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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1004
한자 天主敎
영어의미역 Catholicism
이칭/별칭 로마 가톨릭교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한 건

[정의]

부산 지역 일대에 보급된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그리스도교파의 하나.

[개설]

천주교는 유일신인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하는 종교이다. 이를 ‘로마 가톨릭교’라고도 한다. 천주교의 교리를 살펴보면, 하느님은 인간을 포함한 천지의 창조주인데, 타락한 인류를 구제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사람이 되게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성자로서, 그는 세상을 구원하고자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택하였고, 다시 부활하여 성부에게로 돌아갔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제 사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고, 이것을 간택한 12사도에게 맡겼으며, 그 최고 책임을 베드로 사도에게 위임하였다. 또한 그리스도는 성신을 보내어 그가 세운 교회를 대신 돌보고 성화케 하였다. 이렇게 천주교의 하느님은 하나이지만 위(位)는 셋이다. 이것을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비라고 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한편 성사들을 세웠다.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을 성서(聖書)라고 한다. 천주교는 물론 성서를 믿지만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성전도 믿는다. 또한 천주교는 교회 안에 칠성사(七聖事)가 있음을 믿는다. 이 칠성사 가운데 성체 성사(聖體聖事)는 최고의 성사이다. 이 성사가 미사에 집전되기 때문에 미사는 천주교인의 신앙과 신앙생활의 중심이 된다.

[전래 및 변천]

1. 조선 후기

천주교는 16세기 말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전래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천주교를 서학(西學)이라 하여 서양 문물의 하나로 간주되었을 뿐 신앙을 위한 종교로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이수광(李睟光)[1563~1628]이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소개한 이후 이익(李瀷)[1681~1763]과 그의 제자인 신후담(愼後聃)[1702~1761], 안정복(安鼎福)[1712~1791] 등 주로 남인 실학자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졌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두 주자학적인 견지에서 이를 이해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비판적인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천주교의 천당, 지옥설 등은 불교 교리와 같은 것으로 여겼고, 따라서 세상을 미혹케 하는 것이라 하여 극렬히 배척하였다.

학문적 대상이던 천주교가 종교 신앙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의 영조 말엽부터이다. 당시 정치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심하던 일부의 실학자들은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 운동에까지 이르렀다. 왜냐하면 천주교가 그 근본에 있어서 유교의 우주관과 사회관에 정면으로 충돌하여 유교의 인륜과 가부장적인 가족주의, 신분 계급주의를 배격할 뿐만 아니라 조선의 현실을 부정하는 사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권철신(權哲身)[1736~1801]을 중심으로 한 정약전(丁若銓)[1758~1816], 이벽(李檗)[1754~1785] 등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들은 1799년(정조 23) 주어사(走魚寺)와 천진암(天眞庵)에서 가진 강학을 계기로 마침내 천주교의 천주 신앙을 일으키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이렇게 싹트기 시작한 천주 신앙은 1783년(정조 7) 이승훈(李承薰)[1756~1801]이 사신 일행으로 북경에 가서 서양 선교사로부터 영세를 받고 교리 연구를 위한 서적들을 가져와 이벽과 함께 선교 활동을 함으로써 이 신앙 운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그 결과 천주 신앙이 이벽, 이가환(李家煥)[1742~1801]을 비롯하여 정약전, 정약종(丁若鍾)[1760~1801], 정약용(丁若鏞)[1762~1836] 형제 등 남인 학자와 김범우(金範禹)[?~1786] 등 중인 계급에까지 퍼져 나가면서 평신도만의 교회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천주교의 유포에 대해 조선 정부는 처음에는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교세가 점차 확대되자 정부는 천주교를 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군신부자의 의를 경시하는 소위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로 낙인을 찍고, 국법으로 엄금하는 한편 위반하는 천주교도를 사형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즉 한국의 가톨릭은 수용 직후부터 조정의 탄압 대상이 되어 교회 창설 이듬해인 1785년(정조 9)부터 한불 수호 통상 조약이 비준된 1887년(고종 24)까지 10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박해가 끊이지 않았다.

1785년에는 1784년(정조 8)에 창설한 조선교회가 발각되어 김범우가 유배당하였고, 1791년(정조 15)에는 모친상을 당하고도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살랐다는 고발로 이른바 ‘진산 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 윤지충(尹持忠)[1759~1791]·권상연(權尙然)[1750~1791]이 처형당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은 계속되는 압박에도 굽히지 않고 베이징교회 뿐만 아니라 로마 교황에게까지 거듭 편지를 보내어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교회 창설 11주년이 되던 1795년(정조 19)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1752~1801]를 처음으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1801년(순조 1) 순조 즉위 뒤부터는 조직적이고 전반적인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고, 당시 득세한 노론 벽파(老論僻派)가 종교를 빙자하여 남인에게 정치적 보복을 가하였는데, 이것이 신유박해(辛酉迫害)이다. 이로 인하여 주문모와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거의 순교하고 성서도 대부분 압수되었다. 많은 가톨릭 신자가 이러한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경상도 지역으로 이주하여 신앙 공동체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1815년(순조 15)의 을해박해(乙亥迫害)와 1827년(순조 27)의 정해박해(丁亥迫害)는 경상도 지역 천주교의 실태를 보여 주고 있다. 을해박해는 그 대상이 경상도와 강원도 지방에 거주하는 피난민이었고, 특히 전년에 일어난 심각한 기근 현상으로 인하여 가톨릭 신자들의 재산을 노린 배교자 전지수의 탐욕이 지방관을 부추겨 일어난 천주교 박해 사건이다. 정해박해는 경상도 북부 지방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여 곧 충청도, 전라도 지역까지 파급되었다. 특히 1859년(철종 10)에 일어난 경신박해(庚申迫害)는 경상도 남부 지방에까지 신자들의 활동이 활발하였음을 알려주는 의미를 지닌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시 경상도, 특히 부산과 가까운 울주군 지역에 공소(公所)[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예배소나 그 구역]가 설립되어 있었다. 최초의 공소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내관월 불당골[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이다. 공소라는 것은 신자들의 작은 신앙 공동체를 의미하는데, 때로는 그에 속한 신자들이 모이는 집회 장소로서의 강당을 가리키기도 한다. 지금도 이곳에는 천주교 신자들의 피난처 또는 공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후 양산, 김해, 기장, 동래 지역에까지 박해가 미쳐서 신자들은 많은 고초를 겪게 되었다.

2. 개항기

1866년(고종 3)에는 그 유명한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났다. 1863년(고종 즉위) 철종이 승하하자 천주교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벽파(僻派) 대신들이 철종과 함께 온건한 정책을 폈던 시파(時派)를 대신하여 조정을 장악하게 되어 천주교에 대한 강경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마침 통상을 요구해 온 러시아 세력에 대응하기 위하여 천주교와 교섭을 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천주교에 대한 직접적인 박해는 가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기를 놓친 천주교도의 대응과 청나라의 천주교 박해, 자신이 권력을 잡게 해 준 풍양 조씨(豊壤趙氏)에 대한 배려 등등으로 대원군의 태도는 급변하게 되어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박해로 당시 6천여 명의 평신도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선교사 등이 처형되었고, 이것이 병인양요(丙寅洋擾)의 발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병인박해는 부산에도 영향을 끼쳤다. 1868년(고종 5)에 일어난 동래의 천주교 순교이다. 즉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가 일어난 지 3년 후에 동래 지역의 천주교 박해가 발생하였다. 처음에는 동래 부사 정현덕(鄭顯德)[1810~1883]과 경상 좌수사 구주원(具胄元)이 조정의 명령을 받고 동래와 울산, 기장 등지로 포졸을 풀어 가톨릭 신자를 수색하였다. 1868년 동래 지역의 신자들이 일본인과 접선을 하려던 것이 발각되었고, 이때 잡힌 신자는 모두 11명인데, 그 가운데 동래에서 체포된 사람은 8명이었다. 이정식(李廷植)[요한: 1795~1868], 이관복[프란체스코], 박소사[마리아], 이삼근[베드로], 양재현[마르티노], 차장득[프란체스코], 이월주[야고보], 옥소사[발바라] 등이 동래의 사형장인 지금의 남구 광안동에 있는 부산수영중학교 위쪽 언덕바지인 장대(將臺)[수영 장대골 순교 성지]에서 효수당하였다.

요한 이정식은 동래 출신으로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선달직에 있었다. 그가 입교한 동기는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충청도 피난 신자들이 문경, 상주, 예천 등지에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이정식의 처가가 충남 홍주에서 문경으로 이주한 내력을 가진 집안이었고, 그 처는 별명이 영남 회장이라던 박요한의 누이였다. 그리고 이정식의 둘째 아들 이다두는 늘 외삼촌 집에 가 있다가 1868년 포졸에게 그의 이종사촌 장 안토니오와 함께 순교했다는 사실 등을 종합해 보면, 이정식의 입교 동기도 역시 처가인 문경 방면의 신자들로부터 감화를 받은 것 같다.

프란체스코 이관복은 이정식의 맏아들이다. 마리아 박소사는 이관복의 아내다. 베드로 이삼근은 이정식의 조카이다. 야고보 이월주는 본래는 서울 사람인데 동래에 와서 살다가 이정식과 함께 울산으로 피신 갔다가 울산에서 이정식과 함께 잡혀 동래로 이송돼 왔다. 프란체스코 차장득과 마르티노 양재현의 출신지와 내력은 자세하지 않으나 함께 처형되었다. 발바라 옥소사는 1866년 수영에서 잡혔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방면되었다가 다시 1868년 동래 포교에서 잡혀 함께 처형되었는데, 그때 그녀의 나이가 51세였다. 처형장을 목격한 이들이 전한 말에 의하면, 사형 집행 이전 사별상이 주어졌을 때 모두 정중히 꿇어 앉아 성호를 그었다고 한다. 순교자의 시체는 유족들이 1977년 오륜대 입구에 있는 한국 순교자 기념관으로 옮겼다.

그 뒤 천주교는 침체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경상도 남부에 신자의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1880년대 초에 이르러서이다. 즉 1881년에 양산에서 신자가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천주교인 우병연이 동래 왜관에 들어갔고, 이또오라는 일본인이 그에게 천주교를 배우려고 하자 그가 이또오를 대구로 데려가려고 했음이 발각되었다. 이 사건으로 우병연은 효수되었지만, 이 지역에 직접적인 박해는 가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882년을 계기로 조선 정부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서구 열강과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점은 선교사들의 전교(傳敎) 활동을 점차 유리하게 만들어 주었다. 특히 1887년 한불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자 한국 천주교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한불 수호 통상 조약의 제9관 2조인 “양 국민이 왕래하여 언어, 문자, 격치(格致), 율례(律例), 기예(技藝) 등을 학습(學習) 혹 교회(敎誨)하는데 상호 보조와 편의가 제공될 것이다.”라는 구절은 교회는 여러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폭넓은 가르침을 뜻하는 것으로 천주교의 가르침도 이에 포함될 수 있다. 또한 제4관 6조에서는 프랑스인이 구체적인 여행 목적을 밝히지 않더라도 여행을 위하여 호조(護照)[여행증명서]를 얻을 수 있다는 규정과, 프랑스인이 과실로 체포될 때 가장 가까운 프랑스영사관에 인도되어 처벌을 받는다는 치외 법권(治外法權)의 조항이 삽입되어 있었다. 이로써 프랑스 선교사들은 ‘교회’를 목적으로 호조를 발급받아 국내 각지로 여행할 수 있는 동시에 여행 도중에 조선 형법의 제재를 받지 않게 되었다.

물론 합법적인 전교 활동은 할 수 없었고, 또 수도와 멀리 떨어진 경상도의 포교 활동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여러 신자들의 순교와 활동으로 경상도의 교세가 확대되어 부산을 근거지로 한 경상도 남부가 독립하게 되었다. 이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블랑(Blanc)[백규삼(白圭三)] 주교는 다음의 이유에서 이러한 조치를 취하였다. 첫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자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었으며, 그 대상 지역이 신부 혼자 담당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한불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된 이후 개항지인 부산에서 선교사들이 자유롭게 대지를 매입하여 성당 건축을 할 수 있었으며, 외국과의 관문인 부산이 빠르게 발전할 소지가 있고, 또한 호조를 발급받는 절차를 갖지 않더라도 전교 활동을 할 수 있는 지역이라는 생각에서 본당(本堂)[주임 신부가 상주하는 성당]의 설립을 서둘렀던 것이다. 이에 이러한 임무를 조조(Jozeau)[조득하(趙得夏), 1866~1894] 신부에게 맡겼다.

조조 신부는 처음에는 부산 시내에 거처할 곳을 마련하지 못하고 절영도에 머물렀다.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초량에 본당 설립을 위한 대지를 구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오두(Oudot)[오보록(吳保錄)] 신부가 1893년에 부임하여 사제관 설립에 박차를 가하여 그 해 8월에 성체까지 옮겨 와서 모실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완공된 초량성당은 1916년 5월 범일동으로 본당이 이전되기까지 경상남도 일대의 사목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1899년 진주본당의 창설로 경상남도는 부산본당의 구역, 진주본당의 구역, 그리고 임시 밀양본당의 구역 등으로 나뉘어져 전교 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지역을 다시 현재의 교구별로 구분하여 보면, 부산교구에 속하는 부산·밀양본당 지역과 마산교구에 속하는 진주본당 지역으로 구분되었다.

3. 일제 강점기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하였다. 1911년 조선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분할 독립되어 경상도와 전라도가 편입되었고, 기존의 조선교구는 경성교구로 개칭되었다. 당시 대구교구에 속하는 본당은 부산본당을 비롯한 18개이고, 공소는 391개였다. 그리고 18개 본당 중 7개는 경상도에, 11개는 전라도에 있었는데, 경상도의 대구, 김천, 칠곡의 가실, 영천의 용평, 부산, 마산포 등이었다. 또 공소는 부산교구 지역에 해당하는 것만을 추려 보면, 부산본당의 26개 공소 중 울산, 동래, 언양, 기장, 양산 등이었다.

1915년에 부임한 페셀(Pesche)[백학로(白鶴老)] 신부는 본당을 이전하기 위하여 1916년 부산 범일동[지금의 성당 및 데레사여자고등학교 자리]에 매지를 구입하고 초량성당 대지를 매각하였다. 같은 해에 목조로 성당을 신축하고 ‘부산진본당’으로 명칭을 확정하였다. 페셀은 부산 지방의 ‘천주공교협회(天主公敎協會)’를 창립하였다. 그것은 각 공소 회장과 평신도 대표들로 하여금 평신도 활동을 조직화하고, 교회의 재산 관리를 맡도록 하는 제도였다. 그리하여 신자들에게 신용 대부의 편의를 도모하기도 하고, 기금도 마련하였으며, 각 지방에 토지를 매입하여 소작료 수입으로 재산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것은 교세의 확대와 함께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한 제도였으며, 1931년 4월 30일 해체되어 이듬해 1월 17일에 ‘부산 지방 재산관리위원회’로 변경되기까지 부산 지역의 전교 활동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해체되기까지 15년 동안 이 협회의 임원으로 활동한 사람들은 회장 최태홍, 부회장 김태일을 비롯하여 각 지역 공소의 회장들이었다. 이 임원 가운데에 등장하는 송경수(宋慶洙)는 괴정성당 설립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1926년 경주본당과 1927년 언양본당 지역이 분할되어 부산진본당은 더욱 관할이 축소되어 부산, 기장, 김해 일부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렇듯 본당의 분할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은 바로 신자 수의 증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1932년 청학동본당이 분할되었고, 다양한 자선·교육 사업에 종사하여 신자 수를 늘려 갔다.

일제가 만주 사변과 중일 전쟁을 일으켜 조선을 본격적인 병참 기지화로 만들어 나갔다. 이 무렵 외국인 신부가 연금되고 국외로 추방되는 사건이 일어나 천주교 위세에 큰 타격을 주었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획책으로 1942년 일본인 하야사까 이레네오[旱坂久兵衛] 신부가 대구교구로 임명되어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고,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체포하여 투옥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이때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투옥된 인물로는 대구교구의 부주교 박재수와 김영호, 정재석, 최재선, 권영조 신부 등이다.

일제는 이 시기에 교회 건물과 시설의 징발도 강압적으로 행하였다. 대구교구의 관할 아래에 있던 본당들 또한 이러한 일제의 착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왜관의 학교, 부산진성당 등이 그 대상이 되었다. 또 일제는 성당에 일장기를 게양하도록 하고, 국민복 착용을 명하였으며, 징병과 징용을 강요하고, 성당의 종을 헌납하도록 하였다.

4. 광복~1950년대

광복 후 교세의 확대와 더불어 성직자와 신자들의 노력으로 부산진본당에서 여러 본당이 분할 신설되었다. 즉 대청동본당[부산 중앙성당] 등이었다. 이러한 부산 교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 바로 6·25 전쟁의 발발이었다. 한국 교회 전체의 성직자, 수도자, 신자 등이 대부분 부산으로 피난을 오게 되어 부산 지역 교회는 신자 수의 갑작스런 증대와 더불어 피난 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매우 중요한 점이 바로 수도회가 이곳에 진출하여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물론 6·25 전쟁 발발 이전에 올리배따노성 베네딕트 수녀회가 부산 중앙성당에서 활동하였으며, 메리놀회 수녀들이 의료 사업을 전개한 사실이 있었지만 이 시기 여러 수도회들이 부산에 진출하여 봉사 활동을 하였다.

또한 이 시기 부산 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새로운 본당을 설립하였다. 이로써 부산진본당, 중앙본당, 청학동본당 이외에 동래, 초량 등 2개 본당이 신설되고, 여기에 힘입어 다른 지역에서도 본당 설립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점이 1957년 부산교구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교구’는 교회의 일정한 지역에 교회의 수위권자인 교황에 의해 임명된 주교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하느님 백성의 교회를 말한다. 즉 지역 교회의 완전한 교계 제도(敎階制度)를 설정하게 된 것이었다. 부산교구는 한국 교회의 11번 째 교구로 탄생되었다. 부산교구의 관할 구역은 경상남도 전역으로 모두 6개의 시와 20개 군이었다. 6개 시는 부산, 마산, 진주, 진해, 충무, 삼천포, 등이었다. 본당은 27개였고 부산 지역에는 동항, 신선동, 서대신, 수영본당이 있었다.

이 가운데 서대신본당은 사하구 지역과 관련이 있는 성당이다. 서대신본당이 독립되기 이전에 이미 이 지역에는 괴정, 하단, 다대포, 감천 등의 공소가 산재하여 있었다. 당시 사하구 지역에 관심을 보인 신부는 초량본당에 있던 권요셉 신부로, 그는 이 지역의 신자들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자 본당 설립을 계획하고 일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54년에는 서대신동에 대지를 구입하고 성당을 신축하던 중 이듬해 2월 1일자로 교구청의 설립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드디어 1955년 4월 14일에 성당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권 신부는 본당 초대 주임 신부로서 기초를 다지는 데 주력하여 교무위원회를 발족시키고, 1956년 1월 3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쁘레시디움을 창설하여 신심 운동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 레지오 마리애 활동은 제2대 변로이 신부[1957~1959 재임] 때에 더욱 활성화되어 본당 신심 단체의 기초가 다져지기도 하였다.

5. 1960년대~현재

부산교구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1966년에는 31개 본당의 증설을 보았다. 1970~1980년대 군사 정권의 정치 문제로 현실적인 소리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하여 최근 2013년까지도 그러한 분위기를 이어 가고 있다. 현재 한국 천주교 내에는 16개의 교구가 있는데, 부산은 대구 대교구에 속해 있다. 2012년 핵 발전소와 핵 시설 예정 지역인 대구, 부산, 안동, 원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동해안 탈핵 천주교 연대’를 출범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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