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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이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655
한자 權以鎭
영어음역 Gwon Ijin
이칭/별칭 유회당(有懷堂),수만헌(收漫軒),구시재(求是齋),불기재(不欺齋),권유회당,자정(子定),권자정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동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안동
대표관직 동래 부사|공조 판서
출생 시기/일시 1668년 7월 12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93년 - 생원 진사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94년 - 문과 별시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09년 1월연표보기 - 동래 부사에 임명, 충렬사 별사 건립
활동 시기/일시 1723년 - 평안 병사, 사은 부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26년 9월 -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27년 - 경기도 관찰사, 대사간, 호조 판서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31년 4월 - 공조 판서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33년 1월 -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734년 11월 6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66년 - 신도비 건립
출생지 공주 유성 탄방리 -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
거주|이주지 유회당 권이진 고택 -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299
묘소|단소 권이진 묘 -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사당|배향지 귀후재 -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신도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정(子定), 호는 유회당(有懷堂) 또는 수만헌(收漫軒). 증조할아버지는 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이고, 할아버지는 탄옹(炭翁) 권시(權諰)이며, 아버지는 현감 권유(權惟)이다. 어머니는 송시열(宋時烈)의 딸이다. 고모부는 명재(明齋) 윤증(尹拯)이다.

[활동 사항]

권이진(權以鎭)[1668~1734]은 호서 지방의 명문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 집안에서 태어나 1694년(숙종 20)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부정자를 지내고 1698년(숙종 24) 세자시강원 설서를 거쳐 사헌부 지평, 세자시강원 사서, 홍문관 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709년(숙종 35) 1월 동래 부사에 임명되어 1711년(숙종 37) 4월까지 재임하면서 많은 일을 하였다. 권이진의 업적은 1740년(영조 16) 편찬된 『동래부지(東萊府誌)』에 잘 나타나 있다.

권이진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컸고, 특히 조선 침략의 병참 기지 구실을 하였던 쓰시마[對馬]의 도주(島主) 요시토시[宗義智]를 주범으로 여겨 미워하였다. 이에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강화하고,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임진왜란에 대한 현창(顯彰) 사업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임진왜란 현창 사업에 대해서는 『충렬사지(忠烈祠誌)』 권7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1709년(숙종 35)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 등을 모신 충렬사의 별사를 짓고, 같은 해 10월 별사의 편액을 청하는 장계를 올려 2년 후에 사액이 내려졌다. 1710년(숙종 36) 2월에는 「별묘 봉안(別廟奉安)」 제문을 지었다. 또한 「동래부 순절도」를 그리게 하고, 화기(畵記)를 지었다.

권이진은 화기에서 “사당으로 부족하여 또 비석을 세우고, 비석으로 부족하여 또 그림을 그려서 장차 이 천리(天理)를 함께 품부 받아 마음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려는 것이다. [중략] 이 그림을 보고서 임금에게 충성하고 윗사람을 위해 죽으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현재 육군사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동래부 순절도」[보물 제392호]는 1760년(영조 36) 변박(卞璞)이 고쳐 그린 것이다.

또한 외군관청(外軍官廳), 연향대청(宴享大廳), 성황사(城隍祠)를 중창하고 사직(社稷)을 동래부의 서쪽 2㎞[5리] 거리로 이전하였다. 금정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할 계획도 세웠다. 현지답사와 문헌 조사를 통해 개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공사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 확보 방안까지 마련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권이진은 하급 관리인 훈도(訓導)와 별차(別差), 초량의 주민들이 왜관에 사는 일본인들과 유착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 고리를 끊으려 하였다. 일본인들이 훈도나 별차를 만난다는 구실로 초량촌을 불법으로 드나들고, 매매춘 등의 문제를 일으키자 1709년(숙종 35) 초량 왜관의 흙담을 돌담으로 바꾸었다. 또 왜관 밖에 담장을 쌓고 설문(設門)을 만들어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한편 문 안에 있던 민가를 밖으로 옮겼다. 초량 왜관에서 열리는 개시(開市) 및 왜관 수문(守門)[출입문] 앞에 서는 새벽 시장인 조시(朝市)에도 손을 댔다. 쌀은 개시일에만 팔게 하고, 조시에서는 어물, 채소, 됫박 쌀 외에는 아무것도 거래하지 못하게 하였다.

매매춘도 강력히 단속하였다. 1707년(숙종 33) 조선 여성 감옥(甘玉)과 왜인 연식기(連食只) 사이에 매매춘 문제가 발생하자 조정에서는 1708년(숙종 34) 최상집(崔相集)을 당상관으로 문위행(問慰行)[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파견한 공식 외교 사절]을 보냈으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에 권이진은 5차례나 장계를 올려 강력히 대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문제는 1711년(숙종 37) ‘매매춘을 한 사람은 양국에서 똑같이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의 범간 약조(犯干約條)[혹은 교간 약조]의 체결로 마무리되었다.

권이진의 문집인 『유회당집(有懷堂集)』에는 초량 왜관을 중심으로 일어난 여러 사건과 권이진이 실시한 정책들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고 내용도 풍부하여 조선 후기 부산 지역사와 한일 교류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권이진은 동래 부사를 지낸 이후 1726년(영조 2) 함경도 관찰사, 1727년(영조 3) 경기도 관찰사, 1731년(영조 7) 공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소론의 영수인 윤증의 제자이다. 당론과 학파에 얽매이지 않고, 실사구시의 가학(家學)의 전통을 이어받아 실지(實地)에 바탕을 둔 학문 연구에 정진하였다. 그리하여 권득기권시가 이루어 놓은 도산학(道山學)의 학문 체계를 단단히 다졌다. 일상생활에서는 공자(公子), 맹자(孟子), 주자(朱子), 송시열이 주장한 직(直)[도리가 바름]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문집으로 『유회당집』이 있다.

[묘소]

권이진의 묘는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공민(恭敏)이다. 1866년(고종 3)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묘소 아래에 있는 재실 귀후재(歸厚齋)에서 배향하고 있다. 약포(藥圃) 오광운(吳光運),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지은 묘갈명(墓誌銘)과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은 시장(諡狀)이 『유회당집』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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