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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72
한자 東萊溫川-金井山-東萊溫泉繁榮會尹漢震-
영어의미역 Dongnae Hot Spring under the shadow of Geumjeong Mountain: The story of a hot spring told by Yun Hanjin, a board member of the Dongnae Hot Spring Prosperity Association
분야 생활·민속/생활,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동길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3년 7월 22일 15:00~ - 동래 온천번영회 윤한진 인터뷰
관련 시설 온천장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지도보기

[금정산은 지아비, 동래 온천은 지어미]

동래 온천이라면 금정산을 연상하고 금정산이라면 은꼬리 같은 그 반월을 연상한다. 금정산에 비치는 반달이 구부러져 그 그림자가 은수(銀繡)같이 흔들리는 곳에 동래 온천은 작은 아가씨같이 잠이 들었다. 이야말로 한 절의 고운 서사시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냐? 동래 온천이라면 거리가 깨끗하고 집들이 좋고 설비가 완전하다는 점에서 손을 꼽지만은 풍경이 좋고 아담하다는 점에서도 또한 손을 꼽지 않을 수 없다.”[『(잡지로 보는) 한국 근대의 풍경과 지역의 발견』 5, 51쪽]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는 2013년 4월 잡지를 집대성한 11권짜리 자료 총서를 국내 최초로 펴냈다. 총서 제목은 『(잡지로 보는) 한국 근대의 풍경과 지역의 발견』. 1907년부터 1945년 8월까지 발행된 잡지 50여 종이 대상이었다. 앞서 인용한 글은 『백조』 창간 동인으로 참가했던 일제 강점기 시인이자 수필가 노자영(盧子泳)[1901~1940]이 『조광』 1939년 12월호에 발표한 수필 「온천장 순례기」 앞부분이다. 부제는 ‘꿈을 안은 동래 온천’이다.

인용문에서 짐작하듯 동래 온천금정산과 맞닿아 있다. 지금은 이런저런 건축물에 이중삼중 가려 온천은 온천대로 산은 산대로 둘 사이가 멀어 보이지만, 애초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맞닿아 맨살 부비는 한 몸이었다. 노자영 수필을 조금 더 따라가 보자.

동래 온천을 아늑히 품고 있는 따뜻한 손이 있으니 그 손은 말할 것도 없이 금정산이다. 금정산은 그리 아름다운 산은 아니나 그리 밉지도 않은 산이다. 금정산을 지애비라면 동래 온천은 지어미다. 금정산동래 온천이 있어서 비로소 이곳의 아름다운 풍경은 벌어지는 것이다.”

동래 온천은 우리나라 역사 기록에서 가장 앞서 등장하는 온천이다. 1281년(충렬왕 7) 편찬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동래 온천이란 지명이 나온다. 신라 신문왕 2년(682)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동래 온천에서 목욕을 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삼국유사』 권3 탑상4 영취사]. 기록으로만 따져도 동래 온천 역사는 1,500년에 이른다. 1481년(성종 12)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동래 온천이 언급되어 있다. 다음과 같다.

동래 온천은 병자들이 목욕을 하면 문득 나아 신라 때부터 왕들이 여러 차례 이곳에 와서 목욕하였다. 그 표시를 남기고자 온천 주위 네 귀퉁이에 구리 기둥을 세웠다. 온천 수온은 달걀을 익힐 정도로 뜨겁다.”[『동국여지승람』 권23 동래현조]

[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동래 온천]

달걀을 익힐 정도로 수온이 뜨거운 동래 온천 명성은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역사가 유구한 만큼 온천탕을 비롯해 숙박과 식사 등 편의 시설이 두루 갖춰져 평일이든 주말이든 찾는 사람이 넘친다. 동래 온천 소재지인 동래구 온천 1동에서 펴낸 관광 안내서 『천 년을 자랑하는 동래 온천』에 소개된 온천탕 면면이다. △금정탕 051-555-3666 △금천 파크 호텔 051-555-3285 △녹천탕 051-555-4823 △만수탕 051-555-4316 △반도 온천탕 051-555-7476 △벽초탕 051-552-5755 △약수 온천탕 051-556-5100 △온천 한증막 051-552-4424 △천일탕 051-553-8195 △허심청 051-550-2200 △현대 온천탕 051-555-5737.

동래 온천에서는 온천탕과 별도로 온천수를 이용한 숙박 시설도 성업 중이다. 관광안내서에 소개된 숙박 시설은 다음과 같다. △녹천 호텔 051-553-1005 △늘봄 호텔 051-556-6363 △동방 관광호텔 051-552-9511 △천일 온천 호텔 051-553-8192 △현대 온천 호텔 051-555-5737 △호텔 농심 051-550-2100.

온천탕이 집결한 온천 1동은 온통 온천이다. 온천을 뜻하는 스파에 시티를 붙여 스파 시티, 달빛과 햇빛 비친 물결이란 뜻의 순우리말 윤슬을 붙여 스파윤슬길이다. 윤슬길 입구엔 동래 온천 노천 족탕이 있고 바로 곁에는 고풍스런 솟을지붕이 있다. 솟을지붕 태극 문양 대문에는 현판이 내걸렸다. 현판 각자는 ‘온정 용문(溫井龍門)’이다. 역시 온천과 관련 있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문을 밀고 들어가면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4호 온정 개건비(溫井改建碑)가 있고 용왕신을 모신 사당인 용각(龍閣)이 있다.

온정 용문 대문 안쪽 오른편에 부속 건물이 보인다. 계단을 딛고 내려가면 소파며 책상이며 책장이며 엔간한 건 다 갖춘 사무실. 사단법인 동래온천번영회 사무실이다. 1989년 11월 창립했으며, 현재 회원 업소는 동래 온천 대표적 온천탕이라고 할 수 있는 금천, 녹천, 천일, 현대를 비롯해 58군데다. 친목 도모가 우선인 번영회지만 공적인 일도 도맡는다. 그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꼽는 일이 동래 온천 발원지라 할 수 있는 온정 관리다. 번영회 윤한진(尹漢珍)[66] 이사장을 통해 동래 온천의 어제와 오늘을 들어보고, 듣는 김에 미래까지 들어본다.

윤한진 이사장은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사람이다. 그렇긴 해도 총각 때인 1972년 동래 온천에 정착해 40년 넘는 세월을 보냈으니 동래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살아온 생애 3분의 2 이상을 동래 온천에 몸 담그고 마음 담근 동래 온천 토박이인 셈이다. 2010년 번영회 이사장을 맡아 올해 4년째다. 노자영 수필 대목이 생각나서 동래 온천금정산과의 상관성을 묻자 대답이 시원시원하다. 망설임이 없다. 대답을 옮겨 적으면서 망설인 사람은 오히려 나였다. 동래와 온천을 붙여 써야 하나 띄어 써야 하나. 붙여 쓰기로 했다. 동래와 온천을 별개로 볼 게 아니라 하나의 고유명사로 보자는 마음에서였다.

동래 온천금정산은 불가분 뗄 수 없는 관계죠.”

윤한진 이사장은 동래 온천 그 시원을 금정산에서 찾는다. 금정산 토양은 마사. 모래 비슷한 토양이라서 빗물이 하천으로 죄다 빠져나가지 않고 지하로 스며든다. 스며든 빗물이 온천 1동 동래 온천 발원지 온정에서 샘솟아 동래 온천 천 년 물줄기를 이어 가고 동래 온천 천 년 명성을 이어 간다는 진단이다. 처음 만나는 서먹한 사이가 동래 온천 천 년 물줄기로 트이자 말문도 술술 트였다. 내친 김에 질문의 물줄기를 이어갔다.

[다가가려면 용기가 필요했던 봉래관 자리]

“1972년부터 동래 온천에 사셨다는데 그때 풍경은.”

“지금에 비하면 건물이 노화되었고 아파트라든지 큰 건물이 없었지요. 허심청도 그 후에 들어왔고요. 호텔 농심 자리엔 동래 관광호텔이 있었는데 그때도 연못은 있었지요. 되게 넓었는데 유락 시설을 갖춘 연못은 아니었고 매립되기 직전 방치된 상태였어요.”

동래 관광호텔 자리엔 원래 일본인 무역업자 도요타 후쿠타로[豊田福太郞]가 1907년 세운 봉래관(蓬萊館)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동래 온천 목가적 풍경을 담은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 여기 봉래관이다. 봉래관 앞 하천 6611.57㎡[2,000여 평]을 매축해 정원을 만들고 정원 안에 다시 수백 평 양어지(養魚池)를 파서 호수를 만들어 놀잇배를 띄우고 낚시를 즐겼다. 양어지 잔재가 윤한진 이사장이 말하는 연못이다. 봉래관은 광복 이후 적산 터로 남아 있다가 귀속 재산으로 불하된 뒤 소유주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지금은 호텔 농심과 허심청 주차장으로 쓰인다. 호텔이 들어서기 전, 그러니까 필자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학창 시절 이곳은 유휴지였고 폐허였다. 불량하고 음습한 분위기를 풍겨 가까이 다가가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지금은 산뜻하게 변신해 동래 온천 문화를 이끌어 간다.

“그 당시 동래 온천 경기는 어땠는지.”

“당시는 동래 온천뿐 아니라 온천장 전체가 전성기였지요. 근처 금강 공원도 잘 됐고 유흥업소도 호황을 누렸어요. 가게를 얻으려고 해도 내놓은 가게가 없었어요. 권리금도 비쌌고. 그 정도로 잘 됐는데 접대 문화가 바뀌고 규제가 강화되면서 위축되기 시작했어요. 동래 별장 같은 요정, 요릿집에서 접대부를 못 쓰게 되면서 요릿집 경기가 가라앉았고 덩달아 온천장 경기가 가라앉았죠. 그 대신에 목욕탕은 요즘도 주말, 휴일 되면 차들이 줄을 섭니다. 그 당시는 더했고요.”

직장 다닐 때 갑이 되어 을에게서 한 번인가 두 번 동래 온천 요릿집에서 대접을 받은 적이 있다. 정원을 거쳐 온돌방에 좌정하자 상다리가 휘어지는 술상이 들어왔고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접대부가 도자기 주전자 술을 따르고 안주를 권했다. 일행 가운데 풍류가 있는 한 분은 술기운이 도도해져 접대부 하얀 속치마에 일필휘지 붓글씨를 썼다. 그때가 1980년대이니,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그 어름이다. 시대가 바뀌고 세태가 바뀌면서 지금 그 요릿집은 사라졌고, 당연하게도 접대부들도 사라졌다. 그 세월이 30년 안팎 이쪽저쪽이다.

동래 온천 요릿집 대명사였던 동래 별장은 지금은 일반 음식점으로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정식과 야외 결혼식, 환갑이나 칠순 피로연 등 대소 연회를 주로 한다. 나무가 양쪽으로 우람한 입구에는 동래 별장 역사를 설명하는 입간판이 서 있다. 입간판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제 강점기 부산 3대 거부로 불렸던 하자마 후시타로가 동래에 별장을 만든 뒤 하자마유겐[迫間湯源]이라 불렀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동래 온천 어떤 점이 좋아 차들이 줄을 서는지.”

동래 온천은 수질이, 여기 도표가 있습니다만, 제가 알기론 전국 최곱니다. 그리고 평균적으로 200m 안 되는 깊이에서 끌어 올립니다. 다른 데선 200m, 꿈도 못 꿉니다. 일부 지역은 1,000m를 뚫어서 용수를 끌어 올린다는 말도 들리고요. 얕을수록 온천수 수질이 좋습니다. 온도도 평균 68℃입니다. 70℃가 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만큼 뜨거운 거지요. 그게 동래 온천을 전국 최고로 꼽는 이유 아니겠습니까.”

윤한진 이사장이 보여준 도표는 ‘동래 온천 수질 성분 분석표’였다. 칼슘과 나트륨, 황산, 염소 등 21가지 성분과 함유량이 나와 있다. 화학적 지식을 갖추지 못한 처지에 분석표 수치를 보고 이러쿵저러쿵 평가할 입장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동래 온천 관광 안내서 관련 대목을 인용한다. “전국 최고의 약알칼리성 식염천으로 류마티스, 운동 장애, 신경통, 관절염 등에 탁월한 효과와 말초 혈액 순환 장애에 효험이 많은 건강 웰빙 온천이다.”

동래 온천은 문헌 기록상 고려 후기까지는 땅속에서 저절로 솟는 자연 용출 온천수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0년대 개발 초기에는 5m만 파도 온천수가 솟았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온천공이 굴착되고 무분별하게 남용되면서 1990년대 들어와 지하 130m까지 파 내려갔다. 동래 온천 관리 부서인 부산광역시 상수도사업본부 시설관리사업소에 따르면 지금은 140~150m 남짓 깊이에서 온천수를 끌어 올린다.

“동래 온천 원샘(源泉)은 어디며 온천수는 어떻게 끌어 들이고 어떻게 각 업소로 보내는지.”

“입구 빗돌에 ‘온정 개건비(溫井改建碑)’라고 보셨죠? 온정이 바로 동래 온천 원샘인데 우리가 있는 이곳이 조선 시대는 물론 그 이전부터 온정 자리죠. 땅을 파지 않고 자연 그대로 용출했습니다. 용각 반경이 모두 온정이라고 보면 됩니다. 지금은 땅 깊숙이 파서 물을 끌어 올리니, 여기가 아니고 여기서 나가서 우측 편에 금천탕이라고 있습니다, 양탕장[양탕장은 양수기를 연상하면 된다. 온천탕 물을 끌어 올린다]이 금천탕하고 붙어 있습니다. 시[상수도 사업 본부]에서 관리하는데 파이프를 내어 업체로 용수를 보냅니다. 파이프 깊이는 똑같습니다. 깊이가 다르면 물의 양이 달라지니 혜택을 똑같이 준다는 의미죠.

양탕장은 업체에서 운영하는 [직영] 양탕장이 있고 시에서 하는 [시영] 양탕장이 있습니다. 업체가 개별적으로 직영하는 양탕장이라고 해도 시에 물세는 다 내야 합니다. 아껴 쓰자는 거죠. 직영 양탕장을 운영하는 업소가 네 군데쯤 되고 대개의 업소는 시영 양탕장을 이용합니다. 아직까지 용수량은 풍부한 편입니다. 수량 문제로 불편을 겪는 일은 없습니다. 물세만 내면 물은 원하는 만큼 공급됩니다. 다만 깊이가 한정돼 있으므로 그 깊이에서 나오는 온천 양도 제한돼 있지 않겠습니까. 용수를 낭비하는 일은 자제해야겠지요. 하루 용수량의 구체적인 수치는 시 상수도사업본부에서 관리하니 거기서 알 겁니다.”

온정 개건비는 온정 용문을 밀고 들어가면 뜰 왼편에 보인다. 높이 144㎝, 폭 61㎝큼지막한 화강암 상단에 큰 글씨로 비명이 각자돼 있고, 비문 앞면에 잔글씨로 비를 세운 내력을 꼼꼼히 밝혔다. 동래 부사 강필리(姜必履)가 오래된 온정을 대대적으로 수리한 공로를 기리려고 1766년(영조 42) 세운 일종의 불망비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4호다.

대담이 끝난 후 윤한진 이사장과 둘러본 양탕장은 부산대학교에서 온천장으로 가는 이면 도로에 있었다. 외형은 컨테이너 박스 비슷했다. 박스 가까이 가자 콸콸 물소리가 요란했다. 온천물을 뽑아내는 구멍인 온천공에서 끌어 들인 물이 양탕장으로 들어오는 소리였다. 동래 온천에는 온천공이 34개 있다. 온천공은 새로 발굴 또는 발견되기도 하고 고갈돼 막히기도 한다. 34개 가운데 현재 이용하는 것이 22개고 나머지 12개는 예비용이다. 예비 공은 말 그대로 온천 이용 허가는 되어 있으나 물을 뽑아 쓰지 않는 공이다. 온천은 개발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리고 온천물의 공급 형태에 따라서 시영 공과 사설 공으로 나뉜다.

시영 공은 상수도사업본부 시설관리사업소가 관리하는 양탕장을 통해 22개 업소에 하루 79만 7,000ℓ 온천물을 공급한다. 연간 1억 5,000만 원 정도 수익을 낸다. 개인이 자체적으로 온천 관정을 뚫어 온천물을 사용하는 사설 공을 가진 업소는 10개다. 10개 업소가 하루에 뽑아 쓸 수 있는 온천물은 모두 238만ℓ에 달한다. 하지만 이 물을 다 쓰지는 않고 있다. 시영 공, 사설 공 합쳐서 하루 평균 171만 6,000ℓ 정도 사용한다. 사용량은 하절기와 동절기가 다르다. 동절기가 두 배 더 많다.

동래 온천 축제가 매년 열리는 걸로 아는데.”

“매년 음력 9월 9일 동래 온천 용왕 대제가 열리는데 작년에 300회가 넘습니다. 옛날부터 관[동래부]에서 주관하던 행사였는데 현대로 내려와 경상남도 도지사나 부산 시장이 초헌관이 되었다가 지금은 동래온천번영회 이사장이 초헌관이 되어 용왕 대제를 치르고 있습니다. 동래읍성 축제할 때 대제 길놀이 행사를 하는데 여기 용각에서 출발해 한 시간 정도 동래 일대를 돈 뒤 용각으로 돌아오는 행사지요.”

[1691년 시작한 용왕 대제는 작년 322회째]

온정 용문을 밀고 들어가면 마주 보이는 누각이 용각이다. 용왕신을 모신 사당이다. 동래 온천 용왕 대제는 작년 322회를 치렀을 만큼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300년 세월 제사를 치르면서 동래의 역사는 면면히 이어져 왔고, 동래 사람들의 결속력은 차돌처럼 딴딴해졌으리라. 그러한 결속력이 복천동 영보단 비를 세웠고, 1919년 동래 만세 운동을 이끌었으며, 일제의 갖은 압박에도 굴하지 않던 동래기영회를 이어갔다.

용각에는 용왕탱이 펼쳐졌고, 벽면 한가운데에 용왕 신이 모셔져 있다. 용왕 신 양옆으로 백자 조그만 항아리가 4개씩 8개 보인다. 용왕 대제가 열리면 8선녀가 정갈한 온천수를 떠 용왕 신께 받치는 항아리라는 게 윤한진 이사장 귀띔이다. 작년 용왕 대제 기원문 한 대목이다.

‘1691년부터 시작하여 올해로 322회째 동래 온천 용왕제를 맞이하여 용왕님께 비나이다. …동래 온천수가 영원히 끊이지 않고 용솟음쳐서 동래 온천을 이용하는 분들 모두가 무병장수하고 동래 온천의 모든 업소가 나날이 번창하며 동래 온천장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게 하옵소서.’

“용각은 언제 세웠는지.”

“얼마 되지는 않습니다. 번영회 설립하고 나서 새로 지었습니다. 1991년 7월 동래온천번영회가 용각 복원에 착수하여 이듬해 8월 복원 준공식을 가졌습니다. 원래는 지금 번영회 사무실 위치에 있었지요. 조그마한 사당이었습니다. 부지는 넓은데 용각이 협소하다 해서 다시 지은 거지요. 용각에서 정성껏 기도하면 효험을 본다고 입소문 나 사업하는 분들이 기도하러 자주 왔지요. 허심청에 나이트클럽 있을 때는 거기 종사자들도 자주 왔어요. 마음에 맺힌 게 그만큼 많았던 게지요. 무속인들 출입도 잦았는데 지금은 금지하고 있습니다.”

용각 양옆으로 비석 두 기가 보인다. 왼쪽은 온정 개건비고 오른쪽은 동래 온천 용각 재건비다. 재건비 뒷면에는 비를 세운 내력과 번영회 이사장을 비롯한 임원진 명단이 새겨져 있다. 이사장은 고인이 된 박시현(朴時鉉). 숙박업을 하던 분이라고 한다. 부이사장 다섯 명 가운데 천일장 창업주인 김영태를 비롯 박득상, 박재기 제씨는 온천탕 경영주였다. 윤한진 이사장은 당시 이사로서 이름이 올라 있다. 동래 온천 지역 사회에서 윤한진 이사장이 끼친 공로가 그만큼 오래고 넓다는 반증이지 싶다. 윤한진 이사장의 소망은 동래 온천 일대 온천장 업주 모두를 번영회 회원으로 가입시키는 것. 그러면 한 300명 된단다. 가입자를 늘리려고 온천장 일대 소상공인에게 협조 공문을 꾸준히 보내고 있으며 최근에는 홈페이지를 오픈했다. 홈페이지 주소는 ‘동래 온천 쩜 씨오엠’이라고 두 번인가 세 번을 강조한다.

동래 온천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이란 자부심이 대단한 걸로 아는데, 실제로 그런지.”

“실제로 그렇습니다. 동래 온천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이고, 단 한 번도 폐장되지 않은 온천입니다. 삼국 시대 이래 동래 온천 명성이 이어져 왔고, 신라 재상이 여기서 목욕했다는 기록 등 문헌 곳곳에 동래 온천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건 곧 동래 온천이 역사적인 면에서나 효능 면에서나 한국 최고라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윤한진 이사장이 건네준 유인물은 모두 여섯 가지. 적게는 두 장짜리에서 많게는 열셋 장에 이르는 분량이다. 「동래 온천 시대별 역사」와 「동래 온천 용왕 대제」, 그리고 부산대학교 전기웅 교수가 쓴 「백학을 치유한 전설을 전하는 동래 온천」 등이다. ‘한 번도 폐장되지 않은’은 「동래 온천 용왕 대제」 제2장 동래 온천 문화에 대한 고찰에서 따 온 표현이다. 해당 대목을 간추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문헌에 온천 지명이 최초로 밝혀진 건 『삼국유사』 권3 동래 온천이다. 지금부터 1,500년 전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전국 온천이 34개소로 나와 있다. 남한이 8개소, 북한이 26개소다. 경상도에는 동래 온천과 영산현 온천[현 부곡 온천], 창원도호부 온정[현 마금산 온천] 3군데가 있다. 그중 동래 온천만이 삼국 시대 이래로 한 번도 폐장됨이 없이 1,500년 이상을 유지해 온 국내 유일의 온천이다.”

동래 온천 오래된 업소 가운데 창업 1세대가 경영하는 곳이 있는지.”

“지금 창업 1세대는 없습니다. 동래온천번영회 회원사의 경우 천일은 형님이 창업한 것을 동생이 물려받았고 녹천 온천과 녹천 호텔은 아들이 승계했습니다. 금천탕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 중 연세가 많은 분은 천일탕 김영곤 사장입니다. 육십아홉인가 칠십인가 그래요.”

윤한진 이사장은 창업 1세대를 광복 이후로 잡고 있다. 동래 온천이 번성한 시기는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국권이 침탈당한 비정상적 상황이었기에 윤한진 이사장 판단이 옳다고 봐야겠다. 그러나 광복 이후 동래 온천 면면이나 경영주, 소유주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구청이나 세무서 같은 곳에서 보관하는 각종 신고서를 살펴보면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나 보존 기한이 넘는 경우 폐기되는 경우가 많다. 단서가 있다면 용각 오른쪽 동래 온천 용각 재건비다. 앞서 언급했듯 비석 뒷면에 1991년 당시 번영회 박시현 이사장을 비롯한 임원진 명단이 수십 명 새겨져 있다. 그 명단을 따라가 보면 동래 온천 면면이나 경영주, 소유주 계보를 정리할 수 있지 싶다.

용각 재건비 뒷면에 새겨진 사단법인 동래온천번영회 임원진 명단은 다음과 같다. 직책은 재건비를 세운 1992년 5월 기준이다. 이사장 박시현, 고문 이문석·이병조·김상임·조영수, 부이사장 김학우·김영태·박득상·박재기, 상무이사 정태교, 총무이사 이상덕, 감사 임택호·배호기, 이사 정윤문·양희곤·김석륜·정희상·이귀남·박순옥·신용복·정주태·정동면·박동관·황차갑·이중민·장희재·윤한진·이민자·배태준·장복자·김용대·이호길·홍재선·김병동·최용도·안종홍·이춘식·김종일·한병조·민병학·최수용·류재형·안승부·김병준, 참봉 박덕홍, 온천 1동장 박영학.

덧붙여 말하자면 동래 온천 상호로 ‘사슴 녹(鹿)’ 자를 쓰는 데가 두 군데 있다. 일제 강점기 번성한 백록관도 사슴 녹을 썼다. 우리나라 온천은 백학(白鶴) 또는 백록(白鹿) 전설이 많다. 동래 온천에는 눈 내리는 한겨울 백록이 며칠 연이어 잠 잔 곳에 가 보니 따뜻한 물이 샘솟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동래 온천 대중탕 상호로 사슴 녹을 선호하는 이유다.

“온천수를 쓰는 목욕탕과 온천수를 쓰지 않는 목욕탕은 어떻게 구별하는지.”

“간단합니다. 목욕탕 간판에 표시된 로고를 보면 됩니다. 전에는 동그란 욕조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로고를 모든 목욕탕이 섰지요. 그래서 온천수 목욕탕인지 온천수 아닌 목욕탕인지 구별이 어려웠는데 요즘은 다릅니다. 온천수를 쓰는 목욕탕은 로고가 바뀌어 배같이 생긴 파란 바탕에 사람 얼굴이 동그랗죠. 김도 모락모락 나고요. 다시 말해서 옛날 목욕탕 로고 간판은 물을 덥혀서 쓰는 목욕탕이고 새 로고 목욕탕은 온천수 목욕탕인 거죠.”

그러고 보니 동래 온천 온천수 목욕탕은 로고가 여느 목욕탕이나 숙박 시설 로고와 달랐다. 상호 앞에 또는 상호 아래 선명한 로고는 어떻게 보면 윤한진 이사장 표현대로 배 같았고 어떻게 보면 모든 사람이 가장 편하게 지냈을 어머니 자궁 같았다. 그럴 것이다. 어머니 자궁처럼 편안하고 따뜻한 곳, 그곳이 어쩌면 온천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조가 아닐는지. 그런 면에서 동래 온천은 지역 전체가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곳이다. 이곳을 지나게 되면 느끼게 되는 편안함 같은 것도 거기에서 연유하지 싶다.

기존 목욕탕 로고는 1981년 ‘온천법’이 제정되면서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온천 로고가 일반 목욕탕이나 숙박업소에서 똑같이 사용됨에 따라 ‘온천법’으로 허가받은 전국 470여 온천장을 구별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희소성이 있고 관광 상품화할 수 있는 온천장이 일반 목욕탕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는 업주들 민원이 제기되면서 새 로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2008년 6월 온천 로고가 새로 도입되었다. 새 로고는 뜨거운 온천탕을 바탕으로 편안하게 온천을 즐기는 가족, 사랑, 건강을 형상화한 것이다. 로고만 보고서도 온천인지 일반 목욕탕인지 구별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온천 표시를 무단으로 사용하거나 유사한 표시를 사용할 경우에는 ‘온천법’ 제32조에 따라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시설이나 운영 면에서 아쉬운 건 없는지.”

“지금 목욕탕 부대 시설은 기껏해야 헬스 정도입니다. 좀 더 다양화하고 탕의 규모도 늘리면 좋겠지요. 50명, 100명 단체 관광객이 왔을 때 부곡 하와이처럼 그들을 수용할 시설이 많았으면 합니다. 목욕탕 규모가 허심청 빼고는 천일탕이 가장 크고 그 외에는 시설을 확장하고 싶어도 확장할 여건이 안 되는 처지지요. 천일탕의 경우 처음 허가 신청할 때 규모하고 실제로 허가 받은 규모하고 차이가 납니다. 온천수를 다 확보 못 한다 해서 규모가 축소돼 허가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시설을 확장하고 싶어도 주변 땅 확보가 안 되기 때문에 애로점이 많습니다.”

[웰빙 온천 치유 센터 무산된 건 아쉬워]

동래 온천이 가진 난제 하나가 주변부다. 상가에 막히고 주택에 막혀 규모의 경제 파급 효과를 누리지 못하는 실정이다. 온천장 주변 금정산, 금강 공원, 온천천 등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가진 온천 휴양 도시 입지가 온천 목욕 기능에만 매달린 정책적 오류로 인해 타격을 받고 있다. 한국 제일의 온천이란 명성과는 달리 관광 휴양 도시, 위락 도시라고 내세우기엔 역부족이란 인상을 주는 게 사실이다.

부산시는 1970년 부산시 전체의 관광 산업 육성 계획의 하나로 온천 휴양지 동래 온천의 새로운 개발에 착안하여 이 일대를 ‘관광지’로 고시한 바 있다. 그러나 별다른 추진 실적 없이 해지됨으로써 오히려 안 한 것보다 못 하게 됐다. 1981년에는 일대를 ‘온천법’에 의한 온천 지구로 지정 고시하였으며, 1986년 5월에는 당시 황폐화, 슬림화되고 있던 동래 온천 지역 일부를 도심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 고시하였다. 윤한진 이사장 이야기를 더 들어 보자.

“3년 전인가, 현대탕 뒤쪽으로 웰빙 온천 치유 센터를 건립하려고 했죠. 그 자리에 지금은 소형 아파트가 들어서 내부 공사 중입니다만, 그게 들어섰으면 온천 관련 재활 프로그램이 도입되면서 동래 온천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그 무렵 세계 경제가 다운되고 경기가 극도로 나빠져 은행 대출이 묶이는 바람에 뜻대로 되지 않은 게 지금도 아쉽습니다.”

한때 무슨 무슨 치유 센터 붐이 일어난 적이 있다. 자연 치유 센터, 명상 치유 센터, 한방 치유 센터 등이다. 동래 온천이 가진 약효라든지 치유 기능을 감안하고 동래 온천이 지닌 역사성이라든지 명성을 감안하면 웰빙 온천 치유 센터는 가능성이 충분한 모색이었겠다 싶다. 참고로 유성 온천이 있는 대전에서는 족욕 체험장이 딸린 온천 치유의 거리가 추진된다. 이는 ‘외국인을 위한 휴양형 의료 관광 연계 협력 사업’의 일환이다.

이 사업에는 내륙권 5개 지역[대전광역시·세종특별자치시·강원도·충청남도·충청북도] 지방 자치 단체와 정부가 연계한다. 사업을 위해 우선 올해부터 내년까지 대전 유성 온천 지역에 온천을 즐길 수 있도록 족욕 체험장을 확대하고 황톳길을 조성하는 등 경관을 정비해 ‘온천 치유 건강 특화 거리’를 만들 예정이다. 또 의료 기관 밀집 지역인 둔산동 일대에는 맞춤형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휴게 시설과 관광 시설 등을 확충해 '메디컬 스트리트'를 조성한다.

충청북도 제천에는 청풍 호반의 관광·문화 자원을 활용해 휴양·치유·관광을 동시에 체험하는 ‘한방 자연 치유 센터’를 건립한다. 충청남도 금산에는 2015년까지 아토피 환자를 위한 치유 공원, 산책로 등을 갖춘 ‘한방 아토피 치유 센터 및 치유 마을’을 조성하는 등 지역별 거점에 휴양 의료 인프라를 확충할 방침이다. 동시에 대전 유성 온천~충남~충북~강원을 온천 자원으로 연계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예정이다. 더불어 대전의 건강 검진, 금산의 인삼, 제천의 한방 명의촌, 원주의 한방, 횡성의 치유의 숲을 연계한 관광 코스를 개발해 외국 관광객을 적극 유치해 나간다는 전략도 세워졌다.

부산은 서면 메디컬 스트리트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을 동래 온천이나 해운대 온천으로 유치하는 전략을 제대로 수립한다면, 그리고 내륙권 5개 지방 자치 단체가 갖지 못한 해양 수도의 이점을 살린다면 승산이 충분하리라 여겨진다. 정책적 고려와 접근이 필요한 대목이다.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지방 자치 단체의 노력이 필사적이다. 그런 면에서 동래 온천은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부산은 일본과 가까워 일본 관광객 접근성이 높다. 더욱이 동래 온천을 본격적으로 개발한 건 1900년 전후 일본 자본이었다. 목욕 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한 일본이기에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그걸 염두에 두고 물었다. 목욕 손님은 주로 누구인지.

동래 온천에는 다양하게 옵니다. 주로 노년층과 장년층입니다. 연세 지극한 분들이지요. 외국인들은 허심청에 많이 옵니다. 외국인들은 단체로도 오고 개인으로도 오는데 주로 관광 오시는 분들이지요. 개인적으로 자주 오는 분들은 각자 자기 취향대로 골라 가고요. 외국인은 주로 일본인입니다. 아쉬운 건 목욕만 하고 가면 저희가 바라는 만큼의 사업성이 안 나온다는 거죠. 여기서 목욕도 하고 식사와 유흥을 즐기면서 휴식을 취해야 2차 상권이 활성화될 텐데 현재는 그런 게 좀 아쉽습니다.”

동래 온천 자랑을….”

“온천장은 조건이 좋습니다. 금정산이 있어 산행을 마친 등산객이 목욕하기 딱 좋은 위치지요. 산책로가 잘 돼 있어 인근 주민은 물론이고 사직동이나 금정구 주민, 심지어는 북구 화명동 분까지 산책하러 와서는 목욕을 하고 콩국이나 재첩국으로 요기를 합니다.”

온천장에 어디 금정산만 있을까. 동래 온천 주변엔 자랑거리가 한둘이 아니다. 1960~1970년대 부산 시민 최고의 휴양지 금강 공원과 식물원이 있으며, 동래부 동헌 문루 망미루가 있다. 동래 조개더미와 복천동 고분군, 조선 시대 출장 온 중앙 관원들이 객사로 쓰던 동래부 객사가 있으며 동래읍성 4대 성문이던 남문 북문 서문이 있다. 이주홍 문학관부산 민속 예술관, 임진 동래 의총 등 동래의 역사와 문화를 한껏 치켜세우는 유적이 동래 온천 주변 곳곳에 있다.

동래는 그 정신이랄지, 기상도 남에게 내보일 만하다. 동래의 정신, 기상은 3·1 만세 거리, 부산 3·1 독립운동 기념탑, 영보단 비에서 접한다. 복천동 고분군 북쪽 끝자락 영보단 비는 1909년 일제가 조정하는 중앙 정부 호적 대장 제출 요구에 반대하여 불태운 호적 대장 재를 묻은 자리에 세운 빗돌이다. 산성 막걸리, 동래 파전, 곰장어 등 맛집도 수두룩하다. 윤한진 이사장 표현대로 목욕을 하고 나와서 콩국처럼 요기용으로 간단하게 먹는 음식 가운데는 깨죽도 이름값을 한다. 깨와 콩, 현미를 섞어서 간 깨죽으로 한 그릇 3,000원 한다. 새벽 5시부터 아침 10까지 녹천탕 앞 노천에서 전을 편다. 동래 온천이 가진 한국 최고의 명성에 동래 온천 주변의 역사와 문화, 맛집을 결합시키고 거기다 치유의 기능을 가미한다면 해양 수도 부산을 대표하는 명소로 동래 온천은 손색이 없을 것이다. 온정 개건비를 세울 그때처럼 새롭게 일어설 것이다.

[지아비 금정산, 지어미 동래 온천]

인터뷰를 마치고 윤한진 이사장과 동래 온천을 둘러보았다. 번영회 사무실에서 나와 용각과 온정 개건비, 용각 재건비를 사진에 담았다. 맑은 물이 흐르는 스파윤슬길을 따라 온천장 예술의 거리를 걸었다. 거리 곳곳 시화와 동래 온천 옛 사진들을 보며 감흥에 젖기도 했다. 온천 목욕탕 새 로고가 박힌 녹천탕, 천일탕 간판은 새삼스러웠다. 온천장 명물 곰장어 거리를 일별하면서 금곡 온천 샛길을 거쳐 시에서 직영하는 동래 양탕장에 가 보았다. 온천 치유 센터가 들어서려고 했던 현대탕 뒤편 소형 아파트 공사장은 괜히 얄미웠다.

온천 골목을 지나 온천 시장에서 윤한진 이사장과 작별했다. 짧은 시간 동래 온천 거리를 동행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동래 관광호텔 연못을 이야기했으며, 온통 논밭이던 1970년대를 이야기했다. 거기에 추임새를 넣을 요량으로 국제신문사 앞 한양 아파트 자리가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연못이었다는 둥 나도 몇 마디 보탰다. 산성 막걸리 이야기가 나왔고, 막걸리 안주로는 딱이라며 동래 파전 이야기가 나왔다.

막걸리를 이야기하고 동래 파전을 이야기하는 윤한진 이사장의 넉넉한 표정을 보며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어디 허름한 주막 휘장 들추고 들어앉고 싶은 마음이었다. 해는 지고 있었지만 한여름 볕은 따가웠다. 땡볕이었다. 달아오른 땅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땅 아래 들끓는 온천수가 모락모락 내뿜는 김인 것만 같았다. 금정산 산그늘이 동래 온천 거리를 서서히 물들이고 있었다. 지아비 같은 금정산이 지어미 같은 동래 온천을 물들이고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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