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4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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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萊州築城碑 |
영어의미역 | Stone Monument for Castle Construction in Naej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3-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재혁 |
[정의]
조선 후기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동래읍성의 수축을 기념하여 세운 비.
[건립 경위]
내주축성비(萊州築城碑)는 1731년(영조 7)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성을 고쳐 쌓은 내력과 동원 인원, 규모 등을 적어 건립하였다.
[위치]
내주축성비는 원래 동래읍성 남문 밖에 세워져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도로 확장을 이유로 이섭교비(利涉橋碑)와 함께 금강 공원 내 동래부 동헌 외대문(東萊府東軒外大門) 뒤쪽으로 옮겨져 보존되다가, 일제 잔재 청산과 민족 정기 회복, 문화재의 효율적인 보존·괸리를 위해 2012년 동래읍성 북문 앞으로 이전·복원하였다.
[형태]
비의 크기는 높이 270㎝, 너비 107㎝로 큰 규모이다. 비석의 머리 부분인 이수(螭首)에는 한 쌍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으며, 비대(碑臺)[기단 부분]에는 연꽃무늬가 소박하게 양각되어 있다. 재질은 화강암이다.
[금석문]
비석에 새겨진 내용에 의하면 읍성은 둘레가 약 936.36m[3,090척], 높이가 약 3.93m[13척]이었는데, 1731년 정월에 성터를 척량(尺量)하고 경상도 64개 군에서 5만 2000명의 백성과 승군(僧軍)을 동원하였다. 연인원 41만 7050명, 전(錢) 1만 3454량(兩), 포 1,552석, 미곡 4,585석으로 4월에 성벽을 축조하고 이어 5월에 성문, 7월에 문루를 완공하여 둘레 약 5.23㎞[1만 7291척], 높이 약 5.15m[17척]의 성을 쌓았다. 앞면에는 축성에 관한 사실을 20행으로 기록하고, 뒷면에는 축성에 종사한 임원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비의 앞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승훈랑 행황산도 찰방 김광악 기. 유학 송광제 서. 통훈대부 행현풍 현감 유우기 전. 금상(今上) 9년 계축(癸丑)년[1733, 영조 9] 겨울에 광악(光岳)은 승정원의 당후(堂后)에 있게 되어 경연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떤 중신이 임금 앞에서 평양에 성을 쌓는 일을 계획하며 ‘만약 정언섭이 동래성을 쌓았던 일과 같이 그 고을 신하가 스스로 하도록 청을 들어 준다면 국고를 쓰지 않고 백성의 힘을 고갈시키지 않아도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것을 일기에 적어 승정원에 보관하였다. 이듬해 봄에 황산(黃山)의 역승(驛丞)이 되었을 때 동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는데, 동래 사람은 정공의 치적에 훌륭한 것이 많다고 칭송하였다. 동래의 선비 중에 송광순(宋光洵)이 성을 쌓을 때의 사적을 기록한 책 두 권을 가져 와서 나에게 비문을 청하였는데 대여섯 번이나 청하여 포기하지 않으므로 나는 결국 사양할 수 없었다. 그 도면과 기록을 살펴보니 동래는 임진년에 성이 함락된 후부터 140여 년 사이에 그 주변의 옛터가 무너져 백성들의 집이 되어 한 조각의 울타리를 친 설비도 없게 되었다.
공이 처음 이곳에 와서 변방의 설비가 어설픈 것을 크게 두려워하고 장마에 대비하여 보수하는 계획은 시절이 태평하더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하여 개연히 보수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날 밤 바깥사람 모르게 미복(微服)으로 몰래 나가 성터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왔다. 드디어 계획을 확정하고 장계(狀啓)를 띄우니 당시의 관찰사 조공(趙公)[조현명(趙顯命)]과 뜻이 잘 맞아 그것을 도와주었다. 신해(辛亥)년[1731] 정월 정묘에 성터를 측량하고 일을 분담하여 각 패장(牌將)에게 맡기니 기기와 물자 및 인력은 오래전부터 비축해 두었던 것이라 한 가지도 모자란 것이 없었다.
이에 바람 만난 불처럼 명령을 내리니 감히 거역하는 자가 없었다. 땅을 파니 해골이 쌓여 있었고, 옆에 화살촉이 있었으니 임진왜란 때 전사한 병사들이었다. 종이와 베로 염을 하여 관에 넣어 제사를 지내고 묻어 주었다. 그 후에 발견된 해골은 모두 이렇게 해 주었다. 날마다 일하는 곳을 돌며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의 작업을 살펴 벌할 것은 조금도 늦추지 않고 상줄 것은 반드시 상을 주었고 술과 음식을 먹이고 돈과 베를 아낌없이 주었다. 그래서 장수와 병사들이 다투어 힘을 내고 기뻐 뛰어다니며 모두 사력을 다하였다.
그해 4월 성이 완성되고 5월에 성문이 완성되었으며 7월에는 문루가 완성되니 공사를 시작한 지 백여 일 만에 견고하게 우뚝 솟은 성이 마치 귀신이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둘레가 2,280보(步)로서 8리(里)[약 3.14㎞] 정도 되고 높이가 수십 자가 되었으며 길이는 전보다 길어졌고 돌도 모두 새 것을 썼다. 일꾼 5만 2,000명, 쌀 4,500섬, 베 1,550필, 돈 1만 3,000냥을 썼는데 모두 공이 낸 것이니 정말로 백성에게 걷은 것도 아니고 국고를 축낸 것도 아니다.
공사를 다 마치자 장수와 병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고 돈과 곡식을 넉넉히 나누어 주었으며, 네 곳의 장교들에게 각기 문루에 술자리를 설치하고 음악을 연주하게 하여 마음껏 놀게 하였다. 8월 기유에 잔치를 열어 낙성하니 관찰사 조현명 공과 좌병사(左兵使) 이복휴(李復休) 공, 그리고 여러 고을 수령과 각 진(鎭)에서 모두 와서 모였다.
얼마 후 또 성을 지키는 데 양식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해서 따로 조미(租米) 4,000여 섬을 준비하여 창고를 설치하고 ‘수성창(守成倉)’이라 이름을 붙이고 군대가 필요할 때 쓰게 하였다. 부지런하고 민첩한 무인 5명에게 그 일을 맡기고 급료를 주었으며 특별히 수첩 군관(守堞軍官) 200명을 뽑아 부역을 덜어 주고 성을 지키게 하였다. 시설이 견고하고 오래가지만 그래도 무비(武備) 때문에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해서 읍의 서쪽 몇 리 되는 곳에 서재를 세워 ‘시술재(時述齋)’라 이름을 붙이고 읍의 자제들이 공부하는 곳으로 삼으니 가르침에 요령이 있었고 음식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다.
공과 같은 이는 근본이 되는 것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나는 책을 덮고 탄식하며 말한다. 지혜로써 계획을 시작하였고 용단으로 일을 결정하였으며 은혜로써 무리를 모았고 검약하게 재물을 모아 나라 일에 썼으니 몸은 한때 수고로운 일을 맡았지만 나라 위해 천백 년의 굳은 방비를 도모한 것이다. 무비를 갖추고 나서 문교(文敎)로 근본을 돌려놓았으니 이 한 가지 일에서 모든 것이 아름답게 되었다.
지난날 경연 자리에서 이야기된 것은 그중 한두 가지 뿐이었다. 손순(孫順)이 임금의 포상을 받을 때, 임금이 ‘나는 이제 남쪽을 근심할 것이 없다’고 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그 후에 호서 절도사로 나아갔고 승정원을 거쳐 동도(東都)의 책임자가 되었으니 이유가 있다. 숭정 기원 후 92년 을묘[1735] 10월 일 세움. 건륭 을유[1765] 가을 농주산에서 이전해 세움. 감관 박사연, 좌수 이중열, 색 김응윤, 후에 경진[1820] 가을에 이전해 세움. 도감 정상언, 좌수 신태규, 감관 장우일[承訓郞行黃山道察訪 金光岳 記 幼學 宋光濟 書 通訓大夫行玄風縣監 兪宇基 篆 上之九年 癸丑冬 光岳忝居堂后 因得入侍筵席 有重臣 於上前畫平陽築城事曰 若如鄭彦燮之築東萊城事 聽守臣自爲則 不費國廩 不彈民力而 事可成矣 光岳謹書日記 藏之院中 其明年春 爲丞黃山時 得接見萊人 萊人稱鄭公治績多赫赫焉 有萊儒宋生光洵 携築城事蹟二冊來 要余作碑記 其請至五六而不捨 余竟不能辭 按其圖記 盖萊州自壬辰城陷 百四十餘年之間 其周遭舊址 夷而爲民居無復一片藩蘺之設 公始至 大懼邊圉之疎虞 而陰雨綢繆之策 不可以時平而忽也 慨然有意於修治 一日夜 以微服潛行 周覽城址而還 外人不知也 遂定計 封發狀啓 時則觀察使趙公 議以克合 助其成之 辛亥正月丁卯 尺量城基 分定各任牌將 其器機物力 宿已儲備 無一之不給焉 乃發號出令 烈如風火 無敢違拒者 其開基也 有積骸 傍帶箭鏃 盖壬亂戰亡士也 斂以布楮 納之櫃 致祭以□之 後有骸骨發者咸如之 日巡役處 課其勤惰 罰不少貸 當賞必賞 饋以酒食 賜以錢布 棄若土芥 由是 將士爭奮 歡근踊躍 咸致死力 厥四月城成 五月城門成 七月門樓成 自始役百餘日 而屹屹堅城 若神施而鬼設焉 周回二千八百八十步 爲八里許 高可數十尺 袤過於舊而石皆用新 用役丁五萬二千人 用財米穀四千五百餘石 布一千五百五十疋 錢一萬三千四百餘兩 皆公所自料辦 信非剝於民 而靡於國廩者 功旣告訖 賜宴將士 優給錢穀 令四所將校 各於其門樓置酒張樂 極遊而罷 以八月己酉 燕飮以落之 觀察使趙公顯命 左兵使李公復休 諸守宰列鎭 皆來會焉 旣又謂城守不可以無餉 別備米租四千餘石 設置倉舍 名曰守城倉 以爲軍儲緩急之須 使勤敏武夫五人 主其事 給以廩料 特差守堞軍官二百人 蠲其役以守之 其所施設可固而久也 猶謂武備之不可徒修也 迺於治之西數里 建齋名曰時述 以爲邑子 肆業之所 敎導有方 庖廩有具 若公可謂知所本哉 余乃掩卷而嘆曰 智以謀始 勇以決機 惠以得衆約己聚財 而用於國 身任一時之勞 而爲邦家千百年固圉之圖 武備旣飭而歸本於文敎卽 此一事而衆美焉 嚮也筵席之所陳 特其一二之觕耳 孫順邁聖上所褒 予無南顧之憂者 豈偶爾也 旣而按節湖西 貫銀臺方尹東都有以也哉 崇禎紀元後 九十二年歲乙卯 十月 日立
乾隆 乙酉 秋自弄珠山移竪 監官 朴師演 座首 李重烈 色 金應潤 後庚辰 秋移竪 都監 鄭相彦 座首 辛兌奎 監官 張宇一].”
뒷면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래 축성 시차임, 사원 다대포 첨사 권순성, 한량 김석중, 도청 출신 최성, 유학 정지제, 신구, 박계□, 책응 전 첨사 허념, 사과 이만한, 출신 채덕홍, 출신 함유일, 한량 이익태, 한량 윤숭은, 부석 도감 송동원, 사과 김상중, 좌수 박취하, 한량 김윤하, 별감 문세남, 통덕랑 최천주, 비석 도감 박취하, 사과 백상미, 감관 출신 정태희, 한량 황시백, 동소장 출신 이시첨·박진영, 도패장 겸 동문감 문유징, 출신 강상망, 남소장 유학 박민성, 패장 송두성, 도패장 겸 남문감, 겸사복 유재흥, 출신 김창하, 패장 겸 사복 서기찰, 출신 송세기·박태성, 사과 최재강, 사과 김기성, 출신 이우백, 한량 김성중, 겸사복 전명채, 사과 방진관, 사과 구세강, 판관 최석한·문중장, 겸사복 배치적·송상준, 출신 피태성, 북소장 유학 박취하, 한량 조세량, 도패장 겸 북문감 사과 이창정, 절충 홍천한, 출신 윤성임, 패장 유학 송정렴, 겸사과 김려휘, 판관 송상일, 출신 강세망, 유학 이인서, 한량 김윤진·이성렴·정원상·정재서, 사과 양수동, 한량 박태기, 서소장 유학 신□, 출신 박태삼, 도패장 겸 서문감 한량 이덕만, 출신 김중명, 출신 서후봉, 겸암문감절충 조세일, 겸사복 윤징은, 패장 유학 송규채, 한량 김치영·김만겸·송재심·문필홍, 사과 이익하·신치영·김보한, 사과 송치만, 판관 김득한·이지흥, 일소장 유학 박시한, 판관 양수부, 한량 강성지, 한량 김성일, 사과 최재곤, 한량 김설봉·안여석, 겸사복 정시화, 이소장 유학 박명채, 패장 한량 남도정, 사과 김재창, 한량 홍만택·옥명순·김차걸, 삼소장 유학 박문순, 패장 사과 최운한, 목물감 한량 김우삼, 무철감 겸사복 조관벽, 절충 안화송, 반와감 김성검, 무탄감 한서선, 각소색, 도색 강치호·신중채·윤희성, 책응색 윤희창·이우상·최동호·박치하·윤희장, 목물색 손만채, 동소색 황구태, 남소색 최만장, 서소색 황두억, 북소색 추월명, 암문색 김익하, 부석색 신여원·강흥주·오한경[東萊築城時差任 使員 多大浦僉使 權順性 閑良 金碩重 都廳 出身 崔晟 幼學 鄭之濟 申璆 朴桂□ 責應 前僉使 許捻 司果 李萬漢 出身 蔡德洪 出身 咸有一 閑良 李益泰 閑良 尹崇殷 浮石都監 宋東源 司果 金尙重 座首 朴就夏 閑良 金潤河 別監 文世南 通德郞 崔天柱 碑石都監 朴就夏 司果 白尙米 監官 出身 丁泰希 閑良 黃時白 東所將 出身 李是瞻 朴震英 都牌將兼東門監 文有徵 出身 姜尙望 南所將 幼學 朴敏聖 牌將 宋斗星 都牌將兼南門監 兼司僕 劉再興 出身 金昌夏 牌將兼司僕 徐起札 出身 宋世基 朴泰星 司果 崔載崗 司果 金起聲 出身 李友栢 閑良 金聲重 兼司僕 全命采 司果 方鎭觀 司果 仇世康 判官 崔錫漢 文重章 兼司僕 裵致績 宋尙俊 出身 皮泰成 北所將 幼學 朴就夏 閑良 趙世良 都牌將兼北門監 司果 李昌庭 折衝 洪天漢 出身 尹聖任 牌將幼學 宋挺濂 兼司果 金麗輝 判官 宋尙逸 出身 姜世望 幼學 李仁瑞 閑良 金允珍 李星濂 鄭元祥 鄭載瑞 司果 梁秀東 閑良 朴泰基 西所將 幼學 辛□ 出身 朴泰森 都牌將兼西門監閑良 李德蔓 出身 金重鳴 出身 徐後逢 兼暗門監折衝 趙世逸 兼司僕尹徵殷 牌將 幼學 宋奎彩 閑良 金致榮 金萬兼 宋載心 文必弘 司果 李翊夏 辛致榮 金輔漢 司果 宋致萬 判官 金得漢 李芝興 一所將 幼學 朴始漢 判官 梁秀夫 閑良 姜聖之 閑良 金星一 司果 崔載崑 閑良 金雪峰 安如石 兼司僕 鄭時和 二所將 幼學 朴明彩 牌將 閑良 南道貞 司果 金再昌 閑良 洪萬澤 玉命順 金次傑 三所將 幼學 朴文純 牌將 司果 崔雲漢 木物監 閑良 金禹三 貿鐵監 兼司僕 趙寬璧 折衝 安和松 潘瓦監 金成劒 貿炭監 韓瑞善 各所色 都色 姜致豪 辛重彩 尹喜聖 責應色 尹喜昌 李友相 崔東豪 朴致夏 尹喜長 木物色 孫萬彩 東所色 黃龜泰 南所色 崔萬長 西所色 黃斗億 北所色 秋月明 暗門色 金益河 浮石色 辛汝元 姜興周 吳漢敬].”
[현황]
비석 주위에 주춧돌이 남아 있어 비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내주축성비는 조선 시대 동래성 연구의 가장 정확한 자료가 되는 동시에 조선 후기 성축사(城築史)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어 조선 후기 국방사 및 지역사 연구에 가치가 있는 문화재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