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1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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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溫泉場-沐浴-金剛公園-逍風-釜山- |
영어의미역 | The Busan people who bathed at the hot spring and went on an excursion at the Geumgang Park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가연 |
[개설]
부산의 대표적인 유흥가 온천장, 지금은 사람들이 잘 찾지 않아 옛 명성을 잃어 가고 있지만, 중년을 넘긴 이들에게 온천장은 옛 추억을 되돌아보게 하는 곳이다. 온천장이 유명한 유원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온천이 가진 매력 때문이 아닐까.
부산의 여러 관광지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곳은 두말할 것도 없이 동래 온천이라고 할 수 있다. 부산 사람들 가운데서 동래 온천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직접 온천을 이용하지는 않지만 가까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물 좋은 온천을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금강 공원은 또 어떠한가. 오락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 주말에 부모님의 손을 잡고 금강 공원 한 번 안 가 본 사람이 있을까. 이렇듯 동래 온천과 금강 공원을 품고 있는 온천장은 오래전부터 부산 사람들의 따뜻한 휴식 공간이 되어 왔다. 오늘날에도 주말이면 부산의 명산 금정산을 찾은 등산객들이 하산 길에 금정산성 막걸리 한잔 걸치고 피곤한 몸을 담그고 피로를 푸는 곳이 동래 온천이며,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탕치를 목적으로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곳 또한 동래 온천이다.
[오랜 역사의 향기를 품고 있는 동래 온천]
동래 온천의 신비로운 효험은 백학(白鶴) 전설을 통해 예부터 널리 알려져 있다. 신라 때 동래 고을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절름발이 노파가 있었는데, 어느 날 집 근처에 있는 논에 백학 한 마리가 날아와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 노파는 같은 처지에 놓인 백학을 동정하며 지켜보았는데, 사흘째 되는 날 백학은 다리가 완쾌되어 근처를 몇 바퀴 돌다가 기쁜 듯 힘차게 날아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노파가 백학이 있던 곳으로 가 보니 뜨거운 샘물이 솟고 있었고, 노파는 이 샘물이 백학의 다리를 낫게 해 준 약물이라고 생각하여 그 물에 다리를 담갔더니 과연 효험이 있어 며칠 후에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동래 온천은 지금도 어르신들의 신경통에 좋다고 널리 알려져 있고, 실제로 신경통 치료를 위하여 매일 이곳을 찾는 분들도 있다.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실제 우리 역사의 기록 속에서 동래 온천의 효험에 관한 이야기를 꽤 발견할 수 있다. 동래 온천은 일찍이 신라 제31대 신문왕 때 재상 충원공이 동래 온정에서 목욕한 것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선 전기 간행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서는 동래 온천에 대하여 “계란이 익을 정도로 뜨거우며, 병자가 목욕하면 곧 치유되므로 신라 때에 왕이 여러 차례 이곳에 행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그 “기념으로 네 곳에 돌을 쌓고 그 위에 구리 기둥을 세웠다”고 서술하고 있다.
고려 시대 대문장가 이규보(李奎報)·정포(鄭鋪)·박효수(朴孝修)도 동래 온천에 관한 글을 남겼으며, 조선 시대 정구(鄭求)[1543~1620]의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 그리고 조선 후기 동래 부사로 오랫동안 재임했던 정덕현(鄭顯德)은 『봉래별곡(逢萊別曲)』 등을 각각 남겼을 만큼 동래 온천은 신라 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국왕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과 관리들이 방문하였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동래 온천은 이러한 사람들의 방문으로 전국에서도 이름난 곳이 되었다. 이에 따라 각종 규칙 및 시설 정비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1691년 동래 부사 김흥복이 새로운 온천을 굴착하여 돌로 두 개의 탕을 만들고 기존의 온정(溫井) 옆에 온정가(溫井家)를 두어 동래 온천을 관리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세월이 흘러 건물이 낡고 탕이 막히게 되자, 1766년(영조 42) 동래 부사 강필리는 9칸의 건물을 지어 남탕과 여탕을 구분하고 온천을 지키는 집을 지었으며 대문을 세워 그 안에 비석을 건립하는 등 온천의 대대적인 정비를 가하였다. 이때 세운 기념 비석이 온정 개건비(溫井改建碑)로, 당시 돌로 만든 물통과 함께 현재까지 지방 문화재로 전해 오고 있다. 온정 개건비는 농심 호텔 후문 쪽 족욕 시설 근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온천의 개발과 금강 공원의 탄생]
동래 온천은 조선 시대 왜관(倭館)이 있었던 부산과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왜인들 또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동래 온천을 즐겼다. 그리고 1876년 개항 이후 부산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에 의해 동래 온천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일본 자본가들이 부산으로 대거 진출하면서 일본인들은 온천이 용출되는 곳에 여관을 지어 본격적으로 관광 사업을 시작하였다. 1907년에 세워진 도요타 후쿠타로[豊田福太郞]의 봉래관, 1912년에 개업한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의 대지 여관, 1916년 부산역전에서 여관을 하던 나루토[鳴戶]의 명호 여관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세운 여관은 깨끗한 욕탕과 화려한 시설로 많은 관광객을 끌어 모았다. 특히 봉래관은 새로운 영업 방식을 시도하였는데, 교통비와 목욕비를 하나로 묶은 패키지 상품을 판매한다든지, 여관 홍보를 위해 전병을 만들어 제공하기도 하였다. 봉래관은 농심 호텔의 전신이기도 한데, 봉래관 앞에 있던 연못이 지금 허심청 앞 일대라고 알려지고 있다. 연못은 온천천의 물을 끌어들여 만든 인공 호수로서 나룻배를 타거나 물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관광용 사진엽서가 발행되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의 온천장 진출이 늘어나고 또 온천장 경영자들이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부산과 온천장을 잇는 교통 시설을 개선하여 1915년에는 전차의 종점이 온천장으로 연장되었다. 지금 온천 사거리의 부산은행 앞이 당시 전차 종점이었다고 한다.
금강 공원 또한 일본인들이 부산을 식민 도시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 만들어졌다. 개항 후 부산에 정착한 일본인들이 동래 온천을 휴양지로 개발하면서 배후지 금정산을 관광지로 만들 계획을 세웠고, 그래서 그 기슭에 금강 공원을 만들게 되었다. 금정산의 바위들이 매우 아름다워 강원도 금강산에 버금간다고 해서 명칭을 금강 공원으로 하였다고 한다. 온천장의 목욕탕, 여관 등을 이용하여 돈을 벌 목적이었던 일본인 자본가들은 손님들이 온천장에 더 오래 머물 수 있도록 주변에 보고 즐길 만한 공간이 필요하였다.
처음 금강 공원은 부산으로 건너와 담배 장사로 큰돈을 번 일본인 자본가 히가시바라 가지로[東原嘉次郞]의 개인 정원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1920년대 초반에 이곳의 계곡물을 이용해 청룡담이라는 일본식 연못을 만들고, 계곡의 바위 위에 13층 높이의 후락탑(後樂塔)도 세워 일본인 사업가의 위세를 과시하였다. 그는 1933년 무렵 동래부 관아 지역에서 시가지 계획으로 철거된 망미루와 독진 대아문(獨鎭大衙門)을 금강원으로 옮겨 놓았고, 지금은 제자리를 찾아 옮겼지만 이섭교비(利涉橋碑)와 내주 축성비(萊州築城碑) 등을 옮겨와 정원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히가시바라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와 함께 일본식 연못과 석탑, 불상 등으로 조성한 개인정원을 1931년 일반인 관람객들에게 개방하였다.
이후 금강 공원은 온천장 공중 욕탕에서 온천욕을 즐긴 관광객들이 산책삼아 올라가서 여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관광 코스로 이용되었다. 그는 1940년에 이 정원을 동래읍에 기증하였는데, 정원과 관련한 내용은 청룡담이라는 일본식 연못 위쪽의 큰 바위를 깎아 새긴 금강원지(金剛園誌)에 전하고 있다. 이 바위는 겉으로 보기엔 주변의 바위와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자세히 보면 ‘황기이천육백년기념비(皇紀二千六百年記念碑)’라는 큰 글씨 아래 ‘금강원지’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금강원 주인인 히가시바라가 정원을 동래읍에 기증한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동래읍장이 만들었다.
이렇게 동래 온천과 금강원을 하나의 위락권으로 만든 관광 문화는 제국주의 일본의 자국민과 조선민에 대한 식민지 관광 육성책에 의한 것이었다. 유서 깊은 동래 온천에서의 여행담은 더 많은 일본인들을 조선으로 불러 모으는 식민지 관광의 효과적인 홍보 수단이었다. 이로써 대규모 숙박 시설, 식당, 상점이 들어선 온천장은 화려한 벚꽃과 함께 일본인을 위한 환락향으로 변해 갔다.
[요정이 넘쳐 나던 온천장]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이름을 날리던 일본인 자본가들은 동래 온천에 앞다투어 별장을 건설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가 건설한 동래 별장을 들 수 있다. 하자마 후사타로는 19세기 말 부산에 처음 들어온 후 장사와 토지 약탈, 고리대금 등으로 대자본을 축적한 사람이다.
동래 별장은 한때 일본 왕족이 방문하기도 하였고, 총독부의 고위 관리가 부산에 오면 머물기도 한 곳이다. 현재 한정식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별장은 조용한 골목 한가운데서 강한 포스를 풍기고 있다. 일단 큰 대문을 들어서면 먼저 숲속 사이 본관이 나타난다. 긴 복도와 유리창으로 장식한 목조의 2층 건물은 한눈에 봐도 일본식 대저택임을 알 수 있다. 내부는 많이 변해서 그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없지만, 하자마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고 하는 목욕탕이 남아 있어 당시의 호사스러움을 알 수 있게 한다. 바위 하나를 통째 파서 만든 욕조는 당시에는 아무나 가질 수 없었다. 별장 뒤편에는 정원이 있는데 각종 정원수와 장식물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전형적인 일본식 인공 연못과 일본식 석탑이 남아 있어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광복 후 동래 별장은 미군들의 휴양 시설로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민간에 넘겨진 이후에는 줄곧 부산에서 가장 잘 나가는 고급 요정이었다. 이른바 정·관계 사람들이 부산에 오면 하룻밤 접대를 받는 곳으로 유명하였다. 1960~1970년대 동래 온천에는 기생들이 넘쳐 났는데, 한 시대를 풍미하던 유명한 탤런트들도 여기서 일을 하다가 높은 사람의 눈에 들어 데뷔를 하였다는 소문도 파다하였다. 동래 별장뿐만 아니라 온천장은 1960~1980년대 개발의 붐을 타고 많은 요정과 요릿집들이 넘쳐 나던 곳이었다.
“옛날 우리 아버지 때 동래고보 하면 얼마나 유명한 학교였소. 그런데 그 동래고보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면 동래에 기생들을 보러 다녔다고 합디다. 학생이라 돈은 없지, 그냥 요릿집 근처에서 기웃거리는 거지. 그 정도로 동래에는 기생이 많았어. 왜정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1960~1970년대에 여기 근처에는 기생집이 넘쳐 났어요. 돈이 얼마나 많이 굴러 다녔다고. 여기서 유명한 탤런트가 다섯이 나왔다고 해. 탤런트 OOO 알아요? 참 예쁜데, 갸도 여기 요정에서 일했다 아니가.”
온정 개건비 앞 길다방에서 마주친 심재홍[1938년 생] 어르신이 기억하는 동래 온천장 최전성기 때의 모습은 이러하였다. 그렇다면 2013년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기억하고 있는 동래 온천과 금강 공원의 모습은 어떠할까?
[봄바람 동래 온천]
‘봄바람 동래 온천 여름 한철 송도요 달마중 해운대도 부산 항구다. 가느니 못 가느니 종열차에 베루[bell]가 운다. 경상도 사투리 아가씨들의 이별이 좋다.’[「부산 행진곡」 3절]
노래 가사에도 있지만, 부산이라고 하면 제일 좋은 데가 송도, 그 다음이 동래였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온천장 자체가 부산의 다른 곳에 비하여 많이 쇠락하였지만 한때는 주말이면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넘쳐 났던 곳이다. 1950년대 중반기에는 권번 소속 기생이 120명에 달하였고 숙박, 욕객의 수도 급증하였다. 온천장의 지명도가 점점 높아지자 온천장은 전국적인 관광지가 되었고, 1960년대에는 영도 대교와 함께 학생들의 수학여행 목적지가 되었다. 당시 학생들이 주로 이용한 관광 교통수단은 버스와 전차였다. 1960년대 당시 부산으로 수학여행을 왔던 이복성[61] 씨의 말을 들어 보자.
“밀양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던 중에 6학년 봄에 수학여행을 가는데, 부산으로 가더라고. 제일 먼저 부산에 와서 영도 다리 드는 것을 봤지. 그 무거운 다리가 서서히 들리는데, 얼마나 신기하던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다음에 태종대에 갔어. 지금 영도 등대 있는 곳에 신선 바위가 있지? 거기서 내가 열두 살 때 사진 찍은 게 있어. 며칠 전에 그 자리에 50년 만에 다시 서 봤어. 그러고 영도에서 전차를 타고 마지막 종점 동래 온천에 갔지. 당시 동래 온천이 엄청 유명했거든. 부산에 다른 곳은 숙박할 곳이 마땅치 않았고 동래 온천은 별천지였어. 사람들이 넘쳐 나더라고. 동래 온천에서 하룻밤 자고, 그러고 다음 날 목욕하고 금강원에 놀러 갔다. 아마 그게 당시 일반적인 수학여행 코스였던 것 같아.”
어디 수학여행뿐이겠는가. 그런 이벤트뿐만 아니라 부산 사람들에게 온천장은 힘겨운 일상생활 속에서 한 번씩 콧바람을 넣을 수 있는 쉼터였다. 매일 금강원에 올라 가벼운 등산을 하고 하산 길에 동래 온천에 들어 목욕을 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심재홍 어르신은, 온천장에 관해 묻는 필자에게「부산 행진곡」 3절을 들려주신다. “‘봄바람 동래 온천, 여름 한철 송도요~ ’, 이 노래 아나? 동래 온천은 노래 가사에 나올 정도로 유명했어. 요즘 사람들은 알란가 몰라.”
올해 76세인 심재홍 어르신은 16세 때부터 우장춘 박사한테 농업 교육을 받기 위하여 동래 온천에 다녔다. 그때나 지금이나 강서구 쪽에서 살고 있지만 그 먼 곳에서 아직도 매일같이 온천장을 찾고 있다. 어르신은 온천장의 흥망성쇠를 직접 온몸으로 체험한 장본인이자, 온천장의 쇠락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하는 부산 시민이었다. 옛날 전차가 다닐 때는 전차 종점에서부터 금강 공원에 올라가려고 줄을 서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부산 시민의 휴식처 금강 공원]
“금강 공원이 살려면 동물원이 있어야 해!” 금강 공원에 동물원이 있었던가. 필자도 학교 다닐 때 봄가을 소풍으로 자주 찾던 곳이 금강 공원이었는데, 갑자기 나온 동물원 이야기에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께서는 금강 공원이 다시 살아나려면 동물원이 꼭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처음 금강 공원에 동물원이 생겼을 때에는 미국에서 폐기 처분하는 동물을 가지고 와서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화려한 동물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있을 것은 다 있었다고. 특히 어르신이 자식들을 키울 때는 금강원에 나들이 가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큰 선물이었다. 어르신은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얼굴로 옛 온천장에 대한 추억을 풀어내신다.
“예전에는 놀이터가 여기밖에 없으니까. 그때는 한 동네 100집 살면 텔레비전 있는 집이 한 두세 집밖에 없거든. 주말에 즐길 데가 어데 있어. 금요일 저녁 되면 시장에서 김밥거리 사서 김밥 말고 먹을 것 준비해서 가는 거지. 우리 애들도 그러면 친구들한테 자랑하는 거라. ‘우리 내일 금강원에 간다. 우리 금강원에 코끼리 보러 간다’ 이렇게 자랑을 해. 그래 가지고 여기를 오면 우리뿐만이 아닌 거라. 줄을 어디까지 서서 표 사기도 힘들었다. 애들은 좋다고 난리고.”
어디 아이들뿐이겠는가. 어른들에게도 온천장은 신나는 놀이 공간이었다. 애들은 공원에서 동물 보면서 놀고 어른들은 금정산성 막걸리를 마시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여기서 노는 것이 하나의 큰 행사였던 셈이다.
“여기 오는 게 하나의 행사였어. 아줌마들도 금강원에 와서 잘 노는 거라. 막걸리 한잔 걸치고 장구 치고 노니까 신이 나는 거지. 오죽하면 금강원에 치마 주우러 가자는 말이 나왔겠노. 아무도 간섭 안 하거든. 싸움도 없고. 옛날에는 참 좋았어. 그러니 봄바람 동래 온천이라는 노래가 안 있겠나. 옛날에는 우리가 순박해서 막걸리 한잔하고 친구들하고 만나서 장구 치고 춤추고 노는 게 좋았어.”
금강 공원에는 ‘치마 주우러 간다’는 말이 있다. 금강 공원을 좀 다녀 본 부산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여자들이 술을 마시고 취해서 치마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추고 놀았다는 말이다. 그 정도로 부산 시민에게 금강 공원은 일상의 고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고마운 장소였다. 그렇다면 어르신이 어렸을 때는 어땠을까. 동래 온천에 대한 기억이 있을까.
“어릴 때 내가 강서구에 있을 때 그건 큰 행사거든요. 울 아버지하고 동네 사람들하고 봄가을로 여기에 온다 아닙니까. 온 동네 사람들이 새벽에 도시락 싸서 만덕 고개 넘어서 걸어온다고. 새벽 4시에 출발하면 여기 6시에 도착하거든요. 그게 1955년 무렵의 일인기라. 구포에 작은 다리가 있었는데, 그걸 건너서 만덕을 넘어 왔어. 그렇게 와 가지고 먼저 온천에서 목욕하고 도시락 먹고 나면 금강 공원에 올라가요. 거기 가믄 아버지들은 금정산성 막걸리 마시고 우리들은 풀빵 먹고 그랬어. 당시에는 목욕을 거의 못 했으니까 물에 푹 불려서 때를 긁어내야 한다고. 때수건도 없었고, 돌로 때를 긁어냈다고, 하하하. 그러고 다시 걸어서 집에 온다. 여자들은 또 따로 왔어. 우리 마을에 동래댁이라는 아줌마가 있었는데, 그 아줌마가 주동을 해서 가는 거라. 그 아줌마네 친정이 여기서 작은 여관을 했는데, 그 집에 가서 국수 얻어먹고 그랬어. 그게 큰 행사고 즐거움이라. 별로 놀 것이 없던 시절에는.”
어르신의 아버지가 마을 행사로 동래 온천장을 찾았듯이, 후에 어르신이 자식들을 데리고 온천장에 놀러 왔듯이 동래 온천과 금강 공원은 부산 시민의 휴식처이자 가족과 즐거운 한때를 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인형 뽑기, 케이블카, 「인디아나 존스」, 그리고 동물원]
광복 이후 1965년에 부산시는 금강원을 ‘금강 공원’이라 개칭하고 일반에 공개하였다. 1967년에는 동물원을 개장하였고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를 운행하면서 제법 공원다운 모습을 갖추었다. 정부는 1969년 금강 공원을 태종대와 함께 정부 지정 관광지로 정하였다.
온천장에서 망미루를 거쳐 금강 공원 입구를 향하는 길목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놀이의 공간이었다. 필자가 어릴 적에도 부모님의 손을 잡고 동생들과 금강 공원에 놀러 갈 때면 그 길목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항상 엄마와 실랑이를 벌이면서 눈물을 쏙 빼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그만큼 길가에 쭉 늘어선 포장마차 점포들이 발산하는 유혹은 참을 수 없었다. 아이들의 눈에 인형 뽑기나 공놀이, 풍선 터뜨리기 등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신세계였을 터. 고사리 같은 손에 솜사탕이라도 쥐어 줘야 만이 무사히 금강 공원 입구까지 갈 수 있었다.
그렇게 매표소에 도착하면 아빠는 길게 늘어선 줄의 끝자락에서 가족들을 위하여 지겨운 줄도 모르고 차례를 기다린다. 그리고 드디어 공원에 입성, 제일 먼저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펴고 앉아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지 않았던가. 엄마가 싼 김밥 도시락은 야외에서 먹으면 그 맛이 배가 되는 것 같다. 오랜만의 가족 나들이를 위해 새벽부터 싼 엄마표 김밥에는 사랑이 들어가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굵고 맛나다.
김밥을 배가 터져라 먹고 나면 이제부터 기념 촬영이 시작된다. 필자의 앨범에도 어릴 때 금강 공원에서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일본식 연못에 있는 돌다리 위에서 아빠의 손을 잡고 찍은 사진 속 필자의 표정이 잔뜩 흐리다. 물에 빠질까봐 겁이 나서 그랬을까, 아니면 먹고 싶은 군것질거리를 먹지 못하였기 때문일까. 그렇게 인증 샷을 남기고 나면 본격적으로 구경에 나선다.
지금은 화려한 테마 파크에 밀려서 제 구실을 못 하다가 바로 얼마 전에 철거되었지만, 당시 부산에서 놀이 기구를 즐길 수 있었던 곳은 부산진구 초읍동의 어린이 대공원과 금강 공원이 유일하였다. 놀이 기구의 고전인 회전목마, 범퍼카, 다람쥐 통, 비룡 열차 등은 꽤 인기가 있었다. 아빠는 어린 우리들만 놀이 기구에 태울 수 없었기에 이 모든 놀이 기구에 동승하였고, 엄마는 밖에서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사진을 찍었다. 놀이 기구를 타기 위해서 꽤 오랫동안 줄을 서야 하였지만, 길게 늘어선 줄을 기다리는 시간이 그리 지루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설레는 경험이었다.
지금 금강 공원의 놀이 기구는 다 철거되고 없다. 그래서 그 시절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놀이 기구들 뒤를 장식하였던 「인디아나 존스」 영화의 한 장면을 그린 벽화뿐이다. 1980년대 초반에 개봉하여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을 그린 벽화는 금강 공원의 나이를 가늠케 한다.
놀이 기구도 타고 나들이에 지쳐갈 무렵 동물원에 들른다. 울타리에 매달려 집채만 한 코끼리에게 먹이를 주거나, 두려움을 무릅쓰고 사자를 구경한다. 암사자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새끼를 세 마리 순산하였다는 뉴스는 당시 동물원의 명성을 잘 보여 준다. 하지만 2001년 이후 동물원은 문을 닫았고 우리들의 기억에만 남아 있다. 동물원이 없어진 것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아쉬워한다. 심재홍 어르신은 금강 공원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동물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지금 내 생각 같아서는 이 공원을 발전시키려면 사람한테 해코지 안 하고 피해 안 주는 동물들로 풀어 키우면 사람들이 다시 올 것 같아. 공원은 애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애들이 가자고 해야 하는 거지. 애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되어야 사람들이 저절로 온다고. 내가 어렸을 때 일본 교토에 살았는데, 거기는 보면 사슴 공원 같은 거 있지 않습니까. 애들은 사슴 몇 마리만 가져다 놓아도 깜박 죽는다니까. 사자니, 호랑이니 이런 거 필요 없어요. 그런 것은 비싸잖아. 그런데 여기 동물이 어데 있어? 고양이나 몇 마리 있지. 토끼를 몇 마리 갖다 놓은 적도 있는데 이게 번식력이 좋아서 문제가 되는 거라. 그래서 치웠다고.”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김광수[80] 어르신이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길다방에 들렀다가 한마디 보태신다.
“공원이 억수로 변했어. 40~50년 전에는 주말만 되면 금강 공원에 치마 주우러 가자 그랬거든. 토요일, 봄만 되면 사람들이 밀려 올라갔다고. 동물원이 있을 때는 더했지. 20년 전만 해도 동물원이 있었어. 내가 올해 80인데 20년 전 예순 살 때 우리 손자를 데리고 만날 동물원에 올라갔다고. 그때 동물원이 참 잘 되어 있었어. 우리 아들이 빨리 죽어 버려서 내가 손자를 키웠는데, 그 당시에 애를 데리고 갈 곳이 마땅치 않았잖아. 그래서 그 꼬맹이를 데리고 매일 동래 온천에 목욕시켜서 음료수 하나 사서 들려주고 금강 공원에 가서 동물 보여 주는 거라. 가끔 놀이 기구도 태워 주고.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 손자가 올해 스물 여섯 살이라고. 그때만 해도 동물원이 참 좋았어.”
옛날 온천장에는 유흥업소도 많았고, 장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사람들도 넘쳐 나던 곳이었다.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25년 동안 온정 개건비 앞에서 길다방을 해 오고 있는 아주머니의 아쉬운 목소리가 예사로이 들리지 않는다.
“옛날에는 유흥업소도 많았고, 장사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금강 공원에 올라가면 센터라고 해서 아줌마들이 음료수나 군것질거리 좀 팔고 그런 게 있었는데, 지금은 다 없어지고 하나도 없지 뭐. 포장마차가 여기저기 있었는데 없어졌어. 그래서 사람들이 온천장에 오면 소일거리가 없는 거라. 그러니 발길이 멀어지고 그렇지. 내가 여기서 장사한 지가 25년 정도 되었는데, 그때만 해도 여기 이 길에 사람들이 부딪치면서 다녔어요. 사람이 바글바글했던 거라. 그런데 봐요, 지금은 사람이 없지요? 사람들이 찾아와서 즐길 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없으니까 점점 안 오는 거지. 그나마 목욕탕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이것마저도 없었으면 여기서는 먹고 살게 없지요. 예전에 포장마차가 100개도 넘었는데 다 철거시켰어. 지금 공원을 꾸며서 재개장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때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참 그립고 아쉽고 그러네요. 그래도 항상 사람은 기대 속에 살아야겠지요, 호호호.”
[그래도 물은 동래 온천이 최고]
부산에 유명한 온천이라고 하면 해운대 온천과 동래 온천을 들 수 있지만, 동래 온천에는 유난히 어르신들이 많다. 일반적으로 해운대 온천은 해수 온천이기 때문에 피부병에 좋다고 알려져 있는 반면, 동래 온천은 신경통에 좋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어르신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이리라.
지금 동래 온천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허심청을 제일 먼저 떠올린다. 시설이 다른 목욕탕들보다 월등하게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외 녹천탕, 금천탕, 천일탕 등의 공동탕이 있는데 각자 취미에 맞게 목욕탕을 골라서 갈 수 있다. 제일탕이 제일 오래 됐었는데, 아쉽게도 얼마 전에 폐업하였다. 녹천탕과 쌍벽을 이루며 동래 온천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던 제일탕은 이제 없어지고 그 자리에 새 건물이 들어선다고 하니, 세월이 많이 흐르긴 흐른 모양이다. 참고로 지금 동래 온천에서 소문난 공동탕인 녹천탕은 원래 고구마·옥수수 밭이었는데, 당시 녹천탕 주인이 집을 지으면서 연탄 화덕을 묻으려고 땅을 파자 거기서 온천이 터져서 목욕업을 시작하였다는 소문이 있다.
어르신들은 시시한 약을 먹는 것보다 매일 동래 온천에서 목욕하는 것이 건강에 더 좋다고 믿고 있다. 혈액 순환에도 좋고 감기에도 잘 걸리지 않는다며 동래 온천을 극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아직 온천의 효능을 잘 느끼지 못하는 필자에게는 바로 그 감상이 공감되지 않는다. 이에 심재홍 어르신은 온천의 효험을 테스트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온천의 효능을 잘 모르겠거든 일단 일반 목욕탕에서 이틀 목욕하고 동래 온천에서 목욕을 함 해 봐. 그러면 물이 얼마나 좋은지 잘 알 수 있을 거야. 머리카락부터가 매끈매끈해요. 가끔 일본 사람들이 동래 온천에 와서 목욕을 하고 간다. 심지어 골다공증이 있는 사람이 여기서 목욕을 하면 다리가 안 아프다고 해.”
훌륭한 온천을 두 개씩이나 가지고 있는 부산 사람들은 복을 타고난 것일까? 동래 온천 단골들은 물이 이렇게 좋은 곳은 전국에서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 것이라고 단언한다.
길다방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버스를 타고 온천 사거리 부산은행 앞에서 내려 ‘살살’ 걸어 온정 개건비 앞까지 온다. 그리고 거기 길다방에서 천 원짜리 커피 한 잔 사 들고 그 옆의 녹천당이나 천일탕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코스가 일반적인 것 같았다. 날씨가 선선해지면 그 앞의 노천 족욕탕에 발을 담그기도 하는데, 필자가 방문하였을 때는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한여름이라 족욕탕도 임시 휴업 상태였다. 지난겨울 우연히 본 족욕탕에는 한 사람이 앉을 자리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족욕을 즐기고 있었다.
여기 어르신들은 온천을 하고 나서 맛있는 게 있으면 사 먹기도 하는데, 예전처럼 포장마차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매일 군것질을 하기에는 부담이 크다. 대신 한 번씩 친구들과 밥을 먹는데 온천장에는 명성만큼 특별한 맛집이 없어 아쉽다. 그래도 요즘과 같은 여름에는 함흥집이라고 하는 보신탕집에 가끔 들르거나, 아니면 동래구청 앞까지 가서 동래 파전에 동동주 한잔하는 것이 사는 낙이다. 동래 파전도 예전보다 두께가 많이 줄어들었다며 불만을 말씀하신다. 예전에는 파전 하나면 막걸리 석 되는 마실 수 있었다고.
심재홍 어르신이나 김광수 어르신이나 동래 온천을 50년 이상 다닌 사람들은 예전의 온천장을 그리워한다. 전차가 끊긴 이후 개발의 붐을 타고 1960년대 중반부터 온천장도 대대적으로 개발을 시작하였다. 이후 나이트클럽, 유흥업소 등 청소년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성인들의 놀이터가 온천장의 밤을 화려하게 밝혔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10여 년 전쯤에는 온천장 가운데를 흐르던 실내천을 메꿔 길로 만들어 버렸다. 심재홍 어르신이 기억하는 옛날 실내천에는 고기가 바글바글하였고 조그마한 보트가 있어서 온천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보트도 타고 놀았다. 실내천 가에는 상점으로 사용되던 슬레이트 지붕 가건물들이 쭉 늘어서 있었는데, 당시에는 이런 집들을 줄집, 하코방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목욕탕, 여관들도 거의 일본식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목욕탕 안에도 바가지를 비롯하여 의자 등이 전부 나무로 만든 것이었다고. 지금은 무거워서 들지도 못 할 정도의 것이었다고 한다.
“비 오고 나면 고기가 마구 올라왔다. 여기서 빨래도 하고 고기도 잡고 애들도 놀고 난리였지. 지금 복개한 곳을 다시 뜯어서 살린다고 하던데 모르지 뭐. 옛날에는 전경이 참 좋았는데……. 온천 입구에서부터 벚꽃이 만발하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남녀 공동탕도 있었어. 까치발을 서서 보면 여탕이 보였다고. 허허허.”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
작년 여름 장맛비가 오락가락 내리던 날 동래 온천장과 금강 공원을 찾은 적이 있다. 일본에서 온 손님들이 온천장 일대 일제의 흔적을 보고 싶어 하였기 때문에 안내자 역할을 자처하였다. 온천장을 간단히 둘러보고 동래 별장에서 식사를 한 후 금강 공원으로 올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금강 공원을 찾을 일이 없었던 필자는 금강 공원이 그저 그런 동네 체육공원 수준으로 전락한 것을 보고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었다. 금정산 등산을 마치고 하산하는 사람들, 아니면 동네 주민들이 산책하러 올라오는 정도였다.
동래 온천과 금강 공원 일대에는 임진 동래 의총, 「동래 야류」나 「동래 학춤」 등을 이어 가는 부산 민속 예술관, 이주홍 시비, 금정사 등 수많은 역사 문화 콘텐츠가 흩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들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다른 관광지처럼 문화유산 해설사가 투입되어 공원에 관한 역사적 설명을 하고 있지만, 그 외 많은 것들이 더 필요해 보였다.
온천장에서 만난 어르신들이 분석한 온천장이 쇠락한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였다. 우선 금강 공원 앞을 지나는 도로[우장춘로]가 만들어지고부터 차들이 윗길로만 다니고 아래쪽의 온천장 쪽으로는 내려오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무분별한 개발로 인하여 유흥업소가 너무 많이 들어선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온천과 공원은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많이 찾는 곳인데, 아이들 교육상 좋지 않은 시설들이 너무 많다. 셋째,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옛날 금강 공원에는 동물원, 놀이 기구들이 있어 아이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케이블카만이 겨우 운행하고 있을 뿐, 근처 학교에서 소풍도 잘 가지 않는 곳이 되어 버렸다.
“왜 여기가 죽었냐 하면, 지금은 애들 중심으로 돌아가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애들이 즐길 거리가 하나도 없지. 하다못해 젊은이들이 노는 조용한 술집, 멋진 카페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하나도 없잖아. 사람이 안 오니까 저절로 낙후되는 것 아니요. 가족끼리 놀러 와서 김밥 하나 놓고 먹을 자리도 없다 아닌교. 온천장은 나이든 사람들만 가는 곳이라고 생각들 하잖아요. 안 그래요? 하다못해 돼지 한 마리라도 있으면 그거 보러 올 거 아니요?”
결국 시민을 끌어들일 프로그램의 실종이 가장 큰 문제였다. 특히 금강 공원은 필자가 어렸을 때 봤던 풍경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금강 공원은 왜 이토록 오랫동안 방치되다시피 하였을까.금강 공원은 국·시유지와 사유지의 복잡한 소유 관계, 우장춘로, 동물원·식물원 등 공원을 단절하는 민간 시설, 그리고 동래구 온천동과 금정구 장전동에 걸치는 지방 자치 단체 사이의 무언의 경쟁으로 인하여 주민의 힘이 결집되지 않는 부작용이 있다.
최근 부산시는 동래 온천과 금강 공원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하여 재정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온정 개건비 앞 스파윤슬길에는 무료로 족욕을 할 수 있도록 온천물이 흐르고 있고, 금강 공원에는 각종 놀이 시설을 현대화하고 테마 공간을 만드는 이른바 ‘드림 랜드’ 조성 사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2017년까지 20여 개 단위 사업들을 순차적으로 완료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사업의 성공 가능은 장담할 수 없다. 자칫 무분별한 자본의 투입으로 재충전의 공간이 아닌 피곤한 소비의 공간으로 그 역할이 축소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실제 부산시의 드림 랜드 조성 계획에는 ‘사람’이 없다. 시설물 위주의 계획만이 있을 뿐, 실제 시민이 참여하여 공원을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 공간으로 만든다든지, 주변 지역과 연계하여 자연 공원을 되살리는 전략은 없는 것 같다.
“온천장은 전통성이 너무 없어졌어요. 너무 외국을 따라하려고 한다고. 개발이 전부인 줄 아는 거라. 그래도 우리는 된장찌개, 김치를 먹어야 하는 한국 사람이잖소. 제발 쓸데없는 데 돈 쓰지 말고 자연 그대로 부산 시민이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르신의 이 한마디가 동래 온천과 금강 공원을 되살리는 프로젝트에 관한 일반 부산 시민의 생각이 아닐까. 부산 시민이 부담 없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 가족끼리 온천하고 공원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으로 부디 재탄생하기를 바라 본다. 우리의 부모님이 그랬듯이 나 또한 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웃으며 놀러 갈 수 있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