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45
한자 野球-社稷球場-
영어의미역 What do the baseball fans enjoy at Sajik Stadium?
분야 생활·민속/생활,문화·교육/체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사직로 45[사직동 930]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수한

[롯데 아니 야구 우찌 됐노?]

롯데 이야기지만 해태 김응룡(金應龍) 감독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특이한 음색 덕분에 한때 개그맨 김현철이 당신의 성대모사로 대박을 날렸다. “응~~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본인이 밝힌 바로는 1997년 우승 이후 일본 프로 야구팀 주니치 드래건스로 트레이드 된 두 선수를 아쉬워 한 심경을 토로한 것이라고 한다. 실재로 김 감독은 그 후로 해태를 떠날 때까지 플레이오프에 단 한 차례도 진출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롯데 자이언츠의 분위기는 그보다 더 심각하다. “대호도 가고 성흔이도 없고 주찬이도 없고 민호는 어찌 될지 모리는”, 말 그대로 점입가경에 설상가상이다.

2012년 사직 구장 홈경기 66게임에 달려온 부산 팬들은 무려 138만 명, 참으로 구도(球都)다움이 물씬 풍겨나는 인원수다. 그런데 2013년 부산 사람만의 ‘불뚝심’이 마침내 폭발했다. “쎄리라”도 화끈함도 “단디 하는” 꼼꼼함도 찾아 볼 수 없는 어정쩡한 야구 때문인지 사직 구장을 찾은 관중은 시즌 홈경기를 통틀어 80만 명, 거짓말 조금 보태서 작년에 비해 딱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롯데는 30년 한국 프로 야구의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원년 멤버, 한 번도 연고지나 팀명을 바꾸지 않은, 말 그대로 역사와 전통의 명문 구단이다. 그러나 기록경기 야구에서 롯데가 명문 구단이 될 만한 명분은 찾을 수 없다. 마지막 우승의 기억마저 가물거리고 연속 4년 최하위 기록을 보유한팀이 바로 롯데다.

이런 연고팀의 실망스러운 행보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야구장을 누비는 원정대와 사직 구장을 가득 채우는 부산 팬들의 열렬한 지지야말로 해태나 삼성에 한참 뒤떨어지는 롯데를 ‘가을 야구’의 전설로 우뚝 서게 만든 원동력이다. V3! 지금처럼 8년에 한 번씩이라도 우승하면 백만 아니 더한 것도 감당할 수 있다는 부산 팬들은 소박하다 못해 바보스런 구석도 있다. 무엇이 늘 배신당하고 그리고 다시 실망하면서도 야구장을 떠나지 못하는 부산 갈매기들을 이토록 절망하게 했을까? 아니 다시 물어보자. 부산의 야구팬, 그들이 진정 사직 구장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이탐’, ‘홍큐’, ‘낭큐’를 아시나요?]

부산에서 야구 이야기는 롯데가 아닌 고교 야구부터 시작해야 한다. 7, 80년대 고교 야구의 4대 메이저는 대통령배,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기가 있었다면 부산에는 국제신보[지금의 국제신문]가 주최한 화랑대기가 유명하다. 지금이야 고교 야구는 모교 학생이나 선수, 학부모 그러니까 보는 사람만 보는 스포츠가 되어 버렸지만 전성기 때의 사정은 달랐다. 당시 방송 3사[KBS·MBC·TBC]가 앞 다투어 고교 야구를 중계했고 아무리 채널을 돌려도 야구만 나오던 날도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행여나 모교가 전국 대회 결승에 진출하기라도 하면 버스를 대절해 동대문 구장까지 진출했던 까까머리 응원단이 요즘으로 치면 원정 응원의 원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포츠에 스타가 빠질 수 없는 법, 당시 고교 야구를 지배한 선수들 가운데 야구 천재 박노준(朴魯俊)이 있다. 지금 프로 야구에서는 지명 타자제 덕분에 홈런 치는 투수를 보는 것은 아주 드물지만 에이스 투수가 4번 타자를 할 수 있던 야구가 고교 야구였고 그 선수가 박노준이었다. 박노준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발군의 외모 덕에 여고생 팬들이 유독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1981년 복합 골절로 입원한 박노준의 병실 밖은 여학생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야구만 놓고 보면 고교 야구가 낳은 최고의 선수 가운데 한 명이 바로 ‘무쇠 팔’최동원(崔東原)이다. 1974년 고교 1학년이던 최동원은 이미 경남고등학교의 선발 투수였고 그의 오른팔은 50만 원의 보험이 들어 있었다. ‘황금의 팔’, ‘노히트 노런’ 등 애칭도 많았던 그의 공식 별명은 바로 ‘무쇠 팔’이었다. ‘MBC 만화 영화 마징가 제트(Z)’의 주제가를 아시는 분은 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무쇠 팔, 무쇠 다리, 로켓 주먹” 그리고 당시 인기 외화 「6백만 불의 사나이」의 팔 한쪽은 100만 달러였으니 요즘 영화로 치면 최동원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였다.

현실의 마운드에 최동원이 있었다면 만화 속 야구장에는 이강토와 오혜성 그리고 마동탁이 있었다. 허영만(許英萬)의 만화 『태양을 향해 달려라』 그리고 이현세(李賢世)의 『공포의 외인 구단』은 여학생들의 로망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함께 중고생들의 필독서였다. 정수라(丁秀羅)가 부른 영화 『공포의 외인 구단』 주제곡 한 구절도 문득 떠오른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만화 속 우리의 주인공이 필사의 노력으로 타자 앞에서 갑자기 솟구치는 마구를 완성한 것을 보고 투구 폼을 언더핸드 드로우로 전향하던 귀 얇은 투수들도 참 많았다.

월급날이면 거나하게 취하신 아버지 손에 들려 있던 노란 봉투에 담긴 통닭 한 마리 아니면 동네 야구 4번 타자는 그 시절 개구쟁이 사이에서 하나의 로망이었다. 가을걷이 끝나고 논바닥에 쌓아 놓은 볏단이 홈 플레이트가 되고 이쪽저쪽 논두렁을 1루와 3루 삼아 벌어진 야구 경기는 점심 먹으러 각자 집으로 갈 때 빼고는 온 종일 계속되었다. 강타자가 없는 편에 1명 더 끼워주는 이상한 규칙이 있던 경기는 심판도 없이 ‘됐나?’, ‘됐다’ 구호를 시작으로 시작되었다. 한창 진행 중인 경기는 젖은 논바닥에 빠진 신발 한 짝 때문에 “아이탐”으로 중지되기 일쑤였고 연두색 테니스공을 주먹손으로 날려 버리던 일명 ‘손야구’는 그 때 그 꼬맹이들을 다시 만난다면 꼭 다시 해보고 싶은 추억의 경기였다.

[부산 야구를 만나다]

그리 오래전도 아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아이들의 지상 과제는 학원이 아니라 운동이었다. 그래서 운동 잘하는 친구는 동네 자랑거리이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필자에게 그 친구 그러니까 요즘의 ‘엄친아’가 바로 동갑내기 외사촌이었다. 키는 나보다 한참 작은 이 녀석은 권투만 하면 내 코를 납작 눌러놨다. 외삼촌의 사업 때문에 우리 동네로 이사 온 사촌은 롯데 팬 그러니까 ‘롯데 자이언츠 창단 어린이 회원’이었다. 파란 헬멧에 야구 잠바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보기 힘든 일제 야구 ‘빳다’를 갖춘 녀석의 등장은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손야구에 ‘빳다’와 투수가 등장하면서 논바닥 야구장 풍경도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견제구가 들어가고 홈런이 터지기 시작했다. 1루수가 신경식(申慶植)의 학 다리를 흉내 내기도 하고 보내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알 수 없는 사인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롯데 팬이던 사촌이 코믹하게 재구성한 최동원의 투구 폼이었다. 누가 봐도 역동적인 와인드업의 소유자 최동원은 그 해 혼자 힘으로 롯데의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다음 해 상급 학교로 진학한 우리들은 시내에 있는 중학교로 흩어지면서 동네 야구도 시들해져 갔다.

1991년 봄 대학생이 된 나는 본의 아니게 부산 시내 대로변에서 최동원과 마주쳤다. 유니폼이 아닌 정장 차림이었지만 짧게 깍은 머리에 여전히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금테 안경을 쓴 그는 민주당 부산광역시 의원 후보였다. ‘건강한 사회를 향한 새 정치의 강속구’ 그의 슬로건은 역시 야구였다. 김영삼(金泳三)의 ‘삼당 합당’에 반대한 노무현(盧武鉉)이 이끈 꼬마 민주당 후보, 최동원은 그 해 선거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다음 해 군대에서 롯데의 우승을 TV로 보게 되었다. 1984년의 영웅은 단연 최동원이라면 1992년 우승의 주역들은 그 이름도 화려하다. ‘외로운 황태자’ 윤학길(尹學吉), ‘슈퍼 베이비’ 박동희(朴東熙), 역동적인 타선의 ‘탱크’ 박정태(朴正泰), ‘자갈치’ 김민호(金旻浩), 그리고 ‘호랑나비’ 김응국(金應國)까지. 그런데 빙그레를 응원하던 고참들도 감탄한 투수가 한 명 있었다. 선동열(宣銅烈)도 한수 접어준다는 위력적인 슬라이드를 구사하는 고졸 신인 염종석(廉鍾錫)이었다. 부산에서 1년 대학 다닌 경력 때문에 ‘롯데’로 지목된 내가 봐도 위력적인 투구 덕분에 괜히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2008년 3월, 본의 아니게 부산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부모님이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낙향하시면서 어부지리로 무상 거주 할 수 있는 집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제동 부산교육대학교 맞은 편 한 아파트에서 나는 다시 부산 야구와 마주했다. 어디인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아련하게 들려오는 절규와 함성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 집에서 지하철 3코스는 가야 닿을 수 있는 사직 구장에서는 제리 로이스터(Jerry Royster)가 이끄는 ‘두려움 없는 야구’가 시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야구 도시 부산에 이사 온 게 실감나는 순간이다.

이글을 쓰면서 『거인의 추억』이란 제목의 최동원 평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책 마지막에는 ‘한 장의 사진’이란 부록을 발견했다. 한 때 인터넷에서 잠잠한 감동을 불러 일으켰던 어깨와 팔꿈치 수술 자국으로 엉망이 된 염종석이 웃옷을 벗고 찍은 사진이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사했지만 원래 살던 아파트 몇 층 위에 그 염종석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2층에 살던 터라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훤칠한 키의 그를 몇 번 본적이 있지만 차마 말을 걸지 못했다. 필자의 연배가 높기도 하고 낯을 가리는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염종석은 ‘영원한 신인왕’답게 지나치게 ‘동안(童顔)’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런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었다니. 혹여 그 아파트를 지나다 다시 마주치게 되면 꼭 한마디 해주고 싶다. “저 팬입니다.”

[야구장 가는 길]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종합운동장역으로 향한다. 롯데 선수들이 눈 수술 받은 병원, 롯데 선수들이 먹는 홍삼, 롯데 선수들이 다니는 한의원, 정말 ‘롯데스러운’ 부산의 지하철이다. 하지만 가을 야구를 볼 수 없는 올 하반기 이 광고들도 조만간 내려질 것이다. 그라운드 위 “롯데의 강민호”가 상상이 되지 않는 강민호(姜珉鎬)의 수줍기도 하고 어색한 다음 역을 알리는 멘트가 흘러나온다. 이쯤해서 이대호(李大浩) CF 이야기를 어찌 하지 않을 소냐. 193㎝에 130㎏의 몸으로 날린 대사가 “요~ 요~ 뜨겠네”. 대사에 곁들인 어색한 율동[?]에 실소가 절로 나온다. 3세대 거인들이 이 정도니 그 이전 세대들이 카메라 앞에 선 장면은 어떠했을지 짐작된다. 화끈한 경기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순박한 말투와 투박한 몸짓, 정이 많아도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부산 사람의 자화상 그대로다.

사직 구장은 사직역과 종합운동장역 중간쯤에 있다. 느낌으로는 500미터는 걸어가야 하는 것 같은데 매표소까지 거리는 사직역이 가까운 것 같다. 하지만 요즘은 종합운동장역에 내린다. 9번 출구를 나와 300미터 정도 직진하면 자칭 ‘집안 살림에 더하기’가 된다는 대형 마트를 들러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야구장 밖에서 파는 통닭의 양과 질에 불만이 많은 젊은이들은 대개가 이곳을 거쳐 간다. 대구 연고팀 유니폼 입은 몇몇 젊은이들이 이곳을 찾았다. 쭈뼛쭈뼛하는 모양새가 새내기 원정대인 듯싶다.

야구가 있는 날이면 가끔 지하철역 부근에서 사직 야구장 가는 길을 묻는 타지 말투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몇 해 전 만 해도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다. 대범하게도 초대형 마트 건너편 노상부터 각종 야구 용품, 그러니까 먹거리부터 응원 도구가 가득 실린 손수레들이 활주로 유도등처럼 야구장 가는 길을 안내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일명 ‘스머프 유니폼’이라 불리는 1980년대 롯데 선수들의 하늘색 원정 유니폼의 백넘버만 따라가면 어김없이 사직 구장 출입구를 만날 수 있었다.

전성기 때만 해도 매표소 입구가 다가올수록 ‘스머프’들의 속도도 점점 느려졌다. 매표에는 원래 시간이 걸리지만 야구장 좌석이 세분화 되면서 지체도 자연 더 늘어난 것이다. 그래서 한창때는 아예 전날부터 자리 잡고 있는 ‘롯빠’들과 자기 영역을 침범당한 암표상 사이의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원래 매표소로 승천하는 수동 에스컬레이터 진입로에는 일명 ‘갈매기 타임즈’를 파는 아저씨들이 수호신처럼 지키고 서 있었다. 구덕 구장 시절, 전날 경기 결과와 팀 성적, 선수 정보 등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시원찮은 스탠드로부터 양복바지를 지키기 위해 넥타이들이 사기 시작한 신문이었다. 지금은 그 용도를 달리해 응원 도구로 사용된다지만 이 또한 롯데의 성적이 좋을 때 이야기다.

올해 롯데의 플레이오프 진출이 좌절된 이후로는 안 그래도 시원치 않은 매출이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원래 2층으로 올라가는 구름다리 양쪽을 지키던 것이 이제는 매표소가 있는 왼쪽에서만 판매를 하고 있다. 필자가 지켜본 2시간 남짓 신문을 사가는 사람은 열손가락을 겨우 채울 정도였다. 한부에 500원 하는 신문을 팔 때마다 조그만 고무줄을 관중 손에 쥐어준다. 혹시나 신문지로 응원용 총채를 만들 때 흩트리지 않게 묶으라고 나눠 준다고. 생계가 궁금해 에둘러 물어보아도 답이 없다. 한때 대학가에서 호프집도 하고 대학 부설 최고 경영자 과정도 수강할 만큼 여유를 부린 적도 있었다는 신문 가판대 아저씨. 그가 기억하는 롯데의 전성기는 제리 로이스터가 감독으로 있을 때로 혼자서 7,000부까지 팔아봤다고 한다. 롯데 성적과 부산 경제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롯데가 이기면 소주 1병 공짜, 지면 소주 2병이 공짜다[?]. 롯데가 연승하기라도 하면 장사가 더 잘될 것 같지만 정답은 아니란다. 주인들이 가게 문 닫고 야구 보러 가기 때문이다.

고교 야구, 실업 야구, 프로 야구까지 그리고 구덕에서 사직까지 함께 했던 많은 동료들 가운데 이제 혼자 남아 낡디 낡은 신문 가판대는 야구가 시작되기도 전에 창고로 향했다. 부산 야구 명물의 쓸쓸한 퇴장을 뒤로 하고 출입문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아니나 다를까 통닭 아줌마들의 수다와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암표 흥정을 뒤로 하고 검색대에 가방을 올려놓는다. 맥주 이외 반입이 되지 않는 규정이 있지만 여전히 경기장 주변에는 소주와 막걸리가 그럭저럭 팔린다. 한때 부산시가 사직 구장을 직영할 때는 소주 반입을 철저하게 단속했다. 그래서 각가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단속을 뚫고 반입된 소주는 날개 달린 듯 팔리곤 했다. 워낙 귀하게 들여온 것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워낙 감질나게 맛보는 한 모금이라 그런지 소주 파는 아저씨와 주고받는 접선 암구호는 “보약 있어요? 보약”이었다.

[부산광역시 동래구 사직동 930번지]

부산이 구도(球都)라면 사직 구장은 부산 야구의 메카와 같은 곳이다. 1970년대 허허벌판 미나리꽝을 갈아엎고 만든 사직 구장을 따라다니는 수식어 가운데 “3만 석 규모 초대형 야구장”이란 호칭이 있었다. 1985년 10월에 완공된 사직 구장은 원래 3년 전에 완공된 잠실 야구장에 이은 두 번째 대형 구장이었다. 최근 잠실 구장이 좌석 수를 줄이면서 사직 구장은 대한민국 제2 도시에 있으면서 우리나라 ‘최대’ 구장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현재 사직 구장의 좌석도 2,000석이 줄어든 2만 8,000석 정도로 줄여 고급화 전략을 취하고 있지만 최근 급증하는 여성 팬들에 대한 배려는 부족한 편이다.

야구장으로 사직 구장은 두 가지 특색이 있다. 일단 관중들이 선수들의 눈높이에 경기를 볼 수 있는 구조라는 장점을 들 수 있다. 원래 다목적 구장으로 설계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뚜렷한 이유가 없다면 굳이 익사이팅 존을 고집하지 않을 만큼 내야석의 전망도 훌륭하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지만 “롯데 1루 코치는 내야석 관중이 본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물론 두 좌석 간 요금 차이는 꽤 난다. 사직 구장도 요즘은 수익 제고 차원에서 포수 바로 뒤쪽 좌석인 프리미엄석은 1인당 4만 원, 가족석은 일인당 3만 원으로 차별화하고 있다.

1만 원 짜리 C석까지 지정석으로 한 것은 누가 봐도 얄미운 자리 ‘찜’을 막으려는 것이다. 응원 단상 앞뒤는 소위 ‘명당자리’로 개찰구가 열리자마자 질주를 시작하는 열혈 팬들이 노리는 바로 그 자리이다. 가파른 계단 때문에 안전도 문제지만 마치 범죄 현장처럼 청 테이프를 길게 붙여 놓는 것 때문에 관중들 간에 충돌이 잦았다. 얼마 전 KBS ‘1박 2일’ 팀이 미리 촬영 협조를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몰상식한 행동으로 오랫동안 구설수에 오른 것도 바로 그 자리의 ‘내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방송 출연이 꿈인 연인이나 가수 지망생은 S-다, S-라석 예약은 필수 되겠다.

그리고 이 모든 삼라만상의 번잡함을 초월한 자리가 있었으니 단돈 7,000원에 팔리는 외야석 그 이름도 반가운 ‘자유석’이다. 부산 중심을 가로 지르는 온천천의 자전거 행렬 가운데 나이 지긋한 어른신들 질주의 동반자, 트랜지스터라디오! 원래 야구장 필수품이던 것이 직종 변환한 것이다. 사직 구장 전광판은 외야석 안에 우뚝 서 있는 관계로 보조 전광판이 먹통이 되면 외야석도 깜깜 무소식이 된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이어폰이 달린 소형 라디오였다. 구덕 구장 시절 그 외야석 요금도 없어 길을 가며 중계를 듣다 난데없이 경찰서로 끌려 간 팬을 만났다. 경찰관이 대뜸 물었단다. “누구하고 접선중이야! 너 간첩이지?” 중계도 듣고 나 홀로 해설도 하는 ‘원맨쇼’가 직업 정신으로 똘똘 뭉친 그분들에게는 그렇게 보였나 보다.

사직 구장은 관람 공간이 경기 공간에 바짝 다가온 통에 1루에서 3루 사이 펜스 공간이 국내에서 가장 짧고 중앙 펜스까지 거리도 118미터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홈런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거의 5미터에 달하는 외야 펜스 덕분이다. ‘똑딱이 타선’ 혹은 ‘소총 타선 부대’로 불리던 롯데 전성기의 타격 스타일은 사직 구장에 맞게 진화해온 결과였다. 그러나 진화의 장점은 예측 불허의 돌발성에 있듯이 거꾸로 진화해 온 생존 방식도 있으니 바로 ‘조선의 4번 타자’ 이대호다. 2007년 4월 21일 현대 유니콘스 정민태(鄭珉台)를 상대로 150미터 장외 홈런을 걷어 올린 것이다.

사직 구장에서 홈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그 유명한 국민 타자 ‘이승엽(李承燁)과 고의 4구’ 사건이다. 2003년 55개로 아시아 홈런 신기록 달성을 눈앞에 둔 사직 구장 외야는 때 아닌 잠자리채 부대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말이 잠자리채라고는 하지만 얼핏 멸치 떼 퍼 올리는 어망도 눈에 들어왔다. 4-2로 뒤진 8회 1사 2루에서 이승엽이 타석에 들어섰지만 김용철(金容哲) 감독은 걸러 내기 사인을 지시했다. 그 순간 경기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경기는 1시간 반 가량 중단되었다. 감독의 해명이 있고 서야 경기를 진행할 수 있었지만 롯데 팬들은 분을 삭이지 못했다. 몰론 이들의 분노는 삼성에서 지급하는 3,000만 원 보상금이나 공에 메겨진 수억 원의 현상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부산말로 ‘앗사리’하지 못하고 ‘얍삽한’ 야구가 보기 싫었던 것이다. 짐작컨대 부산 사람들은 롯데가 아니라 야구를 더 사랑한 것은 아니었을까.

* 앗사리는 원래 일본말 앗사리(あっさり)로 시원하게, 깨끗하게 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 부산에서 ‘앗살하다’는 뒤끝이 없이 화끈하다는 부산 ‘싸나이’들의 심성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인다.

[지상 최대의 노래방, 사직 구장]

허구연(許龜然) 해설 위원은 사직 구장을 찾을 때마다 이곳을 ‘세계에서 제일 큰 노래방’이라는 추겨세운다. 1만 원 정도만 있으면 대여섯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은 야구장뿐이라는 것이다. 백번 지당한 말씀이지만 몇 마디 더 거들어 보면 사직 구장은 어른들의 놀이터도 된다. 종합운동장역 지하철 문이 열리는 순간 어른들의 소풍이 시작되는 것이다.

혹시 야구팬이세요? 아님, 부산 시민이세요? 야구팬이 아니라도, 부산 시민이 아니라도 상관없어요. 저와 함께 사직 야구장 한번 가보지 않을래요? 사직 구장을 다녀와 본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감히 말씀드릴게요. 한번 가보시면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3~4시간 동안 모든 스트레스를 다 풀 수 있고, 다음에 또 오고 싶어질 겁니다. 거긴요, 단순히 야구장이 아니라, 흥에 젖은 사람이 있고, 정이 있고, 노래가 있고, 음식이 있고, 춤사위가 있는 한판 축제의 마당이에요.[「아무튼, 사직 구장에 가보셨나요」, 『한겨레 21』, 2008. 5]

즐거움과 위안을 동시에 줄 수 있는 그런 곳이 야구장이라면 사직 구장도 처음부터 그런 찬사에 어울리는 야구장은 아니었다. 구덕 구장이 오래된 골수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통제 아래 있었다면 사직 구장은 고삐를 차보지 않은 야생마를 연상케 했다. 정돈되지 않은 경기장 분위기와 함께 1984년 우승의 여세를 몰아 새 구장으로 옮겨온 롯데의 성적은 부진의 연속이었기 때문이었다.

롯데가 경기에 지는 날이면 누군가 쓰레기통을 들고 그물 위로 기어오르는 것을 신호로 성난 관중들이 구단 사무실로 몰려가 싸움판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직원과 싸우고 상대팀 팬들과 싸우고 응원단장과 싸우고 자기들끼리 싸우고 이유는 몰라도 옷은 왜 그리 훌렁훌렁 벗어 던지는지 진풍경 아닌 진풍경이 벌어졌다. 심지어 무슨 시위 현장도 아니고 선수단 버스 가로막는 관중 해산시키기 위해 전경들이 최루탄을 쏴야 하는 일들이 하루걸러 일어났다.

새로 지은 경기장에 구태가 만연할 즈음 휘파람 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총잡이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처럼 사직 구장을 구원한 것은 다름 아닌 ‘부산 갈매기’와 사설[?] 응원단장들이었다. 구덕 구장 시절 롯데의 대표 응원가 조용필(趙容弼)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응원에 활기를 넣어 주었다면 롯데의 어이없는 경기에 울화가 치밀어 오를 쯤 어디선가 들려오는 「부산 갈매기」는 관중들의 웅성거림을 진정시키고 경기에 집중하게 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있었으니 요즘으로 치면 응원 자원봉사자들이었다. 사직 올드 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들의 이름은 유퉁과 살살이 아저씨. 원래 사직 구장 앞에서 심장병 어린이 돕기 홍보를 하고 있던 지역의 연극배우 유퉁은 누군가 건네준 입장권 때문에 야구장에 처음 들어가게 되었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받은 충격은 야구가 아닌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때는 야구를 보는 것보다는 한풀이하러, 화풀이하러 구장을 찾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경기장 질서가 말이 아니었다. 술을 마시고 싸움을 벌이는 관중들이 너무 많았다. 경기가 끝나면 구장 전체가 쓰레기장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싶었다. 학교 다닐 때 응원단장도 해봤고 배우 수업을 하고 있던 때라 직접 응원에 나서 경기장 질서를 바로잡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독지가의 지원을 받아 옷감을 사고 피에로 옷을 손수 만들었다. 사직에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응원을 시작하자 경기장 폭력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 [정범준, 『거인의 추억』 중에서]

지금처럼 웰빙이나 여가라는 개념이 부재한 시절, 오로지 술과 젓가락 장단이 유흥의 전부인줄 알았던 그 때 그 시절이었다. 요즘도 아주 드물게 취객의 돌발 행동이 벌어지지만 이전만큼 집단적이거나 폭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최근에는 조지훈이란 걸출한 응원단장의 카리스마와 전 구단에서 가장 많은 경비 비용을 지불하는 구단의 배려로 사직 구장은 오로지 야구와 응원만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그리운 추억이지만 롯데가 이기는 주말이면 사직 구장은 주말 매진의 신기록이 연일 갱신되었다. 그리고 그 열기의 정점에 있었던 2008년, 야구에 도통 관심 없어 보이는 영국 방송 BBC가 감탄한 인상적인 응원이 펼쳐졌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세계적으로 ‘부산은 야구’란 상품을 만들어 낸 것은 부산 사람들의 목소리, 신문지, ‘봉다리’였다. “마! 마! 마!” 롯데 타자를 향한 위협성 투구나 1루 주자 견제구가 던져지면 득달같이 달려오는 응원 구호다. 아마 1루를 가장 많이 애용한 전준호(田埈昊)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롯데의 극성팬은 전준호가 1루만 나가면 무조건 “띠라 띠라”를 외쳤다. 심지어 운동회 때나 쓰던 출발 신호용 딱총도 등장했다. 자연 투수의 견제도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가 ‘임마’인지 ‘하지마’ 인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때부터 시작된 마! 마! 마! 요즘은 내성이 생긴 상대팀 응원단이 ‘왜!’ 로 맞받아치기도 한다. 한 때 걸 그룹 Miss A의 “Shut up boy"로 다시 맞받아치던 롯데 팬들은 원정팀 배려 차원에서 하정우(河正宇)의 명대사 “살아있네”로 수위를 조절했다고 했다고 한다.

사직 응원의 정점은 역시 신문지와 머리에 뒤집어 쓴 ‘봉다리[봉지의 부산 사투리]’ 그리고 이 두 가지 ‘원투 펀치’를 장착하고 부르는 「부산 갈매기」가 울려 퍼지는, 애국가 부를 때 안 일어나도 괜찮지만 ‘부갈’ 부를 때 안 일어나면 ‘사직 아재’가 뒤통수를 날린다는 8회가 아닐까. 신문지와 ‘봉다리’, 신선한 것 같지만 왠지 ‘짠한’ 구석이 없지 않아 있다. 원래 실업 야구 시절 방석이나 주안상 깔개로 쓰던 신문지는 흥분한 관중들 손에 들린 채 하염없이 휘날리던 신세. 지금은 아주 곱게 반으로 접힌 채 잘게 찢어 먼지떨이 형태의 ‘갈매기 총채’로 거듭났다.

요즘 사직 구장에는 조금 과장해서 남자 반 여자반이다.[실제로는 40% 정도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일단 마구마구 피어오르던 담배 연기가 사라진 것이 가장 큰 변화이다. 오히려 장내에서 담배 피는 사람들이 곱게 술만 드시던 부부 동반 어르신께 봉변당하는 바람직한 모습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람 빠진 찐빵 같던 ‘봉다리’가 ‘사직녀’의 손끝에서 미키마우스, 베트맨, 피오나, 리본 모양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야구장이 여성들에게 홀가분하게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아직은 ‘작정’하고 가야되는 도전의 장소이다.

[“왜 야구를 좋아하죠?” “마요”]

지금도 사직 구장 앞마당은 아이들의 놀이터다. 자전거, 전기 오토바이 그리고 이름도 잘 모르는 각종 탈 것들이 종횡무진이다. 4살 난 꼬맹이부터 고(高) 3도 울고 간다는 중(中) 2 학생들을 포함해 연령대도 다양하다. 사직 구장 앞마당은 유흥가와 아파트촌이 가로막은 도심 속 유일한 해방구 같은 곳이다. 편견인지 몰라도 부산 남자를 정의 할 때 사례로 드는 퇴근 후 집안 풍경이 있다. “아는?”, “밥도!”, “자자” 여기에 야구 시즌이 돌아오면 “아는?”, “밥도!”, “야구는?”, “자자” 가 된다고 한다. 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런 분위기에 익숙한 아이들이 아버지뻘 삼촌뻘 되는 어른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을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가 바로 야구장이었다.

이미 하는 야구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보는 야구 역시 재미있지만 야구 보러 온 어른들이 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던 곳이 80년대와 90년대 초반의 사직 구장이었다. 더욱 매력적인 것은 먹을 거리였다. 소풍 때나 볼 수 있던 김밥, 사이다, 과자는 네 것 내 것이 없었고 롯데가 이기는 경기라면 통닭과 족발을 맛보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 때 닭다리 하나를 건네주던 아저씨는 교복 입은 학생들에게 항상 이런 말을 건네곤 했다. “학생들 수고 많네.” 수고는 무슨 소위 ‘땡땡이’ 치고 온 죄인들을 격려해주는 아저씨에게는 속으로만 미안함을 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한창 호기심 많을 학생들이 처음 술을 배운 것도 사직 구장 전광판 아래쪽이 아니었던가.

가끔 야구장에서 같은 학교 선생님을 만난 순간처럼 난처한 경우도 없다. 아마도 보림 극장이나 구포에 있는 성인 영화 전용 극장으로 학생 지도 나가 있어야 할 선생님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운이 지지리도 없었던 한 녀석은 하필 중계 카메라에 덜미를 잡힐 줄이야. 사정이야 어찌되었던 다음날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학생 사이에는 암묵적인 협상이 이루어진다. 체벌의 강도는 롯데의 경기 내용과 성적에 따라 정해졌는데 체벌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롯데의 승리뿐이었다. 자율 학습을 하더라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라디오 이어폰을 소매 속으로 넣어 감시의 눈을 피하긴 해도 홈런 한방에 터져 나오는 탄성과 만세의 물결 속에 ‘야자’는 자동으로 종료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갈고 닦은 야구 사랑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는 곳은 다름 아닌 군대 내무반이다. 이등병, 일등병, 상병까지 감추고 있던 야구 본색이 드러나는 건 내무반장을 갓 달기 시작한 후부터이다. 롯데 팬 왕고참이 점령한 내무반 TV 채널은 자연 야구 경기에 고정되고 후임병들은 출신지역 불문하고 억지 춘향 롯데 팬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장면이 신기했는지 순찰 중이던 선임 하사가 혀를 끌끌 차며 말하기를 “군대 와서 야구 보는 녀석들은 롯데밖에 없다”는 후일담도 전설 아닌 전설로 전해진다.

확실히 야구는 부산 사람들에게 특히 어린이들에게 특별한 추억이다. 한명숙(韓明淑)의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동네 강아지들도 부르고 다녔던 1960년대 중반. 전국 최강이었던 대신초등학교 야구부가 서울로 시합을 떠나던 날, 당시 부산시장이던 김현옥(金玄玉)이 어린 야구 부원들에게 노란 점퍼 한 벌씩을 선물하며 선전을 기원해 주었다. 어느 도시의 시장이 초등학교 야구 부원들에게 점퍼를 맞춰주며 출정식을 열어줄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훗날 이 어린이 가운데 한 명은 부산 최고의 야구 해설가로 활약하게 된다]. 어린이 선수뿐만 아니라도 보통 아이들도 야구 문화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롯데가 우승하는 해에는 기념 책받침이 전교생에게 일괄 지급되는 도시가 부산이었다.

부산 사람의 야구와 자식 사랑의 함수 관계는 사직 구장 ‘아주라’ 문화를 통해 풀 수 있다. ‘아주라’는 파울 볼이나 홈런이 났을 때 공을 잡은 어른들에게 ‘아이에게 공을 주라’는 말을 부산 사투리로 재구성한 것이다. ‘부산 싸나이’의 아들딸로 태어난 이상 사직 구장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수 코스였다. 김밥 담은 찬합 들고 머리에 배 모양 고깔모자를 쓰고 때로는 아버지가 일용할 소주를 양말 속에 숨겨야 하는 특수 임무도 주어졌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사인볼 하나 받아주겠다고 사직 구장을 동분서주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이들이 지금껏 보지 못한 당신의 진심을 발견하는 순간이 아니었던가.

야구장은 단순히 야구를 즐기는 곳이기도 하지만 과묵하기로 정평이 난 경상도 아버지들의 숨은 교육열과 ‘남자 만들기’에 대한 욕구가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다. 일단 일부 극성팬들의 추태 앞에 의연히 “아[이가] 있다.”, “아[이가] 본다.”를 목청껏 외치는 아버지는 만화 영화 속 악당들을 응징하는 정의로운 주인공과 오버랩 된다. 그 순간 어디선가 시작되는 ‘아주라’는 어른 간의 추태를 막자는 신사협정인 동시에 언젠가 자기에게 돌아올 그 순간을 기다리는 아버지가 공동의 목표를 함께 하는 동지로서 자식을 받아들이는 ‘그들만의 성인식’이라고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프로 야구 한 경기당 평균 3~40개씩 날아오는 파울 볼과 이벤트 볼을 합산하면 한해 야구장 내·외야석에 뿌려지는 공만 해도 3,000개가 넘는다. 그렇다. 사직 구장은 적어도 3,000개의 야구공 숫자만큼의 아빠를 아버지로 ‘아’들은 어른으로 성장시키고 두 사람 모두에게 절대 야구를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운명의 공간인 것이다. 혹여 부산에 와서 사람들에게 왜 야구를 좋아하냐고 묻지 마시라. 추억과 운명은 공유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 그래서 부산 사람들은 야구를 ‘마’ 좋아한다고 웃는다.

[부산은 롯데 아닌 야구팬들의 도시]

“세계에서 가장 열광적인 스포츠 팬의 응원을 보러가라.” 야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영국 사람들의 방송사 BBC가 자사 홈페이지에 한국의 ‘제2 도시’ 부산의 볼거리를 소개한 기사의 내용이다. 분명 부산에 가면 야구나 그 선수들이 아니고 야구팬과 그 응원 문화를 보러 가라고 말하고 있다. 말이 나온 김에 몇 분의 소회를 더 들어보자.

“야구를 하면서 이렇게 열정적인 팬들의 모습을 본적이 없다. 미국에 돌아서 이런 팬들을 두고 야구를 했다고 자랑하고 싶다.”[전 롯데 선수 존 갈]

“메이저 리그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찾아 볼 수 없다.”[전 롯데 투수 라이온 사도스키]

“유럽의 축구 열기도 이 정도는 아니다.”[리버플 출신의 외국인]

“와우(Wow) 정말 대단하다. 에너지가 넘친다. 7회에나 8회에도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팬들은 처음이다. 아름답고 행복하게 야구를 할 수 있는 곳이다.”[전 롯데 구원 투수 카브레라]

“보스턴의 열광적인 팬들과 매우 비슷하지만 이런 독특한 응원 문화는 처음이다. 매우 개성이 있고 이 팀을 응원하지 않더라도 오고 싶게 만드는 곳이다.”[사직 구장을 찾은 외국인]

“말로만 듣다가 실제로 보니 정말 대단하다. 베네수엘라 플레이오프를 보는 것 같다.”[남미 출신의 관광객-용병 에두아루도 리우스]

야구 하나만 놓고는 ‘제2 도시’를 인정하지 않는 그래서 부산은 야구의 수도이다. ‘야생야사(野生野死)’, 야구에 살고 야구에 죽는 사람들, 그래서 이 부산 사람들 가운데 생체 리듬도 야구에 맞춰져 있는 사람들도 많다. 프로 야구가 시작되는 4월이 되어야 한 해가 시작된다고 주장하는 소위 ‘롯빠’들이다. 작년 시즌이 끝날 즈음 “치아뿌라”고 한 절교 선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슬금슬금 모니터로 다가가 올해 롯데의 전력을 읽어 내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당신도 그 부류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유독 봄 야구[시범 경기]에 강해서 ‘봄데’라 불리는 롯데는 뉴욕 양키즈도 LA 다저스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축구를 해도 ‘맨유’ 정도는 우습다고 허세를 부린다. 그래서 부산 팬들은 야구를 사랑하는 만큼 연고팀 롯데 선수들에 대한 애정도 무한정이다.

사직 구장이 개장되고 처음 인조 잔디를 깔면서 선수들이 잦은 부상으로 한동안 힘들어 한 적이 있다. 부산시 관할이라 롯데 구단이 여러 차례 건의도 했고 선수 대표로 정수근(鄭守根)이 야구장을 찾은 시장에게 직접 건의도 했지만 타 구장 사례를 들어 차일피일 미루어졌다. 그때 나선 것이 바로 팬들이었다. “시장님 경기장에 천연 잔디 좀 깔아 주이소” 라는 피켓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콘크리트 위에 마치 카펫을 깔아놓은 듯 딱딱한 경기장 바닥은 천연 잔디로 거듭나면서 롯데 선수들은 다른 구단 선수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게 되고 믿거나 말거나 그 시장님은 연임 가도를 달리게 되었다고 한다.

‘8888577’ 무슨 저주처럼 롯데 성적이 7년 동안 ‘지구의 맨틀도 뚫을 기세’로 바닥을 치던 그 어느 해였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울에서 내려온 한 기자가 들뜬 마음에 “왜 야구장에 오느냐?”는 질문을 하자, 한 야구팬이 그랬단다. “마 언젠가는 안 이기겠는교.” 이 무심한 듯 냉랭한 대답은 얼마 뒤 행동으로 이어졌다. 2002년 10월 16일 사직에서 벌어진 롯데와 현대 유니콘스와의 홈경기를 찾은 관중은 겨우 96명이었고 이어진 19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는 달랑 69명이 입장했다. 썰렁하다 못해 적막한 경기장 분위기에 경기는 뒷전이고 선수들 보라는 듯이 야구장 안을 자전거로 빙빙 도는 팬들까지 등장했다. 롯데가 부진의 늪에서 허우적대자 1루 쪽 응원석에 나부긴 “우리가 야구하께 너거가 응원해라”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에서 최근 ‘무관중 운동’까지 부산 팬들은 선수들이 대충하는 꼴을 보지 못한다.

지역 연고 선수를 우선 선발하는 우리 프로 야구의 특성상 부산 팬들에게 롯데 선수들은 아들이고 동생이었다가 친구가 되고 동네 아는 형처럼 친숙한 존재들이다. 부산 팬들이 선수들에게 가진 애증과 달리 롯데나 구단 그리고 프런트에 대한 태도는 전혀 다르다. 미국 메이저리그 구단 이름 앞에는 ‘뉴욕’이나 ‘보스턴’처럼 지역 이름이 들어간다. 반면 한국은 기업명이 앞에 붙는데 롯데는 삼성과 함께 30년 동안 기업도 연고지도 바뀌지 않은 유일한 구단이다. 롯데가 부산상고 부지에 백화점을 짓고, 옛 부산시청 부지에 제2 롯데월드를 짓겠다고 했을 때 부산 사람들이 환영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1988년 해태 투수 김대현의 사망을 남의 일처럼 야구 선수들과 남겨진 가족의 장래가 걱정이 된 최동원이 선수협의회를 조직하려고 하자 구단은 그를 삼성으로 방출시켜 버렸다. ‘마림포’ 마해영(馬海泳) 역시 임수혁(林秀赫)의 사고와 박봉의 후배들을 보면서 최동원이 간 길을 따랐고 그 뒤를 ‘민한신’ 손민한(孫敏漢)이 뒤를 이었다. 부산 팬들은 롯데 구단과 선수협 선수들의 이야기를 ‘잔혹사’라고 부른다. ‘부자는 되고 싶어도 부자를 존경하지 않는’ 한국 사람들이라면 ‘자이언츠는 좋아해도 롯데는 싫다’고 하는 것이 부산 팬 대다수의 정서다.

이대호 같은 선수를 잡지 못하는 무능함과 이해할 수 없는 감독 교체 등 구단이 ‘팬심’을 거스르는 일이 벌어지면 부산 팬은 직접 팔을 걷어 나선다. 2010년 8월 24일과 25일 부산의 일간지에는 처음 보는 문구의 광고가 실린다. ‘Why not Royster?[로이스터 감독이 안 될 이유가 있느냐는 뜻]’라는 제목과 광고였다. 구단에 대한 항의가 명백한 이 광고는 교체설이 나도는 제리 로이스터 감독의 연임을 지지하는 롯데 팬 2,900명이 나흘 간 인터넷 카페를 통해 1,000만 원을 모아 올린 자발적인 광고였다. 야구는 스포츠 경기 가운데 유일하게 감독과 선수들의 유니폼이 동일하다. 부산 팬들에게 등 번호 3번 ‘제리’도 한 명의 선수였고 다시는 뺏기기 싫었던 ‘우리 편’이었던 것이다.

[사직 구장은 가을 노을이 아름답다]

2013년 사직에서 열리는 마지막 롯데의 홈경기, 외야석은 무료, 지정석 1,000원 임에도 불구하고 평상시 엄두도 내지 못하던 프리미엄석을 반값 2만 원에 끊고 입장했다. 4인 테이블과 2인 테이블로 나누어진 좌석 중 나에게 배정된 것은 4인용 테이블이었지만 경기가 3회를 넘긴지라 옆자리가 찰 확률은 거의 없어 보였다. 매표소 아가씨는 미소나 목소리뿐만 아니라 센스도 만점이었다. 야구도 좋지만 사람 구경도 야구장을 찾는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칠순을 훌쩍 넘긴 노부부 옆엔 양복 입은 아들이 어디선가 가져온 무릎 담요를 덮어 주고는 자리를 떠나간다.

부산의 사직 구장 아니랄까봐 앞좌석 두 친구의 안주는 전어회 한 접시, 5회가 끝나갈 때쯤 부랴부랴 입장한 한 부부의 비닐봉지 속도 어종을 알 수 없는 횟감으로 채워져 있다. 벌컥벌컥 급하게 맥주를 들이키는 아저씨, 웬 일인가 싶어 두고 보니 늦은 진도 따라가느라 바쁘시단다. 한층 아래편 사장님들은 야구는 뒷전이고 친목모임이 한창이다. 어느 듯 칠순 부부에게 접근한 불쾌한 낯빛의 사장님은 분홍색 롯데 스카프를 두르고 기념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오늘이 마지막 경기라 구단에서 5,000장의 스카프로 호기를 부렸다고 한다. 처음 경험한 프리미엄석은 1루 지정석과 달리 여유가 넘쳐흐른다.

5회 말이 끝나고 돌이 갓 지난 아이를 안은 새댁 같은 아기 엄마가 출구로 향한다. 그러자 여기저기 뒷담화가 작렬하기 시작한다. ‘정보명이다’ 아니다 ‘전준우다’ 설전이 오갔지만 전준우의 판전승이다. 이야기인 즉, 태명이 ‘뾱뾱이’라던 전준우 선수의 첫딸과 그의 아내가 아빠이자 남편인 전준우의 경기를 보러온 것이다. 대학 때 만났다던 2년 연상의 아내는 역시나 예뻤다. 그런데 이날의 뒷담화의 종결자는 전준우 선수의 취미가 쇼핑이라는 것, 그것도 옷 사러 백화점 돌아다니는 것을 즐긴다는 의외의 정보였다. 야구장만큼 이야기꺼리가 무궁무진한곳도 없을 것이다.

8회 6위 SK를 6점 차로 이기고 있었지만 어김없이 들려오는 「부산 갈매기」는 장엄하고 가슴 찡하다. 그런 내 심정을 아는 듯 위층 단상에서 들려오는 그 노래도 구슬프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런데 뭔가 다른 느낌이다. 3회 때부터 아저씨는 연신 주변 분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바쁜 반면 선수 하나 하나 등장할 때 마다 응원해 주시던 아주머니는 유난히 높은 톤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약간 흥분한 듯 떨리는 듯 그 분의 노래는 「부산 갈매기」 합창에서 정점을 찍었다. 모두가 기립한 가운데 성가대 메인 소프라노 같은 아주머니의 열창은 주변 사람들을 압도하기 충분했다. 기독교인들은 「할렐루야」 합창에 기립한다고 들었는데 「부산 갈매기」 때문에 일어선 나도 어느새 입을 다문 채 그 분의 독창을 경청하고 있었다. 여전히 부산에서 야구는 종교인가 머릿속이 복잡하다.

원래 야구장 통로는 선수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경기 진행 중에는 이용하지 않는 것의 예의다. 그런데 어디나 예외는 있는 법, 파울 공이 펜스를 넘어갈 때 마다 관람객의 안전을 살피는 안전 요원과 ‘다라이’를 머리에 얹은 ‘아지매’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한손에 빈 맥주 캔과 안주를 연신 흔들며 행상을 하는 아주머니들, 그런데 이날따라 아주머니 손은 비어 있었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천천히 관람객에게 손을 흔들며 경기장을 돌고 있는 모습이 전년도 미스코리아 고별 행진 못지않다. “‘사장님 고맙습니다.’ ‘할매 수고했어요, 내년에 보이시더’” 역시나 그것은 한 시즌 마감을 알리는 ‘아지매’ 나름의 작별 인사였다.

야구가 너무 좋아 직장을 접고 야구장에 취업했다는 분식집 배달 아저씨, 강민호 보러 왔다가 봉준호[와 눈매가 너무도 닮은 지금 남편]와 결혼 했다는 새댁, 한때 3루 쪽 그물 좀 타봤다는 세련된 등산복의 중년 아저씨, 롯데가 부산에 뭘 해줬냐며 애꿎은 할머니만 닦달하는 할아버지, 벌써 내년 타선을 두고 걱정 중인 야구장에서 처음 만난 두 명의 아저씨, 경기장을 바닷가로 옮겨야 된다는 이야기도 얼핏 들린다. 이미 사람들의 관심사는 경기 결과를 벗어나 추억과 미래로 향하고 있다. 하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V3[통상 3번째 우승]’의 날갯짓을 퍼덕이며 날기 시작한 부산 갈매기들의 꿈은 가을로 이어지지 못하고 중도에 날개를 접어야만 했다.

[부산 사람 그리고 통(通)/ 야(野)/ 구(求)]

어릴 적 야구 배트를 손수 만들어 주시던 할아버지 말씀이 생각난다. “와 빳따를 동그랗게 만드노, 넓적하면 잘 맞을낀데” 그래서 당신은 언제나 제일 아끼는 막내 손주를 위해 야구 ‘빠따’를 빨래 방망이 모양으로 깎아 주셨다. 말은 안 해도 요즘 부산 팬들의 마음이 우리 할아버지의 마음일 것이다. 부산 사람들이 사직 구장에서 즐기고자 하는 것? 당연히 롯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가을 야구’다.

야구장을 좀 다녀봤다는 ‘야빠’들이라면 각 팀에 따라 붙는 은어들이 당황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롯데와 관련된 그것들은 대개가 서글프다. 아니 처절한 것들이 많다. ‘꼴데’는 4연속 최하위[2001~2004년]를 기록한 롯데를 부르는 말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롯데는 봄 시즌 시범 경기에 강하다. 그래서 롯데의 또 다른 별명은 ‘봄데’. 화끈하게 치고 나가지만 마무리가 안 되는 부산 사람 스스로의 자조일지도 모르겠다. 연패와 성적 부진이 이어지면서 롯데의 더 이상 비밀이 아닌 비밀 번호도 한자리씩 늘어가 어느 듯 ‘8888577[2001~2007년 성적]’. 그리고 작년엔 ‘8데’ 그리고 올해는 ‘9데’. 이 모든 오명들이 하나하나 늘어가면서 야구장의 훌리건은 ‘꼴리건[‘꼴데‘와 훌리건의 합성어]’이라는 인식이 다시 부활하고 있는 실정이다. 영광의 상처란 말이 있다지만 롯데칠성, 롯데제과의 주가는 지난 30년간 꾸준히 올라 액면가 5,000원 기준으로 100만 원을 넘는 황제주의 자리에 올라간 반면 부산 팬들이 입은 상처는 치명적이다. 팬들과 ‘통(通)’하지 않는 구단 대신 시민 구단으로 가자는 이야기가 빈말은 아닌 것이다.

사직 야구장을 찾는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야구를 보러 온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을 보러온 사람들. 특히나 후자를 위해 준비된 5회 키스 타임, 최소한 뽀뽀라도 해야 화면이 넘어가지 그렇지 않으면 어김없이 다시 돌아오는 카메라 탓에 대통령 부부가 와도 거역할 수 없다. 야구는 4번 타자라고 스트라이크가 4개로 늘어나지 않는다. 10번 중 3번만 안타를 쳐도, 그러니까 3할 정도의 타율만 올려도 대접받는 나름의 규칙이 있고 모두에게 공평하다.

최근 야구장에 부쩍 늘어난 여성 팬, 일명 ‘야생녀’의 등장은 주목할 만하다. ○○녀, ○○녀 등 움직임 하나도 제약이 따르는 젊은 여성들이 야구장에서는 신나게 몸을 흔들거나 상대편 투수를 향해 사정없이 욕을 해도 다음날 인터넷에 도배되는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된다. 치어 리더들의 시원시원한 옷차림과 춤동작이 남심(男心)을 사로잡았다면 ‘야생녀’를 야구장을 불러들인 것은 4세대 거인들의 세련된 외모와 탄탄한 허벅지 아니겠는가. 하지만 천장이 뻥 뚫린 사직구장에서 이런 ‘훔쳐보기’는 당당하기 그지없다. 이 모든 것은 단지 야구를 보러온 사람들이 누리는 지극히 ‘건전한 여가’이자 놀이일 뿐이다. 야구장이 ‘야(野)’해야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것 아닌가.

“앞으로는 ‘마도(馬都)’ 부산으로 불러주세요.” 2005년 개장한 부산 경남 경마 공원이 2012년 입장객 132만 명으로 26년차 사직 구장을 바짝 추격한다는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이다. 사직 구장이 총 66차례 경기가 열려 1일 평균 2만 명이 넘는 관중 수를 기록한 반면 경마 공원에서 경마가 시행된 일수는 96일로, 1일 평균 1만 4,000명 남짓한 유료 관중을 동원했다. 마도? 아직은 그런대로 관중 동원력에서 사직 구장이 경마 공원보다 1.5배 앞서고 있지만 여성 팬 특히 유아 동반 관람객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별다른 볼 것이 없어 야구장을 찾던 시대는 끝났다.

최근 부산의 모 사립 대학에서 개설한 여학생 사투리 클리닉이 25만 원이라는 수강료에도 불구하고 신청자가 만원사례라고 한다. 그 취지는 사투리가 취업의 당락을 결정짓지는 않지만 심리적 자신감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대상이 표준어를 구사하는 직종으로 한정되어 있지만 일말의 불안감도 없지 않다. 미모가 절대 선발 기준이 아니라고 해도 다 알아서 살 빼고 성형하지 않는가. 앞으로 “오빠야 쎄리도”라는 정감 넘치는 응원은 야구장이 아니라 사전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건 극단적인 기우일까.

어떤 팬들은 상대팀에게 “마”라고 하는 건 폐쇄적인 연고 의식의 발로라고 한다. 롯데 구단은 2012년부터 수익 창출과 무관한 ‘봉다리’ 응원을 감동 없이 퉁퉁거리는 막대 풍선으로 대체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마”는 우월감이 아니라 야구 하나만이라도 최고가 되고 싶은 촌사람의 소박한 바람에서 나온 것이다. “마”는 서울 중심의 문화에서 소외된 박탈감을 지역 정체성으로 탈바꿈 시킨 부산 사람들의 창의력이라는 주장이 있듯이 ‘봉다리’ 응원 역시 구단의 ‘짠물’ 경영을 조롱하는 부산 사람들의 저항이다. 부산의 민주주의가 그렇듯이 야구도 부산 사람들의 ‘야성(野性)’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1984년 삼성이 약체 롯데를 우승의 제물로 낙점했을 때 상기된 표정의 최동원 선수가 강병철(姜秉哲) 감독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함 해봅시더.” 20년이 지난 지금 부산 그리고 이 도시의 야구팬들은 제2의 최동원이 구원 등판할 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번 시즌 사직 구장을 달구었던 단 한마디 응원 “어느 날”처럼 그날은 꼭 올 것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4.25 오류 수정 중앙 펜스까지의 거리도 114미터 -> 중앙 펜스까지의 거리도 118미터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