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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2883
한자 美術
영어의미역 Fine Art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도미자

[정의]

부산광역시의 공간 및 시각의 미를 표현하는 예술.

[전근대 미술]

부산의 전근대 미술에는 크게 회화, 조각, 건축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부터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이 불교 미술이다. 그 가운데 건축으로 범어사, 안적사, 선여사 터, 척반암, 취성사지 등이 있다. 조각으로 석조물을 들 수 있는데 부산 범어사 삼층 석탑(釜山梵魚寺三層石塔)[보물 제250호], 범어사 석등(梵魚寺石燈)[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16호], 범어사 석조 연화 대좌 하대석(梵魚寺石造蓮花臺座下臺石)[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73호], 원효암 동편 삼층 석탑(元曉庵東便三層石塔)[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11호], 원효암 서편 삼층 석탑(元曉庵西便三層石塔)[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12호]이 있다. 그 외 건축으로 성곽인 동래 고읍성(東萊古邑城)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성곽은 흙으로 판축한 공법을 사용하였다.

고려 시대의 미술도 주로 불교 유산과 관련된다. 대표적으로 석탑은 오층 석탑(五層石塔)[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9호], 삼층 석탑(三層石塔)[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10호], 고려 오층 석탑(高麗五層石塔)[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13호], 범방동 삼층 석탑(凡方洞三層石塔)[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23호], 선암사 삼층 석탑(仙巖寺三層石塔)[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53호], 범어사 고려 삼층 석탑(梵魚寺高麗三層石塔)[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57호] 등이 남아 있다.

고려 시대 유물과 함께 기비사(祇毗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된 만덕사지(萬德寺址)[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호], 만덕사지 당간 지주(萬德寺址幢竿支柱)[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14호], 범어사 석조 연화 대좌 하대석도 있다. 사원에서 불교 의례 때 사용된 대안 원년명 반자(大安元年銘半子)[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100호], 일반 민들의 일상생활이나 불교 의례를 위해 물을 담았던 ‘흑유호(黑釉壺) 및 흑유정병(黑釉淨甁)’[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101호]도 고려 시대의 불교문화 유산으로 주목된다. 이외 남구 용당동 유적[부산문화회관 뒤 코오롱 아파트]에서는 월천사(月天寺) 등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편과 청자와 분청사기, 점토로 조성한 연황색의 소조 불두편(塑造佛頭片) 1점도 당시 불교 미술의 한 면을 찾을 수 있다.

조선 시대는 이전과 달리 불교 미술에 한정하지 않고 다양한 미술의 흔적이 발견된다. 먼저 가장 대표적으로 조선 후기에 그려진 회화이다. 한국 회화에서 초기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대표적인 예는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들 수 있다. 안견과 비견될 수 있는 화가인 정선(鄭敾)은 진경과 실경(實景) 두 가지를 포함할 수 있는 작가이다. 실경은 일명 진경이라고도 하며, 정해진 형태를 그대로 그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는 그림을 사진 촬영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실경을 토대로 작가의 예술적 기술과 재질에 의하여 산수를 표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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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진경 또는 실경에 의하여 전해지는 작품으로, 정선의 『교남 명승첩(嶠南名勝帖)』은 1733년 청하 현감 재직 시 영남 지방의 명승 58곳을 그렸는데 「동래 몰운대」, 「동래 태종대」, 「동래 해운대」, 「동래 영가대」가 있다. 이들 작품은 정선의 화법이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는 수직준을 사용하기보다 원경의 산들은 삼실을 가지런히 펴서 덮어 둔 것 같이 피마준(披麻皴)이나 혹은 미점(米點)으로 표현했는데, 바닷물로 둘러싸인 넓디넓은 산수를 황량하게 보이게 하여 정선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금강산을 그린 구도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정선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동래 부사 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는 사실화에 가까운 실경으로서 십곡 병풍을 이루고 있다. 현재까지 정선 작품으로 칭하는 것은 병풍의 표제에 『경상도 동래 부사 여일본청공친밀적즉견도화사정겸제원백사(慶尙道東萊府使與日本諸公親密的卽見圖畵師鄭謙齋元伯寫)』라고 한 데서 기인한다. 이 그림의 형태는 실제 현장에 참관하여 사실적으로 그린 일종의 실경화로 보인다. 이 그림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열 폭 중 제1폭에서 제7폭까지는 동래 부사가 왜사를 접대하기 위하여 동래부 남문을 나와 초량 왜관 설문까지 행차하는 행렬을 나타냈고, 제8폭은 초량 객사에서의 왜사의 숙배 광경, 그 뒷부분은 연대청의 연향의(宴享儀)로 이루어져 있다.

진재(眞宰) 김윤겸(金允謙)이 남긴 『영남 명승첩(嶺南名勝帖)』은 진경산수의 면모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14면으로 된 이 화첩은 부산, 해인사, 산청, 가야산 등 영남 지방을 기행하며 사경하였다. 이 가운데 부산 지방을 그린 「영가대」, 「태종대」, 「몰운대」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영가대를 제외하고 특히 태종대를 사생한 그림에서 생생한 그 장소만이 가지는 모습을 느낄 수 있다.

태종대김윤겸 이외에도 정선과 그의 손자인 정황(鄭榥), 그리고 강세황(姜世晃)의 그림도 있다. 강세황이 그린 「태종대」는 현재는 『송도 기행첩(松都紀行帖)』이라고 알려진 화첩 속에 있는데, 그림의 대부분이 송도 지방의 것이지만 「태종대」만은 바위 언덕과 수목의 양상이 흔히 알려진 태종대의 경관과 유사하여 부산의 태종대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김윤겸이 그린 부산의 세 곳은 화면을 좌우로 이등분하여 그렸는데, 「태종대」는 신선 바위, 왜구에 끌려간 지아비를 애절하게 기다리던 한 여인이 돌로 변한 망부석 등 뒤에는 바위를 종횡으로 절단하여 조각한 듯한 병풍바위, 널리 왼쪽의 수평선 가까이 주전자를 띄워 놓은 듯한 생도 등 태종대 본연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몰운대」는 정선의 것은 화면을 대각선으로 처리하여 근경의 몰운대에서 다대포 마을을 향하여 묘사하였으며, 김윤겸의 그림은 몰운대에서 넓은 바다를 향하여 바라보는 두 인물을 배치하여 화면이 좌우로 갈라지게 함으로써 더욱 더 광활한 공간을 나타냈다.

이성린(李聖麟)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인 부산 그림은 부산에서 대마도를 거쳐 강호(江戶)에 이르는 통신사 노정을 30폭 2권에 나누어 그린 『차로승구도(搓路勝區図)』의 한 폭이다. 이 중 부사산을 그린 폭에 6월 17일의 일자가 있는데 조명채(曹命采)[1700~1763]의 『봉사일본시간견록(奉使日本時間見錄)』의 동일 기록과 일치하여 1748년 무진 사행(戊辰使行) 때 그림임을 알 수 있고, 또한 당시 참가한 화원 이성린이 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그림은 앞서 언급한 김윤겸의 「영가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성을 중심으로 한 부분은 공통점이 있으나 성 외곽 부분, 즉 성 주변에 밀집하여 산재되어 있는 민가들의 상세한 모습이 실경을 방불케 하여 김윤겸의 그림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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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절도(殉節圖)를 비롯한 기록화는 조선 후기 국방력 강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정세적 분위기 속에서 제작되었다. 변박(卞撲)의 그림은 전체적으로 산수 묘사에서는 윤곽선을 두고 약간의 담채를 가하고 명암을 넣었고, 원산 묘사는 푸른 담채로 처리하여 사건의 배경을 그려 냈다. 또 순절도인 만큼 순절에 대한 부분을 아주 정확히 묘사하여 사건의 전말을 한 화면에 담고 있다.

작가 미상의 「동래부 순절도」는 변박의 그것보다 폭이 넓다. 특히 화면 중앙의 객사 묘사가 변박의 것보다 훨씬 사실적이며 외부 묘사가 매우 세심한 편이다. 특히 이 순절도는 등장인물 옆에 인물명을 부기함으로써 사료적 가치를 극대화하고 있다. 변곤(卞崑)의 「동래부 순절도」는 화면 중앙에 동래성을 중심으로 왜군과 대치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 순절도는 앞의 순절도와 대동소이하나, 순절도 가운데 화면 규모가 가장 방대하고 색채도 선명할 뿐만 아니라 화면 내에 화기(畵記)도 있는 특징이 있다.

다음은 건축이다. 조선 시대 건축은 범어사의 중건과 동래읍성의 수축 개축이다. 범어사는 통일 신라 시대에 초축(初築)된 것이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서 많은 중·개축이 이루어졌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참화를 입게 된 범어사는 1602년 관선사가 일부를 복구하지만 이내 큰불로 전소되었다. 본격적인 복구는 1613년 묘전(妙全)이 주지를 맡으면서 시작되었다. 해회당, 대웅전 관음전, 심검당 등이 건립되면서 이후 80여 년간 복구공사가 이루어졌다. 1700년에 보제루와 종각이 창건됨으로써 현재의 범어사의 사격을 갖추게 되었다.

이 복구공사에 참여한 역군 가운데 승려도 많았다. 이른바 승인 공장(僧人工匠)이라고 불리던 그들은 사찰 조영은 물론이고, 부산 지역의 각종 관아 조영에도 최고 기술자로 참여하였다. 범어사의 건축 생산력이 가장 왕성하던 시기에 중건된 일주문과 대웅전은 건축 법식과 의장 수법에서 이 지역 건축을 대표한다. 이른바 맞배지붕 위에 포작(包作)하는 실용주의적 수법이나 누하주(樓下柱)인 장대석주(長大石柱)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또한 범어사의 일주문은 흔히 큰 막돌 위에 그래질[혹은 그랭이질이라고도 한다. 그랭이는 얇은 대나무로 만든 집게 모양의 연장으로 집게의 한쪽 다리에 먹을 찍어 선을 그릴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그랭이를 사용하여 부재의 울퉁불퉁하고 불규칙한 모양을 그대로 다른 부재에 옮겨 그리는 일을 그랭이질 또는 그래질이라고 한다]해서 기둥뿌리를 맞춘 덤벙주초[둥글넓적한 자연석을 다듬지 아니하고 놓은 주춧돌] 형식이 아니라, 3칸 가구의 맞배지붕을 받치는 4개 기둥이 긴 석주로 되어 있다.

다음은 동래읍성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이 파괴된 이후 한동안 방치되었다. 1731년(영조 7)에 동래읍성은 읍성 가운데 처음으로 기존보다 3배 이상 되는 규모의 방어 시설로 수축되었다. 성곽의 둘레가 늘어난 만큼 성곽에 설치되는 시설도 많아졌다. 즉 여첩이 많이 설치되고 성곽의 높이도 증가하였다. 특히 치성이 크게 늘어난 것이 종전과 매우 다른 점이다. 또한 이 읍성의 경비 조달 방식은 최초로 요판취리(料瓣取利)에 의하여 자체적으로 조달한 방식이다. 동래부는 왜관을 중심으로 한 무역 업무를 관리하면서 지역 경제도 활성화된 상태였다. 통상적인 전결세(田結稅) 외에 일본에 지급되던 공작미(公作米)의 관리를 맡으면서 많은 이익을 남기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동래읍성 축조에 소용되었던 것이다.

1871년에 동래 부사 정현덕의 주관으로 동래읍성이 개축이 이루어졌는데, 특징은 바로 포군 설치가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1731년의 것에 비하여 치성, 옹성, 포루 등이 증가되었던 것이다. 또한 동래 관아의 수축이 있다. 동래부의 행정 업무가 늘어나면서 각종 관아 조양도 활발해졌다. 동래부 관아는 1740년대 이후로 빈번히 중건되었고 1869년에 들어서면서 대대적인 관아 정비를 하게 되었다. 1871년까지 54종 건물 312칸을 새로 짓고, 35종 건물 341칸을 수리하였다. 마지막으로 초량 왜관을 지었다.

[근대 미술의 여명기]

조선 시대의 미술은 개항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부산의 미술 현황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개 1920년대부터 서양화가 도입되면서 전근대적인 미술계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서양 미술을 중심으로 1922년 조선미술학회가 창설되었고 1회부터 부산 거주 일본인 화가인 후지이[藤井], 안도[安藤], 이치이다[市井] 등이 출품하였다.

1930년대 부산 화단의 구조는 일제 강점기 다른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이 주도하는 가운데 소수의 한국인들이 동참하는 양상이었다. 당시 부산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부산 미술 전람회를 개최하였는데, 당시 언론 기관인 부산일보사[당시 『부산 일보』는 광복 전 일본인들이 발간한 신문이고, 현재의 『부산 일보』는 광복 후 1946년에 창간함]의 역할이 컸다.

광복이 되자 일본에서 공부하던 화가들이 부산으로 돌아왔다. 대표적인 인물이 일본제국미술학교에 양달석·김용환·김종식, 오사카미술학교에 임호·김윤민·김인태, 일본미술학교에 김경, 태평양미술학교에는 천재동 등이었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 조선 미술 전람회 또는 부산 미술 전람회 등의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해 오던 김남배, 서성찬, 우신출, 김원갑, 서태문 등의 부산·경남 일대 거주 작가들과 함께 부산 미술의 여명기를 열었다.

즉 일제 강점기 미술 공부를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던 부산 화가들이 부산에 정착하면서 유화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이루어질 무렵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이 되자 다양한 화풍을 보여 주는 화가들이 서로 모여 개인전을 열거나 미술 단체를 만들면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 전시회와 미술 대회는 1946년 3월 1~7일까지 남일초등학교 강당에서 열렸던 3·1절 기념 미술전이다. 이것은 부산미술협회의 창립전이었다. 또 1946년 8월 15~21일까지 8·15 경축 미술전, 3·1절 기념 미술전[1947년] 등이 있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첫 공모전이었던 부산 미술 전람회가 1948년과 1949년에 열렸으며, 제1회는 동광초등학교 강당에서, 제2회는 부산시립공화당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6·25 전쟁으로 더 이상 개최되지 못하였다.

[현대 미술의 모색기]

1950년대는 서양식 미술의 표현 양식을 더듬어 찾았던 모색기로 설정해 볼 수 있다. 6·25 전쟁을 겪었던 1950년 8월 18일부터 1953년 8월 15일까지 부산은 임시 수도가 되었고, 전쟁 동안 전국 각지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그 때 몰려든 피난 예술가들로 인하여 부산은 뜻하지 않게 미술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 무렵 부산의 다방은 갤러리 역할을 하였는데 밀 다원, 금강 다방, 대청동 다방 등 많은 다방과 부산국립박물관, 창선동 외교구락부, 미화당 백화점 화랑, 미국 공보원 등 다양한 전시 공간이 광복동을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전쟁 중에도 이미 이곳에서 1946년 3월부터 1950년 5월까지 4년 2개월 동안 34회의 미술전이 펼쳐졌으며, 1950년 11월부터 1953년 12월까지 3년 1개월 동안 107회로 늘어난 것은 피난 화가들의 활동 덕분이었다.

전쟁으로 인하여 동양화가인 고희동·배렴·천경자 등과 서양화가 김인승·박영선·도상봉·김환기·남관·이마동·황염수·이세득·한묵·장욱진·손응성·정규·이중섭·김주영 등이 부산에 들어와 머무르게 되었다. 부산에 모여든 이들 미술인들은 중구 남포동창선동 일대의 밀 다원, 르네상스, 휘가로 같은 다방에서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부산 화단은 전쟁 중이었지만 활기에 넘치는 시기를 맞이하였다.

한편 1953년 7월 전쟁이 끝나자 부산에 머무르던 피난 화가들 대부분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부산의 화가들은 토벽회전[1954년 6월] 등의 전시회를 개최하고, 부산미술협회를 조직[1954년 10월]하는 등 나름대로의 활동을 펼쳐 나갔다. 이후 1950년대 말까지 부산 화단은 토벽·청맥·일선 등의 자생적 미술 모임인 ‘동인’ 활동과 3·1 운동 기념, 6·25 전쟁 기념 등의 대규모 전시회를 통하여 작품 발표를 지속하였다.

[미술의 전환기]

1960년대는 사실과 구상과 추상이 교차하고 혼재하는 다양한 양식들이 자리하고, 특히 새로운 실험적 시도들이 대두되면서 전환기로서 활력을 보여 주었다. 1960년대의 부산 미술계는 5·16 군사정변의 영향으로 미술 단체의 해체와 재구성, 그리고 대규모 전시회 개최 등으로 변화를 맞이하였다. 대표적으로 국전이라 불리는 대한민국 미술 대전이 1961년에 동아대학교 공과대학에서 이동 전시되었고, 한국미술협회 부산지회가 결성되는 등 관변 주도로 미술 행사들이 주최되었다. 또한 부산공보관의 설치로 부산뿐만 아니라 경상남도 일대의 작가들이 부산에서 개인전을 활발히 열 수 있게 된 것도 변화 중 하나였다.

1960년대는 한국 미술사에서도 새로운 미술 경향과 실험적 작업이 시도되던 시기였다. 부산 미술계도 예외 없이 갈등과 모색의 시기를 겪었으며, 특히 1964년의 8·15 경축 미술전에서는 앙데팡당전을 개최함으로써 부산 화단이 새로운 미술 운동을 수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구 현대 미술 사조의 영향으로 앙포르멜, 액션 페인팅 그리고 추상 표현주의 같은 새로운 용어들이 등장하면서 부산 화단의 1960년대는 내면적인 갈등과 모색적 시기를 맞이한다. 보수적 아카데미즘과 그에 반하는 새로운 미술 개념이 수입되면서 ‘사실과 구상’, ‘구상과 추상’ 그리고 ‘추상과 오브제’라는 조형 방법론의 대립과 갈등은 새로운 실험과 모색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이처럼 1920년대 일본인에 의하여 수입된 미술의 식민지 시대와 광복 후 양분된 이데올로기의 시기를 지나 전쟁이라는 극한의 체험을 겪고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미학적 대립과 갈등 속에서 부산 미술의 모더니티는 자생력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 무렵 대구에서 문화 평론을 개시하였던 김강석이 1960년부터 부산에 정착하였다. 그는 1975년 타계하기까지 『민주 신보』 등의 지상에 300여 편의 미술 평론을 발표하고 게재하면서 부산 미술 비평사의 한 획을 그었다. 생전에 김강석은 늘 부산 미술계 대부분의 작가들과 불협화음 속에서 외롭게 생활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까지도 부산 미술과 관련된 비평문이나 여러 글에서 김강석의 글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이 무렵에는 동인 활동이 적극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1963년의 혁 동인전과 길 동인전, 1965년의 습지 동인전, 1968년의 ‘이후 작가전’ 등을 들 수 있다.

[미술의 정착기]

1970년대에 들어서서 부산 미술은 크게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의 10년간 개최된 미술 분야의 전시회 수는 1,250회를 기록하여 1960년대의 10년간 628회에 비하여 두 배나 늘어났다. 전시회가 급증하기 시작한 해는 특히 1976년부터였으며 이에 몇 가지 원인 들 중 하나로는 부산의 대학에서 관련 학과의 졸업생들이 배출되기 시작한 것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이 무렵 중요한 일 중 하나는 그 동안 연례행사처럼 꾸려 왔던 3·1절 기념 미술전과 8·15 경축 미술전을 거두고 부산미술협회전으로 전시명을 바꾸어 부산미술협회의 회원 작품전을 선보인 것이다. 또한 부산 미술 대전은 동양화 구상, 서양화 구상, 회화 비구상, 조각, 판화, 서예, 공예, 사진, 건축 등으로 갈래 지어진 미술을 모두 조형 예술로 간주하고 공모 형식의 전시회를 갖게 되었다. 한편 1973년에는 부산 시민 회관과 탑 미술관이 개관되면서 규모가 큰 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개인전을 주로 열던 다방 문화에서 화랑 문화로 접어들면서 많은 전시회가 전문 갤러리에서 열리게 되었다.

[미술의 확장기]

1980년대는 그 동안의 전시회에 비하여 훨씬 많은 종류와 장르의 미술 전시회가 열렸다. 물론 많은 수의 전시장과 면적의 확대와도 연관이 있겠지만, 젊은 작가들의 실험과 열정이 맺은 결과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2,875회나 되는 전시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가운데 절반이 넘는 전시회가 20~30대의 젊은이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동안 부산 미술의 새로운 조형 예술의 참 길을 열었던 양달석김종식 등의 원로 화가들이 세상을 떠난 시기이기도 한데, 이들에 의하여 부산의 서양화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에 의하여 쌓인 조형 예술 세계의 힘은 이후 부산의 많은 작가들에게 남아 있다.

한편 1981년 제1회 부산 청년 비엔날레로 시작된 비엔날레는 2002년 부산 비엔날레로 개칭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개칭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부산 미술의 적극적인 모색의 결과였다. 이에 2011년부터는 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 주관으로 비엔날레와 바다 미술제가 분리 개최되는 등 다양한 행사를 치르게 되었다.

특히 2000년대에 들어서 전시회 장소가 실내에서 벗어나 공공장소로서 온천천이나 광안리, 금련산 지하철 역 등에서 새로운 형태의 미술 전시를 선보였다. 2010년부터 총괄 예술 감독 제도를 도입한 이후 비엔날레 프로그램을 통합 운영하고 있으며, 바다 미술제를 비엔날레 개최 연도 사이에 진행하는 것으로 분리하여 시도하고 있다.

부산 미술이 도입기부터 100여 년 동안 진행되면서 한국미술협회 부산지회, 부산 비엔날레 등 단체가 아니더라도 많은 동아리 형태의 그룹과 개인, 또 협회 소속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작가들에 의하여 작품이 제작되고 전시되었다. 또한 미술학을 전공하는 이들도 생겨나서 작가들의 작품을 정리하고 연구·분석하고자 하는 미술인들이 있어, 차세대에는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들과 이론을 전공하는 연구자들이 함께 부산 미술의 체계적이고 충실한 정리가 기대된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옥** 해방이 되고 난후 부산미술계의 인적 상황은 1946년 3월 <3.1절 기념미술전>에 출품한 작가명단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양달석,우신출,서태문,서성찬,김남배,김종식,김윤민 7명이고, 이들이 토착1세대 부산미술인이라고 할 수 있다 . 2015.07.04
옥** 김윤민은 1941년 졸업후, 일본에서 생활하며, 징병을 피해다니다 해방되기전인 1945년 5월 고향 남해로 귀국하여 어장서기일을 하였고, 해방후 부산으로 와서 경남중학교에 교직을 얻어 정착하였다. 임호, 김경도 1950년 6.25전쟁 이후 부산으로 이주 정착한 화가이다 2015.07.04
옥** <근대미술의 여명기>에서, "광복이 되자 일본에서 공부하던 화가들이 부산으로 돌아왔다"고 했는데, 이러한 사실과 부합되지않으므로 수정되거나 삭제해야한다. 양달석은 1932년 일본에 갔으나, 동경제국미술학교입학생(중퇴생,졸업생)명단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아마도 그 당시의 제도로 청강생였을 것으로 본다. 김종식은 1942년 졸업후 부산으로 귀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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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은 수정증보 사업을 통해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15.07.04
옥** <전근대미술>의 내용중, 정선의 작품설명에 나오는 화법가운데 '수직파'는 '수직준'의 오기며, '파마준(波麻준)'은 '피마준(披麻준)'의 오기이므로 정정을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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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3
옥**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온 화가로, 서진달, 김재선을 들고 있는데, 사실이 아니므로 삭제되어야함. 서진달은1941년 동경미술학교졸업후 대구로 귀국하여 활동했으며, 김재선은 1943년 동경미술학교 졸업후 서울로 이주하여 성남중교사로 근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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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3
l******* <미술의 전환기>란의 문장중, 1960년의 '부산미술제'는 '부산미술계'로 바로잡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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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30
l******* <현대미술의 모색기>란에서 전쟁중 부산에서 활동한 작가명에 오기가 있으니 정정하기 바람.
'황응수'는 '황염수'로, '송응성'은 '손응성'으로 해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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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30
l******* 수정해야될 내용이 있어서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1.<근대미술의 여명기>란에서,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화가가운데, 동경제국미술학교에 적힌 김윤민은 잘못기입되었으므로 삭제하고, 오사까 미술학교에 옮겨 적어야함.
송혜수와 한상돈은 1950년 6.25전쟁이후 피난와서 정착한 1세대 부산지역화가이므로해방과 동시에 부산에 오지않았으므로 삭제되어야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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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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