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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순절도[1760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197
한자 東萊府殉節圖
영어음역 Dongraebusungeoldo
영어의미역 Picture of the Patriotic Martyrs in the Battle of Dongnae [1760]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서화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현주 1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1760년연표보기 - 동래부 화사 변박이 제작
문화재 지정 일시 1963년 9월 2일연표보기 - 동래부순절도 보물 제392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동래부순절도 보물 재지정
현 소장처 육군박물관 -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산230-30
원소재지 충렬사 -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838지도보기
성격 회화
작가 변박
서체/기법 견본 채색
관리자 육군박물관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정의]

1760년 변박(卞璞)임진왜란 당시의 동래성 전투 장면을 그린 기록화.

[개설]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는 1592년 4월 15일 동래성 전투의 상황을 그린 기록화이다. 동래부순절도는 모두 세 종류로, 육군박물관 소장본, 여산 송씨 종가 소장본, 울산박물관 소장본이 있는데 작가는 모두 다르다. 동래부순절도는 원래 1709년(숙종 35)에 그린 원본이 낡아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게 되자 1760년(영조 36) 동래부 화사 변박이 이를 보고 다시 그린 것으로, 현재 육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63년 9월 2일 보물 제39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및 구성]

비단 바탕에 채색한 것으로, 총 크기는 가로 96㎝, 세로 145㎝이다. 세로가 긴 세 개의 비단을 기워 만들었는데 길이는 각각 18.6㎝, 38.2㎝, 38.9㎝이다. 오랜 세월로 연결 부분의 바탕은 흐름이 다소 어긋난 상태이며, 화면 곳곳에 끊어진 흔적이 보인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부감법(俯瞰法)을 사용하였다.

[특징]

화면 중앙에 동래 읍성을 두고 성 내부에 동래부의 군사들을 그리고 성을 겹겹이 둘러싼 왜군들은 성의 윤곽선을 따라 배치함으로써 적군에게 포위된 동래성의 급박한 상황을 묘사하였다. 화면 속의 인물들은 동래성 전투와 관련하여 제각기 ‘이야기(story)’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충렬사지(忠烈祠志)』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동래성을 포위한 왜군은 전투에 앞서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못하겠으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矣不戰則假道]”고 적혀 있는 목패를 송상현(宋象賢) 부사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송상현은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假道難)”라고 답하여 항복을 거절하였다. 그림에서는 이를 ‘길을 빌려 달라[假我途]’, ‘길을 빌려주기 어렵다[假途難]’라고 간략하게 적은 팻말을 통해 표현하였다.

갑옷을 입고 군사들과 함께 남문루의 중앙에 위치하여 결전에 임하는 송상현, 망월산 너머 밀려오는 왜군들, 지붕 위에 올라가서 기와를 던지며 왜군들과 싸우는 부사 김상(金祥)과 아낙네들, 담을 넘어가다 적에게 붙잡혀 끝까지 항거하다 죽임을 당한 송상현의 애첩 금섬(金蟾), 동래성 북문 밖으로는 도망가는 좌병사 이각(李珏)과 그의 군사들, 선현의 위판(位版)이 모셔진 성 안 정원루에서 순절한 동래 향교 교수 노개방(盧蓋邦)과 유생 문덕겸(文德謙)·양조한(梁潮漢)의 모습이 보인다.

갑옷 위에 분홍색 관복을 갖추고 임금에게 마지막 하직의 절을 하는 송상현과 그 옆에서 무릎을 꿇고 함께 예를 올리는 양산 군수 조영규(趙英圭)와 이들을 보호하며 싸우고 있는 겸인(傔人) 신여로(沈能燮), 비장 송봉수(宋鳳壽), 김희수(金希壽), 향리 송백(宋伯) 등도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는 동래 부사 송상현이 전투 전과 후의 모습으로 두 번 등장한다. 즉 동래성 전투의 시작과 끝이 모두 한 화면에 배치된 것이다. 시간적 간격을 가지는 연속된 사건을 한 화면에 동시에 묘사함으로써 역사적 사건의 전말을 서사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산수 묘사에서는 윤곽선을 두고 약간의 담채를 가하고 명암을 넣었으며, 원산 묘사는 푸른 담채로 처리하여 사건의 배경을 그려내었다. 그리고 인물의 경우 왜인들은 낮은 채도를 사용한 반면 동래 군민들은 높은 채도의 색채를 사용했다. 산수의 명암 표현, 인물들의 해학적인 표정과 자세, 안면부의 눈, 코, 입 등과 손, 발 등의 신체 윤곽선을 붉은 색으로 그린 점 등은 18세기 풍속화의 특징과 무관하지 않다. 화면 위쪽의 산은 윤곽을 선으로 나타내고 점을 찍어 표현하였는데 다소 경직된 모습이나 18세기 유행했던 진경 산수화풍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동일한 형태의 동래성 전투 그림인 여산 송씨 종가 소장본과 비교해 볼 때 전반적으로 성 내부의 묘사는 변박의 동래부순절도가 더 정확한 데 반해 성 외부 묘사는 종가 소장본이 세심한 편이다. 이와 같은 양상으로 볼 때 변박본은 종가 소장본에 비해 후대에 그려진 것으로, 복잡한 것을 간략화하여 그리면서 누락된 부분은 첨가하고 약한 부분은 강조하여 작품을 완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 지도는 동래 읍성 안의 마안산(馬鞍山)과 망월산(望月山), 남문 앞의 농주산(弄珠山), 내산(萊山)과 윤산(輪山), 소산(蘇山) 등의 위치와 표현 등 지리적 정보는 종가 소장본에 비해 더 정확하다. 이는 변박이 동래부 무인이자 세거인으로 동래 지리에 상당히 밝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충렬사지』의 기록과 비교해 볼 때 전투 당시를 충실하게 재현한 기록화로서의 가치가 높으며, 사전의 전말을 한 화면에 담아 이야기를 서술해 낸 구도도 뛰어나다. 또한 이 그림의 작가가 동래부 무관직을 역임한 화사(畵師)인 까닭에 지방 화사(地方畵史)와 지방 회화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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