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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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電車-生活 |
영어의미역 | Riding on a Streetcar and the Life in Busan |
분야 | 역사/근현대,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해훈 |
[부산에 유일하게 남은 전차]
“전차를 타고 등하교 했는데 먼저 표를 보여주고 전차에 오른 친구가 창을 통해 다른 친구에게 표를 건네 줘 타게 하는 등 변칙적인 무임승차를 했던 게 기억납니다.”
부산시 관광협회 김인남[60] 여행이용권 사업팀장의 회고다. 학생 때는 재미로 규정을 어기는 행동을 하는 친구들이 많다. 당시에는 학생들이 악의 없이 하는 행동들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용서가 되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전차를 탈 기회가 없다. 아마 전차가 진화한 게 전철[도시 철도]일지도 모른다. 현재 우리나라에 3대의 전차가 남아 있다. 서울에 일본제 전차가 2대 있는데, 서울역사박물관과 국립서울과학관에 각각 1대씩 있고, 부산에 미국제 전차가 1대 남아있다. 그러면 부산에 있는 전차를 한 번 보러가자. 전차는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에 전시돼 있다. 도로에서도 전차가 보인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관리하는 이 전차는 오후 1~2시 박물관 직원의 안내를 받아 누구나 타볼 수 있다. 이 전차가 왜 여기 있을까.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겠다.
이 전차는 1927년 미국의 신시내티 차량회사(Cincinnati Car Company)에서 제작한 GP&L 860~899 시리즈 중 893호로, 애틀랜타에서 운행되다 1952년 미국의 원조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당시 한국에 도입돼 부산에서 운행된 전차 20량 중 마지막까지 운행된 전차 중 1대다. 남선전기[한국전력의 전신]가 이 전차를 1968년까지 16년간 부산 시내에서 운행했다. 전차 운행이 중단되자 동아학숙 설립자인 정재환(鄭在煥) 박사가 남선전기로부터 학습용으로 전차를 기증받아 1969년 2월 23일부터 구덕캠퍼스에 보관해 왔다.
그러다 동아대학교는 2010년 12월 21일 전차를 구덕캠퍼스에서 부민캠퍼스로 옮겼다. 전차가 42년 만에 바깥나들이를 한 셈이다. 전차를 옮기는 모습도 장관이었다. 이날 오전 7시부터 구덕캠퍼스 의과 대학 배면 창고 앞에 보관돼 있던 전차를 대형 크레인으로 들어 올리는 일도 만만찮았다. 아마 그렇게 큰 크레인은 처음 보았을 것이다. 전차는 1량인데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이 전차의 크기를 보면 길이 14m, 높이 3.2m[집전장치 제외], 너비 2.4m이다. 표면은 철재, 내부는 목재로 마감돼 있다. 내부는 2명씩 앉을 수 있는 나무 좌석이 24개 있으며, 입석을 고려하면 100여 명이 탈 수 있다. 좌우 각각의 미닫이문으로 오르내릴 수 있으며, 전차가 앞뒤로 이동하기 때문에 앞뒤 구분 없이 모양이 똑 같다.
크레인으로 들어 올린 전차를 대형 트레일러에 싣는 모습도 영화 속의 한 장면이었다. 이 장관을 구덕캠퍼스를 가로질러 구덕 공원으로 가던 인근 주민들이 신기하게 쳐다봤다. 이렇게 해서 전차를 부민캠퍼스로 옮겨 안착시키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부산 전차를 부민캠퍼스로 옮긴 뒤 보존 처리 및 복원 작업을 거쳐 2011년 7월 25일부터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복원된 전차는 동력선이 없어 움직이지 않지만 탑승할 수 있다. 이 전차는 2012년 4월 18일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 문화재 제494호로 지정됐다.
[번갯불을 잡아먹고 달리는 괴물]
그러면 전차의 역사는 어떻게 되고 우리나라에는 언제 들어왔을까.
체코 프라하, 오스트리아 빈, 핀란드 헬싱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독일 프라이부르크, 스페인 빌바오, 터키 이스탄불, 일본 나가사키 같은 세계적인 관광 도시에 가면 노면 전차[Tram]가 시가지를 누빈다. 불과 40여 년 전 부산에도 노면 전차가 다녔지만 버스와 자동차, 도시 철도[지하철]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일제 강점기 노면 전차가 운행된 도시는 부산·서울·평양 등 국내에서 세 곳뿐이었다. 부산은 그만큼 ‘모던’한 도시였다.
“번갯불을 잡아먹고 달리는 괴물.”, “쇠막대기로 전기를 잡아먹고 그 힘으로 달리는 괴물.”
우리나라에 처음 전차가 들어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뒤에서 전차와 관련된 에피소드와 사건 사고를 별도로 언급하겠지만, 전차는 그야말로 ‘괴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33년 4월 경상남도 양산에서 온 74세 이종호 노인이 부산 동구 수정동에서 생전 처음 본 전차에 화들짝 놀라 정신이 없어 궤도 안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전치 4주의 사고를 당한 것이다.
도시 교통수단으로 노면 전차가 세계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81년 독일 베를린에서였다. 동양에서는 1894년 일본 교토에 등장했고, 우리나라에는 1899년 서울에 첫 모습을 보였다. 1899년 5월 17일 서울에서 전차가 개통됐으며, 아시아의 도시로서는 두 번째였다. 부산에는 1915년, 1923년에는 평양에서도 개통됐다.
전차는 전기의 힘으로 운행된다. 1885년 말께 경복궁 내 건청궁에서 점등식을 거행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전기가 처음으로 도입됐다. 우리나라에서 전기 사업이 본격화된 것은 1989년 1월 26일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면서 비롯됐다. 한성전기회사는 1898년 10월 17일에 전용 궤도 부설 공사를 착공하여 12월 25일 서대문~홍릉 간 단선을 준공했다. 그리고 1899년 5월 동대문~흥화문[전 서울고등학교 앞] 간 전차 시승 및 개통으로 전차 사업이 본격화됐다.
고종 황제는 신하들을 이끌고 일본인들에게 시해된 명성 황후가 묻힌 청량리 홍릉을 자주 찾았다. 당시 고종의 행차는 비용도 많이 들었을 뿐더러 번거롭기 이를 데 없었다. 이를 지켜보던 미국인 사업가 콜브란(Collbran)은 고종을 설득해 청량리까지 전차 선로를 놓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운행하는 전차가 개통된 것이다. 전차는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긴 것은 당연했다. 쇠로 된 것이 사람을 태우고 다닌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쇠당나귀’로 불렀다.
당연히 고종 황제의 홍릉 행차에 편의를 제공할 목적으로 전차 선로를 놓였다. 하지만 전차의 모양이 상여를 닮은 탓에 불길하게 생각해 막상 전차가 개통된 후 고종의 홍릉 행차에는 그다지 이용되지 않았다. 차 안에는 번갯불이 있어 가까이 가면 타죽는다는 소문과 미신까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객차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나무 의자에다 창문도 없어 비가 내리면 전차 안에서 우산을 받쳐야 했다. 특히 겨울철이면 차안에서도 한기에 떨어야만 했던 것이다.
[부산, 전차 도입 앞서 1909년 경편 기관차 먼저 운행]
이제 부산의 이야기를 해보자. 부산항은 1876년 2월 근대 국제 무역항으로 개항됐다. 그럼으로써 근대 도시에 걸 맞는 새로운 교통수단의 도입은 필수적이었다. 개항된 이후에도 당장 교통수단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남자들은 여전히 조랑말이나 나귀를 타고 먼 길을 다니던 것이 가장 호사스러운 나들이 길이었고, 아낙네들은 가마를 타고 다니는 것이 가장 호강스런 나들이였다.
부산에는 1902년 4월 부산전등이 용미산[현 롯데 백화점 광복점]에 설치된 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해 지금의 광복동 거리에 여러 개의 가로등을 밝힌 것이 전기 도입의 시작이다.
부산에는 전차 도입에 앞서 1909년 8월 29일 부산궤도가 설립되면서, 8월 말 증기 철도 전용 궤도 부설 공사를 착공해 11월 말 부산진~동래 남문 간을 준공, 12월 2일 경편(輕便) 기관차가 운행을 시작했다. 이어 동래 남문~동래 온천장 간 공사를 12월 18일에 준공, 다음 날인 12월 19일부터 영업을 개시해 화객 운송을 시작했다. 따라서 부산진~동래 온천장 간 전 구간의 운행이 개시되면서 동래 온천을 찾는 욕객들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 부산부의 인구 변동 상황을 살펴보면 1911년 말 인구는 9만 9,833명이었다. 새로운 교통수단의 등장은 급속한 도시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부산에 증기 철도, 즉 경편 철도를 설치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1876년 부산항 개항과 부산 일본인 전관 거류지의 설치로 부산을 찾는 일본인들이 늘어나면서 동래 온천장의 온천욕 이용과 금정산의 관광을 하는 일본인들이 증가, 인력거나 우마차를 이용하는 데 대한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면 부산의 증기 철도는 어떤 성격이었을까. 그건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철도이기도 한 것이다. 경편 철도는 궤도 간격 폭이 76㎝로 좁고 객차가 적게 딸린 일본식 열차로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1995년 철거된 수원~인천 간의 수인선, 표준 궤간[1,435㎜]이 이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부산 첫 전차 운행, 1915년 부산우체국~동래 온천장 구간]
부산에서는 1915년 1월 전차 선로 부설 공사를 착공해 부산진~초량, 초량~부산우체국 간의 선로가 준공됐다. 또한 부산진~동래 온천장 간 기존 경편 기관차의 철로를 전차 선로로 변경하는 공사도 준공됐다. 따라서 11월 1일 마침내 부산우체국~동래 온천장 간 전차가 운행을 시작했다.
일제가 부산의 전차 사업을 시작한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 그건 이렇다. 당시 부산 사람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물론 부관 연락선을 타고 오는 일본인 여행객들과 경부선 철도를 이용해 부산을 찾는 여행객들이 부산역이나 국제 여객 부두에서 쉽게 동래 온천장의 온천욕장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여하튼 사정이야 어찌됐던 전차로 인해 부산의 근대 교통 문화는 급속한 발전을 이뤘다.
다음은 부산의 전차 노선이 확장되는 현황을 한 번 보자. 1915년 11월 1일 부산우체국~동래 온천장 간 전차 운행이 본격화된 이후 조선와사전기에서는 부산 시내의 가장 번화가인 장수통[지금의 광복동]을 거쳐 서쪽으로 빠져서 대청정[현 대청동]을 경유하는 시내 일주를 목적으로 긴급 허가를 받아서 시내선 건설을 추진했다.
1916년에는 대청정선[대청동선]인 부산역~부산우편국~대청정 2정목[대청동 2가]~보수정[보수동]~보수정 2정목[보수동 2가]~부성교[현 토성교]~토성정[토성동]의 조선와사전기 사옥 앞까지에 이르는 선로 부설 공사를 착공해 같은 해 9월 22일 개통해 영업을 개시했다.
1917년에는 장수통선[광복동선]인 대교통 1정목[중앙동]~대교통 2정목[중앙동]~본정[동광동]~남빈[남포동] 입구~변천정[광복동]~변천정 2정목[광복동 2가]~행정[창선동]~서정[신창동]~부평정[부평동]~토성정[토성동] 조선와사전기 사옥 앞에 이르는 선로 부설 공사를 착공해 같은 해 12월 18일 시운전을 거쳐 12월 19일 운수 개시 허가를 받아 영업을 개시했다. 이와 같은 시내 일주 순환선의 개통으로 인해 외관선과 연계됨으로써 전차가 시민의 발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됐다.
[1924년 선로 단선서 복선으로 준공, 전차 교통 일신]
1924년에는 선로 개선, 즉 단선을 복선으로 준공함으로써 전차 교통을 일신했다. 지금의 각종 차량들로 복잡한 도로 상황에서는 이해가 안 되지만 당시는 일반 차량은 거의 없고 도로에 전차만 다녔다고 상상하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1924년 9월 말에는 부산역 앞~부산진 간 전차 궤도 단선을 복선으로 준공하는 동시에 배전선도 전부 개선해 새롭게 단장하고 각 노선에 운행 차량을 증가시켜 전차가 시민들의 일반적인 교통수단화 되도록 했다.
이 무렵이 전차가 대중 교통수단으로 가장 인기가 있었다. 창업 이래 최고의 수입을 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상세하게 보자. 1924년 당시 부산의 전차 영업 노선은 범일정선 3,979m, 장수통선 3,376m, 동래선 1만 906m, 대청정선 1,488m로 총연장 1만 9,749m에 하루 평균 225원(圓)의 수입을 기록했던 것이다.
이듬해인 1925년 9월에는 보수정 2정목[보수동 2가]~경남도청 앞[현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중도정[부용동]에 이르는 선로를 단선으로 부설해 연장 개통, 중도정 방면의 교통 편리를 제공했다. 또한 1926년에는 종래 45폰드 및 25폰드였던 궤철을 전부 60폰드로 개량하는 대사업을 완료한 동시에 나무다리를 모두 철교로 교체 가설했다. 또 1927년 2월 2일까지 종래의 소형 전차를 반 강철제 전차로 모두 바꿔 운전 계통의 개선과 차량의 증가로 도시 전차의 모습을 정비했다.
[온천장역 신축으로 온천욕객 증가]
1926년 온천교가 준공되자 기존의 동래 온천장 종점이 온천장과 거리가 있어 전차 승객이 불편을 겪었기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 전차의 온천장 인입 선로 공사와 함께 온천장역을 신축, 10월 개통해 운수 영업을 개시했다. 이로써 욕객들의 이용에 편리를 도모해 호평을 얻음과 함께 수입이 증가했다.
1928년 9월에는 대신정선[대신동선]인 중도정[부용동]~대신정[대신동]~공설 운동장 간 전차 연장 출원 허가를 받아 선로 부설 공사를 착공, 9월 말에 준공 개통해 본격적으로 운행했다. 이로써 부산역 이남의 시내 선로는 장수통 경유선과 대청정 경유선이 재판소에서 만나 대신정까지 연장됐다. 1931년 10월 말에는 종전 전차 궤도인 2척(呎) 6촌(吋)[76.2㎝]을 3척 6촌[106.68㎝]으로 전 노선을 표준 궤도로 개량하는 동시에 차체의 개조를 통해 본격적인 전차 사업을 추진하여 제2 도약을 꾀했다.
1933년 8월 9일에 범일정선[범일동선]의 전차 선로를 부산진 입구~좌천정[좌천동]~범일정[범일동, 구 교통부 앞]까지 단선으로 연장, 개통했다. 1934년 7월에는 대청정선의 부평정 시장통[현 부평동 시장]의 선로를 폐지하고, 부성교[토성교] 북쪽 토성정[토성동]~병원 앞~경남도청 앞까지의 선로를 복선으로 신설하고, 경남도청 앞~공설 운동장 간 복선 공사도 함께 착공, 9월 말 준공해 개통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본정[동광동]~부성교의 장수통선과 대청정선을 제외한 부산진~공설 운동장 간 복선 선로가 개통됐다.
[1934년 11월 13일 영도 대교 개통]
1934년 11월 23일 부산부의 숙원 사업이던 간선 도로 포장과 내륙과 영도를 잇는 부산 대교[현 영도 대교]가 개통됐다. 이후 대창정[대창동] 구 전차 선로는 폐지됐다. 1934년 11월 말에는 시내 간선 도로 전차 선로 복선화와 도로 포장 공사가 완료됐다. 1935년 2월에는 해상 횡단의 도개교 설치 이후 목도[영도]선을 본정[동광동]~부청 앞[옛 부산시청 앞]~목도[영도] 입구~목도 본정~종점[남항동]까지 복선으로 연장, 개통했다. 그리고 일부 궤철은 80폰드 또는 100폰드로 개량했다.
그동안 영도에 사는 부민들이 부청사[지금의 롯데 백화점 광복점] 앞까지 와서 전차를 타는 불편이 해소됐다. 또한 공설 운동장[지금의 구덕 운동장] 방면이나 동래 온천장까지 쉽게 갈 수 있게 됐다.
1935년 3월 현재 부산의 전차 영업 노선을 살펴보면, 범일정선 3,979m, 장수통선 3,376m, 동래선 1만 906m, 대청정선 1,488m, 목도선 1,966m로 총연장 2만 1,715m였다.
전차 운행은 부산 대중교통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면서 도시 형태나 산업의 발전을 가져오게 됐다. 그 후 1938년 새로운 교통수단인 자동차의 출현으로 도로 건설이 시행되면서 도시 발전은 물론 기존 부산역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형으로 확장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그럼 부산의 전차에 대해 간략하게 요약해보자.
부산에서는 1909년 12월 2일 부산진~동래 남문 간 전차보다 먼저 증기 기관차 영업을 개시했다. 1915년 11월 1일 본격적인 전차 사업이 시작된 이후 전차는 약 53년간 부산 시민들과 함께해 오다, 1968년 5월 19일 마지막 운행을 끝으로 5월 20일부터 전면 폐지된 것이다. 우리나라에 전차가 대중 교통수단으로 처음 개통된 것은 1899년 5월 17일이었다. 운행 구간은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 간 단선 노선이었다.
부산에서 전차가 첫 선을 보인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1915년 11월 1일 부산우체국~동래 온천장 간 운행이었다. 부산에서는 이후 1916년 대청동선, 1917년 광복동선이 개통되고 1928년 대신동선, 1933년 범일동선, 1935년 영도선이 연장 개통됐다.
통계를 보면 1918년 1년간 전차를 이용한 승객은 203만 3,027명이었다. 당시 부산의 인구가 6만 2,567명이었으므로, 한 사람이 연간 무려 33번이나 전차를 이용한 셈이다. 전차 운임료는 처음 전차가 운행될 무렵 부산역~동래 온천장까지 왕복 운임은 50전이었다. 날품팔이 하루 품삯이 40~50전 하던 때여서 만만찮은 값이었다.
1937년 3월 10일에는 대흥전기를 주축으로 남한의 6대 전기 회사가 합병된 남선합동전기로 통합되었다. 이 남선합동전기는 이후 성남전기와 강릉전기를 흡수하여 1946년 5월 29일 남선전기가 되었다.
일제 강점 말기인 1944~1945년경에 장수통선의 전차 운행이 폐지되었고, 새로이 소화통선[충무동선]이 부청 앞~남빈정[남포동]~소화통[충무동]~토성정[토성동]까지 신설[복선] 연결돼 개통되면서 새로운 순환선의 신설로 기존의 목도선과 연계가 가능하게 되었다.
광복 직전 남선합동전기가 보유 운행하였던 부산의 전차 61대가 광복 이후에 우리 손에 넘어 왔을 때는, 그 중에서 바로 운행할 수 있는 전차는 고작 38대에 불과하였다. 또한 노후 차량의 빈번한 고장으로 1947년에는 13대로 줄었고, 1948년도에는 8대로 줄었다. 당시 부산의 인구는 광복 이후 해외 귀환 동포들의 정착 등으로 50만 1,890명이 되어, 1944년도의 인구 32만 8,294명에 비해 거의 1.5배 가까운 인구가 증가했다.
교통부에서는 서울과 부산의 교통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미국산 전차를 도입하기로 결정하고, ICA[미국 대외 원조를 담당하던 국제협력청]를 통하여 전차 수입을 추진하였다. 1952년 6월 19일 미국산 전차 40대를 들여와서 서울의 경성전기와 부산의 남선전기에 각각 20대씩 배정하기로 하고, 동년 7월 3일에 각각 인수하였다.
도입 전차는 대형이어서 도로가 좁은 부산 시가지를 달리는데 무리가 있었고 시내버스나 자동차와의 접촉 사고가 자주 발생하여 전차 파손이 빈번하였다. 그리고 새롭게 도입한 전차는 미국에서 30여 년 전에 제작되어 사용하던 중고차여서 몇 해만 운행하고 폐차할 수밖에 없었다.
1955년 6월에는 ICA 원조 자금에 의한 미국산 전차 도입의 승인을 얻어 같은 해 6월 10일부터 12월 28일 사이에 도입한 53대 중 서울의 경성전기에 34대, 부산의 남선전기에 19대를 배정하였다. 당시의 부산 전차 보유 차량 95대 중에서 그나마 운행할 수 있었던 차량은 45대로 광복 이후 최고의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부산의 인구는 해외 동포의 귀국, 1950년 6·25 전쟁 때 두 번에 걸친 임시 수도의 부산 이전과 많은 피난민들의 유입으로 계속 증가하여 105만 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인구는 늘어났지만 그동안 30여 년 가까이 사용하여 온 전차 선로인 궤도와 그 밖의 각종 부대시설들이 극심하게 노후화되면서 매번 막대한 보수비와 유지 관리비가 소요되어 수지 균형을 맞추기가 어려운 지경이어서 매년 적자 운영을 면치 못하였다. 또한 부산의 급격한 인구 증가에 다라 교통 인구의 수송을 위해 시내버스가 500대로 증차되면서 전차 승객을 버스에 빼앗긴 것 또한 전차 운행 유지를 어렵게 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1960년대 부산에는 서면을 기점으로 하는 3개 전차 노선이 운행됐다. 서면~구덕 운동장, 서면~영도 남항동, 서면~동래 온천장 노선이 그것이다. 1968년 5월 17일에 부산직할시장 명의로 ‘전차 철거에 즈음하여’라는 담화가 발표됐다. 여기에는 50여 년 동안이나 부산 시민과 함께 해온 대중교통이었던 전차 운행 중지에 대한 소회와 교통난 해소를 위한 입장이 담겨있었다.
그러면 부산의 전차 요금은 얼마나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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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나 택시 이용객들이 점차 증가하지만, 1963년 정부 직할시 승격 이후까지도 전차는 서민들이나 학생들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해방 후 전차 요금이 일정 비율로 오르다 6·25 전쟁 시기에 급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51년 1월에 1구간 50원에서 7개월 뒤인 8월에 3배인 150원으로, 그리고 이듬해에는 1구간에 무려 6배인 300원으로 급격하게 올랐음을 알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해 그만큼 사회가 불안정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표지이기도 하다.
부산에서 전차 운행이 폐지되기 2년 전인 1966년도 부산시의 인구는 142만 6,019명이었다. 그중 1일 평균 전차를 이용하는 인구는 14만 9,335명으로 전체 인구의 10%정도였다. 1966년 당시 부산 시내를 운행하였던 버스는 관용과 자가용, 영업용을 포함해 979대였으나, 1968년에 버스가 1,403대로 증가하면서 전차는 시민들의 대중교통수단으로서의 자리를 버스에 내어주게 됐다. 이에 따라 시설의 노후화와 계속되는 적자 누적으로 전차 운행을 전면 폐지하게 된 것이다. 서울은 1968년 11월 30일 전차 운행이 폐지됐다.
그러면 부산에 전차는 몇 대가 있었으며, 하루 평균 운행 대수는 얼마나 될까?
1957년에는 보유 대수 73대, 1일 평균 운행 대수는 40대였다. 1958년에는 73/44대, 1959년 73/46, 1960년 73/47대, 1961년 73/48대, 1962년 73/49대, 1963년 75/55대, 1964년 70/48대, 1965년 69/48대, 1966년 64/46대였다.
1930~40년대 전차 운행 노선 및 풍경은 어땠을까. 종점인 대신동[부산 공설 운동장 앞]에서 부민동을 지난 다음, 대청동을 거치거나, 아니면 광복로[훗날 남포동으로 이전]를 거쳐 범일동까지 내왕하던 전차, 그리고 영도 남항동을 떠나 영도 대교 위를 거친 다음, 시내까지 내왕하던 전차, 1930~40년대 부산의 시내 전차의 풍경이었다. 그런가 하면 부산진역 근처의 신좌수영에서 서면과 거제리를 거쳐서 온천장까지 내왕하던 교외선 전차도 있었다.
1930년대만 해도 모두 45대의 노면 전차가 남조선전기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었다. 정류장은 모두 30개가 넘었고, 레일 길이는 20㎞를 넘었다. 인구가 20만에 못 미치던 도시로서는 규모가 큰 편이었다.
다음은 전차 관련 에피소드들이다.
[전차 관련 에피소드]
당시 전차 운행에 있어 크고 작은 사건 사고도 많았다. 동래선 이후 범일정선, 대청정선, 장수통선, 대신정선, 목도선 등 여러 노선이 생겨 부산은 전차의 도시가 된다. 1920년대 중반에는 부산 인구의 25%가 매일 전차를 타고 다닐 정도였다. 부산경찰서에서 「전차 도덕의 노래」까지 만들어 “냄새 나는 물품 휴대말라”, “다리를 동개지 말며” 따위 내용으로 승객을 계도했다. 일본인 전차 운전수의 불친절은 ‘범어사 부처님도 노할 정도’였단다. 손님을 간수가 죄수 다루듯 하면서 아녀자 희롱하기는 예사였고, 목소리가 너무 커 임신부가 낙태를 할 정도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차에 치이고, 전차 안에서 아이를 낳기도 하는 등 전차는 명암이 교차하는 새로운 삶의 풍속도였다.
1916년 ‘부산 항일 전차 시위’, 격한 1,000여 명 전차 2대 엎어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916년, 부산 시민 1,000여 명이 일제의 필요에 따라 건설돼 운영 중인 전차 2대를 뒤집어엎은 항일 시위가 일어났다.
이 사건의 시작은 이러했다. 1916년 9월 13일 밤 부산진 한국인 마을 앞 영가대[현재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근처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전차에 치여 1명이 숨지고, 3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를 목격한 한국인이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그중 한 명이 “저 전차가 사람을 치여 죽였다”고 외치자 1,000여 명의 한국인이 모여 일제히 돌을 던지며 전차를 전복시켰다. 이들은 사고를 수습하러 순사를 태우고 온 전차도 뒤집어엎었다. 이 사건으로 우리나라 사람 39명이 검거됐으며, 주모자 4명은 징역 6월~1년형을 선고받았다.
반면 과실 치사죄의 일본인 운전사는 벌금 200원의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 당시 일본 언론은 「영가대 보름달 아래의 참극」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그러면서도 사망 사고의 원인에 대해 “조선인 특유의 느긋함에 선로에서 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보도하는 등 항일 시위가 확산되는 것을 경계해 사건을 축소하려고 했다.
1918년 어부 치어 즉사, 민중들 전차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게 해
1918년 여름에는 영가대 언덕길에서 좌천동으로 내려오던 전차가 한국인 어부를 치어 즉사했으나, 일본인 기관사는 그냥 전차를 운전해 달아나 버렸다. 그 후 며칠이 지나도 회사 측에서 성의 있는 태도를 보이지 않자 울분에 쌓여 있던 한국인들은 어느 날 영가대에 정차 중이던 전차에 몰려가서 로프를 전차에 매어 여러 사람이 언덕 아래에서 당겨 굴러 떨어지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파업
1919년 4월 20일에는 조선와사전기 소속 부산 전차 기관사 및 차장 50여 명이 파업을 했다.
1937년 부산우편국 앞 전차 충돌
1937년 부산우편국 앞에서 전차가 충돌했다. 이곳은 한 달 전에도 부상자 7명의 충돌 사고가 일어난 소위 ‘마의 교차점’이었다.
1933년, 양산에서 온 70대 노인 놀라 궤도 안으로 뛰어 들어 중상
1933년 4월 경남 양산에서 온 74세 이종호 노인이 수정동에서 처음 본 전차에 화들짝 놀라면서 궤도 안으로 뛰어들어 전치 4주의 사고를 당했다.
전차 안에서 출산
1934년 5월 울산에서 부산 동구 초량동 친정집에 와 있던 22세 김연필이란 여자가 중구 영주동 인근 남행 전차 안에서 병원에 가던 중 여아를 낳았다.
전차 만원 사태
부산역전에서 동래 온천까지는 40~50분 걸렸는데, 1916년께 부산우편국 앞에선 만원이라 부민들은 전차를 탈 수 없었다. 그래서 부평정 종점까지 걸어가서 탔는데 여기도 벌써 30~40명이 줄을 서 있었다고 했다.
부산~온천장 왕복 할인권, 목욕탕 입장권 끼운 전차표도 판매
부산~온천장 왕복 할인권도 나왔고, 목욕탕 입욕권을 끼운 전차표도 나왔다. 1930년 부산 부민이 13만 명인데, 1년간 온천 이용객은 16만 명을 헤아렸다.
1952년 가을 부산우편국 앞 사거리서 전차 충돌 사고
옛 부산시청에서 서면을 거쳐 온천장으로 가는 시발 전차[383호]가 대신동 부산 공설 운동장 앞에서 출발해 초량까지 가는 로컬 전차[309호]를 들이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부산우편국 앞 사고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1930년대에도 간혹 전차가 탈선해 상가로 돌입하는 사고가 발생하곤 했다.
1940년대 후반 보수·대신동 네거리 대형 참사
1930년 3월 대신동 종점에서 한 정거장 거치고 전차가 지나가게 되어 있던 네거리였다. 대신동에서 계속 경사진 내리막길을 달려오던 전차가 네거리 건너 맞은편의 큰 가게로 돌진했다. 그나마 옆으로 넘어져 엎드린 꼴로 건물 안으로 들이박힌 것이다. 마침 부민초등학교에서는 멀지 않은 곳이어서 태어나서 처음 보는 참변의 현장을 대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아이도 있었다. 가속이 붙은 채로 탈선하는 바람에 10여 m쯤 미끄러진 끝에 전복된 뒤 건물과 충돌한 것이었다.
전차 안 화재
1966년 1월 19일에는 범일동 부산철도국 앞 전차 안에서 화재가 일어나 40여 명의 승객이 밀고 밟으며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13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불친절한 부산 전차 운전수
1925년 5월 「불친절한 부산 전차」라는 『부산 일보』 기사에서는 일본인 운전수가 17세 여학생이 영주동에서 내린다고 하여도 못 들은 체 전차를 계속 달려 이 여학생이 할 수 없이 달리는 전차에서 뛰어내려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초창기 일정한 정차장 없어
전차가 부산에 처음 등장했던 무렵에는 일정한 정차장이 없었다. 굳이 정차장을 정해놓고 전차가 다닐 만큼 손님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아무데서나 손을 번쩍 들어 전차를 세우고 탈 수 있었고, 아무데서나 내리고 싶은 곳에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한량들, 밤 드라이브 즐겨
전차 운행 초창기 소위 낭만주의자들은 여름밤에 한 잔 술로 목을 축이고 시원한 밤바람을 쐴 겸해서 부산역~동래 온천장 사이를 다니는 전차를 타고 밤 드라이브를 즐겼다. 당시 부산경남본부세관 맞은편에 있는 부산역 소화물 취급소 자리에 있던 부산역 앞에서 온천장까지를 5구간으로 1구간의 운임이 5전이었고, 시외 요금 구간 1회에 4전씩으로 하되 부산역~초량, 초량~부산진 구간을 각각 한 구간으로 했던 것이다.
당시 한량들은 왕복 전차 삯으로 단돈 50전이면 느긋하게 저녁 바람을 쐬며 무료한 시간을 심심찮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단돈 50전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살림살이가 넉넉한 부자들에게 어울리는 호사이고, 가난한 일반 서민들에게는 50전도 큰돈이었다.
부산에 전차가 등장하기 전보다 조금 앞선 시기의 조사 통계를 보면, 1907년도 순사의 1개월 봉급이 20원이었고, 1904년도의 날품팔이 품삯이 하루 40~50전, 흰쌀[최상품] 한 말에 1원 35전, 소금 한 섬에 1원 5전이었다. 조금 앞선 시기의 조사 통계치지만 이후 품삯과 물가 상승률을 짐작해 본다고 해도 부산진~온천장까지의 전차 삯 25전은 꽤나 비싼 것임을 알 수 있다.
부산에 전차 모형 버스 승강장 등장
1960년대 말까지 부산에서 운행되다 사라진 ‘전차’의 모형을 그대로 옮긴 버스 승강장이 생겼다. 부산 서구는 2010년 8월 전차 종점 기념비가 있는 구덕 운동장 인근 문화 아파트 앞에 전차 모형 버스 승강장을 설치했다. 구청 관계자는 “도시 미관 향상과 대중교통 활성을 위해 대신동 전차 종점 기념비 부근에 전차 모형 버스 승강장을 설치하게 됐다.”며 “이곳은 옛 지역 문화를 담은 명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부산 전차는 1915년부터 1968년까지 중앙동, 광복동, 영도 등 모두 30여 개 역에 걸쳐 운행됐다.
[전차 향후 활용 계획-부산발전연구원, 부산에 노면 전차 도입 바람직]
부산발전연구원 이상국 연구 위원이 부산의 새 대중교통은 간선 급행 버스[BRT]가 아닌 노면 전차가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부산발전연구원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부산의 현 단계 신 교통 실험은 간선 급행 버스가 아닌 노면 전차가 바람직한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히고 초읍선, 영도선, 강서선 등에 노면 전차 도입을 제안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이 연구원은 “브라질 꾸리찌바는 BRT 중심의 대중교통 시스템을 토지 이용과 통합하는 방식의 신교통 실험으로 유명세를 떨쳤지만, 현재 도시 공간 구조의 변화와 교통 체계가 부합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있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 위원은 “현재 꾸리찌바는 BRT 수송 서비스의 한계를 직면하고 다른 교통수단을 검토하고 있다.” 지적하고 “꾸리찌바가 부산에 주는 시사점은 도시 교통에 대한 미래 모델이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부산도 도시 개발 과정에서 급변하는 도시 공간 구조와 교통망 간 부합성이 다소 약하기 때문에 그 해법을 교통 체계 개선[투자]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며 “이 같은 이유로 부산의 현 단계 신교통 실험은 BRT가 아닌 노면 전차가 바람직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 연구 위원은 “부산의 역점 사업인 도시 재생과 신도시 개발 등에 효과가 클 것으로 판단되는 초읍선, 영도선, 강서선 등 3개 노선에 노면 전차를 도입해 도시 공간 구조와 교통 체계의 매칭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노면 전차는 전기를 동력으로 지상 궤도를 따라 운행하는 전차로, 도심 교통난을 해결하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려고 최근 유럽과 미국, 일본 등에서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서울시와 제주도를 비롯한 10여 개 자치 단체에서 도입을 검토 중이다.
또 노면 전차는 사업비가 ㎞당 100억~150억 원으로, 모노레일[400억~500억 원]보다 경제적이라고 이상국 연구 위원은 설명했다. 그는 “노면 전차는 신교통으로 도시 재생을 견인하는 것은 물론 도심 관광 및 생활 교통까지 담당하게 될 것”이라며 “뛰어난 미관으로 도시의 위상과 가치를 높이는 대중교통 중심적 도시 개발의 대표적 철도 차량”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