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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848
한자 李庭憲碑
영어의미역 Monument for Yi Jeongheon
이칭/별칭 증좌승지 이정헌 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473-474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관련인물 이정헌(李庭憲)[?~1592]
재질 화강암
크기 90㎝[높이]|37㎝[너비]|29.5㎝[두께]
소유자 정공단
관리자 정공단
건립 시기/일시 1749년 1월연표보기 - 건립
이전 시기/일시 1766년 - 정공단으로 이전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592년 4월 14일연표보기 - 이정헌 사망
현 소재지 정공단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473-474지도보기
원소재지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사도촌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 있는 조선 후기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 전투에서 전사한 이정헌(李庭憲)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이정헌[?~1592]은 본관이 공주(光州)이고, 자는 수경(守卿)이다. 1591년(선조 24) 봄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가 일본이 가까운 장래에 조선을 침입할 것이라 전하자, 조정은 이를 경계하여 무과(武科)를 중시하였는데, 이정헌은 문과의 과거 준비를 그만두고 그해 가을 무과에 급제하여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의 휘하에 배치되었다. 정발이정헌을 손님을 맞이하는 예로 대우하면서 군문에 관하여 자문을 구하였다.

이듬해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일본군이 부산항으로 침입하여 부산진성을 공격하자 이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정발과 함께 순절하였다. 이정헌의 순국 사실은 1742년(영조 18) 이정헌의 손자 이회일과 이정일 등이 이정헌이 남긴 글을 발견하여 부산진성 전투에서 이정헌정발과 함께 용감하게 싸우다가 순절한 사실을 상세히 전하면서 확인되었다.

[건립 경위]

이정헌 비(李庭憲碑)는 1749년(영조 25) 1월 당시 부산진 첨사 이사선(李思先)이 임진왜란 때의 부산진성 옛터에 세웠다. 조선 시대에 이곳 마을 이름이 사도촌(沙道村)이었다고 한다.

[위치]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정공단로에서 정공단로 21번길로 들어가 약 50m 거리에 있는 정공단(鄭公壇)에 위치한다. 소재지 주소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473-474번지이다.

[형태]

비신(碑身)과 받침돌이 있고 가첨석은 없다. 비의 크기는 높이 90㎝, 너비 37㎝, 두께 29.5㎝이다. 비면의 글씨 새긴 부분을 다듬어 해서체로 새겼다.

[금석문]

비의 제목은 ‘증 좌승지 이정헌 비(贈左承旨李庭憲碑)’이며 ‘기사 맹춘립(己巳 孟春立)[기사년(영조 25, 1749) 1월에 세움]’이라고 되어 있다.

[현황]

정공단에 위치한 16기의 추모비 중 하나로 보존되어 있다. 정공단이 소유하여 관리한다.

[의의와 평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1766년(영조 42) 당시의 부산진 첨사 이광국(李光國)이 임진왜란 때의 부산진성 옛터에 정발과 함께 전투에 나선 군사와 백성들의 충성을 기리기 위해 제단을 만들고 비를 세웠으며, 또한 원래 1760년(영조 36) 동래 부사 홍명한(洪名漢)이 지방 사림과 의논하여 이정헌송공단에 추향(追享)하였으나, 그 뒤 이정헌은 동래성에서 전사하지 않았다 하여 파향(罷享)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문의 기사년은 1749년이므로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즉 1742년에 이정헌의 후손들에 의해 순국 사실을 알게 되어 그다음의 기사년에 세워진 것이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의하면 당시의 부산진 첨사는 이광국이 아니라 이사선이었다. 아마 이광국 첨사 때에 이르러 송공단을 조성하면서 부산진성 순절 인물들의 추모비가 모아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인물들은 정확한 기록이 부족하여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이정헌은 집안의 소유 문서 등을 통해 순국 사실이 밝혀져 세상에 알려진 좋은 사례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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