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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17
한자 歸還同胞-
영어의미역 The story of Pyo Mu-saeng, the repatriated compatriot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생활사)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서만일

[들어가며]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의 종전과 함께 한반도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부산은 극심한 인구 이동으로 큰 혼란을 겪게 된다. 특히 부산은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의 가장 크고, 중요한 항구 도시로 발전하였다. 해방 직전 까지 많은 수의 일본인이 부산에 거주하였고, 대규모 인적, 물적 이동이 가능한 통로였다. 따라서 해방 직후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의 대부분과 해외에 거주하던 동포의 대부분은 부산을 통해 귀환하게 되었다.

해방 직후 한반도로 귀환한 재외 동포는 약 450만 명 내외로 추정된다. 당시 일본에는 약 200만 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들 중 약 140~150만 명이 한반도로 귀환하였다. 이들은 연합군총사령부[GHQ]의 정책에 의해 1945년 8월부터 1946년 2월까지 귀환하였다. 당시 귀환 동포 중 약 52만 명이 경상남도에 정착하였고, 그중 약 32만 명이 이 부산에 정착하였다.

이번에 인터뷰한 표무생 어르신[일본명 야스다 지스코, 1938년생, 여]은 일본에서 출생하여 유년 시절 태평양 전쟁을 겪었고, 해방 직후 귀환한 이후 부산에 정착한 인물이다. 따라서 이 분의 삶의 경험 특히 일본에서 한국인이 어떤 경험을 하였는지, 귀환 동포가 부산에 정착하는 과정은 어떠했는지 살펴 귀환 동포에 대해서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의 이주]

어르신의 아버지는 합천 사람으로 17살에 일본으로 갔다. 많은 돈을 벌겠다는 꿈을 품고 갔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 일본으로 가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일용직 노동자를 전전하다가 일본의 부잣집에서 잡일을 하는 인부로 일하면서 일본 생활의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일본 사람의 추천으로 나고야에 있는 미쓰이 공장에 취직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공장에서 표무생 어르신께서는 당시 아버지께서 정확하게 어떤 일을 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했다.

아버지의 나고야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괜찮았다고 한다. 회사에서 마련한 사택에서 생활할 수 있었고, 봉급도 높은 수준이어서 일본에서의 생활비를 제외하고도 많은 돈을 합천의 집에 송금할 수 있었고 해방 이전까지 꽤 많은 돈을 모아두었다고 한다.

부모님이 결혼한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듣지는 못했다. 아버지가 잠시 합천에 들어와서 결혼식을 올리고 곧 바로 일본으로 돌아갔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아마 일본에서 자리 잡은 이후의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외가 쪽 식구 대부분도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일본에서의 유년 시절]

“나고야 있을 때는 국수 배급이고, 쌀 배급이고 많이 나왔어. 동네 사람들 다 갈라주고.”

어르신은 1938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가 미쓰이 배지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어디서든 좋은 대우를 받았다는 일화로 미루어 짐작건대 직업이 괜찮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생활은 큰 불편함이 없었고, 일본인들로부터 특별한 차별에 대한 기억도 없었다.

“한 번씩 한국말을 했지만 거의 일본말로 대화를 했지.”

“놀다가도 지진이 나면 마마한테 똘똘 몰리 가지고 꽉 업드리는 기라. [지진이] 많아났어. 누우 자다가도…… 전부다 다 널찌고 하나같이 붙어 있는 것도 없고……”

“사택 맨치로 한국 사람 사택이 따로 있었지, 한국 사람끼리 같이 살았어.”

나고야에서 미쓰이 사택에서 생활하였는데, 한국인들이 주로 모여 살았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동무들도 대부분 한국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어를 사용하기 보다는 모든 일상용어는 일본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건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한국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동무들과의 대화, 식구들과의 대화에서도 많은 부분은 아니지만 특정 용어들은 한국어를 사용했던 것을 간헐적으로 기억하였다.

[태평양 전쟁과 피난]

“나고야에서 당시 미국 비행기가 막 공습이 들어오면 ‘보쿠고[?]’라고 굴로 파고 들어가거든……피신을 하는 순간에 또 지진이 나 가지고 막 흔들고 막 그랬어요.”

당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은 태평양 전쟁 발발과 함께 크게 변화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함께 시작된 태평양 전쟁은 미국의 일본 본토 공습이라는 일본의 직접적인 공격으로 이어졌고, 다수의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다. 어르신도 그 공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42년 4월 18일 소위 둘리틀 공습[미국이 도쿄, 요코스카, 고배, 나고야를 대상으로 한 공습, 당시 일본군의 피해는 경미하였으나 가옥의 피해는 컸다고 한다.] 이후 나고야는 미국의 주요한 공습 대상이었다. 1945년 3월 12일, 3월 19일, 5월 14일의 나고야 대공습은 나고야 시가지의 파괴와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낳았다. 특히 3월 19일의 공습은 하루만에 15만 1,332명이 피해를 입었고, 가옥 3만 9,833채가 소실되었다. 나카구[中區], 나카무라구[中村區], 히가시구[東區] 등의 시 중심부가 화재로 전부 타 버렸고, 특히 1937년에 착공한지 얼마 안 된 6층으로 건설된 나고야역이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났기 때문에 입학 할 낀데 입학하지도 못했어. 학교도 못 들어갔어.”

“그 당시 공습이 나가지고 고마노라고 하는 데로 피신을 했거든 피신을 가 가지고 있다고 공습이 마마 해 가지고 나고야 사람 다 죽었다고 막 소문이 나서 우리 어머니 또 신랑 있는데 찾아가니까 살아있다고 하데”

“촌에는 [돈]을 버릴 데가 없어.”

더 이상 어르신의 가족들은 나고야에서 살 수 없었다. 전쟁은 가족들이 살아갈 생활 공간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교육의 기회도 박탈하였다. 아버지는 소방대에 배속되어 있어서 같이 피난을 갈 수 없었지만, 어머니와 외가 쪽 친척들은 우선 코마노로 피난을 갔다. 일본 정부의 피난 지시에 따른 계획적인 피난이 아닌 생존을 위한 피난이었다. 따라서 어떠한 지원도 없었다. 특별한 수용 시설에서 지낸 것이 아니라 마을의 창고를 빌려 생활하였다. 이때 일본에서 모아두었던 상당수의 재산을 탕진하였다. 창고에는 특별한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개조를 해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주위 뒷산에서 대나무를 잘라서 침상 같은 것을 만들어서 생활하였다. 난방과 취사를 위해서는 중앙에 일본식 화로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모아둔 재산이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했다. 마을의 일을 돕거나 근처 도랑에서 참게를 잡기도 했고, 뒷산에 올라가서 장작용 나무를 하거나 열매를 채집했다.

“우리는 차별 같은 거 안 당했어. 시마노케 가가꼬 거기 살았는데 면장이 아기가 없어서 날로 막 주고 가라고 케사트라고 했다데, 차라리 날로 거기 주고 왔으면……그래 가지고 즈그 보고 싶으면 보라고 메달을 하나 주드만 그거도 언제까지는 가지고 있었는데 마 이사 다니면서 버려 버렸다.”

“[일본인들과] 가가꼬 살면 마 친구 되고 합심해서 살고.”

어르신께서는 특별히 일본·일본인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 듯 보였다. 가장 큰 이유는 일본 생활에서 차별을 받은 기억이 없어서 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큰 도움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후 한국으로 귀환과 정착 과정에서 겪은 경험, 즉 귀환 동포에 대한 차별과 냉대의 경험을 통해 오히려 일본에 사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아 있는 듯 보였다.

[해방과 한국으로의 귀환]

코마노에서만 피난 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다. 어떠한 이유인지 정확하게는 기억하진 않았지만 코마노에서 시마노케로 다시 한 번 이동 하였다. 시마노케의 생활도 코마노와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난 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마을에서 배척을 받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큰 도움을 받지는 못했다. 따라서 재산을 계속 탕진 할 수밖에 없었다.

“돈을 배에다가 막 차고 왔다고 하데.”

“피신을 갔다가 우리 집을 그대로 나두고, 나고야 집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시마노케에서 바로 한국으로 넘어왔잖아”

“[얼마나 걸려서 도착하셨습니까?] 모르지 어찌나 파도가 치는지.……큰 배라 연락선 큰 배.”

“부산 저저 자갈치에 도착했지 2 부두에 도착했지…… 한국에 오니까 귀환 동포라고 사람 취급도 안했어. 그 당시에 막 소동을 막 부리고 그란데 한국 사람은 일본 사람 때문에 못살겠다고 귀환 동포 우환 동포라 해가지고 얼마나 고통을 많이 당했는지 모른다.”

그러던 중 전쟁이 끝나고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이후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대다수는 연합군 사령부에 의해서 귀환 명령을 받고 귀환하였다. 그때 어르신의 가족도 정책에 따라 귀환하였다. 어느 항구를 통해 어떤 배를 타고 부산으로 들어 왔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당시 거주 지역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나고야에서 귀환선으로 이용된 연락선을 타고 부산으로 귀환한 것으로 보인다. 부산에 도착한 이후 아버지의 고향인 합천으로 돌아갔다. 외가 친척들도 고향인 진해로 돌아갔다.

“합천을 갔지 가 가지고 마 저 저 예전에 돈 벌어 가지고 큰집에 논 사고, 집 사고 핸거 그런 거는 마 입 싹 딱아 삐고 얼마나 배를 많이 골았는지 모른다.”

“[돈을] 다 때먹었어. 우리 엄마, 아부지가 [돈을] 보냈는데 그걸 마마 동생이 [돈을] 보내주서 [논, 집을] 샀다하는 것을 쌀도 옳게 한 되 주도 안하고 배를 많이 골다 왔어.”

“내 밑에 동생은 우리 큰엄마가 즈그 아들은 밥을 주고 우리 동생은 그 얼마나 먹고 싶겠노. 배가 고픈데. 옛날에 촌에는 봉창을 내놓거든 벽에다가 부엌에다가 반찬 같은 거, 밥 같은 거 갖다 놓는데 거기에 들어가서 즈그는 밥을 먹는데 우리 동생은 ‘엄마 밥도’ 하니까 도랑까 가서 엄마한테 혼나고. 얼마나 배를 많이 골았는지.”

귀환한 이후 가족의 생활은 힘들었다. 언젠가 한국에 돌아와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매달 합천의 큰집에 땅을 사두라고 돈을 송금하였다. 그러나 큰집이 횡령하였고, 일본에서 모아둔 재산도 태평양 전쟁 피난에 거의 탕진하였다. 생계를 유지할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친척들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친척들은 어르신 가족에게 큰 힘이 되지 못하였다. 자신들에게 의지할까봐 어르신들의 가족을 꺼렸던 것이다. 어르신의 가족은 친척들의 냉대와 멸시에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귀환이 2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사건이라는 점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 귀환은 ‘민족의 땅’을 되찾아가는 이동인 동시에, 식민 질서가 해체되고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람들의 이동이었던 것이다. 해방된 조선으로의 귀환은 새롭게 건설될 국가의 국민이 되는 과정일 수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독립한 지역의 국가 건설 과정에는 ‘국민’이라는 공동체 인식의 확산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당시 신문 기사를 살펴보면 귀환 동포 구호에 정부가 많은 힘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귀환 동포를 환영하는 정부의 발표를 시작으로 이후 귀환 동포의 구호를 위한 많은 활동이 벌어졌다. 즉 귀환민은 이차적으로 해외 동포로 호칭되고 국내 동포에 의해 구호를 받은 다음 ‘국민’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귀환 동포는 본국에 살고 있는 국민에게 있어서는 골칫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1945년 9월 30일 조선 원호 단체 대회를 비롯하여 많은 전재민(戰災民) 원호 활동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구호금을 모집한다는 명목으로 강제 할당 방식을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관공서, 회사, 공장 등의 직원 월급에서 일정액을 각출하는 방식에서 정(町)과 동(洞) 단위 등 행정 단위로 강제 할당식이 진행되었다. 이런 ‘자립적’으로 거출(醵出)한다는 명분의 강제 할당식에 대해서 원주민들은 못마땅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고, 귀환 동포에 대한 인식을 부정적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부산에 정착하여]

“지원 같은 거 아무것도 없어, 합천서는 또랑에 칼치 꼬랑댕이 끊어 놓을 것도 다 구어 먹었다.”

당시 귀환 동포에 대한 배급이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직업을 찾기에도 도시가 유리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귀환 동포는 부산에 몰려들었다. 특히 부산의 경우 범일동·범천동 부근의 ‘안창 마을’이라든가 적기 일대에는 6·25 전쟁으로 피난민이 몰려들기 이전부터 이미 많은 귀환 동포들이 모여 살았다. 그러나 어르신의 증언을 통해서 살펴보면 귀환 동포에 대한 지원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어르신은 귀환 동포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없다고 단언하셨다. 따라서 어르신의 가족은 스스로 생계유지를 위한 활동을 해야 했다. 당시를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않았지만 상당수의 귀환 동포가 친척집에 신세를 지거나, 용두산 부근에 천막을 치고 사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어르신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배가 고파 못사니까 우리 아버지가 부산에 부두에 석탄을 매로 먼저 왔거든. 그래가 우리는 합천서 트럭 타고 부산을 와가 부산의 이모집에 와 가지고 문현동에 쪼깬한 집을 하나 샀어요.”

“옛날에 묵고 살게 없어서 동촌강 여 물이 깨끗했거든 내가 그때 열 살 먹었는지 모르겠다. 우리 엄마하고 물 싹 빠졌을 때, 파래를 뜯어다가 진시장에 갔다 팔고 이랬는데, 먹을 게 없어서들 파래는 돌에 딱 붙어가지고 꽝꽝 얼어 가지고 있는 거를 뜯어다가 갔다 팔고 그랬어요.”

“우리 어무니는 처음에는 국제 시장에서 장사하다가, [부산]진시장에서 장사하고, 아버지는 부둣가에서 까만 석탄 매고 했잖아.”

어떻게 해서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했다. 따라서 일자리 많을 것이라 생각되는 부산으로 이주하였다. 부산 이모의 도움으로 충무동에 정착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부두 노동자로 일을 하였고, 어머니는 근처 도랑에서 파래를 뜯어 국제 시장부산진 시장에서 노점을 시작하였다.

국제 시장은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거래 규모가 큰 상업 도시로서 이름을 떨치게 해주었던 상징적인 존재이다. 신창동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시장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45년 해방과 함께였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이 철수하면서 이른바 전시 통제 물자를 한꺼번에 팔아 돈을 챙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나라 최대 시장이었던 부평동 공설 시장 일대에 갖가지 물자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런 물자들이 드넓은 빈터였던 오늘의 국제 시장 자리를 장바닥으로 만들어 자연 발생적으로 상설 시장을 이룩했던 것이 국제 시장이 발생하게 된 배경이다. 이 국제 시장 장터를 ‘돗대기시장’ 혹은 ‘돗떼기시장’이라고도 하는데 시장의 규모가 크고 외국 물건 등 없는 게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있는 데로 싹 쓸어 모아 물건을 흥정하는 도거리 시장이거나, 도거리로 떼어 흥정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부산진 시장은 1913년 생겨나 현재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서울 동대문 시장, 대구 서문 시장과 함께 전국 3대 전통 시장 가운데 하나로 현재도 하루 평균 만 명이 찾는 곳이다. 이 시장은 조선 시대 5일장 형태로 유지되다 1913년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 시장이 되었다. 1950년대에는 목조로 지어져 공설 시장으로 운영되다가 1970년 민영화 되었다.

이러한 시장의 특성을 살펴 볼 때 어르신의 부모님들도 처음에는 이모님의 도움으로 국제 시장에서 장사를 하였다. 6·25 전쟁 시기 이전에 규모가 더 컸던 부산진 시장으로 옮겨 장사를 하다 이후 6·25 전쟁과 피난민의 유입으로 국제 시장이 급격히 성장하여 그 곳에서 다시 장사를 하였다.

“가는 족족 우환 동포라고 구박만 받았지.”

“친척들 옆에 가면 귀환 동포라고 쑥덕쑥덕 거리고……머 하나 얻어먹을까 싶어서.”

그러나 부산에서의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 일본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차별을 부산에서 받았기 때문이었다. ‘우환 동포’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가까운 친척들은 어르신의 가족을 돕는 것을 꺼려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학교에 들어갔어야 할 시기에는 일본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공습으로 갈 수 없었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생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제대로 받기 힘들었다. 한국으로 귀환한 이후 합천과 부산에서 초등 교육을 조금 받았다. 부산에서는 충무동에서 범일동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이마저도 학교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던 다리가 부서진 이후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이후 야간을 조금씩 다닌 적은 있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지는 못하였다.

[6·25 전쟁과 부산 생활]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본격화 되었지만 어르신께서는 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크게 실감하지는 못했다. 전쟁기 동안 부산은 전장이 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피난민들이 부산에 밀려들면서 ‘아 전쟁이 나긴 났구나.’ 하는 정도의 인식 밖에 없었다. 당시 전쟁에 대한 공포보다는 하루하루 생활을 연명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힘들지 배를 얼마나 골았던지. [배급 같은 거] 못 받았어. 요새는 살기가 좋아서 없는 사람들 쌀도 주고이라지만 그 당시에는 지가 노력 안하면 노다지 굶는기라 시래기 같은 거였고 죽 조금 끓여 먹고, 강냉이죽 끓여 먹고, 마마 강냉이죽도 마 특미라.”

전쟁 당시 많은 구호물자가 풀린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부산 시민의 몫이라기보다는 피난민 구호에만 이용되었기 때문에 귀환 동포들 대부분은 계속 힘든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먹을 것이 부족한 시기에 허기를 달래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시래기죽, 강냉이죽 등 최대한의 적은 식재료를 이용하여 최대한 허기를 채우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거의 기반이 잡혔지.[피난민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피난민들은 대부분 수용 시설이 마련된 적기, 영도 등의 지역, 생계의 터전인 국제 시장 인근 지역, 괴정·신평·하단 등 사하구 일대 부산시가 피난민의 거주를 위해 마련한 공간에 주로 자리를 잡았고, 어르신이 거주한 지역으로는 피난민이 들어오지 않았다. 따라서 전쟁의 분위기를 더욱 느끼지 못하였다.

“옛날에 일본서 나와 가지고 문현동 저기서로 굵은 파를 우리 엄마가 이고 국제 시장가서 파는기라.”

“나는 우리 동생 지금 69살 먹은 그거를 업고 문현동에서 메리놀병원 앞으로 해 가지고 국제 시장까지 젖먹이로 다닌기라. 행강살이 가서 나무를 조금 해 가지고 다시 집으로 와서 밥하고 한기라”

그렇다고 전쟁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장사는 부산진 시장을 벗어나 피난민에 의해서 급격히 성장한 국제 시장으로 장소를 옮겨간 것이었다. 당시 어르신은 맞벌이하는 부모님 대신 가사의 상당 부분은 책임지고 계셨다고 한다. 5남 2녀의 장녀로서 어머니의 역할을 해야 했다.

“내는 집안 살림밖에 안 살았어. 공장도 못가고.”

[매축지 마을에 정착]

전쟁 이후 부모님의 노력으로 살림은 많이 나아졌다. 아버지는 배를 구입하셔서 4 부두 인근에서 조개잡이를 하였다. 대부분은 자갈치에서 팔고 일부는 어머니가 조개를 까서 진시장에서 팔았다.

“결혼해가 신랑을 잘 못 만나서, 계속 친정에 살았잖아……신랑이 옳지 않아서 그렇잖아.”

어르신은 1963년 25세의 나이에 결혼을 하셨다고 한다. 당시 남편은 국제고무에 근무하고 있었다.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남편이 집안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다른 살림을 차린 것이었다.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없어서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었지만 이때부터 어르신의 고난은 시작되었다.

“생선 장사 했어. 집에 가와 가지고 조금 장만해 가지고 절이 갔고, 말려 갔고 진시장 갔다 팔고 해 지면 들어오고 다대면 들어오고 그랬어.……물건은 자갈치에서 가져왔어.”

“내가 이 동내[매축지 마을] 온 지 20년 다 되었어. 이 동네 와 가지고 우리 아들 결혼 해 가지고 그 애[손자]가 대학 다니거든……”

당시 아들 한 분을 두고 계셨기 때문에 자식의 교육과 생계를 위해서 일을 해야 했다. 계속 친정에만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친정에서 나와 자성대로 이주하면서 부산진 시장 노점에서 생선 장사를 시작하였다. 이때 어르신의 노력으로 생계도 그럭저럭 꾸려갈 수 있었고, 아들을 대학 교육까지 시켰다. 이후 1980년대 말에 매축지 마을에 정착했다. 이 과정은 분명 힘들고 고생스러우셨을 것이다. 그러나 어르신은 이것을 마냥 고생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다. 남편 없이도 자식을 반듯하게 키우기 위해 당연한 과정이라고만 여기셨다.

“고생을 너무 많이 하고 배를 많이 골아 가지고, 몸이 안 좋아, 춥은 데서 너무 오래 떨고 해놓으니까. 동지섣달에 거 앉자 가지고 떨어봐라 거 얼마나 춥노. 옷을 아무리 많이 입어도. 병만 처 지가지고.”

“오래하고 나니까 돈 벌인 건 어디 가고 없고, 전부 병만 처 지가지고 아직 나도 할 껀데, 심장이 안 좋아 가지고 내 약 먹었는데 시장 가서 쓰러져 가지고 부정맥이 와 가지고, 그래 가지고 대학병원 가 가지고……장사 한 40년 했지.”

“내 장사할 때는 생활비를 안 받았는데, 내가 노니까네 이제 생활비를 받아먹고 사는 거지.”

당시의 생계를 위한 노점 장사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몸은 늙고 병들어 자식에게 신세지고 있다고 하시면서 미안해 하셨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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