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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003
한자 壬辰倭亂-始作地-倭賊-마지막撤軍地釜山-戰爭-記憶
영어의미역 Memory of the Hideyoshi Invasion of Korea Inscribed in Busan, the Starting Palce and the Last Land Where the Japanese Retreate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김강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동래부 순절도」 1658년연표보기 - 임진왜란 때 동래 읍성 전투 장면 그림
「동래부 순절도」 1760년연표보기 - 임진왜란 때 동래 읍성 전투 장면을 변박이 그림
「동래부 순절도」 1834년연표보기 - 임진왜란 때 동래 읍성 전투 장면을 변곤이 그림
「부산진 순절도」 1760년연표보기 -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 전투 장면 그림
「임진 전란도」 1834년연표보기 -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과 다대진성 전투 장면 그림
『충렬사지』 1808년연표보기 - 임진왜란 때 부산 관련 인물, 제단, 제향 기록
부산 시민의 날 1980년 10월 5일연표보기 - 임진왜란 때 부산포 해전의 승전 일을 시민의 날로 정해 제1회 행사가 열림
동래 읍성 역사 축제 2005년 - 임진왜란 당시 동래 읍성 전투와 관련 역사 문화 행사
관련 유적 송공단 -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시장길 27[복천동 229-78]지도보기
관련 유적 정공단 - 부산광역시 동구 정공단로 23[좌천동 473]지도보기
관련 유적 윤공단 - 부산광역시 사하구 윤공단로 112[다대동 1234]지도보기
관련 유적 25의용단 -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362
관련 유적 충렬사 -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 대로 345[안락동 838]지도보기
관련 유적 반송 삼절사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송동 143지도보기
관련 유적 임진 동래 의총 - 부산광역시 동래구 우장춘로 221[온천동 산1]지도보기
관련 유적 동래 남문비 -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63[대연동 948-1]지도보기
관련 유적 정운공 순의비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산144지도보기
관련 유적 정발 전망비 - 부산광역시 동구 정공단로 23[좌천동 473]지도보기

[개설]

1592~1598년 전개된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우리나라 역사상 많은 피해와 영향을 끼친 전쟁이었다. 부산은 전쟁을 일으킨 일본과 가장 가까운 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에 전쟁의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임진왜란 때 부산은 일본군의 첫 상륙 지점이 되면서 전쟁의 피해를 처음으로 직접 당하였으며, 이후 7년 동안 지속된 일본군의 주둔으로 오랫동안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 때문에 일본의 외침에 대한 저항의 기운도 드높았다.

이때 부산 지역의 백성들은 크게 두 모습을 보였다. 먼저 일본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모습인데, 관군과 함께 싸운 경우와 독자적인 의병에 참가한 경우로 나눌 수 있다. 다음으로는 일본의 점령하에서 살아간 모습인데, 수취(收取)나 역역(力役) 등을 강요당하면서 살았던 소극적인 경우와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살아간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조선 왕조는 적극적으로 국가 재건에 나섰다. 먼저 임진왜란 때 외세에 저항하다 순절한 인물들에 대한 대대적인 포상(褒賞) 작업을 전개해 나갔다.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사람들을 공신(功臣)으로 선정하고, 그들을 기념하는 제단(祭壇)을 만들어 추앙하였으며 각종의 기록을 만들었다. 이런 과정에서 부산 지역에도 제단·사우(祠宇)·비석이 건립되었으며, 기록을 편찬하여 임진왜란의 기억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만들었다.

한편 일제 강점기에는 임진왜란 때 죽은 이들을 위한 제향(祭享)이 민족혼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을 받았다. 해방을 거쳐 1970년대에는 국가 위기가 강조되면서 국난(國難)에서 활동한 인물들의 삶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에 임진왜란 시기에 싸우다 순절한 인물들의 동상과 기념비가 만들어졌으며, 학교 교육에서 충효(忠孝)가 강조되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에는 역사의 현장을 문화와 연계하는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임진왜란 당시 전투 현장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우리 주위에 남아 있는 임진왜란의 흔적을 찾아보자.

[제단과 비석의 건립]

임진왜란이 남긴 피해와 영향은 매우 컸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왕조는 전후 복구 작업과 함께 흔들리는 조선 사회를 안정화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임진왜란 이후 부산 지역에서도 전쟁을 기억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있었다.

첫째, 여러 제단이 건립되어 임진왜란 당시 전투 일에 맞추어 올리는 제향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송공단(宋公壇)은 1742년(영조 18) 동래 부사 김석일(金錫一)이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이 순절한 정원루(靖遠樓)의 옛터에 설치한 단(壇)이다. 1742년 동래구 복천동 229-78번지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해마다 음력 4월 15일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제사를 올린다. 일제 강점기 동래기영회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현재 동래 시장 북쪽에 있는 송공단부산광역시에서 1971~1972년에 대대적인 정화 사업을 펼쳐 이루어진 것이다.

정공단(鄭公壇)은 1766년(영조 42) 부산진 첨사 이광국(李光國)이 부산진성 남문 터에 세웠다. 동구 좌천동 473번지에 있다. 제사는 해마다 음력 4월 14일 부산진 첨사영에서 거행하였으나, 갑오경장 이후 첨절제사 제도가 폐지되자 지방민의 정성으로 향사계(享祠稧)에서 지내 왔다. 일제 강점기에도 향사 계원들이 제사를 지내 왔으나, 부산진육영학숙(釜山鎭育英學塾)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된 이후 폐쇄되었다. 해방 이후 지방 유지들이 향사계를 다시 조직하여 정공단을 새롭게 건립하였다. 1958년부터 부산진향우회에서 제단을 관리하면서 정공단보존회로 이름을 바꾸고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다. 1970년 정공단 내에 돌담을 쌓았으며, 1978년에는 부산시에서 정화 사업을 하였다.

윤공단(尹公壇)은 1765년(영조 41) 다대진 첨사 이해문(李海文)이 다대진성 객사(客舍) 동쪽에 설치한 제단이다. 순절비(殉節碑)는 1841년(헌종 7) 조엄(趙曮)의 아들 조진관(趙鎭寬)의 부탁을 받은 동래 부사 홍종응(洪鍾應)이 세웠다. 원래 단과 비는 다대포 첨사영의 성안인 지금의 다대초등학교에 있었는데, 1970년 현재의 자리인 사하구 다대동 1234번지로 옮겼다. 부산시에서는 1976년 비와 단을 고쳐 쌓고, 1978년에는 재실(齋室)을 지었다. 현재 제향은 동민들을 중심으로 음력 4월 14일에 거행하고 있다.

25의용단(義勇壇)임진왜란 이후 동래 부사 이안눌(李安訥)이 좌수영성 전투에서 싸우다 순절한 25명의 의용(義勇)을 찾아내어 집집마다 의용이란 푯말을 붙여 충절을 기린 데서 비롯되었다. 1853년(철종 4) 경상 좌수사 장인식(張寅植)이 수영성 성문 근처에 의용 제인비(義勇諸人碑)를 세우고, 그 앞에 의용단을 마련하여 3월과 9월 정일(丁日)에 제사를 올렸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좌수영이 폐지되자 수영면의 면장이 제사를 주관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면장이 부임하자 수영기로회(水營耆老會)에서 주관하였다. 1974년 부산시에서 의용 제인비 25기를 건립하고 담장을 설치하였다. 1999년 기초 사업 계획을 시작하여 2000년 시작한 공사는 2001년 사당(祠堂) 등을 준공하였다. 매년 음력 9월 말 정일에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 주관으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사상구인 의사 연구 제단(沙上九人義士戀舊祭壇)은 임진왜란 때 사상의 젊은이들이 동래 읍성과 다대포성 전투에 출전하였다 살아서 돌아온 9명이 전사한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제사를 지낸 데서 비롯하였다. 제사를 지내던 9명이 세상을 뜨자, 후손들이 옛것을 그린다 하여 연구계(戀舊契)를 조직하여 팔경대(八景臺)에 제단을 꾸미고 임진왜란 때 전사한 고을 사람들과 돌아와 전사한 분을 제사한 9명을 함께 제사 지냈다.

동래군 사상면일 때는 면민(面民)들이 제사를 올렸고, 일제 강점기에도 일본 제국주의의 눈을 피해 제사를 지냈다. 해방 후 시가지 확장으로 팔경대가 허물어지자, 지금의 백양산 중턱으로 옮겼다. 지금도 매년 음력 4월 14일 노인들을 중심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88년에는 사상구인 의사 연구 제단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제단 옆에 비석을 세웠다.

둘째, 사우를 건립하여 참배를 이어 오고 있다. 부산을 대표하는 충렬사(忠烈祠)는 1605년(선조 38) 동래 부사 윤훤(尹暄)이 동래 읍성 남문 안에 송상현을 모신 송공사(宋公祠)를 세우고 제사를 지낸 것이 처음이다. 1624년(인조 2) 선위사 이민구(李敏求)의 건의로 충렬사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1652년(효종 3) 동래 부사 윤문거(尹文擧)가 지금의 동래구 안락동 838번지로 이전하면서 사당을 창건한 후 강당과 동재·서재를 지어 안락 서원(安樂書院)이라 하였다.

1709년(숙종 35)에는 동래 부사 권이진(權以鎭)송상현정발(鄭撥)이 순절할 때 함께 전사한 여러 사람의 위패를 모신 별사(別祠)를 옛 송공사 터에 건립하였다. 1736년(영조 12) 별사에 모신 분을 충렬사에 옮겨 모셨다. 송상현정발을 따라 죽은 금섬(金蟾)애향(愛香)을 위해 충렬사 동문 밖에 사당을 세웠다. 안락 서원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 때도 충신과 열사를 모신 서원이라는 이유로 철폐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해마다 2월과 8월에 해 오던 제사도 방해를 받았다.

한편 지금의 충렬사는 1976년부터 1978년까지 대대적인 정화 공사를 하여 낡은 사우를 헐고 현재의 규모로 정화하였다. 이후 임진왜란 때 부산 지역에서 순절하거나 공을 세운 선열들을 찾아내어 직책 또는 증직(曾職)의 순서에 따라 93위의 신위(神位)를 모셨다. 현재 유림(儒林)에서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홀기(笏記)에 따라 제향을 올리고 있다. 또한 매년 5월 25일에는 부산 시민 모두의 정성을 모아 부산광역시장이 헌관(獻官)이 되어 제향을 올린다.

반송 삼절사(盤松三節祠)는 1839년(헌종 5) 동래부 유림의 발의로 건립되었다. 이듬해 사림에서 양지(梁誌)·양조한(梁朝漢)·양통한(梁通漢) 3위의 합사(合祠)를 요청하였고, 같은 해 4월 증축 완공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각종 기문(記文)과 현판 등이 압수되고 훼손되었으나, 세한당(歲寒堂) 현판은 보존되었다. 1989년 유림과 후손의 논의로 기존의 건물을 헐고 다시 건축에 착수하여 1990년 지금의 모습으로 준공되었다. 매년 봄과 가을 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송동 143번지에 있다.

셋째, 무덤과 비를 건립하여 기리고 있다. 비는 조선 후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세워져 임진왜란 때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을 기리고 있다. 임진 동래 의총(壬辰東萊義塚)은 1731년(영조 7) 동래 부사 정언섭(鄭彦燮)이 허물어진 동래 읍성을 수축할 때, 임진왜란의 격전지였던 동래 읍성의 남문 터[현 하나은행 수안동지점 부근]에서 전사한 이름 없는 용사(勇士)들의 유골을 삼성대(三姓臺) 서쪽 산기슭[현 내성중학교 부근]에 여섯 무덤을 만들어 모시고, 그 앞에 임진 전망유해지총비(壬辰戰亡遺骸之塚碑)를 세웠다.

동래부에서는 제전(祭田)을 급여하고, 향교에 맡겨 매년 추석에 유생으로 하여금 제사를 모시게 하였으며, 순절 일에는 장사(壯士)를 보내 제사를 모셨다. 일제 강점기에 토지 개간으로 무덤이 파괴되자, 동래구 복천동 뒷산 영보단(永報壇) 부근으로 옮기고 동래기영회에서 제사를 모셨다. 1974년 금강 공원동래구 온천동 산1번지로 옮겨서 하나의 무덤으로 만들었다. 현재 동래구와 동래문화원에서는 이들이 순절한 날인 매년 음력 4월 15일에 구민의 정성을 모아 제향을 올리고 있다.

동래 남문비(東萊南門碑)는 1670년(현종 11) 동래성 남문 밖 농주산에 건립되었다. 송상현의 공적을 기리기 때문에 충렬비(忠烈碑)라고도 한다. 1709년에 권이진 부사가 충렬사 별사를 세울 때 남문 안 별사 뜰에 옮겼다. 1736년(영조 12) 별사를 허물자 남문비와 비각만 남게 되었다. 1970년대에 남문 앞으로 도로가 확장되자, 현재 남구 대연동 948-1번지 부산광역시립박물관 뜰로 옮겼다. 비문은 『충렬사지(忠烈祠志)』에 실려 있다.

정운공 순의비(鄭運公殉義碑)는 1798년(정조 22) 부산포 해전에서 선봉장(先鋒將)으로 출전하여 싸우다 순절한 정운을 추모하기 위해 정운의 8세손 정혁(鄭爀)이 다대포 첨사로 부임하여 몰운대(沒雲臺)에 세웠다. 본래 비석만 있었으나, 1974년 부산시에서 비각을 세웠다. 사하구 다대동 산144번지에 있다. 정발 전망비(鄭撥戰亡碑)는 1761년(영조 37) 경상 좌수사 박재하(朴載厦)가 정발을 기려 영가대(永嘉臺)에 세웠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부설될 무렵 정공단으로 옮겼으며, 비석은 비각으로 보호되어 있다. 동구 좌천동 473번지에 있다.

송공단기(宋公壇記)는 1742년(영조 18) 동래 부사 김석일이 동래 읍성 안 정원루에 세웠으나 비기(碑記)를 갖추지 못하였다. 1975년 송공단 수축 때 송공단의 내력을 밝혀 다시 세웠다. 천만리 영양천공비(千萬里潁陽千公碑)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조선을 도우려 왔다 귀화한 천만리(千萬里) 장군을 위해 후손들이 1947년 동구 범일동 321번지 자성대(子城臺) 공원에 그의 업적을 새겨서 세웠다.

유정 대사 충의비(惟政大師忠義碑)는 1880년(고종 17) 부산진 첨사 임형준(任炯準)이 사명당 유정임진왜란 당시 활약상을 알리기 위해 부산진성 안에 세웠는데, 일제 강점기에 정공단으로 옮겼다. 1980년 어린이 대공원에 사명 대사의 동상이 세워질 때 순환 도로 북쪽으로 옮겼다. 비의 서북쪽에는 사명 대사의 동상이 있으며, 동상 옆으로 유정 대사 충의비가 비각에 보호되어 있다. 부산진구 초읍동 43번지에 있다.

충무공 이순신 영모비(忠武公李舜臣永慕碑)는 해방 후 일본식 지명을 고쳐 현재의 충무로(忠武路)라는 이름이 생겨날 때 세운 비다. 충무로에 일제 강점기 때 남항을 매축하고 세운 기념비가 남아 있었다. 충무로경로회 회원 52명이 남항 매축 기념비(南港埋築記念碑)를 없애고 충무공의 전승 기념비를 세우기로 뜻을 모아 1957년 충무동 로터리에 비를 세우고 해마다 음력 9월 7일에 제사를 올렸다. 1960년대에 도로가 확장되자 서구 암남동의 해양고등학교로 옮겼으며, 1992년 아파트가 건립되자 서구 서대신동 3가 산2-1 대신 공원 정문으로 옮겼다. 무분별한 개발로 비석은 수난을 당하였지만 지금도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동래 24 공신 공적비(東萊24功臣功績碑)는 동래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싸우다 순절한 사람 가운데서 『선무원종 공신녹권(宣武原從宗功臣錄券)』에 오른 인물 가운데 공적이 뛰어난 24명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1988년 5월 14일에 세웠다. 동래구 안락동 421-33번지 충렬사 경내에서 동래 읍성의 동장대로 오르는 곳에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 좌수영 무주망령 천도비(壬辰倭亂左水營無主亡靈薦度碑)는 1999년 8월 25일 토향회(土鄕會)에서 백산(白山)에 있는 옥련 선원(玉蓮禪院)의 양지바른 곳에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때 좌수영성을 지킨 25의용사를 비롯한 수영강 변 토민(土民)들이 고향을 지키기 위하여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군에 대항하다 순직하였는데, 전쟁이 끝난 지 400여 년이 지나 그들의 억울함을 달래 주고 주인 없이 망령(亡靈)이 된 자들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해 건립하였다. 수영구 민락동 327-5번지 옥련 선원에 있다.

[그림과 글로 재현]

임진왜란은 그림과 기록으로 재현되기도 하여 부산에서는 조선 후기 효종과 순조 연간에 순절도(殉節圖)가 제작되었다. 임진왜란 때 제작된 세 종류의 순절도는 모두 부산 지역을 대상으로 한 것이란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그런데 정작 부산에는 순절도의 진품이 한 점도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에 「동래부 순절도(東萊府殉節圖)」와 「부산진 순절도(釜山鎭殉節圖)」를 부산으로 가져오기 위한 노력이 안락 서원의 유림들을 중심으로 몇 차례 시도되었다. 그러나 2008년 7월부터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빌려 주는 형태로 잠시 전시되다가 2009년 1월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되가져 갔다.

송상현 종가의 「동래부 순절도」는 1658년(효종 9) 동래 부사 민정중(閔鼎重)이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전투 상황을 잘 아는 사람들을 찾아 물은 내용을 바탕으로 3폭을 그려 조정, 충렬사, 송상현의 종가에 각각 보관해 오던 것 가운데 하나다. 1978년 충렬사 정화 사업 이후 종가로부터 빌려 전시하다 2000년 5월 청주의 여산 송씨(礪山宋氏) 문중에서 되찾아 갔는데, 지금은 청주고인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동래부 순절도」는 다른 것보다 큰 편이며, 전투의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의 상황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렸다. 그림에 화기(畵記)가 없는 대신 선열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변박(卞璞)의 「동래부 순절도」는 1658년(효종 9) 처음 그려진 것을 1760년(영조 36) 동래 부사 홍명한(洪名漢)의 지시로 변박이 다시 그린 그림이다. 1963년 숭무(崇武) 정신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기증 형태로 육군사관학교로 옮겨져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동래부 순절도」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기법을 사용하여 치열하였던 교전의 장면을 화폭에 나타내었다. 작품의 격은 그리 높지 못하며 구도나 형태, 필치(筆致) 등에서 딱딱한 면이 엿보인다. 그러나 국난을 맞이하여 끝까지 항전한 민족성을 표현하여 민족적 교훈을 담고 있다.

변곤(卞崑)의 「동래부 순절도」는 1834년(순조 34) 동래부에서 그려진 뒤 일본으로 유출돼 교토[京都] 한 사찰에 보관돼 있었는데, 2010년 경매로 울산광역시립박물관에서 구입하여 전시하고 있다. 이 그림은 비단 두 폭을 이어 붙인 크기인데, 왼쪽 하단에는 ‘만력 임진 후 이백사십삼 년 갑오 사월 일 화사 본부 천총 변곤(萬曆壬辰後二百四十三年四月日畵師本府千摠卞崑)’이라는 관지(款識)가 적혀 있다. 변박의 「동래부 순절도」보다 성곽 표현에서 입체감을 살리고, 인물들을 많이 생략한 대신 중요 등장인물의 얼굴을 동그랗게 민화풍(民畵風)으로 그렸으며 인물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덧붙인 것이 특징이다.

「부산진 순절도」는 1709년(숙종 35)에 처음 그려진 것을 변박이 동래 부사 홍명한의 지시로 1760년(영조 36)에 다시 그린 것이다. 1963년 충렬사에서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져 보물 제391호로 지정되었으며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이 그림은 높은 곳에서 전투 장면을 내려다보듯이 그렸는데, 부산진성의 옛 모습과 지형을 잘 알려 주고 있다. 그림의 작품성은 높게 평가되지 않지만, 나라를 수호하는 민족정기를 보여 주는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임진 전란도(壬辰戰亂圖)」는 1834년(순조 34)에 화사(畵師) 이시눌(李時訥)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성과 다대포진성의 전투 장면 및 주변의 지리적 환경을 그린 족자 그림이다. 그림의 우측 하단에는 ‘만력 임진 후 이백사십삼 년 갑오 유월 일 화사 본부 군기감관 이시눌(萬曆壬辰後二百四十參年甲午六月日畵師本府軍器監官李時訥)’이라는 관지가 적혀 있다. 그림에 담긴 전투는 가까운 경관의 다대포진과 먼 경관의 부산진 두 성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 장면이다.

다음으로 『충렬사지』의 편찬이다. 『충렬사지』는 부산 지역의 임진왜란 전투와 충렬사의 연혁, 배향 인물에 대해 간략하게 수록한 책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쟁에 대한 기록이 사라져 갈 때, 이들을 정리하여 편찬한 책이다. 1767년(영조 43) 동래 부사 엄린(嚴璘)이 편찬하고, 1808년(순조 8) 동래 부사 오한원(吳翰源)이 간행하였다.

『충렬사지』는 권1 충렬공 유사(遺事)부터 권11 윤공단까지 임진왜란 시기에 부산 지역에서 싸우다 순직한 인물들에 대한 기록, 제향, 제단 건립 내용을 상세하게 담고 있다. 부록 1은 만공단, 부록 2는 별전 공신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충렬사지』는 지금까지 부산 지역의 임진왜란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구체적인 기록으로 부산 지역의 임진왜란 연구에 도움을 주는 소중한 자료이며, 전국적으로도 유례가 몇 되지 않는 사례이다.

[동상의 건립]

1950년대에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동상이 건립된 이후, 1970년대에 국가 위기가 강조되면서 우리나라 역사에서 있었던 국난 극복의 역사를 강조하였다. 이에 각 급 학교에서도 충효 교육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 부산 지역에서도 임진왜란과 관련한 일들이 다양하게 새롭게 조명되었다. 무엇보다도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인물들의 동상이 인물들과 연고가 있는 시내 곳곳에 세워져 사람들에게 임진왜란을 상기시키며 부산의 임진왜란을 웅변해 주고 있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1955년 12월 22일 임진왜란부산포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당시 부산을 대표하던 중구 광복동 2가 1-2번지 용두산 공원에 세웠다. 조각가 김경승(金景承)의 작품이다. 동상의 앞면에 ‘충무공 이순신상’이라 적혀 있고, 뒷면에 이은상(李殷相)의 글과 오제봉(吳濟峰)의 글씨로 부산포 해전을 기리는 내용이 적혀 있다. 동상은 당시 부산이 속하던 경상남도의 이름으로 건립되었다.

송상현 순절비(宋公壇殉節碑)임진왜란 때 동래읍성 전투에서 싸우다 순절한 송상현을 기리기 위해 1978년 3월 1일 부산진구 양정동 신좌수영 고개 삼각지 공원에 세웠다. 조각가 김정숙(金貞淑)의 작품이다. 앞면에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글씨로 ‘충렬공 송상현 선생상’이라 쓰여 있고, 뒷면 병풍석 가운데에는 송상현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동상의 헌납은 부산시장 최석원(崔錫元)이 하였고, 건립문은 김정한(金廷漢), 약전(略傳)은 김석희(金錫禧), 글씨는 오제봉이 썼다.

2011년 이후 부산 중앙 공원을 조성하면서 송상현 순절비를 34년 만에 옮겨야 하나, 다행히 송상현 순절비가 자리한 위치의 의미성을 고려하여 광장의 이름이 송상현 광장으로 정해져 원래 자리 옆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부산광역시건설본부는 송공 삼거리의 송상현 동상을 철거해 보수와 이전 작업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동상의 자리를 옮겨야 하는 이유는 송상현 광장 조성과 전포로~하마정 도로 확장 공사로 도로 위치가 바뀌기 때문이다. 송상현 순절비가 1978년 3월 현재 자리에 세워진 지 34년 만에 2013년 6월께 현재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13m 떨어진 곳에 다시 세워지는 것이다. 동상의 이전과 더불어 보수·도색 작업도 진행된다. 최근 정밀 검사 결과 내부 부식이 심하고, 주변 시설물도 퇴색해 보수가 필요한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정발 전망비임진왜란부산진성 전투에서 싸우다 순절한 정발을 기리기 위해 1977년 3월 20일 초량 입구 삼각지 공원에 세웠다. 한인성(韓仁晟)의 작품이다. 앞면에는 ‘충장공 정발 장군상’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가 새겨졌고, 오른쪽 측면에는 설립문과 정발의 약전이 새겨져 있다. 약전은 정중환(丁仲煥), 건립문은 허만하(許萬夏), 글씨는 배재식(裴在植)이 썼다. 헌납은 부산시장 박영수(朴英秀)가 하였다.

윤흥신 순절비(尹興信殉節碑)임진왜란 때 다대진성 전투에서 싸우다 순절한 윤흥신을 기리기 위해 1981년 9월 10일 초량의 고관(古館) 입구 삼각지 공원에 세웠다. 조각한 사람은 김영중(金泳仲)이다. 석상 아래 전면에 ‘다대첨사 윤흥신 장군상’이라 새겨져 있다. 건립문은 김규태(金圭泰), 약전은 정중환, 글씨는 한형석(韓亨錫)이 썼다. 부산시장 김무연(金武然)이 헌납하였다.

유정 대사 충의비는 1981년 10월 11일 부산진구 초읍동 어린이 대공원 안에 세웠다. 동상 뒤쪽 병풍석에 유정 대사의 발자취라 하여 행적이 적혀 있다. 글은 이종익(李鍾益)이 짓고, 글씨는 배재식이 썼다. 부산불교연합회에서 유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선 시대의 백양사(白楊寺) 터로 추정되는 현 어린이 대공원 안에 동상을 건립하였고, 해마다 동상 앞에서 추모 법회를 올린다. 동상은 높은 연화(蓮花) 기단 위에 입상(立像)으로 세워졌으며, 기단부에 ‘홍제존자 사명 대사상(弘濟尊者泗溟堂大禪師像)’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동상 뒤쪽의 비석에는 유정 대사의 발자취를 설명하는 명문(明文)과 건립문, 의승병들의 전투 장면이 그려져 있다.

[왜성의 흔적]

부산에는 곳곳에 왜성(倭城)이 많이 남아 있어 임진왜란의 흔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왜성은 일본인들이 임진왜란 때 쌓은 일본식 성이다. 1592년 6월에 접어들자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고 관군도 재편성되었다. 아울러 명나라가 참전하자 항일 전쟁이 본격화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후퇴하여 남해안의 주요 거점에 축성을 서둘러 강력한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일본에서 성곽 기술자를 데려와 조선 백성을 동원해 단기간에 성곽을 쌓았다. 왜성은 성벽이 경사가 져 있으며, 아래쪽에서 정상부로 향하면서 성벽이 몇 겹씩 중첩되어 있고 정상부에 지휘소로 쓰인 천수각(天守閣)을 두었다.

임진왜란 때 부산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은 상륙지인 부산진성을 본성으로 삼고, 동래 등지에는 지성(支城)을 두어 지배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부산에 축성한 성은 부산성, 부산 지성, 임랑포성, 구포성, 기장성, 죽도성, 가덕성, 가덕 지성, 동래성, 추목성, 박문구성 등이 있다. 지금도 뚜렷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부산의 중요한 왜성만을 찾아보기로 한다.

자성대는 원래 부산진성의 부속 성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자성대를 왜성으로 만들어 본거지로 사용하면서, 조선 후기에 자성대가 진성의 기능을 대신하였다. 일찍부터 이곳에는 우리나라의 성곽이 있었지만, 지금의 성곽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부산에 주둔하면서 부산진의 지성을 이용하여 쌓은 일본식 성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끝나고 자성대를 중심으로 성을 다시 쌓고, 사대문을 축조하여 부산진 첨사영으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해서 자성이 부산진성의 본성으로 쓰이게 되었다. 본말이 뒤바뀐 형상이다. 자성대 일대는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고 바다 쪽은 매축되어 옛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자성대는 자성대 부두라는 지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자성대를 가려면 혼수 시장으로 유명한 부산진 시장을 찾아가면 된다. 지하철을 이용하면 동구 범일동역 남쪽 방향의 부산진 시장 건너 동쪽 야트막한 산이 자성대이다.

한편 임진왜란 첫 전투지이자, 부산의 군사적 요충지인 부산진이 있던 부산진성에도 일본인이 쌓은 왜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 부산진성은 교통부 교차로에서 망양로를 이용하여 동구도서관으로 찾아가면 접근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좌천동 가구 거리 뒤쪽 산이 부산진성이 있던 자리이다. 지금 이곳은 동구 증산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정상부에 각종 운동 시설과 작은 운동장, 서쪽에 수원지, 입구 쪽에 동구도서관, 남쪽에는 아파트가 건립되어 있다. 마구잡이식 개발로 부산의 뿌리를 지워 버린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다.

구포 왜성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수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김해와 양산 사이의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쌓은 성으로, 김해 죽도성의 지성이었다. 원래 구포 왜성은 북쪽의 큰 산에서 남쪽의 작은 산으로 연결된 성터였다. 1970년대 남해 고속 도로 공사 중 낙동강교를 건설하면서 큰 산과 작은 산의 목을 자른 탓에 원래의 흔적을 잃어 버렸다. 현재 큰 산은 왜성의 석축(石築)이 보존되어 있어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왜성의 바깥 성인 작은 산은 주민들의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후 이곳에 북구 빙상 문화 센터가 건립되면서 문화재 매장 가능성이 높아 2001년 지성 일부가 발굴되어 고려청자 등이 출토되었다. 이곳이 신라 시대 이래로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음을 보여 준다. 구포 왜성금정산의 지맥인 상학산이 끝나는 구포 지역의 낙동강 변에 자리하며, 남해 고속 도로의 시작점이자 구포 대교의 구포 쪽 야트막한 산에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지금도 왜성 터임을 알 수 있는 흔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상단부의 석축 터는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김해 죽도 왜성은 강서구 죽림동 가락산에 있기 때문에 가락성 또는 죽도성이라고도 한다. 죽도는 대나무가 많이 자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락산은 김해평야 가운데 동서로 뻗은 독립된 야산인데, 그 동쪽 끝은 낙동강의 서쪽 지류인 오른쪽 강변에 인접해 선박을 정박시킬 수 있다. 죽도는 김해부의 안산(案山)에 해당하며, 서북쪽 삼면은 논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형적으로 볼 때 김해 죽도 왜성, 구포 왜성, 물금의 증산성은 삼각형을 이루어 김해 북쪽으로 내려오는 군사를 효율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방어의 요충이었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 지류를 이용하여 배로 다른 성과 긴밀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김해 죽도 왜성을 찾아가려면 강서구 가락동 주민센터에서 야트막한 산을 오르면 된다. 이곳에는 서낙동강이 인접하여 있으며, 옆에 아시아 경기 대회 카누 경기장이 있다.

기장 죽성리 왜성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마을 뒤편 해안에 접한 요충지에 쌓은 성이다. 죽성만의 서쪽에 있는 두 개의 작은 구릉을 중심으로 축조하였다. 남쪽 구릉은 본성이고, 북쪽 구릉은 지성이다. 북쪽의 청강천을 자연적인 외곽선으로 삼았다. 동해안의 울산 학성, 서생포성, 부산성을 연결하는 요충지에 자리하였다. 기장 죽성리 왜성은 조선 시기 만호영이 있던 두모포진에 인접해 있다. 현재는 성곽의 일부가 남아 있지만, 정상부의 천수각 터 등은 잘 남아 있다. 반면 아래쪽은 많은 부분이 밭과 민가로 이용되고 있다. 기장 죽성리 왜성은 기장 시내에서 신앙촌 가는 길을 찾아 들어서 곧장 바닷가로 나가면 바다와 인접한 야트막한 산에서 만날 수 있다.

[시민의 날, 축제, 그리고 송상현 광장]

1980년 9월 10일 부산 시민의 날이 확정·공포되었다. 부산 시민의 날인 10월 5일[음력 9월 1일]은 임진왜란이순신 장군이 부산포[동구 좌천동남구 문현동 앞바다] 해전에서 크게 이긴 날을 기념하여 정하였다. 부산포 해전은 부산포에 정박해 있던 일본 배 100여 척을 쳐부수어 일본군의 해상 기동력을 약화시킨 의미 있는 전투였다. 1980년 10월 2일 부산 시민의 날 조례(條例)가 만들어지고, 10월 5일 제1회 시민의 날 행사가 다양하게 열렸다.

다음으로 2000년 이후 임진왜란과 연관된 역사의 현장은 문화와 관광 체험의 장소로 주목받고 있다. 부산은 임진왜란을 겪은 생생한 체험의 장소이다. 이러한 공간을 새롭게 활용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첫째, 조선 시대 부산의 중심지였던 동래 읍성에서는 역사 축제가 열린다. 동래구임진왜란 때 동래성을 지키기 위해 동래 부사 송상현과 동래 읍성민들이 단결하여 결사 항전하였던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마련한 축제이다. 실제의 긴박한 전투 상황을 재현하고, 읍성민들의 장터 등 생활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역사 체험형 축제이다. 동래 구민은 물론 국내·외 방문객을 동래 지역으로 적극 유치함으로써 지역 경제의 활성화와 함께 경쟁력 있는 축제로 개발하였다. 동래 읍성 역사 축제(東萊邑城歷史祝祭)는 1995년 동래 충렬제로 시작하였는데, 2005년부터 동래구청이 주도하여 동래 읍성 역사 축제로 개편하였다.

동래 읍성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여러 차례의 개축을 거쳐 현재 견고한 성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동래 읍성 역사 축제는 동래 읍성의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개최된다. 개최되는 장소는 치열한 전장이었던 읍성 마당과 곳곳의 성벽 주변, 동래부의 관아 터, 동래 향교, 임진왜란 때 장렬히 전사한 동래 지역 백성을 위로하는 충렬사, 동래 장터, 복천박물관, 온천천이다. 이처럼 역사성과 현재성이 맞물리는 곳에서 축제가 개최되어 역사 축제의 의미가 살아난다.

동래 읍성 역사 축제는 10월 초순에 닷새에 걸쳐 전야제, 주 행사, 체험 행사로 나누어 개최된다. 전야제는 온천천을 중심으로 2박 3일간 펼쳐지며, 가족 중심의 축제가 되도록 구성되었다. 온천천 걷기 대회, 「동래 야류」 길놀이 행렬, 온천천 가족 영화제, 동래 부사·왜군 행렬, 마당극이 열린다. 본 축제는 주말을 이용하여 읍성 마당, 동래 향교, 읍성의 북문 앞 전투지, 동래 문화 예술 마당에서 열린다. 동래 읍성 성곽 밟기, 시조 경창 대회, 동래성 전투 퍼포먼스, 큰 윷놀이, 마당극 공연, 「동래 야류」·「동래 학춤」 같은 전통 예술 공연이 펼쳐진다.

동래 읍성 역사 축제는 과거 동래 지역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행사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임진왜란 때의 복식(服飾)과 병영 모습, 옥사(獄舍), 형틀 등을 체험할 수 있다. 또 전란 중에 사용된 무기도 전시하여 직접 사용해 보게 하여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일본군과 맞서 싸운 선조들의 충렬 정신을 배우도록 한다. 동래 부사의 가마 행차는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축제 행사장 전역에서 하루에 네 차례 퍼포먼스 형식으로 공연된다. 동래 부사 집무 모습도 재현하여 과거를 체험토록 한다.

온천천동래 문화 회관 주변에서 행해지는 전통 길놀이, 동래 관광 상품 전시, 축등 달기 등의 행사도 흥미롭다. 놀이와 기원이 융합된 축제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선 시대 뛰어난 과학자인 장영실(蔣英實)이 동래에서 출생하였음을 기리는 프로그램, 역사성과 현대성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의 하나로 아동극 공연, 동래 장터를 조선 시대의 모습으로 재현한다. 당시 장터를 달구었을 여러 장터 공연물도 연행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역사성과 선조들의 일상적 삶을 알게 하는 체험 형식의 축제가 동래 읍성 역사 축제이다.

축제의 백미는 동래 읍성 북문에서 재현하는 전투 장면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송상현 동래 부사와 동래 읍성민들의 전투 장면을 퍼포먼스 형태로 재현한다. 전투 장면은 제1장 평화[평화로운 동래 읍성의 모습], 제2장 침략[일본군의 동래 읍성 앞 당도], 제3장 결의[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비켜 주기는 어렵다], 제4장 항전[일본군과의 격렬한 전투], 제5장 최후[장렬한 최후] 등으로 진행된다.

특히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두 가지 행사가 있다. 우선 임진왜란 복식 체험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과 일본군의 전투복 등을 전시하고 입어 보게 함으로써 임진왜란과 동래성 전투의 역사적 교훈을 알리고자 한다. 다음으로 임진왜란 무기·병영 체험이다. 칼, 창, 활 등 조선 시대의 각종 무기류 전시와 기초 군사 훈련 및 무기 발사 시범 등 실제 병영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둘째, 동래 읍성 전투지를 재현한 동래 읍성 역사관이 만들어졌다. 동래 읍성 역사관도시 철도 4호선 수안역에 있는데, 임진왜란 때 동래 읍성에서 벌어졌던 처절한 전투 현장을 생생하게 전해 주는 살아 있는 역사 체험장이다. 많은 유적과 유물이 전시된 것은 아니지만, 동래 읍성 해자(垓字)에서 발굴된 중요한 자료들을 볼 수 있다.

동래 읍성 역사관의 시작은 2005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 철도 4호선 공사를 위해 수안역 구간에서 굴 파기 작업을 진행하던 중 동래 읍성으로 추정되는 석축이 발견되면서 7월부터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에 착수하였다. 2007년 4월부터 2차 발굴 조사가 이뤄졌다. 2년이 넘는 발굴로 부산교통공사는 예정한 공기를 맞추기 어려운 상황을 겪었다. 부산교통공사가 2007년 12월 유물발굴지도위원회의 역사관 건설 권고를 수용하면서 역사관 조성은 급물살을 탔다. 유물발굴지도위원회는 도시 철도 4호선 건설 과정에서 임진왜란 때로 추정되는 다수의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실제 발굴지인 수안역 내에 별도의 역사관을 조성해 전시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2007년 도시 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 현장에서 인골과 유물이 발견된 곳은 동래 읍성의 해자로 밝혀졌다. 경남문화재연구원의 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해자에서 무거운 둔기에 맞아 함몰된 인골과 예리한 칼에 잘린 인골 등 100여 구의 인골과 다량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특히 일본군의 조총(鳥銃)에 살해된 5세 남짓한 유아의 인골과 머리를 두 번이나 무참하게 베인 흔적이 있는 20대 여인의 인골도 발굴돼 동래 읍성 전투에서 민간인 위주로 학살이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아울러 문헌으로만 존재를 알고 있던 조선 시대 갑옷의 일종인 비늘 갑옷 한 벌이 역사관 한쪽을 당당히 지키고 있다.

임진왜란 전쟁의 실상을 생생히 보여 주는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부산교통공사가 1,029㎡의 규모로 완성한 동래 읍성 역사관은 주 전시, 기획 전시, 해자 단면 연출, 전사 그래픽 연출 등 크게 4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 전시 공간은 임진왜란 당시 동래 읍성 전투 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동래 읍성 축소 모형, 발굴 유물의 복제품과 복원품이 전시되며, 동래 읍성 전투를 해자 발굴 자료와 사료를 통해 재현한 동영상을 볼 수 있는 영상실이 설치되어 있다.

이 밖에도 큰 칼·창 등 출토 유물 다수가 전시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의 무기를 실제로 사용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무기 체험실이 운영되고 있다. 전시물 중 가장 이목을 끄는 것은 발굴 현장을 그대로 재현한 주 전시 공간의 동래 읍성 해자다. 해자와 그 아래에서 발견된 인골과 무기류가 그대로 전시되어 임진왜란 당시의 참혹하였던 역사를 재현하고 있다.

한편 수안역 대합실 입구와 캐노피는 홍예문을 모티프로 연출하였고, 승강장 벽면에 「임진 전란도」·「동래부 순절도」·「동래 부사 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가 설치되어 있어 동래 읍성 역사관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동래 읍성 역사관은 동래의 오랜 역사를 아는 사람들에게 매우 의미 깊은 곳이며, 민족의 아픈 역사를 돌아보는 체험 장소가 되는 곳이다. 또한 부산도시철도의 대표적인 테마 역사 공간이자, 자라나는 세대에게 생생한 역사 체험장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셋째, 송상현 광장이 조성된다. 2009년 8월 5일 부산광역시는 군부대의 이전으로 생겨난 도심 공간에 시민 공원을 조성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부산 중앙 광장[가칭]의 명칭이 송상현 광장으로 정해졌다. 부산광역시는 명칭 선정을 위한 시민 공모에서 569개의 명칭을 접수한 후 전문가가 참여한 명칭선정위원회 회의를 통해 7개로 압축하고, 다시 여론 조사 결과를 반영해 3개로 압축하는 과정을 거쳤다. 부산광역시는 시정조정위원회를 열어 부산중앙광장명칭선정위원회에서 올린 송상현 광장, 시민의 뜰, 모너머 광장 등 3개 명칭에 대한 심의를 벌여 송상현 광장으로 최종 확정하였다.

부산광역시는 중앙 광장 사업 구간 내 송상현 동상이 설치돼 있는데다 송상현의 충절과 업적을 후손 만대에 기리기 위해 광장 명칭을 송상현 광장으로 하기로 하였다고 밝혔다. 또 시민이나 중앙 등 일반적인 명칭보다 독특하면서도 특징적인 명칭이 필요하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아울러 부산광역시 관계자는 “송상현 공은 임진왜란 때 전사이가도난으로 일본군에 대항해 결사 항전한 분이며, 부산의 영웅으로 추앙할 만하다”면서 명칭 확정 과정에서 이 같은 의미가 반영되었다고 말하였다.

송상현 광장은 부산진구 전포동 삼전 교차로~양정동 송공 삼거리 구간 3만 4740㎡[길이 700m, 너비 45~78m] 규모로 조성된다. 전체적으로 문화 마당, 다이나믹 부산 마당, 역사 마당으로 구분되며 잔디 광장과 실개천, 산책로, 송상현 동상 기념광장, 바닥 분수 등이 포함된다. 송상현 광장은 국내 최대 규모의 광장이자 시민을 위한 소통과 만남의 장소가 될 것이다. 이처럼 부산의 대표 광장이 송상현의 이름으로 정해진 것은 부산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임진왜란을 떼어 놓고 이야기할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나 송상현 광장은 역사·문화와의 접목이 부족하다. 1978년 송상현 순절비를 왜 이곳에 세웠는지에 대한 성찰이 다소 부족하다. 송상현의 동상이 세워진 후 광장을 만드는 지금 부산의 정체성까지 아울러 세워야 한다. 지금도 송상현은 순절비 누대 위에서 광장을 만드는 우리를 엄중하게 지켜보고 있다. 삼전 교차로~송공 삼거리 700m의 중앙로 일대는 2010년 10월 본격 공사에 들어가 2014년 5월 광장으로 태어나게 된다. 면적이 3만 4740㎡로 서울 광화문 광장보다 규모가 크다.

이곳은 애초 1972년 박영수 부산시장 시절 도로 또는 광장으로 계획되었다. 그러다가 부산광역시가 2009년 갑자기 일사천리로 광장을 조성한다며 여론 조사와 현상 공모를 하였다. 2010년 6월 부산시장 선거가 있었다. 시는 총 173억 원을 투입해 2014년 5월께 공사를 마무리한다는 방침이다.

넷째,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서는 임진왜란 7주갑 특별 기획전 ‘임진왜란’을 2012년 6월 1일부터 개최하였다. 이 행사는 전국의 박물관 가운데 부산광역시립박물관이 독자적으로 행사를 기획하여 진행하였다. 특히 부산 관련 임진왜란 순절도 진품 3종이 동시에 전시되었다. 어찌 보면 ‘임진왜란의 도시’ 부산의 입장에서 당연한 행사일 수 있다. 특별 기획전에 맞추어서 도록이 간행되었는데,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소장된 유물과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임진왜란 관련 유물을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임진왜란에 관련된 글로 ‘임진왜란과 부산’, ‘전쟁이 남기다’, ‘전쟁을 기억하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더욱이 이윤택 감독의 「이순신 뮤지컬」 공연되기도 하여 임진왜란이 새롭게 시민들에게 다가온 계기가 되었다.

[기억과 전망]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피해와 영향을 준 임진왜란을 기억하고, 이를 토대로 미래를 개척해 나가야 할 책임이 현재의 우리에게 있다. 임진왜란과 가장 많은 관련성을 가진 부산에는 임진왜란 연관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 현재 부산의 곳곳에 남아 있는 전쟁의 기억과 추억의 현장은 우리에게 역사를 알려 주는 소중한 공간이자, 산책이나 답사를 할 수 있는 생활과 여유의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것들을 전쟁 기억의 장소로 잘 활용하고 나아가 관광 상품화할 수 있다면, 새로운 역사와 문화의 공간으로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아울러 이런 작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임진왜란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계승은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일본과의 관계를 객관적이며 올바르게 인식하게 하여 미래의 발전적인 한·일 관계를 새롭게 열어 갈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관심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라 믿어 본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11.19 유정대사 충의비 건립연도 수정 1820년 -> 18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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