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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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An old woman who have lived together with graves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
지역 | 부산광역시 남구 문현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차철욱 |
[돌산 마을의 탄생]
부산에는 죽은 자들의 공간인 무덤 사이사이로 집을 만들어 삶터로 바꾼 마을들이 적지 않다. 부산광역시 남구 문현동 돌산 마을로 불리는 곳도 그중 한 곳이다. 부산진구 전포동 방면에서 바라보면 황령산 방면으로 커다란 바위산이 보인다. ‘돌산’이라 한 것은 여기서 연유한다. 전포동 방면에서 접근하기에는 급경사인 반면 문현동에서 접근하면 상대적으로 완만하다. 돌산 마을의 정확한 행정 구역은 부산광역시 남구 문현 1동 15통이다. 이 마을의 명칭은 돌산 마을 외에 얼마 전까지 ‘문현동 안동네’로 불리기도 했다. 최근에는 문화 사업으로 진행된 벽화 그리기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면서 ‘벽화 거리 마을’로 변경되었다. 돌산 마을이나 안동네라는 명칭은 마을 사람들보다 외부인이 즐겨 부른 명칭이라고 한다.
이 마을은 1960~197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마을에는 83기의 무덤이 남아 있어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동거하는 기묘한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1971년 『부산광역시 도시 계획 백서』에 의하면 문현동 공동묘지는 문현동 산 15번지에 위치해 있었다. 이 공동묘지는 1898년경 조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1962년 당시 약 7,438㎡가 사용되었다. 문현동 산 15번지는 돌산 마을에서 동쪽에 자리한 황령산 자락이다. 아마 이곳이 공동묘지였고, 매장지가 부족하게 되자 돌산 마을 쪽으로 묘지가 확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죽은 사람이 사는 공간, 산 사람으로부터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공간에 사람이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부산시의 인구 정책, 주택 정책과 관련 있다. 6·25 전쟁, 1960~1970년대 공업화, 농촌의 몰락 등으로 대도시 인구가 급증한 데 반해, 이주민들이 생활할 수 있는 주거지는 태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1970~1980년대 부산의 주택 보급률은 50~60%대로 아주 낮은 수준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 살기 어려웠던 부산의 산동네는 빈터 없이 불량 주택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마을 아래쪽부터 사람들이 이사해 와 살기 시작했다.
오래 동안 마을을 지켜온 어르신들로부터 마을이 만들어진 과정을 들어본다. 귀환동포로 고향인 양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부산에서 살아온 공말순은 결혼 후 마을과 가까운 문현초등학교 뒤에서 셋방살이를 하였다. 어려운 형편에 방세를 부담하는 것도 어려워하던 중 이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1967년 25살] 내가 친정에 셋방살이 하다가, 문현초등학교 뒤에 세를 살았거든, 친정 엄마하고 아저씨하고 살았는데, 돈이 없으니까 세를 줄 형편이 안되는 거라…… 고무 공장 다니는데 못 먹고 살아서 기운이 없을 정도였어. 이 동네 당시 세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오니까 아저씨가 풀을 베고 있더라고. 땅이 없더라고. 이 아저씨 소개로 이웃한 상추밭을 얻었어. 무덤 옆에 상추밭을 3천원에 사서 이사 왔지. 돈이 없어 반지 한 돈 반을 팔아서 마련했어.”
땅은 마련했으나 돈이 없어 집을 지을 수는 없었다. 공말순은 제재소에 가서 나무를 사서 겨우 벽을 치고 고깔 지붕을 만들었다. 바닥에는 온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부엌도 없고 방도 없이 가운데 연탄 화덕을 놓고 겨우 실내를 따뜻하게 했다.
“3부 이다 제일 얇은 거 열장 사고 5천원, 기름칠 한 루핑 930원 주고 사고, 문현 제재소 가서 쫄대 두 다불 샀어, 쫄대 세워서 고깔 지붕을 세웠어. 복판만 내가 앉으면 맞고 옆으로는 앉을 수 없었어. 낮았어. 비는 오고, 밑에 깔기 없어 가마니데기 50원 주고 샀어, 나이롱 장판 쪼가리 하나를 구해서 그 밑에 깔고…… 방안에 물이 들어온다 아니가…… 방도 없고 구들도 없고 부엌도 없고 그랬지. 겨울에는 연탄 화덕 하나 사 가지고 겨울 되면 발이 시려 쭈그리고 앉아 있는 거라. 내가 애를 자꾸 유산을 시켰거든. 먹고 사는 게 없는데 어떻게 애를 낳아. 그때부터 다리가 아파.”
공말순이 살 무렵 주변에 세 가구가 더 있었다. 공말순이 이 마을로 이주한 뒤 그 주변으로 조금씩 판잣집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부산에서는 불량 주택 정비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부산항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시작된 판잣집 철거는 1970년대에 부산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이 마을 사람들도 해운대구 재송동 시영 아파트 입주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재송동은 부산 시내에서 보면 변두리였고, 주민들의 생활 기반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생계 활동이 곤란하였다. 입주권을 받았던 사람들은 이사했다가 다시 돌아오던가 아니면 아예 입주권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렸다. 입주권을 브로커에게 판 사람들도 있었다. 이것이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이 마을에 도시 하층민들이 많이 모였다. 무덤과 공존해야 했던 마을 사람들에게 마을은 무서운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마을에 대한 애착은 그다지 크지 않았고, 외부에서조차도 마을은 도심 내 버려진 공간이었다. 도시에서 버려진 오물들이 이 마을에 버려지기도 하였다. 1983년에 이 마을로 올라온 박덕주의 경험은 특이하다.
“전포동에서 사진관 경영하다가 오락으로 투견 등록 본부를 신설해 공인을 받았어. 투견할 자리가 없어요. 전포동에서 여기 오니까. 공원묘지라 되어 있어요. 묘는 별로 없고 뽀쁘라 나무가 많았어. 개장을 몇 개 지었는데, 무허가 철거를 해싸서…… 거기에 스레트를 이어서 사용했어. 개 먹이는 사람들이 찾아와 요 앞 유아원 자리 마당에서 투견 시범 경기를 했어.”
사람도 많지 않은 이곳이 도심에서는 기피 놀이었던 투견을 하기에 적당한 장소였던 것 같다. 투견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지금도 투견 본부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개 싸움하는 공간이지 사람 사는 공간이 아니었다. 마을이 만들어질 당시 이곳은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는 공간이었다.
[올림픽에 밀려온 사람들과 마을]
마을에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올림픽을 전후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전국적으로 부동산 투기 붐이 일기 시작하던 때였다. 도심 재개발로 도심지에 거주하던 도시 하층민들이 밀려나고 있었다. 생계 문제 때문에 외곽으로 나갈 수 없었던 하층민들이 도심 내 생활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공간만 있으면 정착하기 시작했다. 1983년 마을에 정착한 박덕주는 마을에 무덤도 많았지만 군데군데 포플러 나무가 많았다고 기억한다. 이 나무가 1987년 태풍 셀마 때 많이 넘어졌고, 이것을 구청에서 제거하면서 여유 공간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구청에서 뽀쁘라 나무 이거. 셀마 때, 이 나무가 넘어졌는데 구청에서 이 나무를 전부 잘랐어요. 빈 공간이 생기니까 집이 하나씩 둘씩 생겼지. 아시안 게임, 올림픽 때 다 지었어. 우리가 올라올 때는 무덤이 별로 없었어요. 뽀쁘라 나무의 낙숫물이 떨어져, 묘지가 없어졌지. 나무 서너 개 베면 집 한 개 지을 수 있으니까. 완전 마무리는 88년도 무렵이었어. 그 틈을 타가지고. 88 때는 경비가 허술하니까 많이 들어섰어. 우리 같은 사람이나 더 못사는 사람이 없었으면 아직도 불모지였을 거라. 셀마 태풍이 이 마을에서는 효자가 된 셈이지.”
자기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 마을이 지닌 유일한 매력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나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생활하기에는 어려운 곳이었다.
“88년에 들어왔는데, 우리도 장사하다가 안 돼 가지고, 우리 아저씨가 세화여상 경비로 있는 바람에 내가 자꾸 가자고 해서 왔어요. 그때만 해도 여기는 형편없었어요. 우리 아저씨가 그 동네 가서 못산다. 노다지 싸움하고 맨날 술 먹고 새벽이면 싸움하는 동넨데. 그래도 좋다 똥간 같은 집이라도 내 집이라 좋다고 하는데……”
동네에서 오랫동안 부녀 회장직을 맡고 있는 이춘심의 구술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내 집이라도 마련할 생각으로 이 마을로 들어오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 동네는 사람이 살 분위기가 안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항상 술 마시고 싸우는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무덤이 있었기 때문에 무섭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춘심의 말처럼 똥간 같은 집이라도 내 집이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88 올림픽으로 대한민국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되었지만,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틈을 이용하여 자기 집 한 채라도 마련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국가적인 사업과 1987년 대통령선거, 1988년 국회 의원 선거 등 국제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점에서 무허가 건물 설치에 대한 통제가 다소 완화된 덕분이기도 하였다. 이곳은 주거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민들이 누려야 할 서비스 시설, 상수도, 하수도, 전기 등의 혜택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이곳을 점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국가에 변상금을 납부해야만 했다.
“국유지, 나는 84년부터 변상금을 냈습니다. 그런데 요번에는 변상금이 불어도 너무 많이 불었어요. 프로테지 따지면, 8만 9,000원 정도 냈는데, 요즘엔 40만원. 개발된다 그래 가지고 무심코 있었는 거라. 개발된다고 해서 우리 이주비 못 받잖아요. 개발한다고…… 그래서 변상금이 많이 올랐는 것 같고. 전전 구청장인 전상수라는 여 구청장이 이곳을 공원 부지로 되어 있는 것을 2급지로 풀어서 땅값이 올랐다고 합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정부에서 내라고 하면 내고, 무허가여서 변상금 내라쿠몬 집 안 뜯길까 싶어 내고. 모르고 사는 사람이 불쌍하고, 국고 세금이나 시 행정 세금을 없는 사람이 더 잘 낸다. 백 프로 잘 낸다 아닙니까.”
박덕주를 비롯해 이곳에 이주해 온 사람들은 국유지를 점유한다는 이유만으로 부담해야 하는 변상금을 꼬박꼬박 낼 수밖에 없었다. 무허가 건물을 짓고 산다는 죄책감으로 정부의 요구를 거슬리지도 못하고 살아 온 마을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
[무덤과 어울려 지내는 할머니]
돌산 마을에 자기 집을 마련할 수 있는 땅이 있다는 이야기는 주변 문현동과 전포동 사람들의 입을 통해 여기저기로 전달되었다. 돌산 마을 주변에서 남의 집에 세 들어 살다가 자기 집이라도 마련해 볼 생각으로 올라오는 사람도 있었고, 이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친척의 소개로 이사 오는 사람도 많았다. 초창기 이주해 온 사람들 대부분은 무덤 사이로 자기 집을 지었지만, 1988년 무렵에는 집을 지어서 파는 사람도 있었고, 남의 집을 권리금 주고 사서 이사 오는 경우도 많았다.
초기에 이주민들이 올라왔을 때는 눈앞에 무덤과 나무들뿐이었다. 나무가 넘어지거나 베어내고 난 빈터나 무덤과 무덤 사이에 집을 마련하였다. 이 무렵 무덤 마을에 산다는 것은 외부로부터는 말할 것도 없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소외된 장소, 버려진 장소로 인식되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무덤에 대한 기억은 다양하다. 무덤을 밀어버리고 집 장사를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주 당시 무덤이 별로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는 무덤과 관련해 말도 끄집어 내지 못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어쨌든 이 마을 주민들에게는 무덤과 관련된 기억이 남아있고, 그 기억이 마을 이미지를 만들어 왔다. 1982년 이 마을로 올라온 김순옥이 경험한 무덤 이야기다.
“무덤에 무섭지, 딸이 다섯인데 밖에 안 나갈라캐, 망하니까 어데라도 자리 잡아 살라고 왔지. 아들 다 그 시절에 다 공부하는 시절인데 큰 딸만 공부했어. 무서워서 영감쟁이하고 같이 나가고 그랬다카이, 무서버서. 뭐 사러 가믄 내혼자서 저짜가지 델다 주믄 저저 요 밑에 마트가 사가 오믄 우리 영감쟁이 저 전화 박스 있는데 기다리고 있다 같이 오고 그랬다카이.”
자식들뿐 아니라 자신도 마을을 오고가는 것이 무서웠다는 김순옥 할머니.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무덤은 자연스럽게 마을 사람들의 일부가 되었다.
“성묘 오는 사람 있기는 해도, 처음에는 많이 싸웠어. 하코방 만들면서 무덤 무나부고, 없애부고 그랬는데. 성묘객 대신 우리가 풀을 베어주고 그러잖아. 우리가 요 몸담고 살면서, 벌초해 주지. 우리가 살기 위해서도……”
마을 사람들이 증가하자 행정 당국에서 묘지 이전을 추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 말에 이주해 온 황숙의 통장의 말이다.
“제가 들은 이야기는 그때 무연고 묘지들이 많거든요, 공동묘지. 그때 사람들이 사업하다가 실패하고, 전쟁 이후 오도갈 데 없어서, 무덤 속에 천막 짓고, 70년대 한번 이주시켰는데, 70년대 후반 들어서, 마을이 이렇게 형성되었어요. 묘지들 이장을 공고하였습니다.”
하지만 모두 이장된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는 여전히 묘지 주인들이 방문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마을 중간 중간에 83기의 무덤이 그대로 남아 있고, 비석이 세워져 있는 무덤도 많이 발견된다. 어느 할머니의 경우에는 집 안에 무덤이 있다. 무덤을 없앨 수 없어 주위로 집을 지은 것이다. 이처럼 마을 주민들에게 무덤 때문에 무서웠던 마을이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장소였기에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박덕주의 이야기에서 무덤 마을이 얼마나 마을 사람들에게 친숙해졌는가를 짐작케 한다.
“무서운 기가 없어요. 우리가 밤길을 걸어보면 무서운 데가 있는데, 여기는 없어요. 나는 여기에 개 놔두고, 저녁에 10시에 올라와도, 생전에 무서운 거는 없어요. 그런데 여기가 따시오. 그냥 따신 게 아니라, 무덤이 있어서 따시. 좋은 자린가 봐요. 그리고 무덤 있는 데가 겁이 없어요. 옛날에 모동 사이에 자면 산짐승도 안 건딘다고. 그러니까 여기가 참 좋은 자리라고 봅니다.”
[강제 철거에 맞선 할머니]
마을 주민들은 주민 등록상으로는 부산광역시 남구 문현 1동에 거주하는 것으로 분류되어 부산 시민의 자격을 갖추기는 하였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베고 자는 땅은 국유지이거나 아니면 일부 사유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국유지에 설치된 집은 모두 불법으로 규정되어 동민으로서나 시민으로서의 어떠한 권리도 누릴 수 없었다. 주민들은 끊임없이 불법 주택을 만들고, 국가 권력의 최말단인 동사무소는 불법 주거지 거주자를 추방하기 위해 철거 작업을 강행하였다. 주민들은 안정된 주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철거 공무원들의 위협에 다양하게 대응하였다.
부산시의 무허가 건물 철거 정책은 1980년대에 한창 진행되었으며 남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철거는 1988년을 기준으로 급격히 줄었는데 정치적인 요소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철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철거는 동사무소에서 정기적인 단속에 의한 경우도 있었으나, 내부 또는 외부 고발자에 의한 경우도 많았다.
철거에 대응하는 주민들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저항이었다. 온 식구들이 철거 공무원에 맞서 철거를 방해하였다. 그리고 안면 있는 담당 공무원과의 타협도 존재하였다. 친하게 지내는 공무원이 철거하기 위해 마을에 오면 자리를 피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 공무원은 적당히 건물을 훼손하고 사진만 찍어서 보고하였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의 개인적인 대응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주민 대표를 앞세운 조직적인 대응도 있었는데 여기서는 마을의 공식적인 대표인 통장보다는 마을의 유력자를 앞세우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타협을 봤던 담당 공무원이 피해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김순옥이 이 마을에 집을 짓고 정착하기까지 철거에 대한 경험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 집도 한 열 번 뽀아졌어요. 낮에 뽀고, 밤에 서가 있는 기라. 벌금 300만원 내고 과태료 80만원 내고, 집 진 사람들 다 벌금 과태료 내었지. 술 내면 괜찮은 것도 없었어. 동회장이 오면 부수고, 그라고 나면 세우고 그랬어요. 사람이 살아야 되니까, 때도 못 끼려 먹는데 어짤기고. 주민 등록은 오자말자 다 했다. 무허가라도 산다 카는 증명은 다했다.”
철거반의 철거를 피할 수 없었던 주민들은 공적인 절차에 순응하면서 계속해서 파괴된 집을 수리하고 새로 만드는 방법 외에는 길이 없었다. 가능하다면 행정 관료와 약간의 타협으로 조금 비켜갈 수 있을 뿐이었다. 오랫동안 마을 통장을 한 김수철이 철거당하는 집들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심정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무허가로 지었는데, 누가 신고했는지 몰라도, 그거 뽀아진 거 쳐다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지. 항의도 못하고. 구청 직원도 와서 일부만 뿌고 가지. 경찰서 가서 조서 받고, 검찰에 넘어가면 벌금, 평수에 따라서, 그거 내야 하고. 구청에서는 과태료 나오고. 그걸 다 내야만 조용해져요. 그걸 못 내면, 펑펑 울고 하는 사람 많아요. 31번 당한 집은 묘 주인한테 아무리 사정해도 소용없어요. 알고 보면 자기들도 무허가예요. 자기들 먼저 들어왔잖아요. 처음에 확 밀어부고, 두 번째는 반만 밀고, 세 번째는 그냥 갈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창문만 뽀고 가고.”
31번이나 철거당한 집도 있다는 소문은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다. 무덤 주인이 행정 당국에 고발하면 행정 당국은 어쩔 수 없이 시늉이라도 내어야만 되었다. 횟수가 더하면서 철거 강도가 약해지는 것을 볼 때 철거반과 마을 주민들 사이의 미묘한 감정 변화도 읽을 수 있다. 무허가 철거 단속이 잠잠해진 것은 1988년과 1989년을 지나면서였다고 한다.
계속되는 철거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동사무소나 구청 등 직접 철거를 담당하는 공무원에게 사정하기도 하고, 부탁도 하고, 안 되면 술을 사기도 하면서 위협에서 피해가려고 하였다. 이런 무마 작업은 당사자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행정 당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대응하기도 하였다.
[사람 사는 마을 만들기]
시민이고 동민이면서도 전혀 권리를 누릴 수 없었던 주민들은 스스로 권리 찾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무허가 시설에 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가장 힘든 것은 전기, 상수도, 도로 등과 같은 간접 시설이었다. 마을의 중심 도로는 자전거가 다닐 정도로 좁은 길이었다. 그리고 황토 흙이어서 비만 오면 장화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마을 길을 확보하고 포장을 하는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의 참여를 확인할 수 있다. 마을 통장을 오래하고 마을 시설을 개선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김수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에는 차가 들어올 수 없는 길이었는데, 비용은 처음에 할 때는 여기를 지나서 저 안쪽에 빌라를 지어야 하는데, 짓기 위해서 지나가는 사람이 포장을 해주고, 현대 아파트 지을 때 가서 농성해서, 이 포장해 달라고 했어. 그 목화 빌라를 지을 때 여기를 통과했거든요. 그 사람들이 레미콘 불러줬고, 일은 주민들이 다했지. 주민 동원은 그냥 나오라면 부역 형식으로 다 하였어. 자발적이었지. 안 나오면 할 수 없고, 다 나와요. 여기는 골목골목에도 포장했는데, 포장하기 전에 옛날에 보도블록 깔았는데, 우리가 남구청에 가서 얻어와 가지고, 전부 다 자발적으로 했어. 일당 없어요. 여기는 돈 내어 놓을 사람도 없고, 몸으로 때우는 거지.”
마을의 간접 시설임에도 행정 당국에서 지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을 대표들이 인근 공사장을 찾아다니거나 마을 사람들이 농성을 하면서 필요한 자재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필요한 노동력은 마을 사람들이 직접 몸으로 때웠다. 일당을 마련할 돈도 없었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자기 마을을 만들기 위한 자발적 참여였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은 비좁은 골목길에 차가 들어오게 하기 위해 자신들이 점유하고 있는 땅을 조금씩 양보하기도 하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전기를 들여오는 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실감케 할 정도로 다양한 경험이었다. 무허가에 살았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전기를 공급받을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도전(盜電)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약 30년 전 인근 전포동의 개인 주택에서 땅속으로 선을 묻어 전기를 끌어왔다. 비가 오는 날이면 합선을 일으켜 위험한 경우도 많았다. 도전한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져서도 안 되고, 전기를 보내주는 개인에게도 제대로 전기세를 납부해야만 전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마을 사람들의 단합이 중요하였다. 마을에 전기를 끌어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김수철 통장의 이야기다.
“30년 전에는 개인 집에서 전기를 빼가지고, 땅속에 묻어가지고 왔는데, 비가 오면, 합선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저쪽에서는 퓨즈가 나가니까 돈을 줘도 안 줄라 했지. [도전한 요금에 대해] 가구당 똑같이 분배했어요. 굉장히 단합이 잘되었지. 통장이 촌장 같은 역할을 했어요. 주민들과 의논해서 합시다 하면 다 동의했지.”
마냥 비공식적으로 전기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전기를 들여올 방법을 강구하였다.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사람들은 전기를 끌어다 주겠다는 브로커에게 속아 비싼 가격을 지불하기도 하였다. 브로커와 결탁된 마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마을에서는 전기 문제로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결국에는 지역구 국회 의원 등 정치인들의 힘을 빌리면서 가능해졌다.
“전기가 완전히 들어오기는 한 20년 됐지. 그는 제[김수철]가 혼자 한기 아니고, 같이 하던 사람 돌아가신 분도 있고, 그때 제가 통장할 땐데, 국회 의원 유흥수 의원이 힘을 많이 써줬고, 처음에는 사기 당했고, 한전 브로커한테. 피해도 좀 보고 했어요. 한전에서는 도전이라 하고, 실제로 우리는 브로커한테 돈을 주고 합법적인 것인 줄 알았지. 벌금이 열 배였어요. 유흥수 의원이 힘을 좀 쓰고 해서 한전에서 삭감했어요. 그러고 나서 정식으로 한전과 이야기해서 당시 18만원씩인가 해서 합법적으로 들어왔지. 그 전에는 50만원 달라 60만원 달라, 여기는 설치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로 가격이 비쌌어요. 무허가니까 못한다고 했지. 실제 행정력은 미쳤지만 집은 무허가여서 전기와 수도가 들어올 수 없었어.”
전기가 완전히 들어온 지는 20년 정도 되었으나, 전기를 들이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고단했는가를 통장 김수철의 이야기에서 짐작하고도 남는다. 도시 생활의 기본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전기와 수도가 없는 마을,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시민으로서 권리를 찾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수도를 허가받는 데도 단합된 힘을 과시하였다. 수도가 들어오기 전에 마을 사람들은 오늘날 현대 아파트 옆에 있던 우물물을 이용하였다. 장사를 하던 김순옥은 새벽마다 우물물을 사용하기 위해 가파른 언덕길을 왕복해야 했다. 물 긷는 줄이 언제나 길게 늘어서 있었다. 마실 물이 없다는 게 얼마나 불편한 것인지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다가 1990년 전후 해 지하수를 팠다. 지하수를 파는 데도 마을 통장을 비롯한 사람들의 단합에다가 주변 독지가들의 도움이 보태졌다.
“옛날 지하수 팔 때는 고생 많았어요. 지하수 팔 때 항상 감시하는데…… 지하수는 새마을금고에서 경비를 대어 주었어요. 그때 우리 주민들이 돈 내준 거는 없고. 새마을금고는 이익금을 마을에 돌려줘야 하는데, 이사장님이 협조를 많이 해줬어. 이사장님이 최고 많이 도와 주셨어요.”
지하수를 팠지만 마을 사람들이 충분히 사용할 만큼은 아니었다. 김수철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가 물을 균등하게 집집마다 분배하는 일이었다. 물이 모자라다 보니 밤에 몰래 물을 훔치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 김수철은 물탱크를 지키면서 밤을 새기 일쑤였다.
“수도 들어올 때 가장 기뻤어요. 내가 지하수 물 관리를 근 10년 했어. 많은 집들을 24시간 풀로 줄 수 없으니까, 오늘은 저녁에 1시간, 오늘은 어느 집 라인, 꼭지를 틀고, 또 내일은 어느 집. 물당구에서 누워 자고 그랬어요. 와서 틀고 하니까. 물 도둑이 되는 거죠. 그걸 지켜야 되는 건데. 그 뭐 술 한 잔 묵다가 집에 가면 혼자 지켜야지. 도로가 나면서 지하수가 묻히게 되었어요. 그걸 안 해주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대우건설에서 길을 냈는데, 그 가가지고, 들은 척도 안하더라고. 이사장하고, 권영수 계장 앞장서서 갔지. 지하수를 다시 팠어. 사흘 팠는데 물이 안나오더라고요. 그때 마을 사람들은 야외 놀러 갔고. 나는 물 때문에 못 갔어요. 차가 가는데 눈물이 나더라고. 혼자 뭐하노. 물 파는데 물이 펑펑 나오는 기라. 그런데 놀러간 시간부터, 차가 오는데 물이 터져 붓는 기라요. 그때 제일 기뻤어요. 눈물이 펑펑 쏟아졌어요. 제일 기뻤어요.”
지하수 물이 나오지 않아 마음고생이 많았던 김수철은 마을 사람들 모두 놀러간 사이에도 같이 가지 못하고 물을 팠다. 그 사이 물길이 터져 올라오는 것을 보고 혼자 눈물을 흘리며 좋아했다. 지하수 물을 먹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철형 새마을금고 이사장과 유흥수 국회 의원의 도움으로 수도를 합법적으로 넣을 수 있었다. 1998년에 마을 공동 수도가 만들어지고, 2001년이 되면서 개인 가정마다 수도가 들어오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아지트, 경로당]
돌산 마을에는 경로당이 두 곳 있다. 지금은 나이 드신 할머니들이 화투를 치면서 하루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그곳에서 마을의 대소사가 주로 논의되고 결정되었다. 경로당이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다. 박덕주의 증언에 따르면 2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김수철 통장이 풍물패 조직을 제안하였다. 농악하면 수익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농악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 박덕주가 앞장서고 조금씩 배우면서 농악을 했다.
“이 마을에 옛날에는 풍물도 치고 그랬어. 한 5년 했을 거예요. 앞전의 경로당을 새로 지었어. 그때 당시 풍물 쳐가지고 경로당 지었지. 제가 통장 할 때 구민 체육 대회 할 때, 풍물놀이가 문현 1동 대표로 나갔어. 지금도 장비가 다 있어요. 대나무 깃대도 들고 가고. 이유는 모르겠는데, 안하더라고요. 주도적으로 하던 사람들이 몇 사람 돌아가셨어요. 제 먹고 살기 바쁘고 그러니까. 자연히 조금씩 소멸되었지.”
마을 풍물놀이는 명절 때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중요한 놀이였다. 기금을 모아 경로당도 짓고, 지하수 수중 모터도 사는 등 경제적으로도 마을에 유익하였다. 지역의 행사에서 동 대표로 나갈 정도의 실력이었다. 농악은 무엇보다도 남들이 관심도 가지지 않는 공간에 살아가는 자신들을 드러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경로당은 마을 회관으로 활용되었다. 마을의 중요 대소사를 여기서 의논하였다. 마을의 공론장이었던 셈이다. 앞서 언급한 마을의 중요 사업이었던 전기나 지하수 건설과 같은 문제는 이곳 마을 회관에서 여론이 형성되었다.
마을 회관을 이끄는 사람은 통장이었다. 통장은 행정적으로는 국가 행정 기구의 최말단 조직이었으나, 마을 주민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다. 김수철 전 통장은 마을에서 통장은 ‘옛날 촌장과도 같다’고 말한다. 마을 일은 물론이고 가정에서 벌어지는 길흉사도 모두 처리했다. 결혼식을 할 때에는 통장이 직접 청첩장을 돌리기도 하고, 초상이 나면 장례를 치르는 일까지 전담하였다.
[무덤 마을에서 벽화 마을로]
무덤으로 표상된 돌산 마을, 외부인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조차 버렸던 마을이 점차 사람 사는 마을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마을 사람들의 노력으로 도로가 만들어지고, 전기가 들어오고, 먹고 마실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졌다. 이 과정에서 패배주의에 빠졌던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생각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버렸던 마을을 내가 사는 마을로 바꾸려는 생각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동네가 지금은 참 잘됐어. 이 도로도[마을을 관통하는 중심 골목-필자 주]없었어. 80년대 길이 없어서 쪼가리 나무를 가지고 왔어. 주민이 돈 낼 때 동네서 처음에 자전차 길, 리어커 길, 사는 사람들이 1미터씩 들어가자 해서 이 길을 만들었어. 시나 구에서 아무것도 안 줬어. 차가 들어올수록 좋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복잡해. 지면이 낮아서, 큰 차가 왔다 가면 금이 갔거든. 벽화 마을이 생기고 나서는 좀 더 깨끗해졌어. 마을 사람들이 좀 부지런해졌어. 벽화 마을이 들어서고 나서는 덕이거든, 길이 넓어졌고, 그림을 그려 놔 놓으니까 외관상으로 좋잖아. 자기 집 앞에 빗자루 한 번 더 들게 되지.”
오랫동안 살아온 박덕주의 이야기다. 자신의 집 앞으로 지나가는 길이 마을 주민들의 노력과 양보로 만들어졌음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더 놀라운 것은 최근 이루어진 벽화 마을의 탄생이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던 마을이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면서 마을 사람들의 마을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돌산 마을이 전국의 이목을 받은 데는 황숙의 통장의 노력이 컸다. 경상남도 합천 출신으로 전포동에 살던 황숙의는 1989년 친정 오빠의 추천으로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마을에 들어와서는 서면에서 장사하면서 마을 일에는 그다지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4년부터 마을 사람들의 추천으로 지금까지 통장을 하고 있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이 경험하는 경제적인 어려움, 마을이 지니고 있는 어두운 이미지를 벗겨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많은 기부자를 확보하여 경제적인 도움을 받고 의료 지원도 받게 되었다. 무엇보다 황숙의가 이룬 중요한 성과는 벽화 마을 조성이었다.
마을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2008년부터다. 항상 마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문현 1동사무소 공무원이 벽화 그리기를 추진하였다. 부산시에서 마을 내 몇 집을 선정해 벽화를 그려 보자는 이야기였다. 황 통장은 반상회에서 마을에서 가장 전망이 좋고 외부의 눈에 잘 띄는 집을 선정하였다. 벽화를 그리는 문제를 두고 마을 사람들 사이에 찬반 논란이 뜨거웠다.
“반상회에서 제일 위에 잘 보이는 집을 선정했어요. 지금 50여 점, 그림 그리다 보니까 누구 집도 좀 해 달라. 처음 우리 동네 사람이 반대했어요. 좋지도 않은 동네를 알리려고 하노. 처음에는 엄청 반대하였어요. 사실 제가 안 좋은 소리도 들었습니다. 이럴수록 알려야 한다. 자꾸 알려서 이렇게 낙후된 동네를 개발시켜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MBC에서 30분을 다루었어요. 이 마을이 전국 최우수상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많은 교수들과 학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황숙의 통장이 가장 재미있어 하는 것은 벽화를 단순히 외부에서 들어온 미술가들만 그린 것이 아니라 주민들과 함께 그렸다는 것이다. 벽화의 내용을 단절된 그림이 아니라 주민들이 봤을 때 이야기가 있게 그리자고 합의했다. 커다란 원칙은 첫 화면에서 민들레 씨를 뿌리고 그것이 피어나는 과정을 통해 마을이 되살아나고 희망을 가질 수 있게 그린다는 것이었다. 그림을 그리지 않으려는 집들은 제외하고 동의한 집을 우선해서 그리기 시작했다. 봉사자들도 참가하고, 마을 주민들도 펜을 들고,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린 뒤 마을 주민들의 반응이 좋지 않으면 의논해서 다시 그리기도 하였다. 마을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벽화 마을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자 좋은 점도 있었고, 나쁜 점도 있었다. 그동안 외부인들의 출입이 없었던 마을에 낯선 사람들이 출현하자 마을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꼈다. 남의 마당에 불쑥 들어오기도 하고, 허가도 받지 않고 지붕에 올라가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그동안 못산다고 스스로 생각해 오던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의 속살을 드러낸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벽화는 마을 사람들에게 먼저 사랑을 받았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벽화가 예쁘다고, 그래서 마을이 밝아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해거름이면 마을 술집에서 술에 취해 서로 싸우던 모습들도 외지인들의 방문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마을도 깨끗하게 정돈되어 갔다. 어두침침한 회색빛의 마을이 다양한 벽화로 밝아지게 되었다. 그만큼 마을 사람들의 마음도 변화하였다.
벽화 그리기 사업이 성공하자 황숙의는 또 다른 사업에 도전하였다. 부산진구 전포동과 남구 문현동의 경계에 있는 돌산 공원을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 공원은 ‘돌산 공원 가꾸기 사업’으로 진행되어 2011년 완성되었다. 공원 부지는 버려진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쓰레기가 방치되어 있었고, 술병이 여기저리 뒹굴었다. 누구도 이곳에서 휴식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업으로 보기 싫던 쓰레기를 정리하고, 화장실을 만들고 운동 시설을 갖추었다. 화단도 조성하고 마을 주민들이 편히 쉴 수 있게 했다. 또 마을 주민들 사이의 만남의 공간이 만들어진 셈이다.
[또 다른 희망]
돌산 마을이 벽화 마을과 돌산 공원 조성으로 관심을 끌자, 연구자들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011년 9월 돌산 마을에서는 ‘할머니, 사진, 그리고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와 공동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연구자들과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마을의 가치를 찾아보려는 노력이었다. 그 방법은 할머니들로 하여금 카메라를 이용하여 자신이 찍고 싶은 것을 찍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마을에 살면서도 느끼지 못하던 마을의 귀한 것을 찾는 시간이었다.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교수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카메라 사용법을 가르쳐주고, 찍어 오는 사진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평생 처음 만져보는 카메라에 익숙하지 않은 할머니들이 당혹해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할머니들은 작업에 몰입하는 정도가 강해졌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신선한 놀이였다. 할머니들은 자신의 집 안에 정돈되어 있는 이부자리, 가정 도구, 마을의 골목길, 화초, 벽화, 공포의 대상이었던 무덤, 공원, 동네 사람들을 찍었다. 이렇게 해서 마을 사람들이 찍은 사진은 이야기를 담고서 부산광역시립도서관에 전시되었다. 이 사업은 결과보다는 마을 사람들과 연구자, 마을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의 소통 과정이라는 점에서 더 의미 있는 것이었다.
돌산 마을 사람들은 무덤 마을이라는 낯선 공간에 들어와 국가나 지방 자치 단체로부터 외면 받으면서도, 스스로가 자신의 삶터를 개척하고 만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