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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208
한자 李光國
영어음역 Yi Gwangguk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473-474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용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
성별
대표관직 부산 첨사|금위영 기사장
활동 시기/일시 1739년 - 공을 세워 가좌됨
활동 시기/일시 1743년 - 가선대부에 오름
활동 시기/일시 1761년 7월 - 내금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64년 5월연표보기 - 부산 첨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66년 9월 - 오위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68년 10월 - 평산 부사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779년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황해도 - 황해도
거주|이주지 황해도 - 황해도
부임|활동지 부산진성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정의]

조선 후기 부산 첨사정공단(鄭公壇)을 조성한 무신.

[활동 사항]

이광국(李光國)[?~1779]은 1739년(영조 15) 호환(虎患)을 막은 공으로 품계가 올라가고, 1743년(영조 19)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 품계를 받았다. 내금장(內禁將), 오위장(五衛將), 충장장(忠壯將) 등을 지냈으며 중간에 지방관으로도 나갔다.

1764년(영조 40) 부산 첨사로 부임한 이광국임진왜란부산진성에서 부산 첨사 정발(鄭撥)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병사 및 백성들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부산진성 남문 앞에 정공단을 조성하여 흩어져 있던 비들을 한데 모으고 새로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 세견선(歲遣船)의 출입을 철저히 단속하고 밀무역을 근절하였다. 그 공을 인정받아 1766년(영조 42) 9월 중앙으로 옮겨 오위장으로 영전하였다. 1768년(영조 44) 10월부터 1770년 5월까지 평산 부사를 지낸 뒤 1779년(정조 3) 금위영(禁衛營)의 2번 기사장(二番騎士將)으로 재임하던 중 병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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