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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12
한자 釜山-中國-中國人
영어의미역 The Chinese people in the China Town: China in Busan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신영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재지 부산 차이나타운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지도보기

[화교와 차이나타운]

세계 속의 중국인은 1,800여 만 명으로 90% 이상이 동남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인들의 집단력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 차이나타운의 형성이다. 그 속에서 이민자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중국인의 모습은 세계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다.

한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 즉 중국인 이민자로서 그들의 국적을 유지한 채 전통과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을 우리는 흔히 화교(華僑)라고 부른다. 그들이 정식으로 한국에 정착하여 살아온 지는 120여 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이들의 위상은 다른 국가만 못한 것이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로 박정희 정권 시기 화교 억압 정책으로 당시 20여 만 명이 넘는 중국인 수가 4만여 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후 이들의 한국에서의 법적 지위 및 활동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한국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중국 이민자들의 삶, 그중에서도 부산에서 살아가고 있는 중국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부산에서 중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누구라도 초량 차이나타운을 말할 것이다. ‘중국 이민자-화교’들이 밀집해서 살고 있는 곳, 중화요리 전문점이 밀집해 있는 지역, 화교 학교가 있는 곳, 그곳을 우리는 흔히 중국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요즘 들어 중국 본토에서 여행을 오는 사람들, 유학을 오는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사실은 초량뿐만 아니라 어디서든지 중국말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화교인지 중국인인지 구분할 수 없다. 다만 이민자 부모와 1.5세대들, 그리고 한국에서 나고 자란 2세, 3세들은 한국에서 살아온 시간과 비례하는 한국어 능력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이민자 당사자들이나 1.5세대들은 아직도 한국어보다 중국어를 사용하는 시간이 더 많다.

부산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그 어느 지역의 화교들보다 보수적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타국에 살면서도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면서 살고 있는 그들을 차이나타운이라는 그들의 생활 공간, 문화 공간이라는 틀에 묶어 두고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이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 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래서 부산 초량 차이나타운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물었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들이 생각하는 한국 사람, 한국 문화, 한국 살이에 대해 들어보기로 하자.

[한국 사람, 한국 사람]

한국 사람들은 묻습니다.

평생을 한국에서 살았는데 왜 그렇게 한국말이 유창하지 않느냐고. 우리 부모 세대는 이렇게 오랜 시간 남의 나라에서 살아갈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언젠가는 꼭 다시 자기들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기대를 져 버리지 않았습니다. 많은 어른들이 그렇게 돌아갈 날만 기다리다 돌아가셨지요. 이제 남은 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한국말을 하지 못해도 우리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굳이 한국말을 배울 필요가 없었지요.

하지만 우리 2세대의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대만도 중국도 내 고향이 아니에요. 바로 여기 초량이 내 고향입니다. ‘한국에서 돈 잘 벌고 열심히 일해서 성공해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다만 또 모르죠, 늙고 병들면 잠깐 고향 땅을 밟고 싶을지도…….

또 한국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한국인으로 살지 않느냐고.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 문화권에서 살면서 불합리한 대우를 받을 때도 있는데 왜 그렇게 고집스럽게 중국인으로 살아가느냐고 묻습니다. 그런 것들이 화교들과 한국인들에게 이질감을 준다고 합니다만, 우리는 대답합니다.

국적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애국심이라고요.

우리의 1세대는 중국 산동성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산동성-인천 루트로 들어온 것이지요. 우리의 부모 세대인 그분들은 스스로 중화민국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태어난 우리는 한국 사람도 중국 사람도 아닙니다. 한국에서 우리가 이방인이듯 대만에서도 중국에서도 그들은 우리를 현지인과 같은 부류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역시 이방인이죠. 하하

우리는 해당화 같은 신세입니다. 표류한 상태죠. 뿌리를 박아 놓은 데가 없어요. 1992년 중국과 한국의 외교 정책에 의해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라는 공식이름을 한국에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계 각국 역시 중화 인민 공화국[이하 중국]과 국교를 맺으면서 중국의 ‘하나의 중국’을 지향하는 외교 방침을 받아들였습니다. 힘의 원리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요.

[중국 사람]

저는 지금 이곳 차이나타운에서 2대째 유통업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곳 상가 일을 한 지는 30년째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일을 시작하시고 제가 대를 이었지요. 한국말이 그리 유창하지는 못합니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 한국 사람처럼 유창하지는 않습니다. 하하 이해해 주십시오.

우리 화교들은 화교 학교에서 대만이 지정한 교육을 받고 자랍니다. 저도 역시 중화민국의 역사를 배우고 중국어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교육을 받고 나면 20살이 됩니다. 한국에서 살고 있지만 사실상 우리는 중화민국인임을 항상 상기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육을 통해서, 주변의 시선을 통해서, 그리고 가족의 영향을 받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한국말보다 중국말을 하면서 사는 시간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시대가 변해서 아이를 한국 학교에 보내는 부모도 생겨나고 필요에 따라 한국으로 귀화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국적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모르겠습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죠.

저는 대만에서 몇 년 살았습니다. 대만 신분증도 있습니다. 신분증이 있으면 나중에 돌아갔을 때 취직을 할 수도 연금을 받을 수도 있지만, 신분증이 없으면 아무런 혜택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제가 대만에 갔을 때는 국민당에 입당하면 많은 혜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입당도 했지요. 당시 대만에선 화교들에게 국민당 입당을 많이 권유했죠. 대부분의 화교들이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중국이나 대만 친척집에 보내서 살게 하거나 대만으로 대학을 보내기도 합니다.

대만으로 대학을 보내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특히 남자아이들보다 여자아이들의 경우가 많습니다. 입학했을 때 특례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연애 적령기라는 겁니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면 한국 남자를 알게 되고 사귀게 될 테니 미리 그 길을 차단하는 것이지요. 대만에 가서 공부도 하고 대만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대만에 남게 된다면 좋겠다는 부모들의 바람이 반영된 거죠.

왜 한국 사람과의 결혼을 반대하냐고요?

간단합니다. 우리 딸들이 한국 남자와 결혼해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 남자들과 중국, 대만 남자들은 차이가 많이 있습니다. 한국 남자들은 권위적이고 여자를 귀하게 여기지 않지요. 더구나 여자들은 가사 노동에 시달리면서 시부모와 남편 사이에서 괴로워합니다. 또 제사 같은 짐을 며느리들만 짊어지게 되는 것도 보기 안타깝고요. 그런 힘든 삶을 내 딸이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맞습니다. 요즘 시대가 많이 변하긴 해서 남자들도 가사 부담을 하고 시부모와의 관계가 개선된 경우도 있긴 합니다. 그래도 여자를 대하는 면에서는 중국이나 대만이 좀 더 귀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또 우리 아이들은 외국인이지 않습니까? 요즘 외국인 며느리들[베트남, 필리핀 등]이 학대받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도망가거나 하는 경우를 보면 경계를 하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기들이 좋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요. 결혼은 본인들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남자들이 한국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좀 더 자유롭습니다. 남자들은 결혼을 하면 여자를 데려오는 것이고, 우리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 수 있으니 어른들이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국 여자와 결혼한 2세대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 화교 세대가 변화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좀 있겠지요. 아이들의 엄마가 한국 사람인 경우가 많아지면서 대만식 교육에 한국식 교육이 겹쳐져 아이들이 대만 방식에만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사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엄마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한국식 가정 교육이 안 될 수가 없지요. 또 시대가 변하기도 했습니다.

제 경우요? 아! 제 아내는 한국 사람입니다. 안동 권씨입니다. 하하하! 연애 결혼했습니다. 부산에서 만나서 사귀게 되었지요. 집안의 반대요? 아니 없었습니다. 연애 기간도 길었지만 제가 당시 아주 잘 했었습니다. 하하! 딸 둘이 있는데 큰애는 경성대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딸아이가 한국 사람과 결혼하겠다면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지가 하겠다면 시켜야지요. 걱정하는 건 부모니까 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은 기성세대에 비해 여자들을 많이 위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한국 사람이다 보니 한국에 대한 것이 다른 화교들에 비해 자연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한국 사람도 아니고 대만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우리가 한국 사람이기도 하고 대만 사람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한 가지, 우리도 변해야 하겠지만 한국 사람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에는 ‘신화교’라는 새로운 부류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중국 본토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인데, 굉장히 빠른 속도로 한국에 정착하고 있습니다. 길거리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중국인들을 바라보는 한국 사람의 시선은 그렇게 곱지만은 않습니다. 자본가를 대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차이가 많이 나지요. 돈을 쓸 때는 고객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뒤에서 욕을 합니다.

작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차이나타운을 걷던 청년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20대 초반 정도의 나이로 기억이 됩니다만, 당시 상가 거리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나와 앉아 있었지요. 그런데 청년들이 그 거리를 지나가면서 큰소리로 “떼놈××!”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사람들의 입에서 그런 말이 여과 없이 내뱉어지고 있었습니다. 중국인 거리를 걸으면서 그런 단어를 마음껏 쓸 수 있다는 것은 한국인들의 중국인 비하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듣고도 모른 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늘 겪는 일이라도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들을 불러서 ‘떼놈’의 의미를 알고 그런 소리들을 하냐고 야단을 쳐서 보낸 적이 있습니다. 상당히 불쾌했던 기억입니다.

어린 시절,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늘 들었던 소리입니다. 지나가는 우리를 이유 없이 비난했고, 자기들보다 낮은 사람 취급했습니다. 한국 사람들과 어울릴 수가 없었죠. 요즘 한국 부모들이 학교에서 아이들이 왕따 당하는 것 때문에 많이들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역 왕따를 당했었고 지금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간혹 일본과의 관계에서 한국인을 비하하는 ‘조센징’이라는 말을 듣고 분개하는 한국 사람을 보았을 때 이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대접을 받으려면 먼저 남을 배려하는 행동을 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단 중국인뿐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사람들이나 유색 인종에게 특히 불친절합니다. 이를테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무조건 반말부터 한다든지, 동남아 등지에서 시집온 여성들을 돈을 지불하고 사온 물건처럼 대우하고 학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시어머니들이 며느리를 구타하는 사례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도 포악해져서 한국 사람을 해치고, 한국 사람을 ‘돈’ 벌기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일들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은 남을 인정하는 데 조금 인색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국적도 단일 국적을 고수하고 있지요. 외국계 한국인에게 이중 국적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 사람이면서 외국에 살고 있는 사람, 외국인이면서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의 국적을 요구합니다. 요즘은 성인이 될 때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지만, 어쨌든 성인이 되면 하나의 국적만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요즘은 예전과 달리 많은 화교들이 한국 국적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좀 더 전문적인 분야에서 일하고자 한다면 어쩔 수 없이 한국 국적이 필요하니까요.

특히, 서울에 살고 있는 화교들의 경우 부산에 살고 있는 화교보다 빨리 변화하고 있습니다. 서울과 부산은 수도와 지역이라는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 귀화를 한 화교가 자신이 화교인 사실을 숨기고 한국인인 것처럼 활동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귀화를 하고 한국인으로 살고 있는 자신들이 더 이상 어떤 불이익도 당하기 싫기 때문이지요. 한편으로는 그들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부산은 내가 볼 때 나 같은 고집불통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보수적이지요. 중국인이면서 부산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요? 하하.

언젠가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와 중국 본토에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는 미국 여권을 가지고, 저는 대만 여권을 가지고 입국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미국 시민권자인 그 친구는 영어로 입국 카드를 작성했고 나는 중국어로 작성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입국 불허를 받았습니다. 아무 이유가 없었지요. 단지 영어로 입국 카드를 썼고 문답을 할 때 영어를 사용한 것이 중국 공안의 비위를 상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너는 중국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중국인이냐, 미국인이냐”라고 묻더군요. 그들은 어디에 살고 있으며 국적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귀화를 하거나 다른 곳에 살고 있어도 중국인이라는 정신을 놓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중국을 떠났던 것이 이런 강압적인 공산주의가 싫어서였는데……. 어쨌든 그 친구와 저는 겨우 공안을 달래서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서야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고집스러움이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부산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 사람들이 한국에 있는 화교들 중에서 가장 고집스럽고 느리게 변화하는 편일 겁니다. 그런데 이런 정신은 한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던데, 제가 질문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가수 유승준은 미국 국적을 가지고 한국에서 활동하다가 군대 안 가서 한국에서 거부당한 경우인데, 왜 추성훈은 일본 국적 가지고도 한국에서 활동이 가능한지 묻고 싶습니다. 어떤 기준이 작용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또 북한을 고향이라고 표명하고 있는 정대세 선수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도 궁금합니다. 우리는 한국 사람들의 양극성에 갈팡질팡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정부의 정책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따를 뿐이지요.

다만, 우리를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불에 덴 적 있는 아이들처럼 말입니다. 아버지 세대와 우리 세대는 여기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일어난 일들을 거의 다 겪은 사람들입니다. 특히 우리 2세대들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오히려 부모 세대보다 더 많이 겪으면서 자랐습니다. 사실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한국을 고향이라고 해도 될 겁니다. 6·25 전쟁을 직접 겪은 1세대는 아니지만 전후 부산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우리는 한국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또 우리 부모 세대가 그 시대를 모두 함께 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에서 희망과 실망, 절망을 모두 보고 느껴버렸습니다.

물론 모든 일에는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한국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단행했던 일들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큰 절망이었기에 많은 이들이 이 땅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때 이후로 남은 이들이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화교들이겠지요. 아마 그때 이민 갈 돈이 없는 사람들이 남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하! 이젠 여기서 발전하고 여기에 있는 내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디라도 내가 갈 곳이 있지 않습니다. 내 가족이 있는 이곳이 내가 살아가야 할 곳입니다.

[부산 속의 중국]

아…… 한국말로 정확하게 표현을 할지 걱정입니다. 한국말이 완벽하지 못하다 보니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먼저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우리 가족은 산동성에서……, 다른 이민자와 마찬가지로 산동성에서 1949년 인천으로 도항하였습니다. 부모님이 조부모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산동성에서 웬만큼 산다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살 수 없게 되어 본토를 떠났습니다. 이념적인 문제가 컸지요. 처음엔 인천에 정착했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부산으로 피난 왔습니다. 부산으로 왔을 때 초량 중화가는 이미 포화 상태였다고 합니다, 한국 정부와 대만 대사관에서 화교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영주동은 그때 화교 피난민들의 전시 화교촌 중 한 곳인데, 우리가족은 몇 년간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1951년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한국은 그때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우리 가족도 이렇게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중국에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조부모님 두 분 다 고향 땅을 밟지 못하시고 여기서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지금 나는 부산화교학교에서 30년이 넘도록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산 지역 화교 학교의 역사는 길지 않습니다. 소학교가 있을 뿐이었지요. 6·25 전쟁 당시 부산 지역에 피난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피난민들의 요구 때문에 중고등학교가 생기고 발전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전에는 학생 수가 10명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 역시 부산에서 화교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은 대만으로 갔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년이 되어서 학교에서 퇴직을 하고 여기서 내가 할 일이 없어지게 되면 그땐 대만으로 돌아가야지요. 여기는 내 고향이 아닙니다. 요즘 학생들은 한국에서 살겠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왜 그런지 여기가 고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산동성에서 한국과 무역업을 하셨는데, 한국으로 넘어오신 후에도 계속 무역업을 하셨습니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한국과 국교가 단절되었고, 이념이 같았던 우리는 6·25 전쟁 당시에도 미국으로부터 연합군으로 인정을 받아서 한국 사회에서 꽤 정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당시 전쟁에 참여하였던 화교민들의 역할이 인정을 받았던 거지요. 하지만 1971년 중국이 국제연합[UN]에 가입하게 되면서부터 중국의 위세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국은 UN에서 중국 공산주의가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주장하였고,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NA]과도 화해를 주도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국교를 맺은 말레이시아도 중국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게 되면서 동남아의 질서가 재편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동남아에 퍼져 있던 화교들은 자신들만의 단결이나 치부(致富), 모국에 대한 충성 등으로 거주국 국민들과 갈등이 많았습니다. 국교 재개 이후 가장 큰 골칫거리는 화교의 처우 문제였습니다. 이때 중국은 공산 분자의 지원을 끊고 혁명을 수출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고, 화교들에게 거주국으로의 귀화 정책을 펴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곳에서 융화하여 살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여러 해 동안 분쟁을 가져온 동남아 국가들에게 화교의 불간섭을 표방한 것이었습니다.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은 힘으로 실력을 행사하던 시기를 벗어나 자력갱생의 길을 걷기 시작한 때였고, 또 에너지 위기에 처해 있던 개발 도상국들은 공산국과의 화합이 불가피하였기 때문에 중국과의 교역을 배척할 수만은 없었지요. 이 새로운 동남아의 정세는 다시 세계 속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미 이전부터 화교에 대한 배척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1962년 화폐 개혁은 현금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화교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1인당 현금 교환액을 500원으로 정해 놓은 이상 그 이상의 돈은 그저 휴지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부모 세대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고 계셨고, 또 은행에 저축을 하거나 한국의 제도권 내에 속하려고 하지 않으려 했던 탓에 화폐 개혁은 화교들에게 큰 타격을 가져왔었습니다. 타향에서 힘들게 모은 돈을 날리게 생겼으니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한강으로 가서 투신자살한 사람도 많았지요. 그때 자살한 화교들 좀 됩니다.

거기다 외국인 토지 취득 금지에 대한 법을 제정해서 토지 소유를 막았고, 대외 교역도 규제를 해서 먹고 살길이 막막해졌습니다. 그나마 요식업을 하게 된 사람들도 면적의 제한을 두어서 대형 음식점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화교들은 한국 사회에서 숨만 쉬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165.3㎡[50평] 이하의 점포를 가지고 요식업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국 정부의 가격 차별 정책으로 분식업은 가격 경쟁에서 살아날 수가 없었습니다. 정부의 분식 장려 정책으로 중국집에서는 쌀밥을 팔 수 없었고, 영업 연수가 많으면 거기에 대한 과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니 많은 화교들이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 정부의 화교 배척 정책 이후로는 현금을 모아두어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서 모은 돈으로 집을 샀는데, 아버지 친구에게 명의를 빌려서 샀습니다. 그러데 아무 말씀 없이 돌아가시고 나니 그 자식들이 돌려주지를 않는 겁니다. 그 집이 자기 부모의 유산이라고 우겨서 빼앗았습니다. 법적으로 대항할 수 없는 우리는 돈만 뺐긴 것이 아니라 한국 사람에 대한 신뢰도 깨지게 되었습니다. 더 믿으면 우리가 바보죠.

그때 우리 아버지는 무역업을 하시다가 그만두시고 회사에 취직을 하셨습니다. 회계 관련된 일을 하셨지요. 그러다 일찍 돌아가셨는데…… 내가 대학 다닐 때였습니다. 나는 당시 대만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그 당시 한국 정부에서 한화 유출 문제로 대만에 보내는 송금액에 제한이 있었지요. 그 돈으로는 대만에서 생활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보따리장수도 하고, 방학 때는 아르바이트해서 돈 벌면 대만에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대만으로 공부하러 많이 들어간 이유는, 대만은 학비가 싸서 충분히 조달할 수 있었던 것도 있지만, 당시 냉전 체제로 장개석 정부의 이념적 대립 갈등이 분명하던 때였고, 미국 정부에서도 대만으로 들어오는 화교들에게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화교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습니다. 사범 대학 같은 경우는 정부에서 생활비까지 지원해 주어서 웬만하면 대만으로 공부를 하러 갔습니다. 이후에 상황이 또 좀 달라지긴 했습니다만, 어쨌든 대만은 물가도 싼 편에 속하고 대만식 교육을 계속 받은 화교들이 대학을 가기는 대만이 수월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학생들이 대만으로 대학 진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 대학으로 진학하기를 원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요즘 우리 세대와 생각이 다른 젊은 세대들 중에는 아이를 초등학교 때부터 한국 학교에 보내고 한국식으로 교육시키는 부모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만식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한국 대학교에 진학할 때 외국인 전형이라는 특례를 받기 때문에 아직 부산 지역에서는 대만 학교를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입시가 우리에게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또 중국이나 대만의 대학교를 선택하게 되어도 화교에게는 등록금이나 그 외의 특혜가 따릅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한국식 교육보다 대만 교육을 선호하고 있으며,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민족적인 성향으로 대만식 교육을 고집하기도 합니다.

요즘 우리 학교에는 엄마가 중국인이면서 한국인과 결혼한 결혼 이민자의 자식들이 입학하기도 하는데요. 이유인즉 한국 학생들로부터의 왕따 문제 때문입니다. 사실 대학 친구들 중에서 어린 시절에 집이 시골인 아이들-김해 지역이나 경상남도 지역-은 화교 학교에 다닐 수 없었는데요. 지금은 우리 학교에 기숙사가 있지만 그때는 기숙사가 없었습니다. 한국 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한국 사람들한테 ‘떼놈’이라고 멸시를 많이 당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부모들은 아이들을 한국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부모 세대는 한국말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한국말을 못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화교가 많았고 영주동 화교촌에서는 한국 사람들과 부딪힐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또 이렇게 오랜 시간 머물러 있을 줄 몰랐으니까…….

그리고 대학 때 대만으로 유학을 갔으니 내 세대는 한국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가 좀 힘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은 한국말을 하는데 무리가 없습니다만, 당시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직장을 가지게 되면서 한국말을 배웠지 그전에는 어린 시절 조금 알던 한국말도 대만에 가서 공부하면서 다 잊어버린 상태였습니다. 하하. 요즘 우리 학교 학생들을 보면 오히려 한국말을 더 잘하고 중국말을 못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1992년 중국과 수교 이후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화교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정책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부동산 문제, 비자 문제, 화교에 대한 정책이 대부분 좋아졌습니다. 중국과 수교가 되면서 대만 대사관처럼 공적인 공간은 중국에 넘어가고 화교 학교의 거취가 문제가 되었는데, 화교 학교는 정치 성향이 없다고 인정되면서 대만령으로 인정하기로 되었습니다. 지금 부산화교협회와 학교는 청나라 때부터 지켜 온 대만 땅입니다. 조선과 청나라가 조청 수륙 무역 장정을 맺고 조선에서 청나라 상인들에게 주었던 바로 그 땅입니다. 1884년부터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속 대만입니다.

처음 우리가 한국에 넘어올 때는 중국 산동성 출신으로 넘어왔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이념 때문에 중국 국적이 아닌 대만 국적으로 처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만 국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교육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화교 학교는 대만에서 교과서를 받아서 교육을 시킵니다. 모든 교육 과정이 대만과 똑같습니다. 한국에 있다 뿐이지 모든 것이 대만식입니다. 한국어 선생님 빼고는 선생님들도 모두 대만에서 교육받고 오신 분들입니다. 여기서는 한국어가 외국어입니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우리 때와 다르게 자기들이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제법 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났고 또 부모 중 한 사람이 한국 사람이면 특별히 대만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요.

우리 아이들은요?

나는 딸이 둘 있습니다. 둘 다 대만으로 대학을 보냈는데 하나는 대만 사람과 결혼해서 대만에 살고 있고, 둘째도 대만에서 살고 있습니다. 결혼도 거기서 할 예정입니다. 내 경우는 아내를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만났습니다. 대만 사람이지요. 아이들 외가가 대만이니 더 자연스럽게 그곳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한국 남자에게 시집보내지 않으려고 대만으로 대학을 보냈다는 게 맞습니다. 뭐 지금은 한국 사람들의 성향도 많이 변했습니다. 예전엔 한국 사람에게는 딸을 주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매 맞고 사는 여자들이 많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특히 딸을 가진 아버지들은 딸이 한국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막았지요. 하지만 요즘은 그런 부분이 많이 개선되지 않았습니까. 맞고 사는 여자들이 예전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만약 우리 딸이 한국 사람과 결혼하려고 했다면 막지는 않았겠지만, 그렇게 마음이 좋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행히 거기서 만나서 결혼해 주니 좋습니다.

대만 사람인 아내도 나 때문에 한국에 나와 사니 불만도 있고, 항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지요. 여기는 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혼자 두고 대만에 갈 수도 없으니 지금은 내외가 한국에 있는 겁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나도 한국에 직장을 구해서 돌아오지 않았을 겁니다. 대학 다닐 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막내 동생이 어려서 어머니가 한국을 떠날 생각을 못하셨습니다. 한국에 계시기로 한 어머니의 결정에 따라 나는 장남으로서 가족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다른 동생들은 대만에 남고 저만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이후로 다른 동생들은 모두 대만에 자리를 잡고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저만 이렇게 남았습니다. 돌아가야지요. 아내도 고향이 그곳이고 내 가족들이 모두 거기에 있으니 남은 시간은 거기서 보내고 싶습니다.

여기가 그립진 않겠느냐고요? 물론 한 번씩 생각나면 들어와서 한 바퀴 휘 돌고 가야겠지요. 그럴 겁니다. 내가 살아온 곳이니까요. 생각날 겁니다.

[귀속감! 우리에게도 그게 필요해요]

저는 왕○침이고 화교 3세대입니다. 지금 부산화교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고요. 부모님은 모두 화교이시고 광주에서 중화요리점을 하고 계세요. 대만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려면 화교 학교를 다녀야 하는데 광주는 화교가 적어서 고등학교가 없어요. 부산에는 기숙사도 있고 해서 이곳으로 와서 학교를 다니고 있어요.

여기서는 한국 대학교에 가는 반과 대만 대학교에 가는 반이 나뉘어져 있어요. 전체적인 교과 과정은 같은데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학생들은 한국의 역사라든지 한국 학교에 갔을 때 필요한 과정을 좀 더 배워요. 하지만 한국 대학교에 가려면 입시에서 면접만 보기 때문에 입시 스트레스는 적어요. 대만 대학교에 진학하려면 특혜가 있지만 일단 시험을 봐야 하고 시험에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방과 후 수업이 1시간 더 있어요. 친구들을 소개할게요.

기숙사에서 같이 공부하는 친구 진○민이는 대구에서 왔어요. 우리는 모두 대만 대학교에 진학하려고 공부하고 있어요. 민이 부모님은 모두 화교이신데 아버지는 돌아가셨고요, 민이 엄마는 대구화교학교에서 국어랑 역사를 가르치세요. 그래서 민는 중국이나 대만에서 살지 않았어도 중국어를 정말 잘해요. 요즘 화교 친구들을 보면 중국어를 못하는 친구도 많이 있는데 민이는 좀 달라요. 민이 엄마가 역사를 전공하셨기 때문에 그런 영향이 좀 있다고 해요. 민이는 대구화교학교는 학생이 너무 적어서 경쟁할 수 있는 부산으로 전학 왔다고 하지만, 제 생각엔 민이 엄마가 같은 학교에 선생님으로 계셔서 불편하니까 부산으로 온 것 같아요.

그리고 한○연은 부산이 집이에요. 연이 부모님도 하단에서 중화요리점을 운영하고 계세요. 연이 엄마는 중국인이시고 아빠가 화교세요. 또 연이는 중국 청도 시에서 4살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살다가 왔어요. 매년 방학 때마다 한국에 들어왔었는데도 아직 한국말이 서툴러요. 어릴 때부터 계속 중국에서 살다 보니 한국어를 말할 기회가 거의 없었대요. 학교에서는 중국어로 수업을 하니까 상관없고 우리가 다 중국어를 잘 하니까 학교에서는 별 문제 없어요.

저도 중국에서 몇 년간 살았어요. 중국에 누가 있어서 간 건 아니에요. 제가 어릴 때 중국인이면서 중국어를 못한다고 중국어를 배우게 하려고 보내셨어요. 어학 교육을 받으려고 중국에 간 거죠. 그때는 제가 어려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같이 가셔서 집을 빌려서 생활했어요. 중국어를 배우러 중국에 갔을 때 한국 학생들도 굉장히 많았어요. 중국으로 조기 유학을 많이 오고들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한국어와 중국어 둘 다 어느 정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중국어나 한국어 어느 한 쪽이 더 편한 쪽은 없어요. 비슷해요. 저는 한국어를 먼저 습득한 경우니까요. 가족들이 중국어를 잘하니까 그런 영향도 있었죠.

학교생활은 그냥 그래요. 수업하고 기숙사에서 지내다 가끔은 친구들하고 시내로 외출하고 또 부모님 보러 광주 가고…… 특별한 것은 없어요. 그런데 학교가 차이나타운 중심에 있잖아요. 게다가 외국인 거리[텍사스 거리]와 붙어 있으니까 거리에 술집투성이죠. 말이 좋아서 외국인 거리지 9시만 되면 술집에서 여자들이 나와요. 10시에는 외국인 거리 통행이 제한되어 있는데, 특별히 관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요. 장사도 오히려 외국인 거리가 더 잘되는 것 같아요. 그냥 부르기 좋게 외국인 거리지 그냥 텍사스촌이에요. 이름만 다르게 해서 부른다고 이 거리가 좋은 이미지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차이나타운까지 술집이나 외국인 대상 상점들이 들어와 있어요. 차이나타운 거리 안에도 화교들 상점들로만 구성된 건 아니에요.

화교들이 장사를 하는 곳은 간판에 ‘화상(華商)’이라는 문구가 조그맣게 쓰여 있어요. 주로 구화교들이에요. 오래전부터 장사를 계속 해 오신 분들이죠. 학교 앞에 있는 신발원에서 파는 음식들은 정말 오래전 메뉴 그대로라고 해요. 그래서 옛날 생각이 나시는 분들이 음식을 주문하면 택배로도 많이 보낸다고 해요. 주 메뉴는 만두인데 공갈빵, 월병 같은 것들도 손님들이 많이 찾는가 봐요. 늘 주문이 넘쳐나요. 중국식 만두는 맛에서 한국 만두와 좀 차이가 있어요. 중국 음식도 한국 사람이 만든 것과 화교 음식점의 맛이 다른 것처럼요. 여기 중국 음식 맛있냐고요? 네 맛있죠! 하지만 저는 우리 집 것이 가장 맛있습니다. 헤헤.

우리 친척들은 한국에도 있지만 대만에 주로 살고 있어요. 다 화교이거든요. 그런데 친척 분들이 점점 대만으로 나가고 있어요. 아마 나중엔 제 가족만 남을 것 같아요. 저는 대만으로 대학을 가려고 해요. 그래서 대만에서 주민등록증을 취득하고 싶어요. 대만에서는 그게 가능하거든요. 어차피 성인이 되었을 때 국적을 선택해야 하는데 저는 대만 국적을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 대만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대만 국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면 많은 부분에서 한국 사람들에 비해 불평등한 대접을 받게 될 것을 아니까요. 제가 한국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 것과는 별개로 어딘가에 정당하게 귀속되고 싶어요.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한 나라의 완벽한 국민으로 살고 싶어요. 주민등록증이 중요하냐고요?

네, 그게 얼마나 중요한데요. 한국 사람들은 나이가 되면 자동적으로 갖게 되는 거라서 잘 모르시겠지만 그 카드 한 장이 없는 우리는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불편을 겪으면서 사는데요. 불과 몇 년 전에는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도 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그게 없으면 평생 떠다니는 피난민이나 다를 게 뭐예요. 내 나라가 없는 거잖아요. 대만 국적은 가지고 있지만 국적만 있지 주민등록증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대만에 가서 살아야만 주민등록증을 줘요. 저는 누가 ‘너는 어디 사람이냐’고 하면 화교라고 해요. 그리고 ‘국적이 뭐냐’고 하면 대만이라고 하고요. 연이는 중국 사람이라고 한대요. 그리고 민이는 자기는 그냥 화교래요. 화교만이 자기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서요. 우리는 같은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 달라요.

저는 화교 역사를 배우거나 한 적은 없어요. 누가 가르쳐 준적도 없어요. 그냥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 또 자라면서 주어진 상황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요. 지금 저희는 사실 완벽하게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어른들 말씀은 예전보다 정책적으로 규제가 많이 완화되기는 했다는데 잘 모르겠어요.

귀화를 하는 것도 한 부모가 한국인일 때와 모두 다 화교일 때의 조건이 다르다고 해요. 아직 저희들은 어려서 모르는 것이 많지만 점점 자라면서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는 경우를 목격하게 되거든요. 그럴 때면 정말 화가 나요. 저는 한국말을 할 때와 중국말을 할 때 한국 사람들이 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껴요. 아니 다르게 대우해요. 말도 더 함부로 하고 이를테면 무시하는 거죠. 저는 광주에서 살 때는 잘 몰랐어요. 거기는 화교도 그렇고 외국인도 많이 없어서요. 그런데 부산으로 와서는 그런 것을 많이 느끼게 되더라고요. 부산에서는 취업 비자로 들어오는 외국인도 많고 또 요즘은 중국 본토 사람들도 쇼핑하러 많이 오잖아요. 예전보다 거리를 다닐 때 마음 상할 때가 많이 있어요. 등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리는데 당해 보지 않으면 모를 거예요.

그냥 외국인이라 신기해서 그렇게 행동한다고요? 외국인이라 신기한 것은 저희도 이해해요. 하지만 그것은 ‘조롱’과 ‘경멸’이에요. 쇼핑을 하러 오는 돈 많은 중국 본토인들에게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앞에서 웃으면서 바가지를 씌우고요. 일하러 온 중국 사람들은 멸시를 해요. 연이도 부모님이 중화요리점을 해서 가게에서 일을 도와드릴 때가 있는데 사람들이 연이가 말하면 웃고 따라하면서 놀린대요. 그런 건 늘 있는 일이에요. 10대나 20대는 특히 심해요. 길에서 걷고 있는 저희들 뒤에서 “짱깨 새끼들, 집에 가서 짜장면이나 팔아”라고 해요. 한국 사람들에게 화교는 중국집이나 하는 사람들로 인식되어 있는 거죠.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라고 하지만 정말 중국집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던 부모님 세대의 현실과 상처들을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른들이 우리에게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는 당부나 부탁을 쉽게 저버리지 못하는 것 같아요. 직접 겪은 세월은 아니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소수일 뿐이라고요?

아뇨. 저희는 그런 말을 항상 듣고 있어요. 그래서 아예 국적을 바꾸고 한국 사람으로 살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아닐까요? 차별을 당하기 싫으니까 그냥 한국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거죠. 지방에 따라 좀 다르긴 한데요. 서울은 화교 인구가 가장 많으면서도 오히려 중화요리 집을 하는 화교는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해요. 전문직도 많고 중국어보다 한국어가 더 편한 사람들이 많다는 거죠. 민가 학교를 선택할 때 서울을 제외한 것은, 서울화교학교는 학생 수는 많은데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 것 같았다고 해요. 여기 부산화교학교는 그중에서 적당한 학생 수와 보수성을 유지하고 있는 편이에요. 부산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화교들이 보수적인 건 사실이죠.

그런데 이제 여기 학교 학생들도 순수 화교가 많이 줄어들고 있고 신화교가 늘어가고 있어요. 다문화 가정의 중국인 엄마의 아이들은 아빠가 한국 사람인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당연히 국적을 한국으로 선택해요. 또 조선족 아이들도 많이 들어오고 있어요. 국적이 중국이니까요. 그 아이들의 성향도 화교와 같진 않아요. 학생 수도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고 해요. 점점 한국 학교로 보내는 젊은 부모들이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사실 우리는 스스로를 중국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중국에서는 우리를 중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우리가 한국 사람인 것은 분명 아니지만 한국 사람들은 우리를 한국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죠. 언제까지 화교는 ‘중국집’으로 대변되어야 하나요?

사실 어른들은 중국이 공산화되기 전에 한국으로 오신 분들이세요. 그래서 지금 중국 사람들과 저희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대만 사람들과도 같지 않다고 생각하세요. 대만에서도 마찬가지고요. 그저 화교는 화교끼리 만나야 서로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떤 일이든 강요는 하지 않으시죠. 단지 어른들의 생각을 먼저 저희들에게 알려주세요.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 사람이든 중국 사람이든 또 외국인이든 상관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앞으로 대만에서 살려면 대만 사람이나 화교가 좋겠죠. 민나 연이도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될 때 화교나 대만 사람과 하려고 해요. 한국 사람과 결혼을 할 확률은 0%라네요. 둘은 저보다 훨씬 더 확고해요. 아마도 연이는 부산에서 살면서 한국어가 서툰 것 때문에 놀림을 당한 게 큰 것 같고, 민는 역사의식이 강한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가 화교 청소년의 표본은 아니에요. 우리는 대만 대학으로 진학해서 거기에 삶의 터전을 갖고자 하는 부류이고요. 다른 친구들 중에는 자신을 한국인으로 생각하는 부류와 한국 국적을 취득하려는 부류도 많이 있어요. 그런데 한국어도 중국어도 완벽하지 못하니 문제입니다.

5월말에 차이나타운 축제를 해요. 우리 학교에서는 남학생들이 탈춤을 준비하고 있어요. 전통 무용을 배우려고 대만에서 무용 선생님도 초빙했어요. 용탈과 사자탈을 쓰고 춤을 춰요. 지금도 매일 방과 후에 연습 중이죠. 저희 여자애들은 부채춤을 춰요. 한국과는 조금 다른 모습인데요. 나중에 오셔서 보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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