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3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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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井山城復設碑 |
영어의미역 | Stone Monument for Reconstruction of Geumjeongsanseong Fortres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강로 217[장전동 482-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재혁 |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에 있는 조선 후기 금정산성을 보수한 내역을 기록한 비.
[건립 경위]
금정산성부설비(金井山城復設碑)는 1808년(순조 8) “동래부가 점령되더라도 영남을 지키는 튼튼한 성이 필요하다”는 당시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의 건의에 따라 금정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산성의 면모를 새롭게 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위치]
금정산성부설비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 482-2번지에 있다. 금정초등학교 인근의 벽산 블루밍 아파트 단지 내 공원의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형태]
비의 크기는 높이 185㎝, 너비 72㎝, 두께 35㎝이다. 재질은 화강석으로 귀부와 이수(螭首) 없이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금석문]
비석의 앞면에 새겨져 있는 글은 모두 16행으로 금정산성을 처음 쌓은 때부터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까지의 경위와 부설(復設) 공사의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비바람에 마멸되어 판독하기는 어려우나 동역(董役), 공사 감독 등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동래부의 관할 지역은 동남쪽 바닷가에 걸쳐 있어 섬 오랑캐들이 들어오는 길이 되니, 우리나라의 요충지이다. 임진년의 변란 때 성이 지켜지지 못하고 천곡(泉谷) 송상현 공이 죽으니, 드디어 왜적들이 대대적으로 몰아 들이닥쳐 나라를 어지럽힌 것이 예닐곱 해가 되었었다. 만약 신종 황제(神宗皇帝)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는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나라 선비들은 오랑캐 복장을 하였을 것이다.
강화를 맺고 난 뒤 관수왜(館守倭)[조선 시대에 왜관을 관리하던 왜인]는 관사에 거처하게 하고, 사개(使价)는 예절로 접대하니, 이는 실로 성상(聖上)의 덕화가 먼 곳의 사람들을 회유하는 정책이지만, 원한을 품은 것도 또한 수백 년이 되었다. 이곳에 수령을 두는 데는 조정에서 정하되 전주(銓注)를 거치지 않고, 군사 일을 따지는 데에는 진영을 설치하여 두 고을을 전결하게 하였다. 당초의 시설이 위엄 있고 엄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만 성곽과 못이 견고하지 못하여 지난날의 화를 면하지 못한 것이 통탄할 일이다.
동래부 북쪽의 금정산은 바다와 육지의 목에 들어 있고, 사방이 엄중하게 막혀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들어 준 험준한 곳이요,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다. 지난 계미년에 부사 이무(李埜)가 그 위에 처음으로 산성을 창건하였는데, 둘레가 9,200여 보이다. 시설과 규모가 우뚝하게 영남 바닷가의 방패가 되어, 변방의 백성들이 이를 믿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뒤 갑오년에 성이 너무 크다고 말하는 자가 있어 결국 산성을 폐지하고 만 것이 지금까지 95년이 되었다. 초루는 이미 폐허가 되었고, 성가퀴는 단지 형적만 남아 사람들이 애석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다.
지금 주상 6년 병인년[1806]에 내가 이 고을의 태수가 되어, 일찍이 한번 이 산에 올라 옛터를 둘러보게 되었는데, 오랜 시간 방황하며 차마 떠날 수 없었다. 아! 오늘날 동래부의 읍성은 7리[약 2.74㎞]에 불과한 작은 성곽인데, 믿을 만한 험준한 곳이 없으니, 만약 국경에 경계해야 할 일이라도 발생한다면, 어찌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니겠는가?
옛적에 자양(子襄)은 영(郢) 땅에 성을 쌓을 것을 계획하였고, 무신(巫臣)은 전차(戰車) 타는 것을 가르쳤으니, 이로 보면 성곽을 수리하지 않는 것은 그 땅을 적에게 주는 것이고, 병졸을 훈련하지 않는 것은 그 백성을 적에게 내어 주는 것임을 알 것이다. 대개 병력이란 평소에 양성하지 않아서는 안 되며, 성곽은 험준한 곳에 웅거하지 않으면 안 되고, 군대에는 하루라도 먹을 것이 없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에 나는 옛사람들이 원대한 근심을 하였던 것을 생각하고, 비가 내릴 때의 대비가 없음을 개탄하여 상소문을 지어 몇 가지 조목을 조정에 아뢰었다. 첫째는 변방의 금령을 엄중히 하는 것이요, 둘째는 군포를 덜어 주는 것이고, 셋째는 위병(衛兵)을 선발하는 것이며, 산성을 다시 쌓는 것이 그 네 번째이다. 소를 올리자 모두 좋다는 허락을 받았는데, 다만 산성을 쌓는 조항에 대해서는 특별히 감사에게 명령하여 충분히 의논하여 편의대로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세 고을의 곡식 1만 섬을 옮겨 산성의 양식으로 삼고, 해마다 2,000냥씩의 돈을 20년 기한으로 한정해서 지급하여 세 군문(軍門)의 건물과 군기(軍器) 및 성을 지키는 물자를 조달하는 데 쓰도록 한 것은 도(道)에서 계획하여 품의한 것이고, 동문을 새로 짓고 성곽을 수리하는 것을 본 읍에서 전담하는 것은 내가 소청한 것이었다. 위병 500명을 먼저 선발하여 한 영(營)을 만들고, 활과 총 쏘는 것을 권장하며 임금을 섬길 것을 가르치니, 일 년이 채 못 되어 그 재능들이 쓸 만하였다.
정묘년 늦가을에 토목 공사를 잇달아 일으켜 한 달 만에 동문이 완성되었고, 다음 해 초봄에는 기둥과 들보를 100리[약 39.27㎞] 밖에서 옮겨 오고, 벼랑 끝에서 험준한 바위를 깎아 내어 지고 끌어당기기를 온 인부가 힘을 함께한 지 149일 만에 서남북의 초루(譙樓)가 완성되었다. 사방으로 통하는 길목에 창고를 시설하여 물자 수송을 고르게 하였고, 여러 계곡의 물줄기를 이끌어 강과 바다로 통하게 하니, 성벽이 평탄한 곳에서 시작되어 산 정상에서 그치기를 가로로 32리[약 12.56㎞]에 다다르는 것으로 공사를 끝내었다.
동래 사람으로 부역한 사람들이 이곳을 의지할 곳으로 여겨 즐거이 달려오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것이 이루어진 데에는 마치 신의 도움이 있은 듯하니, 이 역사의 성공은 여러 사람의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일을 감독한 막료들과 여러 교리들이 모두 말하기를, 사실에 대한 기록이 없을 수 없다고 하여 내 사양하지 못하고 그 전말을 이와 같이 간략히 쓴다.
숭정 기원 후 네 번째 무진년[1808], 통정대부 동래부사 금성 오한원 짓고 쓰다[萊之治 處東南海上 爲島夷路 東國之要衝 壬辰之變 城不守 泉谷宋公死之 遂長驅入域 搶攘殆六七年 若非神宗皇帝再造之恩 東士幾左衽矣 及其講和 守倭則以館而處 使价則以禮而享 此實聖化之綏遠 而含怨亦數百年 置守焉 廟剡而不用銓注 詰戎焉 設鎭而專制二邑 當初設施 非不威重 惟其城池之不固 未免有曩時之禍 可勝痛哉 府北之金井一山 據水陸咽喉 四面嚴阻 眞天設之險 必守之地也 在昔癸未 府使李公埜 始創山城於其上 周爲九千二百餘步 設施規模 屹然爲嶺海捍蔽 邊民恃而不恐 逮甲午 有以闊大爲言者 城遂廢 今爲九十五年 譙廨已虛 而圮堞只有形址 人莫不爲之嗟惜 上之六年丙寅 余守是邦 蓋嘗一登 周覽舊墟 彷徨之久 不能去 噫 今之府城 不過七里短堞 無險可恃 苟彊場有警 寧不凜然 昔子襄謀城郭 巫臣訓乘車 是知城郭不修以其地與敵也·士卒不鍊以其民與敵也 夫兵不可以不素養 城不可以不據險 軍旅亦不可一日去食 余於是念前人之遠慮 慨陰雨之無備 遂以一疏條陳于朝 一嚴邊禁也 二蠲軍布也 三選衛兵也 山城復築 卽其四也旣徹 俱蒙允可 而惟於築城條 特下道帥臣議久之以便宜聞 三邑穀萬石之移作山餉 歲劃二千緡之錢 限以二十年 助辦於三門廨廠及軍器守城之資者 道啓之所區劃也 東門之新建 城堞之修築 本邑專當者 賤臣之疏請也 衛兵五百 先已簡取 創爲一營 勸以射放 敎以親上 未朞而材可用 及至丁卯季秋 土木繼興 一月東門成 翌年孟春 運柱樑於百里 斲巉巖於崖巓 擔曳如雲 萬夫齊力 計百四十有九日 西南北譙樓成 設倉廨於四達之逵 以均轉輸 導衆谷之奔流 以通江海 城起于平夷 止干山頂 橫亘三十二里 而功告訖焉 萊人之赴之者 莫不視爲依歸之所·樂趨勇往 其就也 若有神助 可見是役之成 成於衆心也 董事之 幕佐諸吏校 咸曰 記實不可闕也 余不能辭 遂略書其顚末如右云爾 崇禎紀元後 四戊辰 通政大夫 東萊府使 錦城吳翰源 撰並書].”
[현황]
현재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 벽산 블루밍 아파트 단지 내 공원의 큰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금정산성부설비는 조선 후기 성곽 축성 및 사회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큰 암반 위에 세워져 있어 처음 세워진 후 한 차례도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동래읍성에서 금정산성으로 가는 출입로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금정산성 연구의 가장 확실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