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023 |
---|---|
한자 | 釜山-住居文化 |
영어의미역 | The Nest of the Busan People: the Residence Culture of Busan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공윤경 |
[부산의 주거 문화, 어떻게 변해 왔나]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며 변치 않는 것 중 하나는 인간이 거주한다는 행위다. 하이데거(M. Heidegger)는 “건축함은 본래 거주함이고, 거주함은 인간이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방식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거주함은 울타리로 둘러싼 채 머물러 (또는 체류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거주함의 근본 특성은 보살핌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인간 생활의 기본 요소인 의식주(衣食住) 중에서 ‘주(住)’는 인간으로 하여금 안정된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
주거는 물리적 형태의 공간, 즉 주택뿐만 아니라 그 공간에서 거주하는 인간의 정서적 개념까지를 포괄한다. 여기서 주택은 주거 생활이 이루어지는 가장 기본이 되는 장소라 할 수 있으며, 태곳적부터 어떤 형태로든 인간을 위한 피난처[shelter], 안락한 장소, 정체성을 표현하는 곳으로 존재해 왔다. 따라서 주택을 매개로 형성되는 주거의 방식을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파악하여 ‘주거 문화’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땅 위에 존재하고 삶을 지속시키려고 장소의 조건에 따라, 또는 그것을 극복하면서 그리고 다양한 재료들을 조합하고 배열하면서 살아왔다. 마당과 뒷간이 있는 한옥, 거실과 화장실이 있는 아파트처럼 주택은 장소와 시대에 따라 짓는 재료, 짓는 방식도 다르다. 그러나 기와나 짚으로 만들어졌든, 콘크리트나 유리로 만들어졌든 인간은 그곳에서 머물고 체류하면서 보호받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전통적 주거 문화와 외래 주거 문화가 만나고 적응하는 과정도 함께 있었으며, 그에 따라 삶, 의식, 문화도 변하여 왔다.
과거 부산의 주택 형태는 기와집, 초가집 등 우리의 고유한 주거 양식인 한옥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19세기 말 서양식, 일본식 주택 등 새로운 유형의 주택이 등장하여 부산의 주거 형태와 주거 문화는 큰 변화를 겪었다. 해방 이후 귀환 동포, 피란민, 이농민 등의 유입이 증가하면서 빈민들의 주거 형태인 판잣집이 생겨났으며, 판잣집은 산중턱까지 올라가 산동네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중간을 가로지르는 산복 도로가 건설되었다.
1970년대 이후 아파트가 보급되면서 부산의 대표적인 주거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오늘날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 시설이 아니라 인간의 생활과 문화를 담는 그릇, 주거 문화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부의 상징, 투자 가치가 더해져 아파트의 존재감은 더욱 커지고 있으며 이제는 브랜드 아파트, 초고층 아파트 등으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한옥, 자연을 품은 전통 가옥]
부산의 일반적인 주택 형태는 북방형의 구들과 남방형의 마루가 연합하여 만들어진 ‘한옥’이었다. 이는 우리나라 기후에 맞게 발전한 형태로서, 재료에 따라 기와로 만든 기와집, 짚으로 엮은 초가집 등이 있었다. 서민들의 집으로 ‘민가(民家)’라 불리던 초가집은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주거 형태로서 단열성이 뛰어나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구조가 간단하여 쉽게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구성이 좋지 못하고 불에 잘 타는 단점이 있었다. 이런 초가집의 단점을 극복한 기와집을 ‘반가(班家)’라고 불렀으며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부산의 초가집은 대부분 일자형(一字形) 홀집으로 처마 깊이를 짧게 하고 지붕의 경사를 많이 줌으로써 일조량과 강우량을 고려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식 주택, 개항기 이후 주거 문화의 혼재]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초량에 위치하였던 일본 조계지를 중심으로 서양식, 일본식 주택 양식이 전해지면서 개량 한옥, 도시형 한옥, 절충식 주택 등 새로운 주택 양식과 주거 문화가 생겨났다. 붉은 기와, 벽돌, 유리, 함석 등의 자재가 도입된 것도 이 시기였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오는 것이 아니라 집 안으로 들어온 수도를 이용하게 되고, 대청마루가 거실로 변해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며, 변소가 욕실과 함께 실내로 들어왔다. 또한 현관, 발코니, 베란다 등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을 매개하는 전이 공간이 생겼으며, 취침 공간과 식사 공간을 분리하는 식·침 분리 개념이 도입되었다. 초기에는 외래 양식을 그대로 모방한 형태가 유행처럼 번졌지만 우리의 전통 주거 문화와 맞지 않다는 인식이 퍼져 가면서 온돌이나 마루와 같은 전통 양식을 접목한 절충식 주거 형태로 변하여 갔다.
당시 초량 일대에 주로 거주하였던 일본인들은 전통 한옥을 개수하여 주거 공간, 사무 공간으로 사용하다가 이후 일본식 건물을 신축하였다. 그래서 전통 한옥인 기와집과 함께 일식 주택이 공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2층 규모의 일식 주택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1층과 2층 사이에 처마를 덧댄 눈썹지붕이 있고, 2층 지붕은 맞배지붕[박공지붕]이나 팔작지붕이다. 그리고 전면이나 측면에 있는, 일본식 정원을 향해 열리는 미서기 창호를 통해 전체적으로 개방감이 느껴지는 입면 구성을 가진다. 또한 일본식 가옥의 특징적 요소들인 도코노마(床の間)[장식물을 걸거나 얹기 위한 공간]와 오시이레(押し入れ)[붙박이장], 후스마[襖, 방과 방을 구분하는 일종의 장지문], 란마[欄間, 실내 환기를 위한 고창] 등이 있다. 일본과 다른 기후 때문에 다다미방 외에 온돌을 설치하고 벽을 두껍게 하며 창호의 면적을 줄이는 등 한식과 절충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동구 수정동 정란각 은 일본식 주택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주택의 특징은 웅장한 지붕과 높은 천장, 넓은 실내 공간, 화려한 장식이다. 그리고 2층 쯔즈끼마[續間, 연속된 다다미방]는 영화 「장군의 아들」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창살과 창호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창호지가 외부에 붙어 있는데, 창호지를 내부에 붙이는 우리 전통 양식과 반대다. 이 건물은 2007년 7월 등록 문화재 제330호로 지정되었으며, 2010년 12월 문화재청이 인수하였고, 2011년 4월부터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위탁 관리하고 있다.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남겨 놓고 간 일본인 소유의 집이나 건물을 적산 가옥(敵産家屋)이라 부른다. 대부분의 적산 가옥은 국가에 귀속되었다가 일반인에게 불하되었으며, 일부 적산 가옥은 전쟁 때 피란민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적산 가옥은 우리 주거 문화와의 차이, 일제의 잔재라는 인식, 개발 등으로 점차 소멸되어 갔으며, 현재는 일부만이 일제 강점을 입증하는 네거티브 헤리티지(negative heritage)로 남아 있다.
부평 시장 뒤편, 옛 침례병원 근처 등 부산 곳곳에 산재한 일본식 가옥을 보면 100년 전쯤으로 돌아간 듯하고 멈춰 버린 시간이 박제되어 있는 듯하다. 대부분의 적산 가옥이 원형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공간의 부족, 구조적 문제 등으로 일부 증축, 보강이 된 상태이다. 일본의 전통 양식을 유지함과 동시에 한국식 주거 생활 변화에 맞게 변형되어 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적산 가옥은 쓰라린 역사를 증명하는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근대 주거 건축의 변천 과정과 생활사, 향토사를 살펴볼 수 있는 가치 있는 근대 문화유산이며 또한 기억해야 할 공간이자 역사이기도 하다.
[공동 주택의 등장]
먼저 공동 주택, 아파트, 연립 주택의 정의부터 살펴보자. 건축 관련 법규에서 주택은 단독 주택과 공동 주택으로 구분된다. 공동 주택에는 아파트, 연립 주택, 다세대 주택, 기숙사 등이 있으며, 이때 아파트는 ‘주택으로 쓰이는 층수가 5개 층 이상인 주택’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연립 주택은 ‘주택으로 쓰이는 1개 동의 바닥 면적[지하 주차장 면적은 제외] 합계가 660㎡를 초과하고 층수가 4개 층 이하인 주택’이며 다세대 주택은 ‘주택으로 쓰이는 1개 동의 바닥 면적[지하 주차장 면적은 제외] 합계가 660㎡ 이하이고 층수가 4개 층 이하인 주택’으로 정의한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아파트’라는 용어는 미국에서는 아파트먼트(apartment), 영국에서는 플랫(flat)이라고 부른다. 1920년 아파트먼트 하우스(apartment house)라는 용어가 일본에 소개되면서 ‘아파트’로 불리게 되었고 이것이 그대로 우리나라에 전해져 정착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2층 이상의 ‘아파트’라 불리는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이때 아파트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기숙사나 호텔과 같이 숙박시설에 가까운 의미였다. 1933년 『신동아』의 「모던 어점고(modern 語點考)」에서는 ‘아파-트먼트란 일종의 여관 혹은 하숙으로서, 한 빌딩 안에 방을 여러 개 만들어 세를 놓는 집’이라고 정의하였다.
일반적으로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로 중구 남포동 극장가 뒤편에 있는 청풍장[1941]과 소화장[1944]을 꼽는다. 하지만 법적으로 정확하게 구분하자면, 층수가 4개 층 이하이고 바닥 면적 합계가 660㎡를 초과하므로 청풍장과 소화장은 부산 ‘제1호 아파트’가 아니라 ‘제1호 공동 주택’, 구체적으로 ‘제1호 연립 주택’이라고 할 수 있다.
청풍장과 소화장에는 일제 강점기의 건축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내부는 옛날 구조 그대로 다다미방이 보존되어 있으며 일본식 옷장과 대나무 창살도 남아 있다. 그리고 집 안에서 쓰레기를 버리면 아래쪽 창고 쪽으로 떨어지도록 연결되어 있고 발코니 쪽에는 비상 탈출용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줄을 당기는 사기 좌변기까지 갖춰진 당시로서는 최신식 주택이었다. 특히 소화장 입구로 들어서면 궁형 형태의 복도가 있는데 르네상스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1층은 상점 겸 주거, 2층 이상은 주거용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빈집이 많다. 대부분의 상점은 건물 앞으로 돌출되어 있는데 아파트 화단이 있었던 곳에 건물을 덧붙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발코니 난간, 현관문 등 최근에 수선된 것이 간혹 보이긴 하지만 페인트가 벗겨져도, 외벽 타일이나 콘크리트가 떨어져도 이제 대부분 주민은 수리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변 건물과 어울리지 않게 혼자 쓸쓸히 늙어 버린 듯한 모습이다. 1996년 건물 노후, 벽체 일부 균열 및 누수로 인해 재난 위험 시설[D급]로 지정되었다. 2006년 문화재청이 등록 문화재 지정 대상으로 선정하였지만 입주민들의 동의를 얻지 못해 무산되었으며, 재건축 역시 주민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판잣집, 도시 빈민의 생활 공간]
부산은 개항 이후 근대 도시로 발전하였지만 이 당시 근대적 도시 계획과 각종 도시 기반 시설 조성은 일본 전관 거류지인 초량 왜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지금의 영주동과 대청동을 경계로 거주 지역이 나누어졌는데, 일본인들은 시내 중심부를 차지하고 조선인들은 도심 주변, 혹은 산기슭에 정착하거나 영도로 강제 이주해야만 하였다. 일본인들이 일본식 주택, 가로 구획, 상수도 시설 등 체계적인 도시 계획으로 근대 도시를 만들 때, 조선인들은 도로, 수도, 화장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살았다. 판잣집이 빈민들의 생활 공간이 된 것은 이 시기부터라고 볼 수 있다.
각종 공장, 산업 시설 등을 통한 공업의 성장, 대일 무역의 확대, 1909년부터 시작된 매축 공사, 1925년 경상남도 도청의 이전 등 복합적인 요인들로 인해 부산의 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그리고 토지 조사 사업, 산미 증산 정책 등 수탈의 대상이 되던 농촌에서 이탈한 농민층도 도시의 노동력으로 흡수되었다. 1936년 20만 명이던 인구가 광복이 되던 1945년에는 28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증가한 과잉 노동력으로 인해 저렴한 임금과 불안한 고용 구조 아래 도시 빈민층은 늘어만 갔으며, 이들은 공장이나 작업장에서 멀지 않는 곳에 판잣집을 짓고 생활하였다.
해방 후 일본과 만주 지방 등에서 돌아온 귀환 동포들, 6·25 전쟁 피란민들로 부산은 또다시 큰 변혁을 겪게 되었다. 해외로부터 귀환 동포가 유입되어 1948년에는 50만 명을 넘어서게 되었고, 1960년에는 116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부산은 지형적으로 바다와 산 사이의 좁은 평지로 이루어진 선형의 공간 구조를 가져 기존 시가지의 확산에 상당히 불리한 조건이었고, 체계적인 도시 계획도 주택 공급도 없었다. 급증하는 인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피란민들 일부는 부산 시내 곳곳에 마련된 수용소와 공공건물 등에 수용되었으나 나머지 피란민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일터에서 가까운 시가지의 빈터나 개천가 곳곳에 빈 땅만 있으면 판잣집을 지었다. 이들의 주거지는 주로 중구 보수동, 대청동, 영주동과 동구 초량동, 수정동, 좌천동 등 도심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였다. 그러나 도심에서도 살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산비탈로 이동하여 불법 주거지를 형성하였다. 해발100~200m 이상까지, 그리고 공동묘지가 있는 곳까지 판잣집이 들어섰다. 서구 아미동 산19번지는 일본인 공동묘지였으며 남구 우암동 산동네 역시 공동묘지였다.
당시 대부분의 판잣집은 어른 2명 정도가 겨우 누울 수 있는 공간뿐이었다. 나중에 부엌이 추가되기도 하였다. 상하수도 시설이 없어 공동 수도나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왔고 공동변소를 이용하였다. 하수를 아무 곳이나 버려 이웃 다툼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판잣집은 판자나 깡통을 펴서 만든 철판, 가마니 등으로 지어졌으며, 미군 야전용 식량 박스[c-ration box]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부실한 건축 자재로 만든 집에서 방수, 방풍, 보온을 기대할 수 없었고, 난방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겨울을 보내기는 정말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인화성 높은 건축 재료와 다닥다닥 붙은 주택 구조로 인해 크고 작은 화재가 빈번하였다. 판잣집이 밀집하였던 용두산 일대에는 1951년과 1954년, 그리고 국제 시장과 부산역전에는 1953년 큰 화재가 일어났다.
또한 산동네에는 판잣집이 먼저 들어서고 그 사이사이로 길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골목길은 좁고 각기 다른 폭으로 불규칙하게 미로처럼 퍼져 있으며, 그 미로는 다시 가파른 계단으로 이어졌다. 이 골목길과 계단은 주민들을 불편하고 힘들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였지만,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는 주요한 소통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주민들의 통행로이자 아이들의 놀이터였으며, 먹고살기 바빠 만날 시간도, 집이 좁아 모일 공간도 없는 이웃들이 오고가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마당, 사랑방이었다.
산꼭대기까지 빈틈없이 들어찬 판자촌은 해방과 전쟁 시절을 대표하는 가장 보편적인 서민들의 주거 양식이었다. 사진작가 최민식과 구와바라 시세이의 사진을 보면 마치 산 전체를 판잣집이 뒤덮고 있는 듯하다. 하꼬방이라 불리던 판잣집으로 꽉 찬 산동네는 바로 부산의 역사이자 근대화 과정 속에 생겨난 부산 서민들의 공간이었다.
전쟁 후 부산에 머물러 있던 피란민들은 고향으로 또는 외지로 많이 이동하였지만 산동네는 사라지지 않았다. 피란민들 대신 철거민과 이농민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이들 대부분은 생활 기반이 약해 기존 산동네와 그 주변에 거주지를 마련하면서 중구 영주동, 대신동, 동구 좌천동, 범일동 등 산동네가 다시 북적대기 시작하였다. 안창 마을, 물만골이 이즈음 만들어졌다. 그리고 1980년대 아파트 투기 과열, 주택 가격과 전세 가격 폭등 등이 일면서 살 집을 마련할 수 없었던 저소득층은 산비탈의 국공유지에 불법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이때 남구 문현동 돌산 마을, 대연·우암동 철탑 마을 등의 산동네가 형성되었다. 대부분 산동네 주민들은 시의 철거 정책 때문에 힘든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낮 철거 작업반원들에 밀려 보금자리를 잃으면 주민들은 밤을 새워 그 자리에 다시 판잣집을 지었다. 철거되면 다시 짓는 악순환은 1980년대 후반 철거 정책이 멈출 때까지 계속되었다.
현재 대부분의 판잣집은 철거되었고 산비탈 곳곳에 무질서하게 단독 주택, 연립 주택이나 아파트가 난립하여 있다. 도로, 주차장, 소공원 등 도시 기반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채 무계획적으로 판잣집 자리에 그대로 주택이 들어서 주거 환경이 열악한 곳이 많다. 그러나 아직도 산복 도로 주변의 고지대나 아미동, 안창 마을, 물만골, 돌산 마을 등에는 판잣집뿐만 아니라 슬레이트집, 방수천 등으로 지붕을 보수한 집들이 남아 있고 가파른 계단과 좁은 골목길도 여전히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건축가들의 의식적인 작업보다는 이름 없는 서민들의 건축, 즉 건축가 없는 건축에서 그 지역의 건축적 특성이 더 잘 나타난다. 산동네의 건축가 없는 건축물들은 값싼 자재와 낮은 수준의 시공 기술로 비록 그 모습이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하며 조잡하게 보이지만, 그 시대 상황에 맞게 탄생한 대중적인 서민들의 건축물이다. 그래서 산동네는 부산의 역사와 함께 부산 서민들의 주거 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부산시는 사업성 위주의 재개발 사업이 사실상 불가능한 산복 도로 주변의 산동네, 원도심 고지대 등을 대상으로 ‘산복 도로 르네상스 프로젝트’와 ‘휴먼 타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전면 철거 중심의 재개발 방식에서 벗어나 기존 공동체를 유지하면서 살기 좋은 마을로 바꾸고자 하는 재생 사업이다.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많지만 이런 다양한 정책들을 통해 지역 주민들의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고 삶의 질을 높이며, 아울러 공존과 공생을 위한 공동체와 마을 만들기를 시도하고 있다.
[아파트, 현대식 주거 문화의 대명사]
전쟁 이후 인구 과밀화로 인해 토지 및 주택난이 심각해지자 일반 주택의 대안으로 1960년대 부산에 아파트가 등장하였다. 창선동 신창[1960]을 시작으로, 영주동 황금[1966], 대연동 천주교[1967], 신창동 신생[1967], 대연동 대연 공영[1968], 영주동 영주[1969], 신선 2가 신선[1969], 영선 4가 영선[1969], 보수 1가 보수[1969], 수정동 수정 시영[1969], 좌천동 좌천 시영[1969], 남부민동 남부민 시민[1969], 영주동 영주 시민[1971] 등 연립 주택과 아파트가 건립되었다. 시영[시민] 아파트는 부산시가 건설, 공급한 아파트로서, 영주동·충무동 등의 철거민 및 일반 무주택 시민들을 위해 건설되었다. 1968년부터 정부 재정 자금과 시비뿐만 아니라 입주자 분담으로 시행되기도 하였다.
1969년에는 부산시 고지대 개발 사업에 따라 수정동 등 10개소에 시영 아파트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대부분의 아파트는 이렇다 할 단지 배치의 개념도 없었고 녹지, 어린이 놀이터, 주민 공동 시설도 없었다. 다만 주어진 대지 여건과 상황에 맞게 건물을 배치할 뿐이었다. 또한 대부분이 3~4층 정도의 연립 주택 수준으로, 본격적인 아파트로 보기에는 부적절하다는 게 주택 업계의 일반적인 평가이다.
당시 우리나라 아파트는 외국 아파트와 달리 연탄을 이용하여 부엌의 아궁이와 온돌방이 연결되는 전통 구조가 가미된 공동 주택이었다. 공동변소, 공동 수도, 3층 이상의 규모를 가진 아파트의 등장은 전통 양식에 익숙한 시민들의 큰 구경거리이자 관심거리였다. 하지만 ‘연탄가스가 샌다’, ‘고공(高空)병이 생긴다’며 시민들은 입주를 기피하기도 하였다. 다음의 신문 기사[『매일 경제』, 1970. 11. 5]를 보면 당시 아파트에서의 주거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외에 장독이나 김장독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빨래는 어디서 말려야 하는지 등에 대한 것도 논란거리였다. 아파트에 처음 거주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주거 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웠으며 공중도덕 의식도 미약해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발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웹사이트 플러그인 제거 작업으로 인하여 플래시 플러그인 기반의 도표, 도면 등의
멀티미디어 콘텐츠 서비스를 잠정 중단합니다.
표준형식으로 변환 및 서비스가 가능한 멀티미디어 데이터는 순차적으로 변환 및 제공 예정입니다.
1970년대 부산의 인구는 18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늘어나 165%의 놀라운 양적 팽창을 기록한 반면에 도시의 주거 환경은 어둡고 어려운 시기였다.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는 용지난을 가중시키고 여러 가지 도시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기 때문이다. 1972년부터 1975년까지 해운대구 반여동, 남구 용호동, 부산진구 개금동, 사상구 주례동, 북구 만덕동 등으로 철거민을 이주시키기 위한 정책 이주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 주택 단지에는 철거민들이 우선적으로 입주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철거민들 대부분은 생활 근거지가 시내 중심이었기 때문에 거리가 멀고 교통이 불편하여 생계유지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이주를 기피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75~1980년 중구 영주동, 영도구 봉래동, 동래구 사직동, 부산진구 전포동, 북구 덕천동, 해운대구 재송동 등에 시영 아파트를 지속적으로 건립하였으며, 1976~1979년 동래구 사직동과 안락동, 금정구 구서동 3개 지역에는 대한주택공사에서 주공 아파트를 지었다.
여전히 아파트는 대중적이지 못하였고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특히 부산시가 건설한 시영 아파트는 33.06㎡1[10평] 규모로 크기도 작았고 공동변소를 사용하는 등 질적 수준도 낮았다. 또한 부산시의 예산 부족으로 골조와 주요 설비만을 공급하고 내부는 입주자들이 직접 마무리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도심 주변부와 산비탈에 위치하여 교통이 불편하거나 기반 시설이 부족한 경우도 많았다. 1970년 부실 공사로 무너진 서울 와우 시민 아파트 사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시민들은 부실 공사를 탓하기보다는 아파트라는 건물 자체의 결함이 빚어낸 결과로 여겼다. 이처럼 시민들은 서민 주거라는 선입견, 부실 공사에 대한 불신 등으로 아파트보다는 마당이 있는 단독 주택을 더 선호하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등장한 아파트에는 초기 아파트에 등장하였던 형태보다 개선된, 지금과 비슷한 형태의 싱크대와 찬장이 부엌에 설치되었다. 하지만 주부의 신장, 활동 범위, 규격화 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아 장식적인 느낌이 많았다. 그리고 연탄을 이용하여 취사와 난방을 해 연탄을 보관하기 위한 공간이 뒤편 발코니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쓰레기 투입구가 세대마다 설치되어 있었다. 겨울 김장철이면 아파트 화단 한편에 김장독을 묻기도 하였다. 당시 반상회가 활발하였고 주민들은 계단, 아파트 주변을 함께 청소하였다.
민간 건설 업체가 자본 및 기술 축적으로 대량,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를 지어 공급하기 시작하였으며 도심 위주의 건설에서 수영구 남천동, 북구 만덕동 등 도심 이탈 현상이 나타났다. 1976년 삼익주택이 서구 동대신동 옛 부산형무소 부지에 지은 대단위 아파트를 시작으로 남천동 삼익 맨션[1976], 수정동 수성[1977], 문현동 한양[1978], 범일동 한양[1978], 장전동 예그린[1979], 만덕동 만덕 대진[1979], 반여동 왕자[1979], 당감동 무궁화[1981] 등 5층, 10여 동 규모의 아파트 단지들이 건설되었다. 1970년대 초반 서울에서 부유층이 사는 저택이라는 의미로 등장하였던 ‘맨션’이라는 용어가 1970년대 중반 부산에서 나타났다. 단지 중심에 학교와 상가를 배치시키고 어린이 놀이터, 소공원, 체육 시설, 주차장을 갖추는 등 서구의 주거 단지 계획 이론을 도입하여 편리하고 쾌적한 주거 환경으로 정착시켜 나갔다. 이처럼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66.12~132.23㎡[20~40평] 규모의 아파트가 대량 공급됨으로써 시민들의 아파트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하였으며, 점차 아파트가 선호도 측면에서 단독 주택을 능가하게 되었다. 도시화, 핵가족화와 같은 사회 변화로 인해 아파트는 현대 문명의 상징, 경제 발전의 표상으로 부상하였으며, 주거 문화의 선진화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같은 시기 서울과 같은 과열 투기 현상은 볼 수 없으며, 프리미엄이 붙는다 해도 소규모였다.
아파트 내부 시설에는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파이프를 바닥에 깔고 온수를 공급하여 방을 데우는 연탄보일러가 등장하였다. 10층 이상 고층 아파트를 중심으로 연탄 대신 석유[벙커 C유]를 이용한 난방 방식이 보급되었다. 또한 라디오, 선풍기 등이 고작이었으나 점차 흑백텔레비전, 냉장고 등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사치성 가전 제품이라 여겨지던 세탁기는 1970년대 후반 인건비가 높아지고 제품의 실용성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다는 인식 하에 필수품으로 서서히 바뀌게 되었다[『매일 경제』, 1977. 9. 30].
본격적인 아파트 시대는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남천동 삼익 비치[1982], 우동 삼호 가든[1985], 온천동 럭키[1985], 주례동 럭키[1987], 연산동 한양[1988], 수영동 현대[1988], 구서동 선경[1989], 복천동 우성[1989] 등 15층 규모의 고층 아파트가 대단위로 건설되었다. 초기의 아파트는 서구 아파트를 모방하여 내부 공간을 공적, 사적 공간으로 나누었다. 그래서 입구 가까이에 거실, 부엌, 식당을 배치하고 안쪽으로 복도를 형성하여 부부 침실, 자녀 침실을 배치하였다. 하지만 전통 주거에서 안방이 수행하였던 기능을 할 공간이 없게 되자 아파트 평면은 거실을 중심으로 침실, 식당, 부엌이 주변에 배치되는 형태로 변하였으며, 이것이 우리만의 독특한 주거 문화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아파트 평면이 획일화되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받고 있다.
대부분의 아파트는 평형이나 규모의 차이만 있을 뿐 자연 환경, 입지 조건, 주변 환경과 상관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획일적으로 건축되었다. 그러나 망미동 주공 아파트[1986]는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부산의 지형적 특성상 경사지에 축대를 쌓고 평지를 만들어 아파트를 건설하게 되는데, 망미동 주공 아파트는 자연 경사를 활용한 테라스 하우스를 도입하였다. 각 세대의 테라스는 잔디 마당, 화단으로 가꾸어져 단독 주택과 같은 독립성과 개방성을 갖게 한 것이다.
1982년 10월 부산에서 도시가스가 공급되기 시작하면서 가정 연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동아 일보』[1980. 11. 12]에 따르면 취사용 각종 연료의 경제성을 조사한 결과, 5인 가족 기준으로 1개월당 연탄은 6,900원, 석유는 9,090원, 전기는 1만 1,574원, 액화 석유 가스[LPG, 일명 프로판가스]는 1만 4,025원이나 도시 가스는 6,350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때 도시가스는 석유 화학용 원료인 나프타를 분해하거나 LPG를 기화하여 사용한 것이었으며, 보일러는 국산화가 되지 않아 일본에서 수입하여 사용하였다. 1987년 공해가 적고 가격이 저렴한 액화 천연 가스(LNG)가 개별난방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자동차 보급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 예외 없이 주차난을 겪게 되면서 녹지 공간, 어린이 놀이터 등이 주차장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지상 주차는 보차분리가 안 된 경우가 많아 크고 작은 사고도 많았다. 이에 따라 1990년대 초반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 지하 주차장이 도입되었다. 또한 위아래 층을 계단으로 연결한 복층형 아파트와 수영장이 있는 아파트까지 등장하면서 대단위 아파트 단지는 곧 중산층의 주거지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하였다. 특히 132㎡[40평] 이상의 대형과 고층 아파트의 증가로 정원과 연못이 있는 양옥 단독 주택뿐 아니라 아파트도 부자들이 거주하는 고급주택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게 되었다.
한편, 1970년대 이후 지어졌던 대부분의 아파트는 낡고 쇠퇴하여 재건축, 재개발되기 시작하였다. 구서 주공[1979], 사직 주공[1979], 화명 주공[1981], 엄궁 주공[1985]이 재건축되었고 안락 주공[1976], 해운대 AID[1981]은 재건축 중이다. 그리고 부곡 금강 롯데[2012], 명륜 쌍용[2007], 연지 자이[2007], 장전 SK[2008], 청학동 신도 브래뉴[2009], 중동 SK[2011] 등은 재건축·재개발로 생긴 아파트다. 거제 유림 노르웨이숲[2007]은 주거 환경 개선 사업으로 추진되었으며, 부산진구 대원 칸타빌 멤버스[2006]는 도시 환경 정비 사업으로 상업 지역에 들어선 최초의 아파트가 되었다.
또한 불법 무허가 주거지도 재개발 사업에 포함되었다. 동부 올림픽 타운[1999]이 들어선 해운대구 우 2동 승당 마을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곳은 불량 주거지로 부산 최초의 주택 재개발 사업이 시행된 지역이다. 많은 사람이 2009년 1월 발생한 용산 참사를 기억한다. 하지만 승당 마을 철거민들의 망루 투쟁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1996년 4월 재개발에 동의하지 않던 승당 마을 지주들과 세입자들은 적절한 이주 대책을 제시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철거 반대 농성을 벌였다. 하지만 1996년 10월 지주 83세대와 세입자 58세대에 대한 강제 철거가 진행되었고 1999년 그 자리에 동부 올림픽 타운이 생겼다. 재개발로 도시의 외양은 커지고 활력을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살던 이들의 삶의 흔적과 기억은 송두리째 뽑혀 나가고 개발의 주변부는 극명한 양극화의 하위 계층으로 내몰리고 있다.
한편, 지형적 특성상 구조적 개선이 어렵거나 고도 제한, 용도 지역 제한에 묶여 재건축이 힘든 아파트에는 환경 개선을 위해 다양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저소득층 밀집 지역인 좌천동 고지대 좌천 아파트·문화 아파트·금성 아파트는 색채 작업을 통해 도시 미관을 살리고 있다. 이들 3개 아파트 13개 동은 부산시 행복 마을 대상지로 선정되어 40년 만에 외관을 바꾸었다. 그리고 영주 시민 아파트는 철거된 뒤 시민을 위한 공원으로 활용될 계획이며 수정 시영 아파트, 좌천 시영 아파트의 공동 화장실은 최근 수세식으로 개선되었다. 개보수 대상으로 분류되어 있는 나머지 시영 아파트 단지에도 건물 도색, 조경, 옥상 방수, 쉼터 정비 등의 환경 개선 사업이 시행되고 있다.
[브랜드 아파트, 대형·초고층 아파트에 산다]
2000년 이후 아파트에 브랜드 개념이 도입되면서 브랜드 아파트가 등장하게 되었다. 아파트 시장에 대한 소비자들의 뜨거운 열기와 더불어 소비자들의 구매 패턴과 선호도 변화하는 추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즉 IMF 이후 분양가 자율화 등 주택 시장의 변화, 규제 완화와 맞물려 아파트를 짓기만 하면 팔리던 시대는 지나고, 소비자가 아파트를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건설 업체는 기존의 아파트와 차별화하고 소비자의 요구에 맞춘 새로운 콘셉트를 전달하기 위한 브랜드 네임이 필요하게 되었다. 아파트 브랜드가 새로운 마케팅 수단으로 급부상함에 따라 아파트도 브랜드 가치를 따져 가며 구매 여부를 결정하는 브랜드 시대로 변하게 되었다.
초기 아파트 이름은 보수 아파트, 영주 아파트, 남부민 아파트 등과 같이 지역명을 붙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 건설 회사 이름을 딴 현대 아파트, 럭키 아파트, 대우 아파트, 롯데 아파트, 삼성 아파트 등으로 바뀌었다가 구서 선경, 남산 럭키, 문현 한양, 좌천 현대처럼 지역명과 회사명이 혼합된 형태도 있었다. 그리고 2000년 브랜드 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e-편한세상’, ‘푸르지오’, ‘캐슬’, ‘더샵’, ‘자이’, ‘홈타운’ 등의 브랜드 아파트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들 브랜드는 친환경, 웰빙, 고급화, 유비쿼터스, 첨단화 등 새로운 주거 문화를 담고 있다. 서울 등 수도권에서는 ‘래미안’, ‘e-편한세상’, ‘푸르지오’, ‘자이’ 등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으나 부산은 이와 함께 ‘캐슬’에 대한 선호도가 유난히 높았다. 이유는 부산에 가장 많이 공급된 아파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난히 롯데 야구단을 좋아하는 부산 사람들의 심리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동원개발[로얄 듀크], 반도종합건설[유보라], 협성종합건업[르네상스], 삼정[그린코아], 동일[스위트], 유림종합건설[아시아드] 등의 건설 업체들이 부산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실제 부산에서는 이들 아파트보다 대형 건설 업체의 브랜드 아파트를 더 많이 볼 수 있다. 최근 부동산 시장 침체가 장기화되고 재개발, 재건축 사업에서 대형 건설 업체가 수주 물량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기 때문에 지역의 중소 건설 업체는 설 자리를 점점 잃고 있다.
1990년대 후반 또 새롭게 등장한 주거 문화가 있다. 가정에 필요한 각종 가전제품이나 붙박이장 등을 주택 건설 사업자가 입주 전에 미리 설치해 놓은 빌트인(built-in) 아파트가 등장한 것이다. 빌트인은 아파트에서 브랜드 도입과 마찬가지로 건설 업체들의 상품 차별화 전략에서 도입되었다. 냉장고, 세탁기 등 종래의 단순 생활형 가전에서 식기 세척기, 음식물 처리기, 조리 기기, 정수기, 와인 셀러 등에 이르기까지 부엌, 식생활 나아가 음식 문화까지 선도하였다. 그리고 주택의 품질이나 생활의 질이 향상되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가전제품이 없는 입주자에게는 편리하지만, 있는 입주자나 빌트인 제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입주자에게는 낭비의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최근에는 아파트를 구입하거나 리모델링할 때 입주자나 거주자가 빌트인 제품을 선택하기도 한다.
또한 1980년대 후반부터 생겨나기 시작하던 초고층 아파트가 2000년대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1986~1988년 수도권 신도시를 중심으로 건설된 초고층 아파트는 철근 콘크리트 벽식 구조로서 30층 이하의 규모였다. 그러나 철골 구조, 커튼 월 공법, 고강도 콘크리트 등 구조 역학의 진보, 새로운 공법과 건축 재료의 도입에 따라 서울 도곡동 타워펠리스[2002, 66층]를 기점으로 초고층 주상 복합 아파트가 우후죽순으로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주상 복합 아파트는 새롭게 등장한 형태가 아니라 1970년대부터 있었다. 당시 지어진 대부분의 주상 복합 아파트는 4~5층 규모로서 지상 1~2층은 상가, 그 위로는 주거용이었다. 그래서 상가 아파트로도 불렀다. 하지만 초고층화, 최고급화, 최첨단화, 대형화되어 2000년대 등장한 주상 복합 아파트는 일반적으로 지하층은 주차장, 지상 1~4층은 상업 공간, 5층 이상은 주거 공간으로 이루어지는데, 주거 면적은 전체의 70% 이하다. 도심 공동화 현상을 막고 도심 내에 직장이 있는 사람들에게 주거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지어졌다.
초고층 주상 복합 아파트는 1997년 금융 위기 체제 이후 건설업계의 지속된 불황에 대한 돌파구로 볼 수 있으며, 정부의 건설 경기 부양책 차원에서 시행된 분양가 상한선 규제에 적용되지 않는 건축물이다. 주거 용지에 지어지는 일반 아파트와 달리 주상 복합 아파트는 상대적으로 지가가 비싼 상업 용지에 지어진다. 이 때문에 토지의 고도 이용을 위해 초고층화 될 수밖에 없으며 분양가, 관리비, 재산세 등이 비싸기 때문에 상류층을 위한 전유물이 되어 버렸다. 마케팅 측면에서 고급화 전략으로 주택 시장을 이끌고 있으며, 세련된 외관으로 조형화시켜 지역의 랜드마크 구실을 수행하고 있다.
초고층 주상 복합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아파트가 처음 세워진 곳은 서울이었지만 대형 건설 업체들이 맞대결을 벌인 곳은 부산의 해운대였다. 해운대 수영 비행장 부지를 개발한 ‘센텀 시티’와 동백섬 옆 매립지 위에 조성된 ‘마린 시티’를 중심으로 카멜리아[2001, 32층], 베네시티[2005, 37층], 더샵 센텀파크[2006, 51층], 더샵 아델리스[2006, 47층], 하이 페리온[2006, 40층], 위브 포세이돈[2007, 45층], 트럼프월드마린[2007, 42층], 아이파크[2011, 72층] 등 30층 이상의 초고층 주상 복합 아파트들이 계속 지어지고 있다. 2011년 말에 준공된 위브더제니스는 80층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주거 시설을 자랑한다.
초고층 아파트는 고층이라 창문으로 환기가 어렵고 전면 유리벽 때문에 냉방비와 난방비가 비싸며 화재에 취약한 단점이 있다. 그리고 일조권, 조망권 침해 문제, 사회적 위화감 조성, 빈부 격차의 심화 등 많은 문제가 빈발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2010년 10월 해운대구 초고층 주상 복합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진화에 어려움을 겪은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브랜드 아파트, 대형 아파트, 초고층 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지위와 신분을 드러내는 과시적 상징처럼 작동한다. 즉 사회적 지배 계급에 의한 일종의 구별 짓기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부산의 공간적 특성과 주거 문화]
재료와 양식에 따라 기와집, 초가집, 판잣집, 일식 주택, 양식 주택 그리고 법적인 기준에 따라 단독 주택, 다세대 주택, 연립 주택, 아파트 등 부산의 주택 형태는 계속 변하고 있다. 그에 따라 주거 문화 역시 바뀌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지역과 대체적으로 비슷한 흐름을 보인다. 오늘날 아파트로 대변되는 부산의 주거 문화는 다른 지역, 다른 도시와 큰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지역의 특성과 여건, 지형 조건마저 무시한 채 급속도로 퍼진 아파트는 공간뿐 아니라 주거 문화의 균질화, 동일화, 획일화를 야기한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산의 주거 문화에서 다른 지역과 가장 다른 점을 꼽으라고 한다면 산동네와 산복 도로를 들 수 있다. 부산만의 공간적 특성이 주거에 반영된 곳이기 때문이다. 평지가 부족하였던 부산의 불리한 지형 조건과 귀환 동포, 피란민, 이농민 등 급속하게 늘어난 인구 때문에 판잣집이 빼곡하게 들어찼던 산동네는 이제 슬레이트집, 양옥 주택, 연립 주택, 아파트 등으로 변하였다. 하지만 지리적, 공간적 조건을 그대로 유지한 채 여전히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부산의 역사, 부산 서민들의 일상이 가장 잘 드러나고 다양한 주거 형태와 서민들의 주거 문화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최근 아파트는 지금까지의 아파트와 차별화되어 전형적인 사각 형태가 아니라 다양한 평면, 입면 형태를 보이며 가족실, 서재, 멀티 룸 등의 새로운 공간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거실과 방을 자유자재로 변형하는 가변형부터 아파트 안에 또 다른 아파트[원룸 형태]를 넣어 임대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만든 수익형 아파트까지 등장하였다. 이제 사람이 집에 맞추어 사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집이 사람에 맞춰 바뀔 수 있도록 아파트가 진화를 거듭하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가전 기기 제어, 원격 조명 조절, 원격 검침 등의 원격 제어 시스템과 자동 공기 청정 시설, 자동 방화·방재 시스템, 자동 방범 경보, 자동 진공 청소 시설 등의 자동화 설비를 갖추어 주거 문화에 기계와 통신의 편리성을 한층 더하고 있다.
과거 주거 형태에 따라 주거 문화가 바뀌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노인 가구, 1인 가구, 맞벌이 가구 등과 같이 가구 구성의 변화에 따라 주거 문화가 바뀌게 될 것이다. 전형적인 핵가족과 3세대 가구도 여전히 존재하겠지만 그 비율은 점차 줄어들고, 또한 출산율 저하로 인해 인구 증가율이 둔화되어 전반적인 주택 수요는 감소하고 있다. 하지만 특정 계층이나 차별화된 욕구에 대응하는 주택 수요는 증대될 것이다. 즉 전통적인 가구 유형에 비해 가구원 수가 감소하게 되고 가구원의 생활 패턴도 다른 만큼 그들이 필요로 하는 주거 공간도 이전의 전통적인 가구 유형과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룸, 소형 주택, 비혈연 가구를 위한 공유 주택 등 가구 구성원의 생활 특성과 생활 문화에 맞는 맞춤 공간에 대한 요구가 커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