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28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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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立體美術 |
영어의미역 | Three Dimensional Art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영준 |
[정의]
부산의 현대 미술 조류 변천에 따라 조각 미술에서 파생, 확장된 형식으로 설치 미술 등이 포함된 유형의 미술.
[개설]
입체 미술은 말 그대로 미술 작품의 형식이 평면이 아니라 3차원적 구조, 이른바 입체 형태를 띠는 작품을 말하지만 그 개념은 단순히 형식만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입체 미술은 회화에 상치되는, 순수 미술[Fine Art]의 대표적인 유형이 조각이라 할 수 있는데, 조각은 견고한 재료로 항구적인 3차원의 시각적[촉각적] 미감을 구축하는 예술이다.
그렇지만 최근 현대 미술 조류 변화에 그 존재론적 개념이 항시성을 띠지 못하게 되면서 다양한 형식으로 파생, 확장되었으며 종합적인 개념을 입체 미술이라는 확대 개념으로 범주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입체 미술이 단순히 평면 미술에 상대적인 것으로 작품 외관 형식의 차이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비평적 의미를 내포하게 되는 복합적 개념으로 구조화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부산의 조각 미술 지형도도 새롭게 바뀌어 가게 되었다. 변화의 맥락은 부산 지역 조각 미술의 발생과 전개라는 공간과 시간의 좌표에서 살피는 것이 용이할 것이다.
[부산 조각-도입되지 않은 도입기: 1960년대]
입체 미술이라는 범주의 요체를 조각 미술이라 하였다. 그러면 부산의 입체 미술, 그러니까 조각의 시초는 언제,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부산의 조각이 형성되기까지의 다양한 요인을 살펴보면 사료적인 가치가 미천하다. 그 이유는 부산 지역의 근대화·현대화가 식민 지배와 전쟁, 그리고 재건으로 얼룩지다 보니 자생적인 문화 생산 능력이 전무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중심적 정책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였다. 이러한 조건들은 ‘부산’만으로 묶을 수 없는 환경적 요인을 형성하였음에 ‘부산 조각’의 태동을 얘기할 때, 행정 구역상의 지리적 범주에 국한시켜야 하는 한계를 안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현대 조각가를 김복진(金復鎭)[1901~1940]으로 봤을 때, 부산 미술계에서 근현대적 기법으로 조각이라는 분야가 본격적으로 나타났던 시기가 1960년대 초반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현상만 보더라도 서울과 부산의 시차는 30년 정도, 즉 한 세대 간의 차이를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1958년 11월 부산 동광국민학교 강당에서 열렸던 제1회 경남 미술전 심사 위원에 조소부 심봉섭(沈鳳燮)[1922~2001]이라는 조각가의 이름이 처음으로 공식화되어 나타난다. 이런 연고라면 이슈가 될 만한 사건은 아니지만 조소라는 형식의 미술 활동이 이미 1950년대에 즈음하여 존재하였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부산미술협회가 발족하여 1946년 3월에 부산미술협회 첫 주관으로 열린 삼일절 경축 미술전을 예로 든다면 조각 미술은 회화[서양화, 동양화]에 비해 양적으로 극히 미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50년대 말 제40주년 삼일절 기념 예술제[1959년], 부산미술협회전[1959년], 광복 경축 미술전[1959년]에 조각가 염태진(廉泰鎭)이 출품하였다는 기록으로 보면 1950년대 6·25 전쟁 피란민 대열에 전국 미술가들이 대거 부산에 일시 정착하였다는 정황으로 미루어도 조각가의 활동은 극히 미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산 미술의 근현대 조각가 1세대를 꼽는다면 심봉섭, 염태진 정도일 것이다. 이들이 보여 주는 조각 예술은 관객들에게 일반적인 관람의 대상, 공론화된 분야로서의 조소라고 하기에는 양적인 면에서 힘이 부친다. 결론적으로 이 시기에 근현대적 조각이 부산에 도입되긴 하였어도 조각을 하나의 예술 분야로서 문화에 이식시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부산 미술계에 근현대 미술로서 조각의 싹이 처음으로 움을 틔었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음에 틀림없다.
[대학이라는 요람으로부터: 1970년대]
초기 우리 [근대] 미술이 일본으로부터 유입되었고 또 일본 유학파로부터 형성되어 많은 부분 미술의 편재나 풍토가 일본이라는 실체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또 6·25 전쟁은 모든 문화의 장을 단절시켰지만 미국이라는 우방의 정보를 간접적으로 취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젊은 작가들에게 역기능으로든 순기능으로든 외래문화에 경도되게 만들었다.
대학이라는 엘리트 중심의 미술이 미술 문화의 중심을 잡았다. 지역의 유망한 작가 지망생들이 서울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향하여 활동함으로써 지역 미술에 활기를 불어넣게 되었다. 조각 분야에서 젊은 권달술(權達述)이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제대한 후 부산에서 조각만의 동인 전시 그룹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에 동의하여 6명의 조각가에 의한 최초의 지역 조각 동인회 공간이 발족[1969]하게 되었다. 공간의 발족은 미술 분야에서도 조각을 현상적, 문화적 실체로 인식하는 데 기여하게 되었다. 공간을 통해 조각의 전시 형태가 부산 지역에서도 가능해졌으며 따라서 감상의 대상으로서도,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는 특정 사물로서의 가치를 인식하는 데에도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1970년대 지역의 조각들은 대부분이 서울대학교나 홍익대학교를 졸업한 서울 유학파 귀향 작가들이었다. 그룹 공간과 더불어 활발히 활동하였던 조각가들은 심봉섭, 염태진 등 기성 조각가에서부터 김청정, 권달술, 장상만, 심차순, 이기주, 조기수, 박종선, 김정명, 한인성 등 젊은 조각들이 활동하였다.
사실 부산에서 조각의 존재론적, 의미론적, 인식론적 틀의 형성과 미술의 편재가 이 시기에 구체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각이 부산 지역 미술의 한 분야로서 특정한 의미와 가치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선임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사사하는 도제적인 방법으로 작가가 출현하였던 것도 아니고, 종교나 대사회 가치나 관습의 부속물로 출현하였던 것이 아닌, 대학의 전문 교육을 받은 근대적 의미의 작가가 출현해 외부적[유학, 신교육 등] 동기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 등이 그것이다. 역시 그들은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지역 대학 조각 전문 교육 기관에 교수로 재직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작가 활동의 발판과 후배 양성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부산 입체 미술의 구조적 체제와 편재는 1970년대 ‘대학’이라는 교육 환경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부산의 입체 미술은 물론이거니와 부산 미술, 나아가 우리나라의 지역 미술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러한 체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는 굳건한 원천이 되었다.
[저항의 매체-사회에 저항하지 못하는 조각: 1980년대]
1980년대는 대한민국 전역이 민주화 투쟁이라는 정치적 격동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부산의 미술은 질적, 양적 팽창을 가져왔다. 예술은 확실히 어떤 사회적 동기에 따라 변화의 폭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국적으로 민주화 운동이 불붙은 가운데 미술계에서 이른바 민중 미술이 유행하게 될 즈음 부산은 독특하게 형상 미술이라는 미술의 지역적 특수성이 나타났다. 형상 미술은 정치적인 발언이나 선동적인 구호 없이 시민들의 삶의 표정을 관찰자적 시점에서 솔직하게 표현한 것으로 민중 미술보다는 훨씬 미학적 근거의 근거리에서 드러났다.
부산의 조각계에서도 형상 미술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특히 젊은 조각가들에게 형상 미술은 대안적 표현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미술계의 움직임은 1960년대, 1970년대와 비교하여 집단적 활동에 당위성을 가져왔다. 1970년대 대학이 미술 문화를 주도하게 되는 배경을 만들었다면 이제 대학에서 배출된 젊은 예술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그룹을 형성하면서 예술의 집단적 발언의 장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러한 형상 조각으로서 미술계의 대표적인 동인 그룹으로는 깔치대가리가 있었다.
형상 조각은 과거 추상 또는 구상적 베이스의 조각과 공존하면서 입지를 넓혀 나갔다. 1980년대 부산 입체 미술의 비약적인 도약은 그룹 활동과 더불어 지금의 부산 국제 비엔날레의 전신인 부산 청년 비엔날레[1981년]와 제1회 바다 미술제[1987년]라는 제도나 기회 장치의 마련이었다. 한정된 공간에서 좀 더 자율적인 공간의 확보는 입체 미술 분야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진보적 자극은 각 미술대학의 분위기에도 고무적이었다. 1983년에 동아대학교 예술대학에 조소과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소위 청년 미술의 요람인 미술대학이나 미술학과의 편재에도 변화를 도모하게 되었다. 조소를 서양화나 동양화에 비해 약체라고 여겼던 과거의 인식을 청산하고 적어도 비슷한 분야이거나 오히려 대안적 표현 매체로 생각하게 되었다.
1980년대 이러한 모색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면서 활동하였던 작가들은 이종빈, 이정형, 허위영, 박재현, 김종구, 강이수, 주명우 등이 있으며, 대부분은 아직까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또 이 시기에 괄목할 점은 본격적인 화랑의 전성기였다는 것인데,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중앙동 일대에 많은 화랑이 생기면서 조각 또는 입체 미술의 발표 활동 영역에 큰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활발한 입체 미술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비평과 현장 이론의 부재는 이들의 방향을 정립하지 못하였다. 정치적 격동기와 젊은 작가들의 집단적 표현이라는 독특한 저항 의식은 조각이라는 저항적 질료의 강한 항구적 성격에는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정통 매체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몸부림: 1990년대]
컴퓨터와 인터넷이 대중들에게 보급되면서 외부의 정보를 다양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책자를 통해서 막연하게 외국의 정보를 받아들이다가 실시간 지구 곳곳의 정보를 섭취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미술의 총체적인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전통 미학에 의존한 인체 소조 중심의 입체 미술은 새로운 경향들의 유입으로 보수적인 스타일로 인식되었고, 정치적 격동기가 안정되면서 이념적 스타일이나 단체 활동은 점점 힘을 잃게 되었다.
1980년대 젊은 조각가들의 다듬어지지 않은 집단성은 1990년대 조각가 세대들이 세련되고 다양하면서 새로운 시도들이 팽창하는 입체 미술의 본격적 궤도를 만드는 데 많은 유산을 물려주었다. 이 시기는 특히 지역 작가의 사회적 생산에 많은 공헌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활동 영역, 발표의 장, 매체의 확산, 제도 마련 등에 의해 촉발되었을 것이다. 먼저 부산시립미술관이 1998년에 개관하게 되었다는 점과 부산 청년 비엔날레를 모태로 하는 본격적인 국제 미술 행사인 부산 국제 비엔날레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부산 국제 비엔날레는 최초 부산 국제 아트 페스티발[PICAF, 1998년]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비엔날레로 개명하면서 본격적인 국제화 모드로 전환하게 되었다. 또 부산시립미술관이 비엔날레 전시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면서 단기간 비약적인 도약을 하게 되었다. 부산 국제 비엔날레는 부산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살려 부산 야외 조각 대전과 바다 미술제를 흡수 통합하면서 특히 입체 미술 분야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지역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성하게 되었다.
[새로운 공간 변용의 시도: 2000년대 이후]
입체 미술은 이제 장르나 형식으로 묶을 수 없는 확장된 범주를 가지게 되었다. 조각의 전통 방식은 일련의 규범에 예속되어 있었지만 이제 그 규범은 원칙으로서의 힘을 잃고 취사선택이 가능한 여지로 남게 되었다. 예를 들어 전통 조각은 그것이 어떤 재료, 어떤 형태를 띠었건 간에 덩어리[양괴(量塊), mass] 감에 의해 인식되었고 결정되어야 하였다. 따라서 이 덩어리 감의 상태에 따라 작품의 질이 결정되면서 이미 작품 속에 비평적 단서가 절대적으로 존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 미학 요소가 폐기되었다기보다는 낡고 보수적인 경향으로 인식이 바뀌게 되면서 절대성을 잃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의 입체 미술에 대한 비평적 단서는 절대적인 가치나 이론에 의존할 수 없었다. 다양한 상대성을 고려해야 하고 심지어는 비미학, 비미술적 요인, 범사회 문화적 조건, 인류학적, 정치 경제학적 입장들을 고려하고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졌다. 이러한 경향은 작품마다, 작가마다 다양한 ‘차이’들을 허용하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지역의 문화 지평이 비약적으로 확장되었는데, 이를테면 부산이 영화의 메카가 되었고 다양한 문화 예술 복합 공간들이 생겨났으며, 특히 거리 미술, 환경 미술, 공공 미술이라는 새로운 개념들이 문화 속에 침투해 들어왔다. 이제 일상과 예술의 괴리는 문화 속에서 좁혀가고 있다.
원도심 문화 정책은 작가들이 작업실과 미술관, 갤러리에서보다는 거리와 마을에서 미적 역량을 펼치게 하였으며, 젊은 입체 미술가들은 이러한 새로운 공간에서 다양한 미적 실험들을 해 오게 되었다. 이제 미술관, 갤러리뿐만 아니라 도심 어디에서도 작가들의 작품과 행위들을 목격할 수 있게 되었다. 기존 화이트 큐브[전시장 공간의 별명]에 구속된 작품이 아니라 열려진 공간에서 더 넓은 곳을 향해 발언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공간 자체가 작품이 되어 작품과 감상자간의 시각적 대응 관계가 아니라 작품 속으로 관람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의 편재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 예술의 패러다임의 변화에서도 오늘날의 지역 작가들은 인문학적 마인드의 결핍으로 내용보다는 형식, 의미보다는 이미지에 매몰되는 현상이 감지되었다. 물론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다양한 가치의 공존을 허락하지만 대부분의 젊은 작가들이 자신이 하는 미적 수행 능력이 어떤 위상학적 위치에서 맥락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늠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하다.
2000년대 이후는 미술의 총체적인 반성의 지점이 분명히 드러났다. 비평이나 현장 이론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시대적 변화에 따른 학교 교육의 재편, 감상자들에 대한 피드백 장치들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작가들은 국제 사회에 발맞춰 국제적인 마인드를 갖추어 그들의 미감을 부산의 정체성과 국제화에 대응하여 진보하는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