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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590
한자 釜山鎭城-
영어의미역 Site of Busanjinseong Fortress
이칭/별칭 부산포성,범천 증산성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범일동 321-99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나동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72년 6월 26일연표보기 - 부산진성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부산진성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321-99
성격 성곽 터
문화재 지정번호 부산광역시 기념물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범일동에 있는 조선 전기의 부산진성.

[변천]

1403년(태종 3) 경상도 해안을 방어할 목적으로 부산포에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두었다. 1421년(세종 3) 2월에는 경상도를 좌도·우도로 나누고 좌도(左道)의 부산포에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按撫處置使)[정3품]를 두면서 그 아래에 부산진 첨사영(釜山鎭僉使營) 1개소와 두모포(豆毛浦) , 해운포(海雲浦) , 염포(鹽浦) , 감포(甘浦), 포이포(包伊浦), 칠포(漆浦), 오포(烏浦) , 축산포(丑山浦) , 서평포(西平浦) , 다대포(多大浦), 서생포(西生浦) 등 만호영(萬戶營) 11개소를 두었다. 기록에 의하면 1488년(성종 19) “부산포 진성(釜山浦鎭城)을 쌓았는데, 둘레는 5,356척(尺)이다”라고 하였고, 1490년(성종 21) 8월 “부산포성(釜山浦城)은 둘레 2,026척, 높이 13척이다” 등이 보이고 있어 그 규모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이는 기록의 오류와 함께 기록 당시 척도가 달랐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부산진성(釜山鎭城)은 임진왜란 때 부산 첨사 정발(鄭撥)이 왜군의 선봉과 싸워 장렬하게 전사한 첫 격전지로서, 1592년(선조 25) 음력 4월 13일 일본의 조선 원정군 제1진 1만 8700여 명이 부산 앞바다에 쳐들어오자 정발은 부산진성을 굳게 지켜 성안의 군민과 더불어 끝까지 항전하다가 전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607년(선조40) 6월 20일 기록에 "지금의 부산진은 왜인이 쌓은 성을 취해서 이설했기 때문에 왜관의 옛터와 접하고 있다. 즉 동쪽이다." 라고 하여 『영남진지(嶺南鎭誌)』, 『경상남도여지집성』, 『동래군지』 등과 함께 조선 전기의 부산진성이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허물어져 없어졌기 때문에 왜란 후 조선 수군은 부산 왜성의 지성인 자성대 왜성을 부산진 첨사영(釜山鎭僉使營)으로 사용하였다.

임진왜란 때 부산 첨사 정발(鄭撥)이 왜군의 선봉대와 싸우는 전투를 그린 변박(卞璞)「부산진 순절도(釜山鎭殉節圖)」[1760년, 육군박물관 소장]에는 증산[해발 120m] 아래 현 금성고등학교정공단(鄭公壇) 일대를 둘러싸고 있던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성에서의 전투 모습과 왜란 후 자성대 왜성으로 이전한 조선 후기 부산진성의 서문 일부가 함께 그려져 있다.

조선 후기 부산진성은 둘레 506.7m, 높이 3.9m이고, 동문을 진동문(鎭東門), 서문을 금루관(金壘關), 남문을 진남문(鎭南門), 북문을 구장루(龜藏樓)라 하였다. 일제 강점기 측량된 부산진성의 평면도와 지적도 등을 비교하여 보면 자성대 왜성의 서문 인근 삼지환(三之丸)에 객사(客舍)를 배치하였고, 동헌(東軒)은 자성대 왜성의 이지환(二之丸)에 배치되면서 이를 중심으로 19동의 부속건물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장대(將臺)인 진남대(鎭南臺) 옆에는 임진왜란에 참가한 명장(明將) 천만리(千萬里)의 후손이 세운 천만리 영양천공비(千萬里潁陽千公碑)가 남아 있고, 동쪽 산록에는 최영 장군 비각(崔瑩將軍碑閣)이 보존되어 있다.

[위치]

임진왜란 이전에는 현재 증산 체육공원 있는 좌천 아파트 아래에서 좌천1동 정공단 사이에 부산진성이 있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자성대 공원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부산진 시장의 철로변, 북쪽으로는 부산은행, 동쪽으로는 범일전화국, 남쪽으로는 조선통신사 역사관을 잇는 선 안에 부산진성이 있었다.

[현황]

부산진성은 임진왜란 직후 대부분 파괴된 것으로 보이며, 학교와 일반 주택이 들어서면서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실정이다. 다만 조선 전기 때 쌓은 동래읍성처럼 지하에 성벽의 기단부나 해자 등이 남아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부산진성 추정 지역에 대한 매장 문화재 조사가 필요하다. 임진왜란 이후의 부산진성은 현재 자성대 공원을 중심으로 동문과 서문이 복원되어 있는데, 모두 원래 위치가 아니다. 지적도 상에서는 성곽의 윤곽이 뚜렷하게 구분되나 대부분 주택과 건물이 들어서 있어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조선통신사 역사관 건립 부지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을 때 지하에 매몰된 성벽이 확인된 점으로 보아 성벽 추정 선을 따라 성벽이 지하에 잔존할 가능성이 높다.

[의의와 평가]

부산진성은 현 수영동에 있는 조선 후기 경상 좌수영의 전신으로서, 조선 전기 낙동강 동쪽의 해안 방어에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부산진 첨사 정발이 성안의 군민과 더불어 왜군의 선봉대와 싸워 장렬하게 전사한 첫 격전지이다. 비록 성벽과 부속 건물들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동래성 전투와 더불어 부산 지역의 충절이 어린 역사 깊은 유적이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나** 집필자 나동욱입니다. 남문을 종남문(鍾南門)이라 잘못 서술하였는데 진남문(鎭南門)으로 정정합니다.
따라서 한국학중앙연구원 관리자에게 정정을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부산시청 문화유산과에서 제공하는 정보(https://www.busan.go.kr/bhpplace0412)에 근거하여, 오류가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혹시라도 이와 관련하여 오류 확인이 가능한 자료를 보내주시면 검토후 반영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5.28
정** 부산진성 서문(금루관) 우주석 "남요인후" 우측 하단에 壬申夏라는 글로 볼때 서문의 완전한 건립은
1632년으로 보는게 맞을까요?
  • 답변
  • 먼저 귀하의 질의 및 소중한 의견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임신하(壬申夏)의 글귀가 적혀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아직은 남아 있습니다. 먼저 비문의 경우 보통 건립연대는 왼쪽, 아니면 뒷면에 기입하는데, 이 경우 오른쪽에 기입되어 있습니다. 또 비명의 글자체와 연도의 글자체가 일치한다고도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다른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임신을 1632년이라고 단정하기 곤란합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아직까지는 귀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연도로 특정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직접적이고 추가적인 자료가 보완되어야만 서문의 건립연도를 명확하게 특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20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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