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4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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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烈祠 |
영어의미역 | Chungryeolsa Shirine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345[안락동 83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강식 |
[정의]
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에 있는 임진왜란 공신 송상현(宋象賢) 등 92명의 신위를 모신 사당.
[위치]
충렬사(忠烈祠)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에 위치한다. 부산 도시철도 4호선을 타고 충렬사역에 하차하여 지상에 올라서면 바로 길옆에 자리하고 있다.
[변천]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東萊邑城) 전투에서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 등 92위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1605년(선조 38)에 동래부사 윤훤(尹喧)이 동래읍성 남문 밖 농주산에 송상현의 위패를 봉안한 송공사(宋公祠)를 지어 매년 제사를 지낸 것이 시초이다. 1624년(인조 2)에 선위사(宣慰使) 이민구(李敏求)의 청으로 충렬사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짐에 따라 송공사는 충렬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1652년(효종 3) 동래부사 윤문거(尹文擧)는 사당이 좁고 낮으며 습기가 많고, 성문 가까이에 있어 시끄러워 위치가 적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송상현의 학행과 충절은 후학의 사표(師表)가 되므로, 이를 선비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들어 안락리(安樂里)[지금의 충렬사 자리]로 사당을 옮겨 창건한 후 강당과 동·서재를 지어 안락서원(安樂書院)이라 하였다.
1709년(숙종 35)에는 동래부사 권이진(權以鎭)이 송상현과 정발(鄭撥)이 순절할 때 함께 순절한 여러 사람을 모시기 위해, 읍성 안에 있던 충렬사의 옛터에 따로 사당을 건립하고 위패(位牌)를 봉안하여 제사를 지냈다. 1735년(영조 11)에 동래부사 최명상(崔命相)이 충렬사 별사(忠烈祠別祀)의 철폐를 국가에 알리고, 민응수(閔應洙)의 요청으로 별도로 만들었던 사당을 없앤 후 충렬사 별사에 봉안하였던 위패를 안락서원의 충렬사로 옮겼다. 이때 다대 첨사 윤흥신(尹興信)도 함께 모시고, 송상현의 첩 금섬 등의 정려(旌閭)를 세워 기념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서원에서의 교육과 동래의 유림에 의해 봉행되는 제향이 민족정기를 북돋운다고 방해를 가하여,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서원과 사우(祠宇)[신주를 모시기 위해 따로 지은 집]는 보수를 하지 못하였다. 이후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정화 공사를 실시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92위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
[형태]
충렬사의 경내의 중심 건물로 사당으로 쓰이는 본당은 다포식(多包式)이며, 팔작지붕으로 한식 기와이다. 사당으로 쓰이는 의열각(義烈閣)은 이익공(二翼拱)이며, 맞배지붕으로 한식 기와이다. 강당으로 쓰이는 소줄당(昭崒堂)은 초익공(初翼工)이며, 맞배지붕으로 한식 기와이다. 이 밖에 기념관과 내삼문, 외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황]
충렬사의 관리자는 충렬사관리사무소이다. 1972년 6월 26일에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현재 충렬사에는 임진왜란 때 부산에서 순절한 모든 선열의 92위 신위가 직책 또는 증직(曾職)의 순서에 따라 봉안되어 있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는 안락서원에서, 5월 25일에는 부산광역시에서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충렬사는 조선 후기 흥선 대원군(興善大院君)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사액 서원(賜額書院)으로 철폐되지 않은 사당이다. 광복 이후 정화 공사를 거쳐 충렬사는 나라의 관문을 지키다가 순절한 순국선열과 의병들을 추모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여 향토 수호와 자주 국방의 정신을 다짐하는 수련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