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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 순절도」[18세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326
한자 東萊府殉節圖
영어음역 Dongnae-bu Sunjeol-do
영어의미역 Picture of the Patriotic Martyrs in the Battle of Dongnae-bu during the Hideyoshi Invasion of Korea [18th century]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서화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현주 1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회화
서체/기법 견본 채색
소유자 여산 송씨 종중 충렬공파
관리자 청주고인쇄박물관
문화재 지정번호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문화재 지정 일시 2003년 5월 9일연표보기 - 「동래부 순절도」 포함 천곡 송상현 유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23호로 지정
현 소장처 청주고인쇄박물관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정의]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 장면을 그린 조선 후기의 여산 송씨 소장본 기록화.

[개설]

「동래부 순절도(東萊府殉節圖)」[18세기]는 1592년 4월 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에 대응하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군민들의 항전을 그린 기록화이다. 「동래부 순절도」는 모두 세 종류로, 육군박물관 소장본, 여산 송씨 종가 소장본, 울산박물관 소장본이 있는데 작가는 모두 다르다. 이 그림은 여산 송씨 종가 소장본인데, 현재는 청주고인쇄박물관에 기탁 보관중이다.

『여산 송씨 지신공파보(礪山宋氏知申公波譜)』[1957]에 ‘노봉(老峯)이 순절도 3폭을 그려 1폭은 조정에, 1폭은 민정중공 자신이, 1폭은 송 부사 종가가 소장했다고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를 통해 「동래부 순절도」가 1658년(효종 9) 동래 부사 민정중(閔鼎重)[1628~1692]이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 상황을 잘 아는 노인(老人)의 말을 토대로 그린 3폭의 그림 가운데 한 폭을 18세기에 다시 이모(移模)[원본을 보고 그대로 그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003년 5월 9일 「동래부 순절도」를 포함하여 5건 10점의 천곡 송상현 유물이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및 구성]

「동래부 순절도」는 견본 채색으로 크기는 가로 112.0㎝, 세로 147.0㎝이다. 1760년에 변박(卞璞)이 그린 「동래부 순절도」보다 폭이 넓은 편이다.

[특징]

화면 중앙에 동래읍성을 두고 성 내부에 동래부의 군사들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왜인들의 모습을 성의 윤곽선을 따라 배치하여 중앙 중심의 구도를 취하며, 전체적으로는 부감시(齎瞰視)[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점]이다. 화면 속의 주요 인물 옆에는 이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화면 중앙에 묘사된 인물의 위치와 자세는 순절의 순간들을 암시하고 있다. 송상현의 경우 화면 중앙에 관복을 입고 국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는 순절 직전의 모습을 그리면서 동시에 남문루의 중앙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도 아울러 그려, 시간적 간격을 가지는 연속된 사건을 한 화면에 구축하여 역사적인 한 사건의 전말을 서사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화면에 전체적으로 사용한 녹색과 묵색은 바랬지만 청색과 백색, 주색(朱色)의 안료들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산수 묘사에서는 윤곽선을 두고 약간의 담채를 바탕으로 명암을 넣었으며, 원산은 푸른 윤곽선과 맑은 담채로 묘사하였다. 인물 묘사에 있어서는 눈, 코, 입 등과 얼굴 윤곽선, 손과 발 등은 주색(朱色)으로, 눈썹과 눈은 묵색으로 처리하였는데 18세기 풍속화에서 즐겨 사용하는 특징과 무관하지 않다. 의복 표현은 동래 군민의 경우는 높은 채도의 색채를, 왜인의 경우는 낮은 채도의 색채를 사용하였다.

변박의 「동래부 순절도」와 비교하면 화면 중앙의 객사 묘사의 경우 종가 소장본이 훨씬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객사 문이 열려 있고 전패(殿牌)[왕의 초상을 모신 목패]와 위상(位床)이 묘사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성 내부의 묘사는 변박 본이 더 정확한데 반해 성 외부 묘사는 종가 소장본이 세심한 편이다. 즉 금섬이 그려진 동헌과 내아의 구성이 종가 소장본의 경우 소략하게 표현된 반면, 변박 본에서는 한 담장 안에 배치하여 사실에 가깝게 묘사되었다. 김상과 이촌녀의 묘사에서 두 채의 기와지붕에 올라간 모습도 변박 본이 보다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반면 성 외부 묘사에 있어 종가 소장본의 경우 우리 군사들과 일본인들의 의복 표현이 좀 더 섬세하고 색상이 다양하며 화려할 뿐 아니라 화면 전면의 하단에 배치된 막사를 중심으로 좌우에 배열된 여러 종의 군기(軍器) 묘사가 다양하다.

[의의와 평가]

『충렬사지(忠烈祠志)』의 기록과 비교해 볼 때 전투 당시를 충실하게 재현한 기록화로서의 가치가 높으며, 사전의 전말을 한 화면에 담아 이야기를 서술해 낸 구도도 뛰어나다. 또한 「동래부 순절도」는 동래부의 역사를 기록한 것일 뿐 아니라 전해지는 사료와 연구에 의해 동래부에서 제작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지방 회화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더욱이 종가 소장본의 경우 주요 등장인물의 옆에 인물명을 부기함으로써 사료적 가치를 극대화시키고 있으며, 이후 1834년 변곤(卞崑)이 그린 「동래부 순절도」의 모본이 되기도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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