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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855
한자 子城臺
영어음역 Jaseongdae
이칭/별칭 부산진 지성,만공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자성로 99[범일동 590-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나동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축|증축 시기/일시 1593년연표보기 - 왜성으로 개축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4년연표보기 - 동문·서문·장대 신축
문화재 지정 일시 1972년 6월 26일 -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
현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590-5
성격 성곽|장대
면적 1만 8285㎡
관리자 부산광역시 동구청
문화재 지정번호 부산광역시 기념물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는 조선 시대 범천 증산성[부산왜성]의 지성인 자성대왜성의 장대.

[개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부산진성을 함락한 후 성을 헐어 버리고 증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증산왜성을 쌓았다. 그리고 부산진성의 동남쪽에 별도로 지성(支城)인 자성대왜성을 쌓았다. 『충렬사지』에 의하면 자성대왜성의 정상에 왜군이 자성(子城)을 만들고 장대(將臺)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조선 측에서 주로 왜성의 주 공간인 정상부를 두른 본환(本丸) 성벽을 자성으로, 장수의 지휘소인 천수각(天守閣)을 장대로 보고 자성대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임진·정유재란이 끝난 후인 1607년(선조 40) 부산진을 자성대왜성으로 옮겼는데 『영남진지(嶺南鎭誌)』[1895년]에는 왜군이 물러간 후 자성 위에 정유재란 때 참전한 명나라 장수 만세덕(萬世德)을 기리기 위한 만공단(萬公壇)을 쌓았다고 한다. 그리고 임인년(壬寅年)[1842]에 는 자성 위에 ‘육우정(六友亭)’을 세우고, ‘승가(勝嘉)’라는 이름을 내렸는데, “자성은 한 진(鎭)의 장대가 되고, 승가정은 자성의 장대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조선 후기 부산진성 내 자성 공간에는 만공단과 육우정이란 장대가 있었으며 승가라는 현판이 걸렸음을 알 수 있다.

[건립 경위]

왜군이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직후 부산진성을 허물고 쌓았다고 하는 왜성은 동구 좌천동증산체육공원 일대에 남아 있는 증산왜성[부산왜성]이며, 그 동남쪽에 쌓았다는 왜성이 자성대왜성이다. 부산포해전 당시 상황을 보면 임진왜란 발발 직후 증산왜성의 기본적인 축성이 있었으며 본격적인 축성은 1593년(선조 26) 3월부터 8월 사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증산왜성은 왜군 장수(將帥)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부자(父子)가 1만여 명을 동원하여 쌓았으며, 자성대왜성은 주로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아사노 요시나가[淺野幸長] 부자가 축성하였다. 또한, 증산왜성 주변에는 자성대왜성을 비롯하여 추목도성(椎木島城)[영도 아치섬], 박문구성(迫門口城)[중앙동 옛 부산시청 자리] 등의 지성(支城)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고 한다.

[위치]

자성대는 자성대는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590번지 부산진성 공원 내 위치한다.

[형태]

조선 후기 자성대왜성으로 옮겨온 부산진성의 규모와 관련, 외곽의 경우 지적도 상에서 측정한 길이는 1,333m이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대부분의 성벽은 자성대 공원 정상 주변에 남아 있다. 즉, 해발 36m의 작은 구릉 상부 평탄지에 남북 길이 130m, 동서 길이 80m의 성벽[왜성의 본환(本丸)]과 그 아래에 조성된 북쪽 일부 석축 성벽이다. 성벽은 최고 10m, 최저 1.5m 정도 높이로 남아 있으며, 성벽은 60∼70° 정도로 경사지게 축조되어서 전형적인 일본식 성벽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현황]

일제 강점기에 조선 후기 부산진성 내의 군사 시설은 대부분 파괴되었고, 전차 선로가 부설되면서 성문과 성벽이 크게 훼손되었다. 현재 자성대 공원 내 정상부에 자성대 왜성의 본환(本丸)에 해당하는 성벽과 그 아래 일부 성벽이 남아 있다. 지표상으로 자성대의 외곽 성벽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2003년 조선통신사역사관 서남 측에 영가대를 복원할 당시 주차장 부지 조성과 관련하여 사전 입회 조사가 실시된 바 있다. 이때 부산진성의 남동쪽 외곽 성벽으로 추정되는 경사진 형태의 성벽 하부가 조사되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 부산진성의 성벽은 상부가 파괴된 상태로 현 지표 아래에 대부분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4년 7월부터 1975년 2월까지 부산광역시에서 정화 복원 공사를 벌여 동문과 서문, 산 정상부 자성대의 남쪽 공간에 장대인 진남루(鎭南樓)를 복원하였다. 그리고 진남대 동남쪽에는 명나라 장수로 조선을 도우러 왔다가 귀화한 천만리(千萬里)의 후손이 세운 천만리 영양 천공비(千萬里潁陽千公碑)가 세워져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전기 증산 아래 있던 부산진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자성대왜성으로 이전하여 부산진성으로 사용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촬영된 서문 사진을 보면 성벽은 왜성벽처럼 경사져 있으나 문루와 여장은 조선식 성벽을 보이고 있다. 특히 서문 우주석이 성벽에 맞춰 기울게 덧대진 것을 보면 조선측에서 성벽을 새로 축성한 것보다는 왜성벽을 일부 수리하여 그대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성곽 교류사 측면에서 서생포왜성과 함께 조선 측에서 왜성을 이용한 대표적 사례로서 주목된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02.23 현행화 자성대 공원->부산진성 공원
2021.09.02 내용 수정 내용 보완
2021.07.26 수정 내용 수정
2021.05.13 내용 수정 형태에서 높이 390m의 석성->높이 3.9m의 석성으로 수정
2021.04.05 수정 부산진지성 -> 부산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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