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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073
한자 吳翰源
영어음역 O Hanwon
이칭/별칭 공예(公藝)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지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나주
대표관직 동래 부사
출생 시기/일시 1750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75년 -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92년 - 사헌부 장령, 사간원 헌납, 홍문관 부수찬, 수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800년 - 평안도 암행어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06년 2월연표보기 - 동래 부사로 부임
활동 시기/일시 1807년 - 금정산성 동문 완공, 금정산성 부설비 건립
활동 시기/일시 1809년 2월연표보기 - 동래 부사 퇴임
활동 시기/일시 1821년 - 개성부 유수에 임명
출생지 창평 -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부임|활동지 동래부 동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6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공예(公藝). 아버지는 사간원 헌납을 지낸 오현주(吳鉉冑)이고, 형은 사간원 대사간 오정원(吳鼎源)이다.

[활동 사항]

오한원(吳翰源)[1750~?]은 담양 출신으로, 1775년(영조 51) 문과에 급제하였다. 1792년(정조 16) 등용되어 사헌부 장령, 사간원 헌납, 홍문관 부수찬·수찬을 역임하고 1800년(정조 24) 평안도 암행어사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동래부 읍지(東萊府邑誌)』에 따르면 오한원은 1806년 2월부터 1809년 2월까지 동래 부사로 재임하였다.

오한원이 동래 부사로 있을 때 왜인들이 왜관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규정을 어기고 함부로 울타리 밖을 출입하는가 하면 쓰시마[對馬]의 대선이 부두에 정박하는 등 통신사 파견 요청을 둘러싸고 위협적인 행동을 보였다. 이에 오한원은 1807년(순조 7) 금정산성을 보수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허락 받았다. 같은 해 금정산성 동문을 준공하고 오한원이 글을 지어 기념비를 세웠다. 보수 공사가 늦어져 1809년(순조 9)까지 동래 부사직에 있었다.

1809년 쓰시마 측이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면서 역지빙례(易地聘禮)[조선 통신사가 에도[江戶]까지 가지 않고 중간 지대인 쓰시마에서 교섭함]를 건의해 오자 오한원이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후 사간원 대사간, 의주 부윤을 역임하고 1818년(순조 18) 동지사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21년(순조 21) 개성부 유수로 나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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