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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075
한자 釜山鎭城戰鬪
영어의미역 Battle of Busanjinseong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강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투
관련인물/단체 정발|정공단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4월 14일연표보기 - 일본군의 부산진성 공격 개시
종결 시기/일시 1592년 4월 14일연표보기 - 일본군의 부산진성 점령
발단 시기/일시 1592년 4월 13일 - 일본군의 부산 내습
전개 시기/일시 1592년 4월 14일 - 일본군의 부산진성 공격
발생|시작 장소 부산진성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일원
종결 장소 부산진성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일원

[정의]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에서 벌어진 전투.

[개설]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을 지킨 정발(鄭撥) 장군의 군사와 침략군 일본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이 싸운 최초의 전투이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을 침략한 일본군은 4월 14일 부산진성을 공격하였다. 부산진 첨사 정발과 휘하의 군사들은 결사 항전하였으나, 대규모 일본군의 공격을 막지 못하여 오전 중에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교두보로 삼아 조선 침략을 계속할 수 있었다.

[역사적 배경]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오후 5시경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조선 침략 선봉군인 제1군의 대군사는 700여 척의 병선으로 부산포를 내습해 왔다. 이때 황령산(荒領山) 봉수대에서는 서울로 사실을 보고하였다. 당시 부산진 첨사는 정발이었다. 이 날 일본군은 상륙하지 않고 절영도(絶影島) 전방에서 임시로 정박하고 공격은 개시하지 않았다. 다만 일몰 무렵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의 막료인 쓰시마[對馬] 도주(島主) 소오 요시토시[宗義智]가 약간의 군사를 이끌고 상륙하여 부산진성 부근의 경계 상황을 직접 정찰하고는 선단으로 돌아가 부산진성의 방비가 엄중하다는 것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13일 밤을 선상에서 보냈다.

[경과]

일본군은 14일 아침에 해안으로 상륙하여 성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면서 가도(假道)[길을 비켜 달라]를 요구하는 글을 목판에 써 성 밖에 세웠다. 첨사 정발은 이 요구를 묵살하고 성의 방비에 힘을 다하였다. 당시 부산진성은 경상도 해안 지방에 설치된 수군첨절제사의 진영인 부산포진, 다대포진, 가덕진, 미조항진 등 4개 진(鎭) 가운데 경상도 제1의 해상 관문으로서 일본군들이 조선 땅에 상륙할 때는 반드시 거쳐야 할 요충이었다. 그리고 부산포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왜관(倭館)이 설치되어 있어서 일본인들의 제한적인 출입이 유일하게 허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다수의 일본인들이 체류하기도 하였으므로 쓰시마에서 차출된 소오군은 비교적 부산의 지리에 익숙해 있었다.

한편 당시 부산진성의 민호(民戶)는 300여 호로 군민을 합하여도 일본의 대군에 비교가 되지 않았으며, 병력도 불과 1,000여 명이었다. 정발은 부임 후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곽을 보수하는 등 방어 태세를 강화시켰다. 그래서 부산진성은 우리나라의 관문을 지키는 중요한 성으로서 비교적 견고하였다. 이런 사실은 야소회(耶蘇會)의 선교사가 쓴 『일본서교사(日本西敎史)』에서는 “바닷가에서 성에 이르는 사이에는 방어를 목적으로 말뚝을 쳐 놓고 있었으며, 성벽 주위에는 참호(塹濠)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였으며, 『길야 일기(吉野日記)』에서는 “성은 이중삼중으로 성지(城址)를 둘러놓고, 또 반궁(半弓) 등의 도구도 구비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4일 일본군은 예측대로 부산포의 우암(牛岩)에서 삼분하여 결진하고는 배를 포안(浦岸)에 붙여 차례로 상륙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이때는 6시경이었다. 일본군은 성을 공격하면서 흙과 돌로써 참호를 메우면서 성벽에 접근하고 사면으로 성을 첩첩으로 포위하였다. 다수의 병력을 가진 일본군의 대군은 신무기인 조총(鳥銃)을 발사하며 성을 넘어 오려고 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사면에서 활과 화살을 쏘며 사력을 다하여 성을 지켰다. 일본군은 서문이 쉽게 돌파되지 않자, 조선군의 후방인 북쪽의 방어가 허술하다는 것을 알고 북쪽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북쪽 성벽을 넘어 성으로 난입하였다.

첨사 정발은 군민을 지휘하여 활과 화살을 쏘며 죽음을 각오하고 분전하였다. 그러나 순식간에 성중은 아비규환(阿鼻叫喚)으로 변하였으며, 피아간에 장렬한 육탄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굳센 항전도 적의 대군 앞에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마침내 첨사 정발이 탄환에 맞아 전사하자, 아군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고 성은 곧 함락되었다.

[결과]

조선군과 민의 굳센 항전도 일본군의 대군 앞에 차례로 많은 희생자를 내었으며, 마침내 첨사 정발이 탄환에 맞아 전사하자 성은 함락되었다. 당시 적의 만행은 극에 달하였다. 일본 측의 기록에 “성중의 군대는 물론 부녀자, 어린 아이 심지어 개와 고양이까지 모두 죽였다”고 하였으니, 참혹상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우리 측의 기록으로는 정발의 막빈(幕賓)으로 성에 있다 싸움에 임했던 이정헌(李庭憲)의 사적에 “온 영(營)에 해골이 쌓였다”고 하였으니, 얼마나 많은 전사자를 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부산진성의 전투 시간에 대해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송시열(宋時烈)의 「정공 묘표문(鄭公墓表文)」에는 “이 날 정오에 공이 탄환을 맞아 전사하고 끝내 성은 함락되었다”고 하며, 일본의 『길야 일기』에는 “여섯 시경에 공격하여 열 시에서 열두 시경에 함락되었다”고 하고, 또 『서정 일기(西征日記)』에는 “여섯 시경에 포위하여 여덟 시경에 함락되었다”고 한다. 대체로 새벽부터 일본군은 군사를 동원하여 거의 한나절, 오전 중에 전투를 끝낸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부산진성 전투는 임진왜란 때 조선군이 일본군을 맞이하여 처음 치른 싸움이었다. 일본군과 군사수와 무기 면에서 비교하여 현저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군·관·민이 나라의 관문을 지키기 위해 결사 항전했다는 점에서 길이 역사에 남을 만한 전투였다. 이에 일본군도 정발 등이 용감하게 힘껏 싸운 점을 찬양하여 임진왜란 때 가장 용감한 장수는 부산의 흑의 장군(黑衣將軍)이라고 하였다. 일본군은 상륙 당일로 부산진성을 점령함으로써 조선군의 해안 방어 세력을 제거하고, 조선 침략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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