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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 전란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249
한자 任辰戰亂圖
영어음역 Imjinjeonran-do
영어의미역 Map of Imjin War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서화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현주 1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회화
작가 이시눌
서체/기법 견본 채색
관리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제작 시기/일시 1834년연표보기 - 동래부 화사 이시눌이 제작
현 소장처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599

[정의]

1834년 동래부 화사 이시눌(李時訥)임진왜란 당시의 전투 장면을 그린 기록화.

[형태 및 구성]

「임진 전란도(任辰戰亂圖)」는 견본 채색으로 크기는 가로 141㎝, 세로 85.5㎝이며 현재 족자 상태이다. 화면 하단에 ‘만력 임진후 이백사십삼년 갑오 유월일 화사 본부군기감관 이시눌(萬曆壬辰後二百四十三年甲午六月日畵師本府軍器監官李時訥)’이라는 화기가 있다. 화면은 아주 높은 부감시(齎瞰視)[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점]로 잡아 상단에는 부산진성을 둘러싼 부산진성 전투를, 하단에는 다대진을 배경으로 한 다대진성 전투를 묘사하여 두 개의 영역으로 구도를 잡았다. 「임진 전란도」는 현재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특징]

부산진성 위로는 본부관아후주흘산(本府官衙後主屹山)과 서대(西臺)를, 부산진성의 오른쪽으로는 자성대(子城臺)영가대(永嘉臺), 다대진 아래로는 몰운대(沒雲臺), 고리도(古里島), 대마도(對馬島)까지 광활한 영역을 한 화면에 포함시켰다. 화면 상단에는 별도의 견(絹) 바탕을 결봉(結縫)[연결하여 꿰맴]하여 새로운 공간을 형성한 후 각각 사각의 공간을 나누어 정공단(鄭公壇)윤공단(尹公壇)을 그리고 제작 경위와 각 단의 위치를 명시하였다.

부산진성이나 다대진 같은 치열한 전투의 현장뿐 아니라 영가대자성대, 또는 다대진 내의 연못 등 현창 사업의 의미 있는 장소와 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자성대에는 ‘민통사섬 추립비(閔統使暹追立碑)’, ‘만공소륵비(萬公所勒碑)’, ‘만공단(萬公壇)’의 세 비석이 있고, 영가대에는 ‘정공 순절비(鄭公殉節碑)’와 사당[昔無今有]을 그려 정발(鄭撥) 장군을 추모하였으며, 몰운대에는 정운(鄭運) 장군과 그를 도와 싸운 두 사람의 장교를 묘사하고 더불어 ‘정만호운비(鄭萬戶運碑)’가 그려져 있다.

죽은 조선인과 성내에 침입한 일본군은 묘사되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임진 전란도」는 1760년 이후 임진 전란 현창 사업의 결과를 총정리한 『충렬사지(忠烈祠志)』[1808]에 의거하여 성역화(聖域化)된 공간으로서의 동래를 재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오륙도(五六島)·절영도(絶影島)·두송산(頭松山)·팔경대(八景臺)·야망대(夜望臺) 등 지리적 위치와 명승지는 물론 두모포(豆毛鎭)·서평진(西平鎭)과 왜인 군막(倭人軍幕) 등 군사적 의미를 가지는 장소도 명시한 점은 당시 유행했던 회화식 지도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화풍을 살펴보면 우선 피마준(披麻皴)[주로 산의 겉면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 산수화 준법으로 거칠한 감촉을 가짐]에 미점(米點)[동양화에서 나무나 산수를 그릴 때 찍는 가로 점]을 구사한 산수 표현이나 ‘T’자형의 수지법(樹枝法)[나무의 뿌리에서 줄기, 가지, 잎 등의 표현 기법]에서는 진경산수화풍의 영향이 보이며, 산 주름에 담묵(淡墨)[엷은 묵]을 사용하여 이어진 봉우리의 입체감을 살린 것이나 푸른 선염(渲染)[화면에 물을 칠해 마르기 전에 색을 입히는 기법]에 의한 바다 표현 등에서는 19세기의 새로운 화풍도 감지된다. 그러나 다소 풍속화적이고 도식화된 인물 표현이나 간략해진 건물 묘사 등에서는 지방 화풍의 흔적도 엿보인다.

[의의와 평가]

「임진 전란도」임진왜란에 대한 사료적 가치를 지녔을 뿐 아니라 16세기 사건을 19세기의 시각으로 바라본 사회적 규범과 정치 질서가 반영되어져 있다. 또한 그림을 제작한 이시눌이 동래부에서 무임직을 역임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지방 화사 연구에도 주목되는 작품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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