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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동의 월남 피난민 정남이 어르신의 이북 생활과 피난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36
한자 牛岩洞-越南避難民정남이어르신-以北生活-避難記
영어의미역 The life in North Korea told by North Korean defector Old Jeong Nami who is living in Uam-dong
분야 생활·민속/생활,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남구 우암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서만일

[근현대사와 함께 변화한 우암동]

우암동(牛岩洞)은 부산광역시 남구의 서쪽에 있으며, 동쪽은 대연동, 서쪽은 동구 범일동, 남쪽은 감만동, 북쪽은 문현동·대연동과 접해 있다. 예로부터 천연의 포구로 배가 정박하기에 편리한 곳이었다. 이 포구 안의 언덕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모양이 소와 같다고 하여 우암포(牛岩浦)라고 하였다. 이후 1930년대 적기만 매축 공사(赤崎灣埋築工事)[제7 부두 일대]로 이곳에 항구가 들어서고 이 마을의 상징인 소 모양의 큰 바위는 없어졌다고 한다.

우암동 일대에는 일본으로 소를 수출하기 위하여 소 검역소[우암동 우역검사소(牛疫檢査所)]와 2,400마리까지 수용하는 소막[축사] 40동이 있었다. 이곳은 해방 이후 귀환한 귀환 동포와 6·25 전쟁 이후 피난민이 몰려들면서 가옥으로 개조되었다. 특히 6·25 전쟁 시기인 1950년 말 소막을 개조하여 만든 피난민 수용소가 건설되었다. 이후 피난민 수용소 주변에 수많은 피난민들이 판자촌을 짓고 살게 되면서 마을의 모습은 현재와 비슷한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우암 제1 노인당에서 만난 정남이 할머니]

6·25 전쟁이 정전된 지 약 6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렇다고 우암동에서 피난민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암동은 피난민이 유입되어 형성된 다른 부산의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6·25 전쟁 시기의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마을이 계획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집을 지을 수 있는 자리에는 피난민들이 마구잡이로 집을 지어서 동네의 골목길은 좁고 굽이진 곳이 많다. 특히 부산의 대표적인 음식이라 할 수 있는 ‘부산 밀면’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내호 밀면’ 집도 남아 있다. 내호 밀면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함경남도 내호동에서 냉면 장사를 하던 집이 우암동으로 피난을 와 점포를 낸 집이다. 내호 밀면 집은 현재도 대를 이어서 영업 중이고, 여름이면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도 6·25 전쟁 당시 피난민이었던 분들이 현재까지도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특히 우암 제1 노인당에는 피난민뿐만 아니라 귀환 동포로 부산에 들어와 우암동에 정착하신 어르신들을 만날 수 있다. 1936년 함경남도 흥남시 도흥리에서 출생한 정남이 할머니는 1950년 12월 24일 LST(landing ship tank)[미국의 상륙 작전용 함정]를 타고 남쪽으로 피난한 월남 피난민이다. 정남이 할머니는 당시 15살이었기 때문에 피난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따라서 정남이 할머니의 전쟁 전 북한에서의 생활[교육], 거제도 피난 시기, 우암동 정착의 삶을 통하여 6·25 전쟁기의 월남 피난민과 우암동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북한 교육에 대한 기억]

“내가 피난 올 때 나이가 15살, 인민학교 5학년 이었어……, 내가 거기서 빨갱이 교육을 다 받고 왔지.”

정남이 할머니는 나이가 고령이어서 많은 것을 기억하지는 못하였다. 특히 해방 이전에는 세상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정남이 할머니의 부친은 흥남의 비료 공장에 다녔고, 해방 이후에는 간장 공장에서 근무하였다고 한다. 정남이 할머니는 2남 2녀의 둘째로 집안에서 주로 동생을 돌보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이북의 생활에서 가장 큰 기억은 북한의 초등 교육을 받은 부분이다.

북한은 ‘동방에서 제일 먼저’ 초등 의무 교육제와 중등 의무 교육제를 실시하였다고 자평하고 있고, 실제로 의무 교육제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의무 교육 기간이 확대되었다. 5년제 초등 의무 교육의 추진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전개되었던 학교 증설 사업을 기초로 1948년 북한 정부 수립 이후 1950년까지 진행되었다. 1947년 북한 학제 개혁의 결과 초등 교육 기관은 인민학교가 있었고, 중등 교육 단계에는 일반 교육 기관으로 초급 중학교와 고급 중학교가 있었다. 기술 교육 기관으로 초급 기술 학교와 중등 전문학교가 설치되어 있는 상황에서 5년제 초등 의무 교육제가 추진되었으나 6·25 전쟁으로 인하여 실제로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일제 강점기에 억눌렸던 북한 주민의 교육열과 해방 후 북한에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갈 인재의 양성이라는 정권의 요구가 결합되어 전국적으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 준비 과정에서 나타난 특징들은 이후 북한의 의무 교육 제도 확대 사업 수행의 전형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할 수 있다. 당시의 북한 주민은 학교 증설을 위하여 노력 동원, 쌀, 희사금을 내어 그 비용을 마련하였다. 이를 보면 학교 증설과 의무 교육 준비 사업의 수행 방식으로 ‘전 인민적’ 운동의 전형화라는 점을 크게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의 학교 증설 운동과 초등 의무 교육제의 추진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1945년 해방 당시 50%를 밑돌던 초등 교육 기관의 취학률이 1948년도에는 94.3%를 기록하는 성과를 보였다. 북한은 교육 확대에 대한 전 인민적 운동의 전개, 사회단체와 국영 기업 등 후원 단체들의 도움, 그리고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이 결합한 결과 짧은 기간에 큰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교육 받을 여건은 되었어. 여기 나오니까 자유스럽고, 이북에서 15살 때는 빨갱이 교육 다 받고 나왔어. 이남을 비판하고, 저기 머 이남인은 남조선인은 미 제국주의자 신세지고 살고 머 어쩌고 비판하고, 높이 들어라 깃발하고, 우리는 더구나 조깨날 때니까 몸에 배기 가지고 앞장섰어. 나도 있었으면 빨갱이 되었어. 그래 가지고 마 피난 나와 가지고 여기 나오니까 영 자유스럽던데 애들이 공부하는데 보니까네 여기는 둘이서 이렇게 서서[떠들고], 우리는 그기 이북에는 아침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이 말하졔 비틀비틀 못해요. 급장이 앞에 서 가지고 비틀비틀하는 애들을 잡아내는 거야. 따보르고 정면을 보는 거야. 여기 지세포에 와 있으니까네 초등학교 애들 보니까네 자유분방하드라고 막 지대로 말하고.”

북한에서 실시한 초등 교육은 물론 기본적인 교과 과정의 이수도 있었지만 사상 교육에 대한 부분도 철저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사상 교육과 남한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의 교육도 많이 받았다. 특히 학생을 데모에 동원하는 등 북한 주민들에게 사회주의 선전 도구로 학생을 상당히 많이 이용하였다. 교육 과정도 굉장히 엄격했다. 그러나 정남이 할머니는 이 모든 것이 장단점이 있다고 보았다. 특히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교육의 과정이 체계적이고 정돈되어 있다는 것이 북한의 교육의 장점으로 꼽았다.

[북한 문맹 퇴치 운동의 기억]

“밤에는 또 글 모르는 할매들 있잖아요. 글을 모르면은 우리가 학교에서 촌에 가서 한 사람에게 책을 읽어 보라고 한다고. 한글 모르면 무조건 문명 퇴치, 문명 퇴치, 그러니까 이북 사람들은 한글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억지로 데리고 나가는 거라. 장사 갔다 와서도 자불면서도 글을 배아야 되는 거야. 그러니까 의무 교육이 잘 되어 있더라고 이북에는. 나쁜 점은 나쁜 거고, 좋은 거는 좋은 거에요. 여기 이북 할매들이 한글 모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해방 후 북한에서는 군중의 자원적인 운동으로 문맹 퇴치 사업이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벌어졌으나 통일적인 국가적 지도가 보장되지 못한 관계로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문맹 퇴치 사업에 대한 국가의 통일적인 기준과 지도가 없다 보니 문맹자들의 학습 열의는 매우 높았지만 그에 비해 성과는 그리 크지 못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임시인민위원회는 하루바삐 문맹을 일소함으로써 인민들의 문화 수준을 향상시키고 문명 민족의 자랑을 높이고자 「동기 문맹 퇴치 운동에 관한 건」[(1946년 11월 25일 임시인민위원회 결정 제113호]을 발표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북조선에 있는 문맹을 일소할 목적으로 1946년 11월 1일부터 1947년 3월 31일까지 4개월간을 기간으로 강력한 동기 농촌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한다.

2.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교육국장은 북조선 동기 농촌 문맹 퇴치 운동을 책임 지도하여 각 도·시·면의 인민위원회 교육 책임자는 교육국장의 지시에 의하여 동기 문맹 퇴치 사업을 조직적으로 실시하여 각 리·동에는 동기 문맹 퇴치반을 설치한다.

3. 각급 인민위원회 각 정당·사회단체·문화 단체·교육 기관·출판 기관들은 농촌 문맹 퇴치 사업에 선봉적 역할을 다하여야 한다.

4. 만 12세 이상 50세 미만의 남녀 문맹자들은 의무적으로 취학하여 기한 내에 매일 2시간 이상 교육을 받아야 한다.

5. 본 운동에 소요되는 경비는 각급 인민위원회가 부담하여 각 학교·공회당·구락부·독서실 등을 교실로 사용할 것.

6. 교과서를 발행·배부할 책임을 교육국에 부담시키며, 기타 학용품을 우선 배급할 책임은 각 도·시·군 인민위원회에 부담시킨다.

7. 교원은 각 학교 교원·정당·사회단체·문화 단체들 중에서 적임자를 시·면 위원장이 지명한다.

8. 예정 과정 수료자에게는 수료 증서를 수여한다.

북한에서는 주로 농한기와 동절기를 이용하여 1946년 11월부터 1947년 3월까지 제1단계 문맹 퇴치, 1947년 11월부터 1948년 3월까지가 제2단계 문맹 퇴치, 1948년 11월부터 1949년 3월까지 제3단계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주로 교원과 공산당 활동가를 위주로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증언을 바탕으로 살펴본 결과 많은 학생들이 이 운동에 동원되었고, 기간도 농한기뿐만 아니라 농번기에도 시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문맹 퇴치 운동도 의무 교육제와 마찬가지로 북한 인민에게 현 북한의 장점을 선전하기 위한 도구였을 지도 모른다고 정남이 할머니는 생각하였다.

[흥남 철수와 거제도 피난 생활]

경상남도 지역에 거주하는 월남 피난민의 대부분은 해상으로 이동하였다. 특히 흥남 철수 시 약 15만 명의 피난민이 경상남도 지역으로 피난하였고, 그들의 대부분은 첫째 피난지 거제도에 정착하였다.

피난민이 월남하게 된 동기는 사상, 정치적인 이유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폭격과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연합군이 마을을 소개(疏開)[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함]하였을 때 이북의 주민들은 특별한 저항을 하지 않고 연합군의 후퇴와 함께 피난하였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피난민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자 정부는 피난민을 제주도, 거제도 등의 도서(島嶼)[크고 작은 온갖 섬] 지역으로 분산 배치하였다. 특히 경상남도에서 가장 큰 섬인 거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우선 피난민 수용소의 건설이 어렵기 때문에 유휴 건물, 공장 등을 징발하여 피난민 수용소로 사용하였다. 이후 거제도의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피난민 수용소를 확장하여 당시 계속 몰려드는 상당수의 부산 지역 피난민을 거제도에 유치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노력은 대규모 월남 피난민의 유입으로 더욱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 오는데 배에서 물이 올라온다 해서 소동이 났다. 한 번 배에서 물이 올라온다고 해서 사람들이 살라고 배 위에 올라가고 그랬어요. 그런데 별 일이 없었어요. …… LST 타고 왔어요. 차도 싣고 그런 거. …… 사람들이 가득 찼었지. 배 2층, 3층에도 있었어, 몇 천 명이 타고 왔어. 저 위에서 내려온 사람들까지 몰아서 한 배 타고 왔는데.”

흥남 철수 작전은 6·25 전쟁 기간 중 가장 많은 수의 월남 피난민을 피난시켰다. 흥남 철수 작전은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 동안 동부 전선의 미군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을 흥남항에서 피난민과 함께 선박 편으로 안전하게 철수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1950년 11월 30일 동해안 깊숙이 북진해 있던 국군과 미군은 미군 제10군단장 아먼드 소장으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았다. 이때 국군 수도사단은 함경북도 청진까지, 미 7사단과 해병 1사단은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인 혜산진까지 진격해 있다가 중국군의 공세에 밀려 작전상 후퇴를 시작하였다. 중국군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작전 기지인 흥남으로 후퇴하였다. 12월 초까지만 해도 미군들도 이곳에서 철수하지 않고 흥남을 중심으로 한 교두보를 만들어 재진격의 발판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12월 10일 유엔군 사령부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면서 미군과 국군은 24일 흥남에서 철수하였다. 흥남 철수 작전의 공식적인 결과는 국군 제1군단과 미군 제10군단의 병 10만 명과 차량 1만 7,000대, 피난민 약 10만 명과 35만 톤(ton)의 군수품을 안전하게 동해상으로 철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피난선[LST]에 승선하려는 피난민은 약 30만 명이었고, 그들 중 15~20만 명이 LST에 승선하였다는 증언이 나올 정도의 대규모 피난이었다. 또한 정부의 정책에 의해서 부산에서 소개된 상당수의 피난민이 이미 거제도에 있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거제도의 피난민 약 8만 명 보다 훨씬 많은 수의 피난민이 거제도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수용소 어장막에 여여. 지금 말하면 멸치 잡는 어장막에 안 있습니까. 거기 피난민이 어디 갈 데가 있나. 집이 있나 어디 있나. 어장막에서 막 이만한 어장막에서 단체로 막 집어넣는 그라. 몇 세대 몇 세대 막이래 가지고 가마데기[이불 대용] 이만한 게 하나씩 이래 가지고 주면 한 세대 이 가마데기 하나에서 살아. 식구 많으나 적으나 이만한 거 하나 주데. 그거를 막 하나씩 주가지고 서너 너덧 식구씩 잤을 꺼야 어장 막에서.”

경상남도로 유입된 대부분의 월남 피난민은 해안을 통하여 들어왔다. 그 중에서 거제도 피난민은 장승포항, 옥포항, 고현항 등을 통하여 첫 발을 내딛었고, 장승포초등학교를 비롯하여 임시로 수용된 이후 거제도 각 지역에 설치된 피난민 수용소로 이동하였다. 이때 많은 수의 월남 피난민이 장승포, 옥포, 고현, 거제읍, 외포리, 지세포 등지에 설치된 피난민 수용소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거주하였다. 정부는 어느 정도 월남 피난민을 예상하고 수용소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피난민의 수가 너무 많았다. 피난민 수용소라고 하지만 시설이 잘 갖추어진 것은 아니었다. 부산과 마찬가지로 적산 가옥, 공장, 학교, 해변가의 천막이 고작이었다. 당시 거제도에는 약 5만 명의 피난민을 수용할 시설밖에 없었다. 그러나 10만 명 이상의 월남 피난민이 한꺼번에 몰려든 것이다. 주로 군용 텐트로 만든 수용 시설이 모자라 정부가 지정한 지역의 논두렁이나 산기슭에서 노숙하는 사람도 많았다. 따라서 많은 수의 피난민이 어장막과 가마니를 이용하여 최소한의 거주가 가능한 시설을 자체적으로 지어 살았다.

“그런 거는 없었어요. 우리는 지세포 바닷가 어장막에서 바로 바다 여기가 집이라면 바로 앞이 바다거든. 그래 가지고 여기서 피난 와 가지고 그릇도 하나도 안 가지고 왔지. 밥해 먹으라고 하니까 요만한 깡통 하나 주서 가지고, 그거 가지고 요만한 도리 이렇게 그 떼고 그 깡통에다가 안량미 쌀 그것도 숟가락이 없어 가지고 섭조개 가지고, 이 새까만 섭조개라[우리말로 매시] 그래요. 그거를 주워 다가 엄마는 애기 보고 내가 심부름 15때 내가 심부름 다 하고 그 바닷가에서 섭조개 주서 가지고[담치 껍데기], 담치 껍데기 그거 주서다가 깡통에다 밥을 안량미 쌀에 나무는 없어 가지고, 얄궂은 종이 주서 가지고 밥이 위에는 설고 밑에는 타고, 당시에는 맛있더라고 당시에는 배가 고프니까. 그래 가지고 한 1년 지나가지고 아버지가 마 옛날에 농사 좀 지어 봤는가 보드라고. 그래 가지고 그 집에 가서 물어보니까 머슴 좀 써 달라고……. 아직도 그 집이 있어, 그래서 한 번 찾아 갔어. 이제 영감, 할매는 다 죽고, 아들이 하나 있는데, 작은 아들은 죽고, 큰 아들이 그때 논에 가고 없드라고. 만나서 술 한 잔 받아 줄라고 했는데 없드라고, 우리 살든 집은 흔적은 있어. 거기에 원 집에 주인은 있어, 다 죽고 웃데 사람 3세 2세가 살고 있더라고. 내가 가면 제2의 고향이라고. 내가 환갑 때 친구 3명이서 그 집에를 갔거든. 장승포에서 차를 돌아가지고 제2의 고향에 가 보니 그때 살던 흔적이 있더라고, 달라지기는 많이 달라졌다라고.”

물론 최소 생활을 영유할 수 있도록 모포와 식량, 의약품은 잘 보급되었다. 서울에서 온 병원 의료진, 시설 등을 거제도에 위치시켜 전염병 예방 및 피난민의 건강을 관리하였다. 그러나 이북에서 피난 나올 당시 긴박한 상황 속에서 피난길에 오르다 보니 생활품을 거의 가지고 나오지 못하였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숟가락이 없어서 홍합껍질로 대신하였고, 미군 보급품으로 들어온 철제 깡통을 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래 가지고 아부지가 막 이래 가지고 안 되겠다 해 가지고, 먹고 살 일이 영 머 식구들도 있제 해 가지고, 막 먹고 살 일이 곤란하거든 쌀 거 조금 배급 준 거 가지고 되요. 그래 가지고 아버지가 나무집에 머슴으로 들어갔어[옆에서 –웃으면서- 머슴이래 머슴이지. 그 잘 된기라] 그래 가지고 머 참 아부지도 그 다음에 한 1년 고생해서 아버지가 생계를 벌어 가지고 자식 너이 오빠가 그 당시 18살, 내가 15살 우리 여동생이 백 일 되서 나왔고, 남동생이 6살 땐가 해방되니까네 아마 6살 때 나왔지 싶어. 그 정도 되었나.”

당시 피난민 수용소에 식량이 안정적으로 공급을 받고는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생활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상당수의 피난민이 장승포항, 옥포항, 고현항 등의 부두에서 좌판을 벌려 쌀, 고무신, 광목 장사를 하거나 솥을 걸어 놓고 국밥, 국수 등을 팔았다. 또 포로를 상대로 장사를 한 피난민도 있었다. 포로 수용소 철조망 너머로 먹을 것을 넘겨주면, 포로들은 옷가지나 모포를 던져 주었다. 피란민은 포로를 표시하는 ‘PW(Prisoner of War)[전쟁 포로]’라는 글씨를 지우고, 국방색을 탈색한 후 시장에 내다 팔았다. 상당수의 피난민이 농가에 의탁하여 농사를 지었다. 이것도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부산으로 가고자 하였다. 특히 1952년 4월 이후 정부가 실질적으로 피난민에 대한 구호를 점차적으로 줄이기 시작하면서 거제도의 월남 피난민은 대거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이동한 월남 피난민은 부산에서 노숙하면서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부산 우암동에 정착]

“내가 16살 때[1952년] 거제도에서 나왔으니까 부산에 처음 와서 여기 적기에 왔어. 우암동에, 여기 산 밑에 안 있어요. 거기서 살았어요. …… 수용소 있었는데 우리는 수용소에는 안 갔어요. 여기에 땅이 있어서 거기에 하꼬방을 짓고 살았어요. …… 왜 몰라 우리 부모들은 수용소 안 가려고 판잣집을 지었더라고. …… 보급은 하나도 안 받았어요. 어머니는 장사하고, 아버지는 공장 나가고…… 시장이 있었지, 범일동 시장도 있고. …… 여기 와서는 나라의 힘을 빌린 거 없어요. 그때 배급이 조금 나오기는 했어 안량미. 거제도 있었을 때는 배급이 있었는데 여기 와서는 배급이 거의 없어서 우리 힘으로 먹고 살았지.”

중국군의 참전으로 늘어난 피난민을 구호하기 위하여 정부는 전쟁 직후 피난민 구호와는 다르게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부산의 경우 피난민의 유입을 막고, 부산 외곽 지역의 피난민 수용소에 수용하려고 노력하였다. 중국군 참전 이후 부산의 피난민 수용소는 12월 20일 무렵부터 준비하였다. 우면동의 적기, 영도구 봉래동·청학동, 그리고 대연 고개, 남부민동, 당리 등 40여 개의 수용소를 마련하였다. 부산의 수용소는 약 7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산에는 약 26만 명의 피난민이 거주하였으므로 구호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많은 피난민은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52년 4월 14일 정부는 피난민의 적극적인 귀향의 장려와 더불어 피난민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였다. 이북 출신의 피난민과 남한 내의 피난민이라 할지라도 원거주지가 격심한 전화를 입어 복귀하여도 당분간 자력으로 복구하기가 곤란하였다. 지방 출신의 피난민은 앞으로 현 피난지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피난 생활을 하여야 될 것이므로, 정부는 그들을 전면적으로 구호하기 어려웠다. 피난민 자신도 언제까지나 피난민으로서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는 것 보다 현 거주지에 정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2년 7월 정부는 구호양곡을 삭감하고 피난민 수용소로 활용하던 가건물들을 철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생활의 안정을 갖지 못하고 헤매는 수만 명의 피난민에게 구호 양곡의 대폭적인 삭감과 피난민이 살고 있는 바라크[막사]의 철거는 피난민의 생활에 큰 위협이었다. 그리고 1952년 8월 20일 미 8군은 부산시 중구 대창동 22번지에 있는 가건물 700여 호 1,036세대에 대한 철거 명령을 내렸다.

따라서 정부의 피난민 지원 중단 선언은 피난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에 정부의 구호품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피난민은 대거 유랑민화가 되었다. 부산역과 부산진역 앞 광장 그리고 시청 부근을 비롯한 부산 시내에 갑자기 노숙하는 자들이 증가하였으며, 그 중에는 환자까지 발생하여 이들에 대한 구호 대책이 요망되었다. 피난민의 유랑민화는 정부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여기 다 무허가지. 빈 땅이 있어 가지고, 여기 머 이남 사람이 있었어요. 여기 내 땅이라고 말뚝을 박아 놓고 하꼬방을 지었어요. 그래서 6식구가 살았지요. …… 재료는 어디서 구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어디서 구해 왔더라고요.”

당시 농촌에서는 일손을 필요로 하였으나, 피난민은 도시가 일자리를 얻기 쉽다고 판단하고 무작정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결국 부산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적인 인구 유입으로 인하여 1953년 9월 기준 91만 명이 부산에 상주하였다. 이후 계속 인구가 늘어나자 부산 토성동, 중앙동, 남포동, 아미동 일대에 판자촌이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대부분의 피난민이 그러했듯 부산으로 이주한 월남 피난민 역시 부산의 주택 부족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부산의 주택 부족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위 ‘하꼬방’이라고 하는 판잣집을 짓고 살아야만 하였다. 이러한 판잣집도 형편이 좋은 사람의 몫이었다. 대부분의 피난민은 돈도 없는 데다 자재도 품귀 상태라 주로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수위 ‘볼박스’를 이용하여 볼품없이 집 형태를 만들었다. 이것도 여의치 않은 사람은 가마니를 엮어 다리 밑에 움집을 만들어 생활하기도 하였다.

당시 피난민 수용소에 수용되지 못한 이들의 실정은 정부의 정책 부재로 인해 더욱 궁색해졌다. 이에 부산 지역 피난민은 정부의 피난민 구호책에 기대기보다는 스스로 살 길을 찾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소중히 가지고 내려왔던 옷가지며 패물, 집기 등을 내다 팔았다. 그 결과 소위 돗대기시장[도떼기시장]이 성황을 이루었고, 골목골목에 별의별 장사가 다 생겨났다. 또한 이도저도 없는 이들은 험한 중노동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이렇게도 못하는 사람들, 특히 남편을 제2 국민병이나 혹은 먼 피난길에 떠나보낸 부녀자 층은 인육을 파는 경우도 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남이 할머니의 가족도 수용소로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고, 생계에 대한 자구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없어가지고 천주교 가서 강냉이 가루 타고 했어요. 여기 안토니오 신부인가 하는 사람이 큰 다라이에 강냉이 죽 써 주는 거 먹고 그랬어.”

1952년 이후 정부의 피난민에 대한 지원이 대폭 줄어든 상황에서 종교 관련 단체들의 피난민 구호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주로 기독교와 천주교 관련 단체들이 활동하였다. 1951년 2월 가톨릭구제위원회 대표 스완스 트롬 신부가 내한하였으며, 기독교세계봉사회의 초대 총무 헨리 D. 아펜젤러와 선교사 및 한국인 동료들은 의류를 분배하고, 피난민의 이동과 정착에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암동의 피난민들도 천주교의 도움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유사한 경우를 1950년대 말 우암동동항성당의 사례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동항성당의 독일인 신부 하안토니오 신부가 우암동의 피난민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51년 천막 교회로 출발한 현재의 동항성당은 1958년 7월 우암 2동 동항 천주교회로 설립되었다. 1959년 10월 7일 하안토니오 신부가 본당 신부로 취임하였다. 또한 일본을 거쳐 들어온 많은 외국인 수녀로 구성된 프란체스코회 수녀들이 가난과 질병을 구제하고 선교하는 데 앞장섰다. 하안토니오 신부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가난했던 지난날, 마을의 주민을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과 임산부를 돌보고 구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하안토니오 신부는 지체 장애아를 포함한 일곱 명의 고아들을 사제관에서 키우며 자식처럼 돌보아줌으로써 그들에게 재생의 희망을 안겨 주었다.

또한 1977년 봉생신경외과 김시묵 목사와 함께 가난한 산모들을 위한 조산원을 열었으며, 집도 가족도 없는 노인들을 위해 모금 운동을 벌여 이들을 보살펴 주기도 하였다. 1964년 11월 15일에는 우암 2동에 6,600㎡ 대지 위에 건물 면적 1,650㎡의 ‘사랑의 집’을 완공하였다. 이 ‘사랑의 집’은 가난한 이웃을 도우며 학습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증언과 사례의 유사성을 살펴볼 때, 하안토니오 신부의 선행 시기를 착각하여 6·25 전쟁 기간 중이라고 증언을 한 것인지, 개별의 사례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우암동의 피난민이 천주교의 지원을 받은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전후 우암동에서의 생활]

“특별히 이북 사람이라고 해서 괄시받고 그런 거는 없었어요. 머 이북 사람들도 와서 못살겠다고 안 보이는 곳에서는 했을지는 몰라도.”

월남 피난민이 부산에서 차별을 많이 받았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괴정의 사례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어려운 시기에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암동이라는 지역의 특성이 피난민이 대거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지도 모르겠다.

“거제도에 나와서는 그래도 조금 나았어요. 부부가 맞벌이를 했으니까. …… 거제도에서 중학교는 나왔으니까. 나도 중학교 나와서 사무실 조금 다니다가 결혼해서 여기에 살았어요.”

할머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물어보았지만 이야기를 들을 수 없어서 전쟁 이후 생활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남이 할머니의 삶이 한국사의 한 단편이며, 우암동의 한 모습인 것만은 분명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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