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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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鎭城西門城廓隅柱石 |
영어의미역 | West Gate and Corner Stones of the Branch Fortress Wall in Jiseong, Busanj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자성로 99[범일동 321-29]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나동욱 |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는 조선 후기 부산진성 서문 외벽 모퉁이에 있던 명문(銘文) 기둥 돌.
[개설]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이 함락되자 일본군은 부산진성의 성벽을 헐어 증산 왜성을 쌓았으며 동쪽에는 자성대 왜성을 쌓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그 자리에 부산진성을 다시 쌓지 않고 자성대(子城臺) 왜성을 일부 수리하여 부산진 첨사영(釜山鎭僉使營)으로 하였다. 당시 성의 둘레는 506.7m, 높이 3.9m이며, 동문을 진동문(鎭東門), 서문을 금루관(金壘關), 남문을 진남문(鎭南門), 북문을 구장루(龜藏樓)라 하였고, 성 안팎에 19동의 건물이 있었다. 문루 중에 서문인 금루관 바깥 성벽의 좌우 모퉁이 돌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원래 성남초등학교 교정에 있었던 것으로 1975년 부산진성 정화 공사로 서문인 금루관을 복원할 때 이전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성문을 바라봤을 때 오른쪽 돌기둥에는 이곳이 나라의 목에 해당되는 남쪽 국경이라는 뜻의 ‘남요인후(南邀咽喉)’가, 왼쪽 돌기둥에는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는 뜻의 ‘서문쇄약(西門鎖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부산 지역이 국방상 매우 중요한 곳임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건립 경위]
부산진성은 임진왜란 끝난 뒤 자성대 왜성 지역으로 옮겨졌는데 1632년 이후 성문을 개수할 때 국방의 요지로서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서문 외벽 모퉁이에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자성대 교차로에서 범일 교차로로 가는 길 왼쪽에 부산진성 공원으로 가는 입구가 있다. 이곳에서 약 70m 정도 들어가면 부산진성의 서문이 복원되어 있는데, 서문 좌우 돌출된 성벽 모퉁이에 부산진성 서문성곽우주석이 위치한다.
[형태]
자연 화강석을 쪼갠 뒤 글을 새길 바탕면만 평평하게 갈아 낸 다음 깊게 음각한 비석 형태이다. 왼쪽 돌기둥은 높이 272㎝, 너비 46~49㎝이며, 오른쪽 돌기둥은 높이 277㎝, 너비 62~71㎝이다.
[현황]
일제 강점기 때 촬영된 부산진성 서문의 모습을 보면 아치형의 성문 위에 ‘금루관(金壘關)’이란 현판이 보이며, 성곽 우주석이 자성대 왜성의 성벽처럼 성벽과 함께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현재 서문 좌우에 성 밖으로 돌출된 모퉁이에 수직으로 세워 복원된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의의와 평가]
남쪽에 위치한 부산은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국방의 요지로서 그만큼 방비의 중요함을 알리는 문구로 임진왜란 이후 국방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020년 이전에는 부산진성을 부산진지성으로 불렸는데, 명칭 중 ‘지성’이란 것은 ‘왜성에 있어 거점이 되는 본성을 지원하는 별개의 성’을 의미하므로 부산진성의 지성이란 용어는 조선 성에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조선 전기의 부산진성이 '구 부산진성'이라 한다면 조선 후기 부산진성은 '신 부산진성' 이라 할 수 있으며, 구 부산진성이 이미 없어진 시점에서 볼 때 그냥 '부산진성'으로 불러 '부산진성 서문 우주석'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와 학계의 다각적인 검토 후에 2020년에 이르러 부산진지성이 부산진성으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에 따라 부산진지성 서문성곽우주석도 부산진성 서문성곽우주석으로 변경되었다.
한편, 일제강점기 촬영된 서문의 우주석은 경사진 성벽에 맞추어 비스듬히 세워져 있던 것으로 조선 후기에 부산진성이 자성대 왜성을 일부 수리하여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