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8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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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聖堂 |
영어의미역 | Catholic Church |
이칭/별칭 | 본당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 건 |
[정의]
부산광역시에서 천주교의 종교 의식이 행해지는 교당.
[개설]
지정된 모든 건물을 말한다. 대성전, 성당은 천주교 신자들이 미사나 전례에 참여하기 위해 모이는 장소이며, 성체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이 거처하는 장소이다. 넓은 의미에서 성당은 하느님 경배를 위한 경당 등도 성당에 해당한다. 공소(公所)는 본당(本堂)의 성당보다 작은 규모의 예배소가 있는 곳으로, 본당에 소속은 되어 있으나 사제가 상주하지 않는 소규모의 작은 교회를 말한다. 이곳은 미사가 집전되지 않으므로 본당 신부의 위임을 받은 평신자[공소 회장, 선교사]가 공소 예절과 신심 행사를 주관한다. 한국 교회에서는 사제가 정규적으로 1년에 두 번 이상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하고 정기적으로 판공성사를 주도록 하고 있다. 부산 지역에는 예전에는 공소가 많이 있었지만, 도시의 발달과 성직자의 증가로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었기에 현재는 없다.
[부산 지역의 성당]
부산 지역의 성당은 1886년 한불 조약 체결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한 이후 천주교가 서서히 정착을 이루면서 설립하게 된다. 한불 조약 이후 천주교 교정을 담당한 이는 블랑(Blance) 주교와 뮈텔(Mutel) 주교였다. 또한 어느 정도 선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천주교는 교인들의 예배 중심지인 동시에 복음 전파의 전위 역할을 하게 될 본당의 조직을 서둘렀다. 본당은 우선 선교사의 체류가 허용된 서울, 원산, 제물포, 동래 등 개항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동래성당 초대 주임 신부로 임명된 조조(Jozeau) 신부는 1886년 경상도에 최초로 설립된 대구본당을 근거지로 삼고 로베르(Robert) 신부를 도와 약 10개월 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일부까지 순회 전교하면서 부산 부임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1890년 6월 조내기공소[신부의 상주지는 아니지만 준본당 조직에 해당함] 김보윤(金甫允) 회장의 주선으로 영도에 부임하였고 본당이 설치되었다. 그는 약 2개월간 체류하면서 개항지 쪽으로 본당을 옮길 계획 하에 대지를 물색하는 한편, 산재한 신자들을 사목하기 위하여 경상도를 순회 전교하였다.
조조 신부는 1892년까지 전교하면서 본당 기지를 선택하기 위하여 부산 시내로 나와 용두산 공원 밑 검정 다리 곁으로 거처를 옮겨놓고 그 해 봄에 서울 주교관으로 피정 신공과 전교 상황을 보고하러 올라갔다가 전라도로 차정되게 되었다. 이에 그의 후임으로 우-도 신부가 1893년에 부임하여 1899년까지 담임하고 전임된 후에는 드망[안세화] 신부가 부임하였다. 드망 신부가 용산신학교 교수로 전임되고, 이 동안 용산신학교 초회 졸업생 노렌조·강 신부가 부산 영도를 거쳐 밀양 명례 담임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부산에는 안 신부의 후임으로 롤트 신부가 부임하여 임시 성당을 용두산 밑에서 초량으로 옮겨 2년간 전교하다가 1902년 사망하였다.
롤트 신부의 후임으로 1891년에 입국한 루도비꼬 최[최상근] 신부가 1903년 부임하였다. 최상근 신부는 6년간 초량에 주재하면서 신설된 지 얼마 안 되는 부산본당의 터전을 든든하게 다졌다. 그리고 최상근 신부의 후임으로 진주 문산본당 담임으로 있던 권 신부가 초량에 부임하였다. 일제 강점기 조선 천주교는 교구를 조정하였다. 1911년 서울교구와 대구교구로 양분하였다. 1909년에 줄리엥[권유랑] 신부가 초량에 부임하여 1911년에 대구교구에 속한 이후 4년만인 1915년까지 7년간 전교하였다. 이어 1916년에 본당 기지를 부산진 범일동으로 옮겼고 이를 부산진본당이라고 한다.
한편 대구는 1911년 대구교구 설립 당시 교구청을 설치하고 대구 중심으로 교구를 운영했던 반면에, 부산은 일본인의 도시로 변하기도 했지만 대구교구 설립 후 1945년 해방 때까지 부산진에 유일한 본당이 있었을 뿐이었다. 첫 동래본당이 있던 청학동에는 요양 신부를 위한 준본당 격인 성당이 있었고, 때로는 이것이 부산진본당 소속 공소가 되기도 하였다. 부산진본당은 설립 이후 역대로 프랑스 신부들이 사목하여 오다가 1940년부터 청학동에 요양하던 서정길 신부가 1943년 3월 2일 베르트랑(Bertrand) 신부의 후임이 되었고 뒤이어, 해방을 맞았다. 당시 청학동은 신부가 공석이었고, 1945년 부산진본당에는 10개 공소[청학동 포함]를 합쳐 1,514명의 신자가 있었다.
1945년 광복이 되어 일본인이 철수하고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는 역사의 변천 속에 자주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부산 교회 사업들이 시도되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부산중앙본당 설립이었다. 이 때 1945년 본당은 부산진본당[383], 대신동본당[185], 동래본당[224], 영도본당[491-공소 지역], 하단본당[47], 수영본당[23] 등이 있었다.
1945년 말 정재석 신부가 서정길 신부 후임으로 진영에서 부산진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해방된 부산에서 천주교를 부흥시킬 중책을 맡은 셈이었다. 정재석 신부는 갓 서품되어 부산본당의 첫 보좌로서 같은 날 발령받은 김도한 신부와 같이 부임하였다. 한편 영도 청학동에는 일제 강점기 말 대구 남산동성당에 연금되었던 베르트랑 신부가 부임하였다. 부산본당의 급선무는 중앙 지대에 본당을 건설하는 것이었는데, 광복 후 부민동 일본인 공소를 접수하여 현 부산 중구, 서구, 영도구 일부 지역 신자들이 결집하여 매주 미사를 드리게 되어 신자들이 증가했고 따라서 부산 중심지에 있는 본당의 신설이 더욱 절실하였다.
1947년 5월 안달원 신부가 김동한 신부 후임으로 부임하여 성당 부지 물색을 계속하였다. 미군정 하의 적산인 묘심사, 대각사, 지은사 등의 사찰과 현 보수동 부산지방국세청 건물 등을 후보지로 탐색하던 중 1948년 1월 김차수[마리아]의 제보로, 지은사가 종교 본래의 사용 목적에 위배되었다는 이유로 부산 적산관재처에 이의와 명도를 신청했다. 그리하여 제1 단계로 지은사 본전을 접수하게 되었으나 명도(明渡)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 건물 접수에 고심하던 중 새로 부임한 제7 관구[경남] 경찰청장 박명제[가브리엘]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1948년 4월 지은사 경내에 있는 부속 건물인 주지 사택 겸 회관까지 명도 받아 2개월의 수리로 같은 해 6월 20일 성당 축성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까지는 부산진본당 정재석 주임 신부와 보좌 안달원 신부의 노력이 바탕이 되었고 대청동본당[후일 중앙성당]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1948년 8월 1일부로 부산 대청동본당이 대구교구 임시 관리자 노기남 주교에 의해 정식으로 설립되고 초대 주임에 이명우[야고보] 신부가 발령되어 왜관에 부임하였다. 이로써 부산에 세 번째 본당이 설립되었고, 초량 이남, 현 중구, 서구, 영도구를 본당 구역으로 사목하게 되었다[신자 523명]. 이로써 부산 개항 후 처음으로 부산 중심 지역에 본격적인 본당이 자리 잡게 되었다.
1953년 제2대 장병룡 신부가 당시 신창동 소재 경향신문사 사옥과 함께 공생원 건물을 매입하여 적십자 경남지사를 이전하게 하고 동일 구내에 건물을 완전히 소유하여 1957년 부산교구 설립 후 임시 부산교구청사로 사용하였다. 현 교구청사는 본래 일본인 복전증병위(福田增兵衛)의 저택이었는데, 1948년 이명우 신부의 주선으로 관재처(管財處)에서 인수하여 장차 교구청으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불하대금 관계로 메리놀수녀회에 이양되어 수녀원과 병원으로 사용되다가 현 메리놀병원 건립 후 부산교구에 이양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대거 피난해 오면서 부산시 내 중앙동, 범일동, 청학동 세 성당은 피난 신자들의 수용소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서울교구 신부들은 중앙성당에서 부평동 이로사 집으로 처소를 옮기고, 전주교구 신부들은 범일동성당, 이북 신부들은 초량성당 권 신부 집을 중심으로 피난 생활을 하였다.
한편 수녀들도 연고자나 신자집에 거처를 정하고 군 병원에서 간호나 봉사 활동을 하였다. 또한 부산에 결집된 대신학생(大神學生)들은 제주도 서귀포 홍로에 피난하였다가 현 부산 신성동성당 터에서 전시 수업을 계속하였고, 소신학생(小神學生)들은 경상남도 밀양성당에서 피난 수업을 계속하였다. 일부 신학생들은 입대도 하였다. 범일동 구내에서 천막 학교로 시작한 수도여고가 서울로 복귀한 후 현 데레사여자고등학교가 되었다. 한편 군종 신부 제도가 창설되어 포로 수용소에서 사목하고, 또한 미군으로부터 원조를 받은 구호 사업이 신자들을 크게 고무하여 교세가 확장되었다. 또한 원산에서 철수한 신자들도 거제도를 거쳐 부산으로 점차 들어오게 되었다. 이리하여 부산은 임시 수도인 동시에 임시 전국 교회의 축소판이 되었다.
한편 대구교구도 설립 이후 일제의 영향으로 운영에 소홀했던 경남 지구의 교세 확장을 위해 경상남도를 분리하는 것이 시급함을 인지하였다. 대구교구의 제6대 교구장 최덕홍 신부가 한국 제2 도시이며 임시 수도였던 부산의 발전과 급증하는 신자의 추세를 감안하여 교구 설립에 노력하였고, 1954년 6월 18일자로 경상남도 감목 대리구가 설정되고 초대 감목 대리에 대구주교성당 서정길 주임 신부가 임명되었다. 서정길 신부는 범일동성당의 주임 신부를 겸하였다.
제2대 감목 대리로 당시 범일동 주임이었던 정재석 신부가 1955년 9월 16일에 임명되었다. 정재석 신부는 부산교구의 신설을 촉구하였다. 한편 6·25 전쟁 때 납북되었던 춘천교구장 퀸란(Quinlan) 주교가 주한 교황 사절 서리를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구 신설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즉 1955년 12월 31일자로 경남교구 신설 신청서가 교황청에 제출되어 1956년 4월 10일자로 교구장 선발 지시가 하달되었다.
이렇게 교구 설정의 모든 절차가 진행되어 1957년 1월 21일부로 부산교구 대목구가 신설 공포되었다. 동시에 지목구(知牧區)였던 광주교구와 전주교구도 대목구로 승격되었다. 1957년 2월 3일자로 부산교구의 초대 교구장에 당시 대구 주교좌 최재선 주임 신부가 피임되었다. 부산교구 설립 당시 28개 본당에 4만 1,105명의 신자가 있었으며, 중앙성당 내 옛 공생원을 임시 교구청으로 사용하였다.
1962년 부산교구의 승격으로 교세가 날로 확장되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고, 1966년 부산, 울산, 양산, 김해, 밀양을 제외한 경상남도 지역을 마산교구로 분가시켰다. 또한 1975년 제2대 교구장 이갑수[가브리엘] 주교의 임명을 계기로 한국 제2 도시에 걸맞게 교세가 확장되었다. 1997년 대청동에 있는 교구청을 남천동으로 이전하였고, 1999년 제3대 교구장 정명조[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임명으로 현재 제4대 교구장 황철수[바오로] 주교가 주재하고 있다. 부산에는 준본당 1개를 포함한 80개의 성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