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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867
한자 鄭撥
영어음역 Jeong Bal
이칭/별칭 자고(子固),백운(白雲),충장(忠壯),흑의 장군(黑衣將軍)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정공단로 23[좌천동 473]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강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
성별
본관 경주
대표관직 부산진 첨절제사
출생 시기/일시 1553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시기/일시 1577년 - 무과 급제, 선전관, 해남 현감에 임명
활동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부산진 첨절제사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592년 4월 14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24년 - 충렬사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681년 - 좌찬성에 추증, 시호를 받음
추모 시기/일시 1761년 - 충장공 정발 전망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766년 - 정공단 건립
추모 시기/일시 1894년 - 향사계에서 제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5년 - 육영학숙에서 정공단 향사계를 재조직, 정공단을 육영학숙 자리로 옮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8년 - 정공단 관리를 부산진 향우회가 맡아 정공단 보존회로 이름을 바꿈
출생지 청주 - 충청북도 청주시
부임|활동지 부산진성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묘소|단소 송공단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229-78지도보기
묘소|단소 정공단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473-474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충렬사 -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898지도보기
충장공 정발 전망비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정의]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 전투에서 순절한 무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 경주 정씨(慶州鄭氏)는 고려 때 정진후(鄭珍厚)가 군기윤(軍器尹)에 책봉된 이후 대대로 재상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선조인 양경(良景) 정희계(鄭熙啓)는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개국을 도운 공로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고조 할아버지는 정희계의 손자로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낸 정지례(鄭之禮)이고, 할아버지는 돈령부 도정 정세현(鄭世賢)이며, 아버지는 간성 군수(杆城郡守) 정명선(鄭明善)이다. 정명선은 큰아버지 정세호(鄭世豪)에게 입양되었다. 어머니는 관찰사 남궁숙(南宮淑)의 딸이다.

[활동 사항]

정발(鄭撥)[1553~1592]은 1577년(선조 10) 25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이어서 해남 현감(海南縣監)에 임명되었다. 해남 현감으로 부임한 지 3년 만에 지역에 널리 이름을 알렸다. 임기를 마치고 중앙으로 돌아왔을 때 오랑캐가 종성에 침입하자 정발은 막하(幕下)[대장의 휘하]로 나가 난을 평정하였다. 이후 거제 현령(巨濟縣令)을 지내고 비변사 낭관(備邊司郎官)에 임명되었다. 그 무렵 대신들이 둘러앉아서 정발에게 붓을 주며 불러 주는 내용을 적게 하였다. 무과 출신인 정발이 아주 어려운 글도 물 흐르듯 막힘없이 써 내려가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이때부터 대신들 사이에서도 정발의 이름이 회자되었다.

비변사의 낭관을 겸하여 위천 군수(渭川郡守)의 임기를 끝내고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이 되었고, 사복시(司僕寺)로 승진하여 내승(內乘)을 겸하였다. 조정에 왜가 침입할 기미가 보인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1592년(선조 25) 정3품 당상관의 품계인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임명되었으며, 전운이 짙어갈 때 부산진성의 사령관 격인 부산진 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 정발은 1592년 4월 14일 왜군이 부산진성을 공격하자 군·관·민을 독려하며 끝까지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어 전사하였다. 이에 왜군들은 임진왜란 때 가장 격렬하게 싸운 장수로 검은 옷을 입고 싸운 흑의 장군(黑衣將軍) 정발을 꼽았다.

[상훈과 추모]

1622년(광해군 14)에 부산진성의 병사들이 정발의 의열을 추모하여 받들었다는 소식이 조정에까지 전해져 정발의 무공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선위사(宣慰使) 이민구(李敏求)가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의 위패를 모신 송공사(宋公祠)에 사액을 내릴 것과 정발을 함께 배향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1624년(인조 2) 송공사는 ‘충렬(忠烈)’ 사액을 받아 충렬사(忠烈祠)로 바뀌고, 정발도 배향하게 되었다.

이후 정발은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1681년(숙종 7) 동래 부사 조세환(趙世煥)의 상소로 또다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충장(忠壯) 시호를 받았다. 1683년(숙종 9) 경연에서 대신들이 상소를 올려 정발의 집과 마을 입구에 충성스럽고 의로운 업적을 나타내는 표시를 하여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도록 하였다. 1761년(영조 37)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 박재하(朴載河)가 충장공 정발 전망비를 세웠다. 1766년(영조 42)에는 부산 첨사 이광국(李光國)이 옛 부산진성 터정발과 함께 숨진 병사와 백성들의 충성을 기리기 위해 정공단(鄭公壇)을 조성하였다. 정공단충렬사에서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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