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2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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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汝櫓 |
영어음역 | Sin Yeor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양흥숙 |
[정의]
임진왜란 때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을 따라 순절한 인물.
[활동사항]
신여로(申汝櫓)는 동래 부사 송상현의 겸인(傔人)[개인적으로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왜군이 쳐들어오자 동래읍성을 지키던 송상현은 전쟁의 위기를 느끼고 신여로를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신여로의 모친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659년(효종 10) 송시열(宋時烈)이 쓴 송상현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 따르면, 신여로는 송상현이 왜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송상현의 첩 금섬(金蟾)과 함께 주인을 따라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상현의 벗이었던 신흠(申欽)은 송상현의 공로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그의 전기인 「송동래전(宋東萊傳)」을 지었는데, 신흠은 「송동래전」 아래에 금섬과 신여로를 위한 별도의 전(傳)을 지어 두 사람의 사연을 소개하였다. 신흠의 문집인 『상촌 선생집(象村先生集)』[1636년]의 권31 잡저(雜著)에 수록된 「송동래전」 내용 가운데 「신여로전(申汝櫓傳)」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여로라는 사람은 서얼로서, 공[송상현]을 따라 동래에 왔다. 신여로의 모친이 살아 있기에 행여 적에게 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공이 신여로를 돌려보냈다. 신여로는 어머니에게 가는 도중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공으로부터 후한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목숨을 아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는 송상현에게 돌아가 함께 죽었다.”
신흠은 송상현에 대해 “공의 몸은 나라를 위해 죽었으나 공을 따라 죽은 자는 공을 위해 죽었으니, 이는 공의 풍치가 그렇게 하도록 자극한 것이다. 저 개돼지 같은 적도 존경을 할 줄 알았으니, 참으로 특이한 일이다.”라고 평가하면서, 송상현과 함께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였다. 신여로의 행적은 『선조실록(宣祖實錄)』과 동래 부사 민정중(閔鼎重)이 쓴 「임진 동래 유사(壬辰東萊遺事)」[1668년]에도 수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710년(숙종 36) 동래 부사 권이진(權以鎭)은 양산 군수 조영규(趙英圭), 동래 교수 노개방(盧蓋邦), 신여로 등 임진왜란 때 순절한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죽은 자리에서 제사를 올려 충혼(忠魂)을 위로해야 한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렸다. 이에 숙종(肅宗)은 사액(祠額)을 내리고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1713년(숙종 39) 첨사 정발(鄭撥), 군수 조영규(趙英圭), 유생 문덕겸(文德謙), 비장 김희수(金希壽)와 송봉수(宋鳳壽), 호장 송백(宋伯), 부민(府民) 김상(金祥) 등의 위패를 송상현의 사당인 충렬사(忠烈祠)로 옮겨 배향하였다. 1742년(영조 18) 동래 부사 김석일(金錫一)은 송공단(宋公壇)을 조성하여 송상현과 신여로를 배향하였다. 송공단에는 신공여로 순난비(申公汝櫓殉難碑)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