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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5874
한자 球都釜山
영어의미역 Busan: The City of Baseball
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권오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5년연표보기 - 실업 팀 아마 롯데 야구단 창단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2년연표보기 - 롯데 자이언츠 프로 야구단 창단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4년연표보기 - 롯데 자이언츠 첫 우승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5년 10월연표보기 - 사직 야구장 완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롯데 자이언츠 한국 시리즈 우승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8년 - 롯데 자이언츠 한국 야구 사상 최초로 외국인 로이스터 감독 영입

[정의]

부산을, 부산의 대표 스포츠인 야구의 도시라고 하는 데서 붙여진 이름.

[고교 야구]

부산의 야구는 1920년경 철도 공창에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야구팀을 결성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 부산상업학교[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 초량청년회 등의 소수 팀이 있었으며, 연습장으로는 지금의 부산진역 근처 해변 쪽 갈대밭을 이용하였다. 광복 후 부산의 야구는 고등학교 야구부의 활동으로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6·25 전쟁과 1950년대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으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960년대를 거치면서 고교 야구의 명맥은 기존의 부산상업고등학교동래고등학교, 그리고 광복 후 창단된 경남고등학교, 부산고등학교, 부산상업고등학교, 부산고등학교 등 전국 최강의 야구팀으로 이어졌다. 이들 고교 야구팀은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야구 열풍을 일으키며 고교 야구의 전성기를 풍미하였다. 특히 부산고등학교경남고등학교는 라이벌로서 야구 대회에서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서울에서 결승전이 벌어지면 동문회에서 재학생의 상경 응원을 지원하여 야구 명문 고교의 명성을 드높였다. 현재 개성고등학교, 경남고등학교, 부산고등학교 등의 야구부는 황금사자기, 청룡기, 봉황대기, 화랑대기, 대통령배 등 전국 규모의 야구 대회에서 수차례 우승하면서 구도 부산의 기반을 닦는 데 일조하였다.

[프로 야구]

부산 고교 야구의 명성과 열기는 1975년 실업 팀 아마 롯데 야구단의 창단으로 이어져, 야구가 항도 부산의 지역적 특색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1982년 우리나라에 프로 야구가 출범하면서 부산 지역을 연고로 하는 롯데 자이언츠 프로 야구단이 창단되면서 야구는 부산을 대표하는 스포츠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부산 지역 고등학교 출신 선수가 롯데 팀에서 활약하게 됨에 따라 지역성을 띤 고정 팬들이 생겨나고 라이벌 지역과의 경기에서는 더욱 더 격렬한 응원과 승부욕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1984년은 롯데 자이언츠의 첫 우승이라는 의미와 함께 한국 프로 야구사에 큰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프로 팀의 존재 의미가 바로 팬이라는 점에서 최다 관중 팀인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은 부산·경상남도 지역이 프로 야구 20년 내내 구도로 불리고 최고의 프로야구 팬이 꾸준히 열광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해로 평가된다. 그리고 한국 시리즈는 유두열 선수의 역전 3점 홈런과 최동원 선수의 역투[6게임 모두 출전, 4승 2패로 우승을 이끌었음]로, 한국 시리즈 최고의 명승부이자 역전 드라마로 기록되고 있다.

1985년 10월 부산 종합 운동장 내 관람석 2만 8500석 규모로 국내 최초의 인조 잔디로 된 사직 야구장이 완공되면서 부산의 야구의 중심이 구덕 야구장에서 사직 야구장으로 옮겨졌다. 1992년은 부산 야구의 전성기로 관중 수가 120만 명을 돌파하였으며, 역전 우승을 이룬 최고의 해로 평가된다. 강병철 감독이 이끄는 롯데는 페넌트 레이스(pennant race)에서 3위로 오른 뒤 삼성과의 준 플레이오프, 해태와의 플레이오프, 빙그레와의 한국 시리즈에서 차례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 때 우승의 원동력은 부산 팬들의 아낌없는 성원이었다. 연일 만원 관중이 사직 야구장을 찾았고 열렬한 응원을 보냈다. 롯데 선수들은 흥이 났고 상대방은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1997년과 1998년에 연속 최하위 성적에서 벗어나지 못한 롯데는 1999년 김명성 감독이 부임하면서 정신력과 기술력 그리고 인력 수급의 3요소를 강조하면서 고정 팬이 가장 많은 명문 구단의 명예 회복에 나섰다. 투수의 문동환, 주형광, 염종석, 손민한, 타자 박정태를 비롯한 마해영, 공필성, 김민재, 김응국 그리고 시합 도중 쓰러진 임수혁 등 화려한 투타(投打)를 자랑하는 롯데 야구는 20세기 최고의 명승부로 선정된 1999년 플레이오프를 만들어냈다. 7전 4선승제의 플레이오프에서 1승 3패로 벼랑 끝에 몰렸던 롯데 선수단은 나머지 3게임을 6:5라는 1점차 명승부를 만들어 내면서 대 역전 드라마를 연출하였다. 비록 한국 시리즈에서는 한화에게 우승을 내주었지만 이는 1984년, 1992년 시즌 우승의 영광만큼 값진 승부를 보여준 경기였을 뿐만 아니라 새 천년 새 도전의 가능성과 구도 부산의 자존심을 되찾고 야구가 부산의 또 다른 명물로 자리 잡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구도 부산]

그 후 2008년 한국 야구 사상 처음으로 외국인 로이스터[Jerry Royster] 감독이 취임하기 전까지 부산 야구는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4년 연속 최하위에 머물렀지만 부산의 야구팬은 여전히 사직 야구장을 찾으며 야구 사랑을 이어갔다. ‘가을에도 야구하자’라는 모든 부산 야구팬들의 간절한 희망에 부응하여 침체된 팀에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로이스터 감독을 영입하였다. 이에 홈구장 전체 관중 137만 9735명으로 8개 구단 가운데 압도적 기록을 세우면서 정규 시즌 관중 구도 부산의 명성을 회복하였고, 500만 명 시대를 재현하는 데 공헌하였다. 이 후 롯데 야구는 2012년까지 5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홈구장 경기 때마다 「부산 갈매기」가 울려 퍼지는 사직 야구장은 3만 명이 동시에 부르는 세계 최대의 노래 연습장이 되었다. 또한 선수마다 지어준 로고송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도 부산이며, 쓰레기 봉지와 신문지를 이용한 응원 문화, 원정 경기에서도 홈 팀보다 더 큰 응원가, 1루를 견제하는 상대 투수에게 보내는 합창 “마!”, 관중석에 떨어진 공을 아이에게 양보하라는 멘트 “아 주라!” 같은 새로운 응원 문화의 창출은 부산이 야구의 도시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부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 「해운대」에서는 부산 야구장의 모습이 담겼으며, 「롯데 자이언츠의 또 다른 이름 나는 갈매기」와 「투혼」이라는 영화도 만들어졌다. 또한 각종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부산과 야구 및 사직 야구장이 연결되어 자주 다루어지면서 야구의 수도, ‘구도 부산’의 이름을 떨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러한 구도 부산의 야구 문화는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관람스포츠 문화이며, 화끈한 ‘부산 사나이’의 대명사가 되었다. 또한 부산의 지역성을 대표하는 스포츠 문화로 정착되었으며, 나아가 부산 시민의 삶의 질 향상과 세대 간 문화와 대화의 연결 고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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