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0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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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文擧 |
영어음역 | Yun Mungeo |
이칭/별칭 | 여망(汝望),석호(石湖),충경(忠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심민정 |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망(汝望), 호는 석호(石湖). 아버지는 대사간 윤황(尹煌)이고,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성혼(成渾)의 딸이다. 아들은 윤박(尹搏)과 목천 현감을 지낸 윤륜(尹掄)이다. 며느리[윤박의 처]는 송시열(宋時烈)의 딸이다.
[활동 사항]
윤문거(尹文擧)[1606~1672]는 1633년(인조 11)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주서, 세자시강원 설서,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거쳐 제천 현감, 춘추관 수찬관 등을 역임하였다. 1649년 효종(孝宗)이 즉위한 후 여러 번 승지(承旨)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후 1651년(효종 2) 동래 부사로 부임하였다. 윤문거는 당시 동래읍성 남문 안에 있던 충렬사[원래 송공사였으나 1624년 선위사 이민구(李敏求)의 청으로 ‘충렬’ 사액이 내려짐]의 사당이 좁고 습하며 성문 가까이에 있어 시끄럽다는 이유로 지금의 안락동으로 이전하였다. 이때 강당과 동재, 서재를 지어 규모를 키우고, 이름도 안락서원으로 바꾸었다.
윤문거는 왜관 관련 업무를 정비하는 데도 힘썼다. 1652년(효종 3) 9월 쓰시마[對馬]에서 ‘일광산 치제(日光山致祭)’에 쓸 향로를 만들 때, 여기에 적는 명문과 연호를 바로잡았다. 또 왜관의 개시 대청에서 열리는 개시(開市)[공무역]가 규정에 어긋나는 것을 보고 ‘잠상률(潛商律)’을 만들어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러자 대관왜(代官倭)[공무역과 사무역을 책임지고, 조선과 쓰시마의 공문서를 맡아 보았던 왜인]가 왜관 밖으로 뛰쳐나가는 등 크게 반발하였다.
윤문거는 쓰시마 측과 금조(禁條)를 체결하는 등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대관왜의 난출 사건을 바로잡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1652년 11월 파직되었다. 동래 부사 이후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대사간,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672년(현종 13)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학문과 저술]
윤문거는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다.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교유하였으며, 조익(趙翼)·김상헌(金尙憲) 등에게도 배웠다. 동래 부사 파직 후 관직 생활을 접고 『근사록(近思錄)』과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등을 가까이 하며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저서로는 『석호 유고(石湖遺稿)』 3권이 있다.
글씨도 잘 썼는데, 특히 해서(楷書)에 능했다. 그가 쓴 글씨로는 병판송암권징비(兵判松庵權徵碑), 감사이춘광비(監司李春光碑), 참판임광비(參判任絖碑), 참의시남유계비(參議市南兪棨碑), 이응교수록비(李應敎綏祿碑)[경기도 양평], 집의윤선거표(執義尹宣擧表)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충경(忠敬) 시호를 받았다. 연산(連山)의 구산서원(龜山書院),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석성(石城)의 봉호서원(蓬湖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부사윤문거청선비(府使尹文擧淸善碑)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