항목 ID | GC042191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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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風景-山腹道路-畵家朴炳濟 |
영어의미역 | The landscape with stories: Bak Byeongje, the painter of jagalchi and the Sanbok Road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나여경 |
[변두리-나의 존재는 시나브로 화폭 위에 떨어진다]
시각이 끝난 변두리/ 헤어날 수 없는 색깔의 틈 속에서/ 솟구치는 빛/ 아무것도 나를 속이는 것은 없다/ 언제나 정해진 그 위치에서/ 나의 존재는/ 시나브로 화폭 위에 떨어진다.
- 박병제, 1998년 개인전 팸플릿에 쓴 자작시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갈매기가 힘차게 날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세련된 건물이 들어서 있는 자갈치 시장. 중구 남포동과 서구 충무동에 걸쳐 있는 부산의 대표적인 수산물 재래 장터 자갈치 시장은 부산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 중 하나로 자리 잡았지만 전쟁과 피란민, 가난, 자갈치 아지매로 대변되는 지난하고 힘겨웠던 부산 역사의 숨은 그늘을 간직하고 있다. 전쟁과 가난의 험한 풍파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웃음과 눈물, 고통과 환희가 버무려져 하루하루 생이 쌓여 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는 것을 몸으로 가르친 억센 자갈치 아지매들의 정서를 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건재한 자갈치 시장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비약적인 발전을 한 아름다운 해양 도시 부산의 상징이다.
자갈치 시장 좌판 상인들 사이를 뚫고 골목 시장으로 걸음을 옮기면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살랑살랑 일렁이는 바다 위에 한가롭게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 너머로 남항 대교, 남부민동 공동 어시장, 냉동 창고 건물들과 영도조선소들이 보인다. 그리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초장동 산복 도로 주택가가 눈에 들어온다. 자갈치 시장 못지않게 아픈 상흔을 지닌 부산의 또 다른 모습이다. 6·25 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란 온 사람들이 산비탈 여기저기에 판잣집을 지으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산복 도로 주택가. 지금은 알록달록 페인트와 벽화로 단장된 부산의 산토리니로 변신했지만, 정답고 예쁜 그림과 물감으로 감춘 이면에는 미처 다 풀어놓지 못한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자갈치 시장과 산복 도로의 짠한 사연은 이제 개발과 발전의 옷을 입고 감춰지거나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렇게 사라져 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잊힐 것에 대한 애정으로 부산의 상징인 자갈치 시장과 산복 도로를 그림으로 남긴 이가 있다. 달빛 부서지는 남항의 밤, 배 들어오는 항구와 군상들을 표현한 「자갈치 시장」, 꽃처럼 한 무더기로 어우러진 산동네의 집들, 주름이 깊게 파인 산동네 아지매와 생선을 머리에 이거나 앞에 두고 미소 짓는 자갈치 아지매, 바닷가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일을 기다리는 새벽 시장의 모습 등 자갈치 시장과 산복 도로의 산동네를 그림으로 남긴 부산의 화가. 그는 바로 화가 자신의 말처럼 시나브로 자갈치 시장과 산동네가 그려진 화폭 속으로 스며들었던 고(故) 박병제 화백이다.
[삶의 신산함을 보듬은 아웃사이더]
“이 친구하고는 오래전부터 절친한 사인데, 정확한 연령과 학력을 몰라요. 1970년대는 자꾸 캐물으면 중정이라고 생각했어요. 내 나이 묻지 마세요, 사연도 묻지 마세요, 이런 식으로. 그저 친하게 지낸 거지요. 시인 이성희씨와도 같이 어울리고 그랬어요. 이성희씨도 아마 오래됐죠. 그 친구랑 알고 지낸 지가…….”
「세 친구」라는 작품 속의 한 명이기도 한 박 화백의 절친한 친구 이광호 부산교육연구소 이사장은 1975년인가 1976년쯤 광복동 입구 클래식 다방 백조에서 군복 차림의 박 화백을 처음 만나 가깝게 지내기 시작했지만,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말한다. 그의 사생활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학맥과 인맥을 중요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지인들에게조차 자신의 사생활을 밝히기 꺼려했던 박 화백 나름의 자기 방어책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초장동에서 태어났으니까요. 거기에서 계속 자라고 생활하다가 사직동으로 온 거지요.”
박 화백의 부인 김미순씨의 말이다. 박 화백은 자갈치 시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초장동 산동네에서 1954년에 태어났으며, 산동네가 철거되고 사직동으로 정책 이주를 하기 전까지 산복 도로의 산동네에서 유년과 학창 시절을 보냈다. 1970년대 중반부터 2009년 영면에 들기 전까지 살았던 사직동에서의 생활을 제외하면, 생선 장사를 했던 어머니의 일터 자갈치 시장이 내려다보이는 산동네에서 박 화백의 정서와 꿈이 길러지고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사람 사진도 없거든요. 수학여행 가서 찍은 사진과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찍은 사진 한 장이 있었는데, 우리가 이사 다니면서 없어지고 말았어요.”
“결혼할 때는 중앙대 중퇴라고 알고 했는데 나중에 물어 보니 대학은 안 나왔더라고요. 그림만 너무 좋아해서 학교 다니다가 나오고 들어가기도 하고, 또 서울에도 가고 섬에도 가고 이리저리 많이 옮겨 다니고 하면서 제대로 학교를 쭈욱 안 다녔다고 했어요.”
그의 부인이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생업에 종사하느라 바쁘고 힘들어 사진 한 장도 제대로 찍어 주지 못하고 학교도 제대로 보낼 수 없었던 박 화백 집안의 내력을 엿볼 수 있다. 살뜰하게 돌봐 줄 이가 없었던 유년의 그에게 비친 산동네와 자갈치 시장은 그의 그림자이며 운명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자신의 콤플렉스나 상처를 쉽게 보듬지 못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박병제 화백은 제대로 그림 공부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그림자와 운명을 내치지 않고 직시하며 신산한 삶을 보듬었을 뿐 아니라, 따뜻한 마음과 시선을 확장해 낮은 곳에 존재하는 서민들의 삶과 풍경을 올곧게 그려 냈다.
부산 호텔 근처 골목에 위치해 있는 부산포(釜山浦)는 한때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다. 청남 오제봉(吳濟峯) 선생의 「심여수(心如水)」, 서상환 화백의 그림처럼 쓴 「부산포」 작품이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벽면에 크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대의 눈동자를 보면 금세 사라지는 우울, 그대와 입 맞추면 금세 개이는 시름.”
“세상을 살면서 내 것이 어디 있나 쓰다가 버리고 갈 것을.”
“자슥더라 부산포 와서 술 좀 마시라.”
“TV에는 홍세미, 부산포에는 납세미.”
툇마루를 연상시키는 좌석이 인상적인 부산포 벽면에 걸린 오래된 그림, 서예 작품들과 함께 여기저기 쓴 낙서들이 눈길을 끈다. 그것들은 단순한 낙서를 벗어나 이곳 벽면에 걸린 작품들과 함께 삶의 기록이자 시간의 흔적으로 다가온다.
“술 마시고 집에 간다기에 택시 태워 보냈더니, 택시 기사한테 그 돈 다시 달라고 해서 계림에 가 앉아 술 마시고 있는 거야.”
“오영제 선생의 빈소를 갔는데 거기 혼자 박병제가 있더라고. 제일 먼저 와 있었던 거지. 내가 두 번째로 가고. 그래 내가 착하네, 라고 했지.”
고 박병제 화백을 추억하는 부산포 주점 이행자 사장의 말이다. 이 사장을 비롯해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모두 박 화백이 술을 엄청 좋아하는 기인이었지만 단순하고 맑은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2001년 민주 공원에서 전시회를 할 때 갔더니 사람들은 모두 다 와 있는데 주인공이 없는 겁니다. 매점에 있을 거라는 말을 듣고 내려갔을 때는 이미 친구 이석금씨와 둘이 소주를 몇 병인가 마시고 있었어요. 비틀거리며 행사장으로 가는 선생에게 왜 이리 술을 마셨냐고 하니 그림이 중요한 게 아니다, 사는 게 중요하다, 라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또 이런 일도 있었어요. 박병제 선생의 친구 김원백 화가와 동래 시장에서 어두워질 무렵 술을 마시고 있는데, 선문답식의 말을 즐기는 박 화가의 말을 나와 김원백 화가가 새겨듣지 않았다고 느꼈는지, 2차 옮기는 중에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무슨 소리하는 거냐고, 불나서 이미 집도 타고 다 타서 신문에 날 시간이니까 안 가도 된다 했더니 뒤돌아서서 급히 뛰어 도망을 갔어요.”
『부산 일보』 논설위원 최학림씨의 기억이다. 자신이 화폭 위에 옮긴 그림은 마음과 머릿속에 각인된 형상이고 이미 화폭에 옮겨 놓은 상태이니, 박 화백에게 술을 마시고 싶은 또는 마시고 있는 현재의 삶이 더 중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추리가 아니더라도 사실 그의 말대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사는 것 아니겠는가.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이 없는 아웃사이더 화가의 벽을 보고 말하는 습관은 그다지 깊은 추리를 하지 않아도 납득이 가는 부분이다. 그러나 얼굴을 마주 보며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조차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이가 없다고 느껴졌을 때, 그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급히 가스레인지를 끄고 냄비를 구하러 가는 일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은 이들의 제멋대로 추측이 맞는지 안 맞는지 이미 세상을 등진 박 화백은 말이 없다.
“이석금, 이광호, 박병제가 「세 친구」라는 작품의 주인공입니다. 탈 제작을 하는 조각가 이석금과 박병제는 쌍벽이죠.”
부산교육연구소 이광호 이사장의 말에 “쌍벽이요? 분야가 다른 분들이 쌍벽이었나요?”라고 질문을 던지자 “주벽이요!”라는 답이 돌아와 웃음이 터진다. 그 둘은 주벽뿐 아니라 작품에서도 라이벌이었다고 한다. 분야는 달랐지만 같은 미술 쪽이라 서로 보이지 않는 선의의 경쟁이 치열했다고 이광호 이사장이 덧붙인다. 경쟁이 치열했다던 두 친구 이석금 조각가와 박병제 화백은 대연동 문화 골목에 자리한 주점 고방의 벽면에서 액자에 담긴 「자화상」의 모습으로 만남을 유지하고 있다.
“차이콥스키 음악은 길거리 가다 나오면 설 정도로 광적이었어요. 특히 「비창」을 좋아했는데 자기와 정서가 맞았나 봐요. 초량에서 고방을 할 때 병제가 오면 내내 「비창」만 틀어 놓으라 하니까 클래식 안 좋아하는 친구들은 돌아 버리지요. 막걸리 먹고 소주 먹는 집에서 클래식 징징 틀어 놓으면 누가 좋아합니까. 하하하. 어느 날은 음악을 듣는데 옆에서 시끄럽게 떠든다고 이 친구가 심도를 날렸어요. 그게 날아가서 벽에 걸려 있던 바이올린에 꽂혀 박살이 나기도 했지요.”
“또 딱히 할 말도 없으면서 꼭 새벽에 전화를 해서 끊지를 않아요. 30분씩 수화기를 들고 있는데 끊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끊으면 또 전화가 와요. 석금씨한테는 전화해서 노래해 달라고 하고……. 노포동 비닐하우스에 있을 때였는데, 먹는 것도 없고, 막걸리를 먹을 때도 열무김치 하나 놓고…….”
가 버린 친구를 그리워하며 이야기를 풀어 놓는 손용택씨[고방 및 용천지랄 소극장 대표]의 말소리에 섞여 양희은의 노래가 고방 실내에 흐르고 있다.
나 이제 가노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박 화백의 고약한 주벽을 전하면서도 손용택 대표는 친구의 삶에 대해 진한 안타까움을 나타낸다.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천상병씨랑 비교하긴 좀 그렇지만 비슷한 데가 있어요. 공짜 술 먹어도 지가 큰소리치고 당당했어요. 자기 그림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고 흔들림이 없었지요. 내가 봐도 그림 참 좋았어요. 조금 생활이 뒷받침되고 했으면 정말 좋은 화가가 됐을 텐데…….”
지금은 주인이 바뀐 동광동의 주점 계림에서 술을 먹다 박 화백을 만났다는 손 대표는 그의 그림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다. 손 대표의 주점 고방에는 장판지 그림을 엽서로 만든 소품에서부터 「고가」, 「유혹」, 「자화상」을 비롯해 박 화백의 그림이 항상 전시되어 있다. 흡사 고 박병제 화백의 특별전이라도 하는 듯하다.
“마음이 맑은 놈이에요. 약삭빠른 친구들은 내가 볼 때 화랑에 나가기도 전에 물감값만 주고 그림을 가져가고 그랬어요. 내 보고도 그림 하나 고르라고 했어요. ‘에이 미친놈아, 정신 좀 차리라. 니가 이 비닐에 살면서……. 헛소리하지 마. 내가 니 그림을 왜 공짜로 가져가’ 하고 야단을 했지요.”
손 대표가 넓은 벽면 구석진 곳을 가리키며, ‘저기 판화 그림이 있는데, 병제가 어느 해인가 지인들에게 연하장으로 보냈던 거예요’라고 말한다. 그곳으로 다가가 보니 ‘87년 12월’이라고 쓴 글자가 조그맣게 보인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박 화백과 그의 친구들이 자주 어울려 다녔던 유나 백화점 앞 지금의 패션 거리 골목에 있었던 은행나무, 사직동 골목의 순두부집, 타워 호텔 뒤쪽에 있었던 다락방이 사라진 것처럼 그 역시 이제 가고 없다. 하지만 그의 그림과 맑은 영을 간직했던 따뜻한 사람 박병제 화백을 사랑했던 이들은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며 추억하고 있다.
[소중한 공간, 작업장]
산동네를 떠난 후 사직동에 주거지를 두고 있었던 고 박병제 화백은 양산의 법기와 노포동 전철역 부근, 만덕동에 작업장을 두기도 했었다. 박 화백은 고 오영제 화백과 함께 했던 법기의 작업장을 두고 42.98㎡[13평] 사직 주공의 방보다 무척 크다며 좋아했다고 한다. 창문에 드리워진 달과 나무의 풍경을 담은 「법기의 밤」이나 청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법기의 소」 등 자연과 어우러진 그림이 이 시기에 이루어진 작업이다.
노포동 전철역의 작업장은 비닐하우스를 임대하여 꾸민 것으로 법기의 작업장보다는 컸다고 한다. 「소풍」, 「소나무가 있는 풍경」 등의 작품이 이 시기에 그려졌다. 만덕동에 만들어진 넉넉한 공간은 그를 아끼는 미술 애호가의 배려로 갖게 된 작업장인데, 이 시기에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하여 2년 동안 세 번의 전시회를 열었다. 생전에 박병제 화백은 개인전 15회, 단체전이나 기념전은 30여 회를 열었지만 가난한 생활에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그 친구 작품 사이즈가 다 작아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림 그리는 공간이 작았으니까요. 그런데 그림은 작지만 크게 느껴지죠.”
부산교육연구소 이광호 이사장의 말이다. 주로 좁은 작업장에서 그려진 그의 작품은 대개가 자갈치 시장과 산동네의 풍경, 어머니를 상징하는 시장의 아낙들과 바다, 아내의 고향, 그리고 비쩍 마른 모습의 사나이 박병제 화백 자신의 모습이었다.
[날것의 비린내가 곰삭은, 자갈치 시장]
“떠오르는 태양보다 부지런한 자갈치 아줌마들의 억척스러운 생활력은 귀밑을 파고드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첫새벽부터 부두의 생선 좌판을 지키고 있었다. 붉은색으로 칠해진 영도 다리는 절연된 섬과 섬을 잇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하는 듯 아침노을보다 붉게 빛나고, 부두에 매어 있는 배들은 자갈치 사람들과는 달리 힘든 작업을 끝낸 뒤 새로운 노동을 준비하기 위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 한가로웠다. 여명은 아직 온 누리를 밝히지는 못해서 어둠은 군데군데 녹아 있었지만 바다, 하늘, 배, 사람들 어느 것도 암울하거나 힘들어 하는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시린 날씨를 배경으로 힘든 생을 사는 사람들을 그렸지만 전체적으로는 낭만적인 넉넉함으로 보든 이들을 푸근하게 해 주는 그림이었다.”
- 출처: 최갑진, 「이윽고, 달빛 웃음 머금고 사람 사는 세상 그린 사람, 박병제」 중에서[박병제 회고전 및 화집발행 추진위원회, 『박병제 화집 질감의 주름, 흰 그늘의 길』, 신동문화사, 2010]
최갑진 문학 평론가는 전시실 입구 중앙에 걸린 자갈치의 새벽을 그린 작품을 보고 무작정 끌려 6년의 실직 생활을 끝내고 막 복귀한 처지였지만 선뜻 그 그림을 샀다고 한다. 그러고는 69.42㎡[21평] 아파트에 걸었는데, 자신의 가족은 물론이고 가끔씩 방문하는 이들조차 현재의 막막한 삶의 화제는 뒤로 미루고 그 그림에 대한 이야기만 하더란다. 혹자는 지나간 그리움을 또 다른 이는 내일의 희망을 말하기도 했는데, 자신의 느낌과 갖가지 사연을 그림에 의지해 풀어내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렇듯 그의 그림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은근슬쩍 그림에 투영시켜 털어놓게 하거나 조용한 눈빛으로 다독다독 위로의 말을 건넨다.
밀감과 감을 터뜨려 놓은 듯이 따뜻하고 정감 있게 채색된 「만선」은 1997년의 작품이다. 수건을 머리에 쓰거나 목에 두른 이들의 얼굴에 번진 웃음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게 한다. 낮고 리드미컬하게 뱃전을 날고 있는 갈매기의 날갯짓이나 장화를 신고 춤추듯 걷는 이에게서는 삶의 생동감이 느껴지고, 하나같이 감은 듯 웃음 짓고 있는 눈과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헤벌어진 입의 주인공들에게서는 만선의 즐거움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는 힘든 생의 이면에 숨어 있는 환희를 새삼 일깨워 주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축제의 형식과 그 소통의 형식에 관심이 많다. 그 축제는 사람을 흥분시키고 열광시키는 축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두런두런 모여들어 난장을 만드는 우리나라의 시골 장터 같은 형식의 축제들이다. 그 속에는 참여와 열린 소통의 기회가 있고 삶의 흥겨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 속에 야시장이나 바닷가의 번잡한 모습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출처: 이동석, 「박병제의 “따뜻한 비관주의”」[2001년 민주 공원 초청 박병제 그림전]
「야시장」, 「새벽」, 「어촌 풍경」, 「어촌의 밤」을 비롯해 ‘자갈치’라는 제목을 단 수많은 작품들은 이동석 미술 평론가의 말처럼 하루하루 버겁고 팍팍한 삶을 살고 있는 모든 이에게 소박한 삶의 축제를 즐기라고 부추기는 박병제 화백의 위로가 담긴 선물이다.
“어머니가 충무동 수산 시장 자갈치 아지매였어요. 배가 들어오면 고기를 받아가지고 그걸 다 손질해 소매상에게 넘기는…….”
이광호 이사장에 의하면, 박병제 화백의 어머니는 항구로 들어오는 배에서 생선을 받아 손질하여 소매상에게 판매하는 자갈치 아지매였다. 팔순이 넘어 아픈 몸 때문에 2012년인 작년에야 비로소 그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2009년에 박 화백이 영면에 들었으니 아들을 보내고도 3년 남짓 자갈치 아지매 생활을 더 했던 것이다. 박 화백의 뇌리에는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갈치 시장에서 장사하는 어머니가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자갈치 아지매를 연상시키는 연도·제목 미상인 작품 속 여인을 비롯해 「집으로」, 「행상」에는 생선을 이거나 앞에 둔 주름진 여인이 등장하는데 모두 입가에 아주 만족한 웃음을 달고 있다. 오랫동안 자갈치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했던 어머니는 박병제 화백에게 아픔이자 콤플렉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내면에서 깊어진 콤플렉스와 상처는 때때로 살을 파고들어 곪고 썩어, 나와 타인에게 비수를 들이댈 수도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날것의 비린내가 곰삭아 젓갈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박병제 화백의 콤플렉스와 상처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되살아나 그의 그림을 대하는 이들에게 위로와 새로운 희망을 건네고 있다.
“17년 전 지인으로부터 결혼 선물로 받은 박병제 화백의 작품이었는데, 어머니가 생선을 이고 가는 모습이 담긴 소박한 작품이었어요. 힘들 때 보면서 그림이 주는 위안이라는 게 이렇게 대단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출처: 「[나의 소장품 1호] 내 마음을 새까맣게 태웠던 검은 꽃」 기사 중에서 강갑례 국어교사의 말 인용[『국제 신문』, 2009. 7. 14]
[특별한 낡음-산복 도로, 산동네]
박병제 화백의 기억 속에 화석처럼 각인된 낡고 남루한 산동네의 풍경은 그에게 부끄러운 상처가 아니라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그 증거를 그의 그림에서 찾을 수 있다. 둥그런 달, 그 아래 수국 꽃잎처럼 포개진 수많은 집들이 마치 한 송이 커다란 꽃처럼 보이는 「산동네」, 담과 골목길에 햇빛처럼 채색된 노란빛이 평화롭고 따뜻해 보이는 「산복 도로」, 잔디를 깐 듯한 푸른색의 도로와 돌담, 어깨동무한 언덕 위의 작은 집들이 인상 깊은 「비 온 후 산동네」, 집 몇 채를 이고 있는 달처럼 동그란 원 안의 천진스런 「산동네 아이들」, 꽃밭으로 둘러싸인 「언덕 위의 꽃밭」. 울고 웃으며 뛰어노는 자신의 외동딸 유란이 같은 아이들이 사는 생동감 넘치고 순박한 마을이, 달빛과 햇빛 아래 아름다운 한 떨기 수국 같은 동네가 그에게 부끄러운 상처일 리 없었다.
박병제 화백이 장판지를 이용해 그림을 그린 까닭도 생활이 어려워 택한 재료가 아니냐는 질문에 이광호 이사장은 의외의 대답을 들려준다. 그런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옛것,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장판지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이라고 한다.
“개발을 하면서 집들이 뜯겨 나가는데 굉장히 마음 아파했어요. 왜냐하면 이야기가 사라지니까요. 비닐 장판이 들어오면서 뜯겨 나간 집의 장판지를 구하기 위해 산동네나 아파트의 쓰레기통을 뒤졌어요. 그렇게 해서 찾아낸 장판지에 꽤 그림을 그렸지요. 요새로 이야기하면 재생 미술이랄까 뭐랄까.”
콩기름 묻은 장판지에 어떻게 하면 물감을 묻혀 그림을 그릴까 고민하던 그는 장판지를 뜨거운 물에 데쳐 1차로 기름을 뽑아 말리고, 사포로 문질러 기존의 장판지 질감을 그대로 살려 낸 뒤 날카로운 철필로 긁어 먹물을 밀어 넣어 색감을 표시하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렇게 힘들여 마련한 장판지에 그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변두리 삶을 사는 소시민들을 기록했다. 현란하고 밝아 사람들의 마음을 금세 현혹시키는 그림은 아니지만 생선을 머리에 인 자갈치 아지매, 생선 한 마리를 식탁 위에 올리고 미소 짓는 단란한 가족들, 자식에게 나눠 줄 먹거리를 머리에 이고 귀가하는 주름진 얼굴의 우리네 어머니 등 가난하나 포근하고 정겨운 모습들을 편안한 느낌의 장판지 위로 옮겨 온 것이다.
산동네가 철거되면서 42.98㎡의 사직 주공으로 정책 이주를 하기까지 줄곧 산복 도로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던 고 박병제 화백에게 사람들이 모두 떠난 빈집은 또 다른 감흥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그의 그림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대상물이 바로 집이다. 한 채 내지는 두세 채의 집들과 하얀 집, 고가, 그리고 다닥다닥 붙은 산동네의 집들 외에도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 등이 그것이다. 이는 사람을 품고 세월을 견뎌야 하는 집에 대한 애정인 동시에 그 집에 기거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초장동 산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심성과 정서가 형성된 박병제 화백에게 산동네는 남다른 특별함을 지닌 공간이었음에 틀림없다. 깊은 산의 배를 가르며 삶을 연명했던 사람들의 사연을 숨긴 산복 도로와 산동네를 화폭에 담았던 박 화백의 삶은 지난하고 험난했으나, 남은 우리에게 그는 부산의 잊히고 사라진 정취나 풍경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선사하고 있다.
[내면 풍경-말을 건네는 자화상]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콤플렉스 혹은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확인 작업이 「자화상」에 담겨 있어요. 「자화상」은 인물화를 통해 표현 기법을 실험하기도 했던 만큼 그의 예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그림이지요.”
박 화백은 자갈치 시장, 산동네, 산복 도로 외에도 자화상을 꽤 많이 남겼다. 하얀 얼굴로 담배를 물고 술잔을 앞에 두고 있거나, 밤바다의 윤슬이 일렁이는 창문 앞에 턱을 괴고 앉아 있거나, 혹은 불온서적인 듯한 빨간 책에 손을 올리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거나 러닝셔츠를 입고 수건을 두르고 있는 등 일상적인 모습의 자화상들이다. 그 자화상의 머리 뒤나 상 앞에는 자신의 출신 성분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물고기가 놓여 있다.
이러한 자화상에 대해 박 화백의 친구 이광호 이사장은, 자신의 콤플렉스 혹은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확인 작업이었다, 라고 말한다. 많은 이들이 그가 즐겨 그린 자갈치 시장, 산동네 풍경을 두고 화가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애정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작업이라고 평가하는 것처럼, 그의 깡마른 자화상은 쉼 없는 자기 성찰과 정체성에서 우러나오는 자기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야기가 담긴 자신의 그림을 지극히 사랑했듯이, 그것은 비록 현실의 삶은 버겁고 심란하지만 언젠가는 웃을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림에 ‘희망’을 담고 싶었다. 절망의 시간도 훗날 되돌아보면 웃을 수 있는 게 인생 아니겠느냐. 그림으로라도 흥을 잃은 세상에 흥을 돋우고 싶다.”
- 출처: 「박병제 13번째 개인전 26일~12월 2일 갤러리 누보」 기사 중에서 박병제의 말 인용[『부산 일보』, 1999. 11. 25]
실제로 1999년 갤러리 누보에서 마련된 그의 열세 번째 전시회를 앞두고 그는 ‘희망’이라는 단어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하늘과 바다가 노을빛으로 합일된 항구의 모습을 그린 작품과 횟집으로 보이는 상가 가까이 배를 대고 일하는 어부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에 「희망」이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반쯤 벗겨진 상보 아래 드러난 커다란 냄비, 그 냄비 하나로 가득 찬 상 위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작품 「밥상」, 서랍장 하나와 가족사진, 그리고 아무도 없는 방 안 밥상 위에 놓인 냄비 하나를 그린 「안방」에서 외롭거나 단출함이 느껴지지 않고 왠지 푸근하고 가득 찬 것 같은 느낌을 받듯이, 그의 「자화상」에서도 이와 똑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는 그의 작품이 하나의 벽에 걸린 그림으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곡진한 한세상을 옴팡지게 화폭 안에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옹이를 보듬어 아름다운 무늬로 탄생시킨 커다란 나무처럼, 「비창」을 숨 막히게 좋아했던 그의 아픈 삶이 녹진하게 녹아 있는 진생(眞生)의 작품들은 어느 작품을 막론하고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그의 그림 앞에 선 우리는 기억 속 먼발치로 밀쳐 두었던 신산한 삶의 진정성에 대하여 외면하지 못하고 속내를 풀어 놓게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동행-고 박병제 회고전 및 화집 발행]
2010년 9월 10일부터 부산 중구 민주 공원과 대연동 문화 골목 갤러리 석류원에서 고 박병제 화백을 기리는 회고전이 열렸다. 2009년 5월, 갑자기 세상을 등진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련한 행사였다.
“고 박병제 화백의 치열한 예술혼을 기리자는 것과 함께, 가장이 떠난 뒤 더없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족들에게 뭔가 작은 힘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1주기를 맞아 추모전을 준비하게 됐습니다.”
- 출처: 「산복 도로 리포트˂3-15˃산복 도로에 살다: 산동네 그리던 고 박병제 화가」 기사 중에서 이성희 시인의 말 인용[『국제 신문』, 2010. 5. 3]
“죽고 나서 보니 화집이 없더라고요. 그냥 내버려 두면 잊히는 작가예요.”
이광호 이사장이 고 박병제 화집을 만들게 된 계기를 설명하며 그 당시를 회고한다. 이광호 이사장과 뜻을 함께한 이들이 모여 회고전 및 화집 발행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동료 작가 마흔다섯 명이 기금 마련을 위해 소품 위주의 작품을 전시하게 됐는데, 아름다운 그들의 마음이 통했는지 모두 팔려 나갔다. 마련된 기금 중 1,000만 원은 박 화백의 가족에게 전달하고 나머지 금액으로 회고전과 화집 발행 준비를 하게 되었다.
화집을 만들기 위한 작품 수집은 가족에게 남겨진 작품이 많지 않아 소장자들에게 연락을 취해 두 달 동안 모아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찍은 사진으로 회고전에 맞추어 『박병제 질감의 주름, 흰 그늘의 길』 화집이 발행되었고, 문화 골목 갤러리 석류원과 민주 공원 기획 전시실에서 각각 인물화와 풍경화로 분류해 회고전을 열었다. 그때를 회상하는 사람들은 많은 이들의 정성과 도움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못할 작업이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아름다운 동행전 참여 작가 마흔다섯 명, 정승천 외 마흔여 명의 박병제 화백 그림 소장자들, 디자인비 없이 화집 제작을 맡아 주었던 신동문화사와 신동배 대표, 원고료 없이 글을 썼던 이성희, 최갑진, 박경효 필진, 전시를 후원했던 민주 공원, 문화 골목 갤러리 석류원과 고방, 교통비 정도의 금액으로 사진 작업에 힘을 쓴 최우창, 이성열 사진작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박 화백을 기리는 일에 동행했던 모든 이들, 그리고 누구보다 회고전과 화집 발행에 온 힘을 쏟았던 이광호 이사장 등은 고 박병제 화백이 외롭지 않고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해 준 아름다운 이름들이다.
[나의 그림 속에서 축제를 즐기기를-화려하진 않지만 이야기가 있는 풍경 속에서]
“박병제의 풍경에는 이야기가 있다. 그의 이야기는 삶의 진동이며, 삶을 묵묵히 견디어 나가는 삶의 풍경이며 그 풍경의 끝없는 순례이다. 집을 떠난 순례의 길은 고단한 삶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집들 사이로 더러 아이들이 놀고 있는 산동네 골목길을 돌고, 변두리 가로수 길을 지나고, 눈 덮인 교외의 쓸쓸한 들녘을 지나고, 그리고 거친 삶의 애환들이 뒤엉키며 축제처럼 피어나는 자갈치 장터를 지난다.”
- 출처: 이성희, 「질감의 주름, 흰 그늘의 길: 박병제론」 중에서[『박병제 화집』, 신동문화사, 2010]
남루함이 느껴지지 않는 정겨운 산동네 골목,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듯 맞붙은 집과 집들, 그 속에서 천진스레 뛰노는 아이들과 억세고 투박한 삶의 터전 자갈치 시장을 화폭에 즐겨 담았던 박병제 화백.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겸손하게 낮춘 삶들이 옹기종기 얽혀 있는 산동네와 자갈치 시장을 사랑했다. 작품 「음악이 흐르는 집」은 노란색의 둥그런 달이 어머니의 부드럽고 따뜻한 젖가슴처럼 산자락 아래를 잔잔히 비추고, 돌담 위에 앉은 작은 집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그림인데, 이는 버겁고 어두운 길을 지나는 이들에게 바치는 박 화백의 마음의 등불이자 음악이다. 자갈치 시장과 산복 도로는 이제 옛 모습을 감추고 새로운 변신을 하고 있지만 박 화백의 그림 속에서는 여전히 변치 않는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박병제 화백의 오랜 지기 이광호 이사장은 2014년 5월, 고 박병제 화백의 5주기 때 작은 전시회를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박 화백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30점 정도 모아 전시하는 작은 회고전이 될 것이라고 한다. 자신이 사랑했던 삶을 그림으로 고스란히 남긴 박 화백은 마지막 주거지 사직동의 작은 화실 창문틀에 남은 이들에게 전하는 유언처럼 한마디를 남겼다. 서로 소통하면서 삶의 흥겨움을 느끼는 축제를 즐기라고……. 고 박병제 화백의 유언처럼 그를 아끼는 이들에 의해 어김없이 내년에도 축제가 벌어질 것이다.
“나의 그림 속에서 축제를 즐기기를 바란다. 비록 화려하지 않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