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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문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074
한자 尹文擧
영어음역 Yun Mungeo
이칭/별칭 여망(汝望),석호(石湖),충경(忠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심민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유학자
성별
본관 파평
대표관직 동래 부사|대사헌
출생 시기/일시 1606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30년 - 생원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33년 - 식년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36년 - 사간원 정언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37년 - 사간원 정언 퇴임
활동 시기/일시 1637년 12월 - 부수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38년 7월 - 부교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39년 - 제천 현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1년 4월 - 승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1년연표보기 - 동래 부사로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52년 11월연표보기 - 동래 부사 퇴임
활동 시기/일시 1653년 9월 - 승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4년 4월 - 이조 참의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4년 5월 - 대사간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6년 11월 - 이조 참의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7년 7월 - 대사성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7년 8월 - 이조 참의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9년 3월 - 부제학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2년 4월 - 대사간, 이조 참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2년 8월 - 대사헌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3년 12월 - 이조 참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4년 1월 - 대사헌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4년 2월 - 이조 참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4년 5월 - 대사간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4년 6월 - 이조 참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5년 9월 - 대사헌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8년 11월 - 대사헌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672년연표보기 - 사망
부임|활동지 동래부 동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6지도보기
묘소|단소 윤문거 묘 -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 갈산리
사당|배향지 구산서원 -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부황리
사당|배향지 노강서원 -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 오강리 227
사당|배향지 봉호서원 -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봉정리
관련 유적 윤문거 청선비 - 부산광역시 동래구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망(汝望), 호는 석호(石湖). 아버지는 대사간 윤황(尹煌)이고,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성혼(成渾)의 딸이다. 아들은 윤박(尹搏)과 목천 현감을 지낸 윤륜(尹掄)이다. 며느리[윤박의 처]는 송시열(宋時烈)의 딸이다.

[활동 사항]

윤문거(尹文擧)[1606~1672]는 1633년(인조 11)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주서, 세자시강원 설서,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거쳐 제천 현감, 춘추관 수찬관 등을 역임하였다. 1649년 효종(孝宗)이 즉위한 후 여러 번 승지(承旨)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후 1651년(효종 2) 동래 부사로 부임하였다. 윤문거는 당시 동래읍성 남문 안에 있던 충렬사[원래 송공사였으나 1624년 선위사 이민구(李敏求)의 청으로 ‘충렬’ 사액이 내려짐]의 사당이 좁고 습하며 성문 가까이에 있어 시끄럽다는 이유로 지금의 안락동으로 이전하였다. 이때 강당과 동재, 서재를 지어 규모를 키우고, 이름도 안락서원으로 바꾸었다.

윤문거는 왜관 관련 업무를 정비하는 데도 힘썼다. 1652년(효종 3) 9월 쓰시마[對馬]에서 ‘일광산 치제(日光山致祭)’에 쓸 향로를 만들 때, 여기에 적는 명문과 연호를 바로잡았다. 또 왜관의 개시 대청에서 열리는 개시(開市)[공무역]가 규정에 어긋나는 것을 보고 ‘잠상률(潛商律)’을 만들어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러자 대관왜(代官倭)[공무역과 사무역을 책임지고, 조선과 쓰시마의 공문서를 맡아 보았던 왜인]가 왜관 밖으로 뛰쳐나가는 등 크게 반발하였다.

윤문거는 쓰시마 측과 금조(禁條)를 체결하는 등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대관왜의 난출 사건을 바로잡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1652년 11월 파직되었다. 동래 부사 이후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대사간,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672년(현종 13)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학문과 저술]

윤문거는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다.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교유하였으며, 조익(趙翼)·김상헌(金尙憲) 등에게도 배웠다. 동래 부사 파직 후 관직 생활을 접고 『근사록(近思錄)』과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등을 가까이 하며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저서로는 『석호 유고(石湖遺稿)』 3권이 있다.

글씨도 잘 썼는데, 특히 해서(楷書)에 능했다. 그가 쓴 글씨로는 병판송암권징비(兵判松庵權徵碑), 감사이춘광비(監司李春光碑), 참판임광비(參判任絖碑), 참의시남유계비(參議市南兪棨碑), 이응교수록비(李應敎綏祿碑)[경기도 양평], 집의윤선거표(執義尹宣擧表)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충경(忠敬) 시호를 받았다. 연산(連山)의 구산서원(龜山書院),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석성(石城)의 봉호서원(蓬湖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부사윤문거청선비(府使尹文擧淸善碑)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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