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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030
한자 原都心-釜山-
영어의미역 From the Original Downtown to the Centum City: The Past and the Present of Busan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현정

[부산의 강남, 센텀의 화려함과 그림자]

무더운 여름, 한국 제2의 도시라 불리는 부산의 새로운 랜드 마크로 각광받는 광안 대교를 타고 시원하게 바다 위를 달리다 보면 마치 미래 도시에라도 온 듯 착각을 일으키는 거대하고도 화려한 마천루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광안 대교에서 바라다 보이는 해운대와 센텀 지구는 세계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은 듯 이국적이기 그지없는데 특히 독일의 세계적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가 설계했다는 최고급 주상 복합 건물을 바라보고 있자면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세계 어디든 실시간으로 이어지는 21세기에도 아직 더 발전할 신세계가 남아있다는 듯 미지의 느낌을 가져다준다. 거기다 해질녘 노을이라도 받아 그 거대한 건물이 반짝거리기 시작하면 인공으로 가능한 최고의 풍광으로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부산이 이만큼 발전한 도시라는 걸 웅변하듯 외지인들에게 거대한 스펙터클로 다가가는 해운대와 센텀 일대의 변화는 최근 수십 년 동안의 부산이란 도시 공간의 변화와 궤를 같이 하며 그 시간의 흐름을 압축해 보여준다. 더불어 2003년 개통 이후 수영구남천동, 해운대를 잇는 부산의 대동맥이 된 광안 대교를 시작으로 점차 완공될 북항 대교, 남항 대교, 천마산 터널, 을숙도 대교, 신호 대교, 가덕 대교, 거가 대교 등이 모두 연계되면 그야말로 거대한 해안선을 따라 도시의 공간 구조나 생활 방식도 상당히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수영만, 용호만, 센텀 시티, 마린 시티 등 부산의 해안선들에는 최근 수년 간 경쟁이라도 하듯 아찔할 만큼 높고 화려한 마천루들이 앞을 다투며 솟아올라 부산의 변화를 한 눈에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불과 20여 년 전인 1980년대 중후반만 하더라도 해운대는 특급 호텔들이 늘어선 관광객 대상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곤 여전히 논밭이 죽 늘어선 데다 여기저기 군부대들이 들어서 있던 도심 외곽의 한적한 마을에 불과했다. 마치 6·25 전쟁 당시 전국 팔도의 난민들이 부산으로 모였듯 매년 여름이 되면 예나 지금이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국에서 휴양객들이 모여들긴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처럼 상시적으로 거대한 도심을 이루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인 것이다. 수영 비행장과 군사 시설이 들어서 있던 센텀 일대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백사장과 동백 숲의 소나무들보다는 여기저기 들어찬 빽빽한 건물들이 한 발 빠르게 눈에 들어오는 곳, 해운대와 센텀은 최근 부산의 가장 ‘핫(hot)’ 지역 중 한 곳이 되었다. 오죽하면 부산 사람들 사이에선 ‘부산의 강남’이란 말로 통할 정도니 말이다.

해변의 낮은 건물들과 동백섬, 논밭 등을 사이로 당시 최고의 특급 호텔로 인정받던 극동 호텔 하나만이 우뚝 솟아있던 지난 세월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 현대 대도시의 변화 속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제는 관광객들조차 백사장과 바다보다는 화려하기 그지없이 우뚝 솟아있는 ‘팔레 드 시즈’ 같은 건물들이나 최고급 주상 복합건물 등 마치 뉴욕의 맨해튼을 연상시키는 주변의 인공적 풍광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일에 익숙하고 외국인의 비율도 유난히 높아 국제도시의 분위기마저 물씬 풍긴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급격히 변모하는 해변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며 감탄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순식간에 주위를 둘러싼 인공의 숲속에서 오히려 초라하게까지 보이는 동백섬이나 장산, 혹은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 있었던 해안 위 능선의 조그만 집들의 의미와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켜켜이 축적해 놓은 일상의 리듬을 생각하면, 도시의 공간 구조가 집값이나 그 밖의 여러 외부 조건들에 의해 쉽사리 변화되면서 정작 사람들은 일상의 중심을 잡기 힘들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벌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불과 20여 년 전만해도 관광객들 중심의 휴양지, 혹은 군사적 시설들과 논밭에 불과했던 이곳이 어떤 연유로 이토록 급격하게 변화하게 된 걸까.

[한국 제2의 도시 부산?]

부산은 한국 제2의 도시이자 최대의 항구 도시다. 2002년 아시안 게임과 월드컵은 물론 2005년 APEC 정상 회담 등 대규모 국제 행사들을 순탄하게 개최하고 매년 부산 국제 영화제를 비롯한 갖가지 축제가 벌어지는 활력의 도시이기도 하다. 한편 한국거래소기술보증기금 등 공공 기관의 본사가 있으며 앞으로도 속속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주택금융공사,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한국예탁결제원 등이 이전할 예정이어서 더욱 성장이 기대되는 도시기도 하다.

하지만 어찌된 셈일까. 언젠가부터 인구가 계속 줄어들어 지난 10년 사이 자그마치 32만여 명이 부산을 빠져나갔으며 지금도 계속 줄어들고 있단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부산의 인구는 1989년 이후 지속적으로 줄어들었고 1995년 한시적으로 389만 명으로 최고 수치를 기록했지만, 이후 다시 줄어들기 시작해 2010년 360만 명, 2013년 6월 기준 356만여 명으로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매년 1~2만 명에서 많게는 5만여 명이 부산을 빠져나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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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인구 100만 이상의 대도시 가운데 2025년까지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할 것이라고 예상되는 도시 중에서도 부산은 그 속도가 가장 빠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특히 30대 이하 연령대 인구가 많이 줄어든 반면 40대 이상의 인구는 오히려 늘고 있어 급격히 고령화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여기에는 출산율 저하라는 시대적 흐름도 있겠으나 이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복합적이고 사회적인 요인들이 존재한다. 특히 인구의 공간적 불균형이 심각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런데 전반적으로 인구가 줄고 있는 부산광역시의 16개 구군 중에서도 유독 앞서 말한 해운대구만은 지속적으로 인구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늘고 있는 것에 더해 2013년 6월 기준 43만 2263명으로 부산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해운대구에는 현재 부산광역시 전체의 12.1%의 인구가 살고 있다.

반면 원도심으로 한때 부산의 중심이었던 동광동, 광복동 등이 있는 중구는 현재 부산광역시 전체의 1.4%에 지나지 않는 4만 8986명이 살고 있어 부산에서 가장 적은 인구가 살고 있는 곳으로 쇠퇴했다. 부산 최초로 신시가지가 들어선 해운대 좌동 지역과 센텀 시티 및 마린 시티로 급격히 밀집되는 주거, 행정, 관광 등의 영향이 큰데다 앞으로도 속속 개발 계획이 기다리고 있어 당분간 이런 흐름은 지속될 전망이기도 하다. 반면 집값이 비싸 외곽 지역으로 빠져나가더라도 출퇴근하는 데 큰 무리가 없는 금정구의 경우에도 지속적으로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해운대와 함께 동부산 관광 단지 등 대규모의 개발이 진행 중인데다 도시 외곽으로 주거지를 옮기는 부산 시민들이 많아지면서 기장군의 경우도 2012년 11만 6064명에서 2013년 전반기 12만 2234명으로 올해 가장 많이 인구가 늘어난 지역으로 꼽힌다. 반면, 2012년 14만 1422명에서 올해 전반기 13만 5572명으로 가장 많은 인구가 줄어든 영도구를 비롯해 바로 그 뒤를 잇는 동구서구 등은 해가 갈수록 인구가 감소하고 있어 선명한 대비를 보인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걸까? 출산율 감소야 전국, 아니 전 세계 공통의 현상이니 그렇다 쳐도 역시 부산 인구의 역외 유출과 도심 공동화 현상이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힌다 할 수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한국 제2의 도시라고는 해도 유난히 중앙 집중적 경향이 강한 한국 사회의 특성상 부산의 상당수 젊은 층도 199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수도권으로 유출되고 있다. 한편 부산 인구의 역외 유출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이들은 부산에서 일하면서도 주거지는 경상남도에 두는 이른바 ‘베드타운 족’들이다. 김해, 양산, 진해, 울산, 거제, 창원 등 부산 생활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위성 도시들로 인구가 빠져나가면서 인구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부산은 현재 15개의 구와 기장군을 포함해 모두 16개 구·군을 가진 광역시로 기장군이 면적상으로는 가장 커서 전체의 28.47%를 차지하고 다음으로 강서구, 금정구가 뒤를 잇는다. 하지만 전통적으로는 각각 0.37%와 1.28%의 면적을 차지해서 가장 좁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중구동구가 오랜 시간 도심의 중심 역할을 해왔고 여전히 원도심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부산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부산부제가 실시되면서부터 근대 도시의 골격을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면적은 불과 84.15㎢로 지금의 중구·동구·영도구 그리고 서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인구도 2만 명에 불과했다. 그러다 1936년 4월 1일 제1차 행정 구역 확장으로 동래군 서면사하면 암남리가 편입됐고 면적도 112.12㎢으로 늘어났으며, 1942년 10월 1일 제2차 행정 구역 확장 때는 면적이 이전보다 두 배 이상인 241.12㎢로 확대되면서 오랫동안 이 지방의 행정 중심지였던 동래군 동래읍사하면, 남면, 북면 일부가 편입되기도 했다. 당시 인구도 33만여 명으로 증가했다.

광복과 함께 일본인들이 물러가면서 잠시 인구가 28만여 명으로 줄었지만 이후 6·25 전쟁 발발과 임시 수도가 되면서 전국에서 몰려든 피난민들로 인해 1951년에는 84만여 명, 전쟁 직후인 1955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하며 무서운 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1963년 1월 1일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동래군 구포읍, 사상면, 북면기장읍송정리가 편입됐고 면적은 360.25㎢로 늘어났으며 인구 역시 136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1978년 2월 25일 제4차 행정 구역 확장 때는 김해군 대저읍, 명지면, 가락면의 일부 지역까지 편입되면서 면적은 432.32㎢로 확대되었고 인구는 288만 명 가까이 늘어났다.

1980년에는 최초로 300만 명을 돌파하며 한국의 대표적 대도시로 성장했고 1989년 1월 1일 제5차 행정 구역 확장으로 경상남도 김해군 가락면, 녹산면창원군 천가면의 편입으로 면적 역시 525.25㎢에 이르게 되었다. 1995년에는 1월 1일 행정 기구 개편에 따라 광역시로 개칭되고, 3월 1일에는 제6차 행정 구역 확장으로 양산군 5개읍·면[기장읍·장안읍, 일광면·정관면·철마면]과 진해시 웅동 일부 지역이 편입[749.17㎢]되는 등 2012년 12월 31일 현재 768.41㎢로 확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의 10년 간격으로 격변하는 시대와 함께 커다란 부침을 겪으면서 부산이란 도시의 공간 구조도, 또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도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됐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중구와 초량-광복 이후부터 1960년대 초반]

부산은 통상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 그리고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마지막으로 1980년대 후반 이후부터 현재까지 세 번 정도의 분기점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일본의 한국 침략을 위한 전초 기지인 동시에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대륙 진출을 위한 후방 병참 기지로 기능하면서 이미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상태였다.

우선, 광복 이후 전쟁을 거쳐 1960년대까지의 부산은 도시 인프라가 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해방 이후 귀환 동포, 월남민의 이입, 6·25 전쟁 중 유입된 피난민 등으로 전국에서 급속하게 몰려든 인구를 수용하는 것이 최대의 관건이었다. 해방 이후 부산 인구는 연평균 16.9%씩 증가하며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1945년 광복 이후 1947년까지 남한으로 들어 온 해외 귀환 동포와 월남 동포 100만 명 중 29.6%가 남한의 15개 도시에 정착했고 이중 8.8%가 부산에 정착했다고 알려져 있다.

6·25 전쟁 중에도 연평균 19%의 폭발적 증가가 일어났고 학교, 극장, 사찰 등 대부분의 큰 건물을 피난민 수용소로 사용했지만 이들로는 그 수요를 감당할 수가 없어 무질서한 주택들이 난립하고 도시의 공간 구조가 극히 무질서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제 강점기에 대략 30만 명 정도의 인구를 기준으로 계획된 도시였기 때문에 이렇듯 과도한 인구 유입은 갖가지 문제들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장기적 계획이 가능할 리 없었고 현대에 들어 강조되는 생태나 환경에 대한 고민 역시 염두에 둘 겨를이 없었다. 1955년이 되면 부산은 인구 100만이 넘는 거대 도시로 성장하게 되고 다양한 도시 문제가 구체적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이때까지 부산은 중심이 되는 대표적 도심이 있다기보다는 각각의 지역이 나름의 상권이나 문화를 형성하면서 모자이크 식으로 발전한 도시였다. 부산은 전국 도시 중에서도 재래시장 수가 가장 많은 도시인데 이 역시 다양한 생활권이 넓고 파편적으로 조성되어 있었음을 알려주는 좋은 사례다. 그럼에도 근대적 도심의 원형은 통상 개항 이후 한국 최대의 항구 도시로 성장하며 항만 시설과 물류가 집중되었던 동광동과 광복동, 그리고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발전한 초량 등지까지를 포함하는 중구에서 찾곤 한다.

이 지역은 근대 도시 부산의 최초 원도심이 형성됐던 지역으로 지금은 많이 쇠락했지만 부산만이 가진 장소성과 역사의 흔적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는 소중한 공간으로 최근 재조명받고 있기도 하다. 특히 부산역에서 영도 다리를 거쳐, 자갈치 시장, 공동 어시장, 광복로부평 시장, 남포동 옛 영화관 거리, 부산 근대 역사관, 산복 도로, 초량 시장 등을 거니노라면 시간을 거슬러 부산 원도심의 옛 흔적과 공기를 여전히 느낄 수 있다.

한국 최초의 해수욕장인 송도 역시 원도심에서 멀지 않고 또 1918년 조철제(趙哲濟)가 만든, 태극도 신도 4,000여 명이 집단 거주지를 만들며 형성됐다는 감천 마을 역시 6·25 전쟁 당시와 그 전후 시기 부산의 도시 풍경이 어떠했을 지를 아직도 잘 보여주며 잃어버린 옛 추억이나 도시 속에서 찾기 힘든 낭만을 갈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유명한 관광지로 거듭나는 중이다. 그 정도가 지나쳐 매일매일 이곳에서 여전히 각박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주민들이 수많은 외지인 관광객들 때문에 고통을 호소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사상 공단과 서면-1960년대부터 1980년대]

1960년대로 접어들면 부산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함께 직할시 승격을 맞이하며 명실상부 한국 제2의 도시로 거듭나게 된다. 6·25 전쟁 직후 서울 환도가 되면서 잠시 인구 증가가 주춤했지만 1962년이 되면 5·16 쿠데타 이후 경제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부산의 서쪽 사상 등지에 대규모의 공단이 들어서고 여기서 일하려는 인근 경상남도, 경상북도는 물론 전라남도를 포함한 전국 각지의 농촌 인구들이 빠르게 유입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경공업 중심 도시로 거듭나기 시작한 부산은 기존 물류를 책임지던 항구는 물론 새로이 대규모 공단들이 들어선 사상 및 서부산권의 영향으로 한층 더 규모가 커지면서 대략 지금의 부산이란 도시의 골격을 갖추게 된다. 또 이 시기 새로 들어선 서부산권의 공단 지역과 구도심을 잇는 중심지로서 서면이 주 도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도 부산의 주요 상권으로 입지를 다지게 된다.

이런 흐름과 맞물려 1970년대 후반이 되면 늘어난 인구와 6·25 전쟁 이후 난립하던 불량 주택 문제 등이 맞물려 도시 주거 문제가 심각해지는데 그 대안으로 매립을 통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광안리 지역을 들 수 있다. 여기에 고가 도로나 터널, 지하철과 같은 교통 환경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면서 1980년대가 되면 각 생활권역을 경계 짓던 물리적 거리의 한계가 허물어지고 당시 한창 뜨겁게 불어 닥친 부동산 개발의 광풍과 맞물려 대규모의 건설 붐과 함께 투기적 민간 자본에 의한 도시 공간의 변화가 본격화된다.

산업 구조가 변화하면서 당시까지 부산 경제의 주요 축으로 기능했던 신발 및 섬유 산업 등이 위축되고 타 도시로의 생산 인구 유출이 심화되면서 감소하기 시작한 인구 문제도 한 요인이 되었다. 인구 380만 명을 유지하던 부산의 인구가 1980년대 말이 되면 서서히 감소세로 돌아서기 시작하고 경제 구조도 생산 인구를 중심으로 한 제조업보다 자본 그 자체를 투자의 원료로 하는 투기 자본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국의 부동산 광풍은 중동 건설 특수와 맞물려 주로 1970년대 말 서울에서 일어났지만 시간이 지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산에서도 도시 공간을 변화시키는 주요한 동력이 되었다. 이렇듯 부동산 개발을 둘러싼 투기적 자본이 주도하는 도시 구조의 변화는 1990년대가 되면 더욱 공격적이고 본격화돼서 이후 2013년 현재에 들어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도시 개발 계획 등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주요한 사회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수영, 센텀과 해운대-1980년대 후반부터 현재]

서면이 도시의 중심 상권이 되고 해안의 매립지들을 중심으로 신흥 주거 단지가 대규모로 조성되면서 원도심은 쇠락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1999년 시 청사의 이전과 함께 그 쇠퇴가 본격 가속화되면서 공동화의 위기에 처하게 됐다. 원도심을 비롯한 중심 시가지의 노후화는 곧바로 인구 유출과 함께 산업 및 경제의 침체로 이어지고 마침내 인구 공동화(人口空洞化)를 낳게 됐다.

인구 공동화 현상이란, 대도시의 중심부에 상업, 행정 등 도시의 중추 관리 기능이 집중될수록 그 땅값이 비싸져서이를 감당할 수 없는 일반 주택들이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가게 되고 자연스레 해당 지역이 낮에는 일하는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실제 상주인구는 급격히 감소돼 밤이 되면 적막하기 그지없어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베드타운이라 불리는 주변 외곽 지역과 달리 중심이 텅 비어서 그 모습이 마치 도넛을 닮았다 하여, ‘도넛 현상’이라고도 불린다. 또 딱히 땅값이 오르지 않더라도 교통이 발달한 상태에서 도심의 거주 환경이 악화됐을 때도 나타나는데 부산뿐 아니라 한국의 대도시에서는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원도심의 쇠락과 함께 새롭게 중산층의 주거 단지로 부상한 남천 삼익 아파트로 대표되는 해안 매립지 등지의 주거 지역은 1980년대 말 투기 자본에 의한 본격적 도시 구조 변화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는데 이 같은 경향은 수영과 센텀, 해운대로 이어지며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런데 투기 자본에 의한 도시 구조 변화는 기본적으로 각 생활권역 간 극심한 불평등을 유도해 그 차익으로 개발 이익을 얻어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런 흐름이 지속될수록 공간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광안 대교나 도시 고속 도로 등으로 시공간의 압축이 심화되고 자본의 영향력도 심화되면서 이러한 현상은 시간이 갈수록 정도를 더해갔다. 당연히 도심 속에 스며있는 전통이나 그 동네만의 기억 등 장소성은 모조리 소멸되고 최대한 높이 지은 고층의 아파트나 주변 맥락과 상관없이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건물 등으로 도심 역시 삭막해졌다. 그 결과 현재의 부산은 지난 40여 년의 우리나라 주택 개발사를 한 눈에 보여주듯 단독 주택부터 연립 주택, 그리고 최근 주상 복합 아파트까지 1980년대와 1990년대, 그리고 2000년대를 각각 상징하는 듯한 다양한 주택들이 곳곳에 파편적으로 들어서 있고 그 주위로 전통적 삶의 터전이었던 장소성의 흔적들이 거칠게 남아있는 독특한 풍경의 도시가 되어있다.

근대와 현대가 절묘하게 공존하는, 즉 남천 삼익 비치 아파트 주변에서는 여전히 물질하는 해녀들을 만날 수 있는 민락항이 있고 LG 메트로 시티가 들어선 용호동이기대석포의 흔적이 함께 남아있으며 해운대 신시가지 역시 미포의 흔적과 함께 하고 있는 식이다. 이렇듯 부동산을 중심으로 도시 공간이 재편되면서 1995년에는 동래구에서 연제구가, 남구에서는 수영구가, 북구에서는 사상구가 따로 분구되어 떨어져 나오기도 했다.

초창기 부산의 도심이 개항기 열강들에 의해 조계지가 형성된 중구 동광동과 광복동 지역이었고 이후 해안 매립과 경부선 철도 개통과 함께 초량까지 포함되었다면, 이후 사상 공업 단지를 포함한 서부산권의 대규모 공단과 함께 이를 동서 축으로 잇는 서면이 도시의 중심 공간이 됐고, 1990년도부터는 보다 다양한 권역을 중심으로 자본이 도시 공간 변화를 주도하면서 해운대 신시가지센텀 시티, 화명동 신시가지 등이 본격 계획 추진되기 시작한 셈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도시 공간 정책은 부산의 도시 계획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왔는데 도시 내 특정 지역에 대한 집중 문제가 도시 전체의 문제로 심화되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특히 1980년대까지 부산 경제를 주도했던 서부산권이 개발 제한 구역으로 묶이는 한편 동부산권은 해운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도심이 형성되면서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한 것도 현재 부산 도심 구조의 형성에 큰 요인이 되었다.

1990년대 이후가 되면 이러한 움직임이 가시화되면서 제조업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관광, 문화, 영상, IT 등 차세대 부산의 주요 산업으로 전략적으로 키워지는 업종들이 밀집되기 시작하고 더불어 관광지에 머물렀던 해운대 해수욕장 인근이 주거, 교육, 금융, 문화 등 다양한 기능을 가진 도심으로 급성장했다. 센텀 시티해운대 신시가지, 벡스코로 대표되는 첨단 산업 단지 등이 특정 지역에 밀집하면서 최근에는 세계 최대 단일 백화점이라는 신세계 백화점 센텀시티점까지 오픈해 화룡정점을 찍었다.

그 사이 동부산권과 서부산권의 격차는 커지고 원도심이 걸었던 경로와 비슷하게 서부산권 역시 공동화와 기피 현상을 맞이하게 됐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2009년, 서부산권 가운데서도 가장 낙후됐던 강서구의 개발 제한 구역이 해제됐는데 여기에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주목받는 생태, R&D 등을 중심으로 에코델타 시티 및 부산 연구 개발 특구 등이 조성되고 이미 조성된 신항 외에도 가덕 신공항, 신항 배후 연결 도로, 부산 외곽 순환 도로, 신항 북항 연결 도로 계획 등이 진행되면서 도약의 전기를 맞고 있다.

기장과 강서를 제외한 부산 도심지의 절반가량 넓이인 강서구 대부분 지역에서 개발이 진행되고 있고 향후 10년 간 수십 조 원이 투입될 전망이며 사상 역시 김해와 경전철이 뚫리고 정보 산업 단지로 변모를 추구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부산의 미래라는 거창한 표현과 함께 이른바 ‘신(新)낙동강 시대’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서부산권의 발전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으며 지역 언론들은 연중 기획이나 특집으로 그 변화를 시시각각 알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저마다 난상 토론을 벌일 정도다.

[포구에서 항구로, 다시 21세기로 나아가는 부산]

우리가 살고 있는 부산이란 이름은 원래 가마솥을 닮은 부산(釜山), 지금의 좌천동 증산(甑山) 아래 있었던 작은 포구, 부산포(釜山浦)에서 유래했다. 그렇게 조그만 포구에 불과했던 마을이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겪으며 세계적 항구 도시이자 한국 제2의 도시로 성장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1박 2일 정도만 부산의 여기저기를 둘러보면 그 사이 부산의 변화와 여전히 시시각각 변하는 부산이란 도시의 급격한 변화를 잘 확인할 수 있고 또 새삼 놀라게 되기도 한다.

부산포라는 조그만 포구에 불과했으나 근대화와 역사적 격변을 거쳐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 항구 도시가 되었다가 산업화 이후 다시금 급변하는 시대에 적응하는 동안 몇 차례의 쇠락을 거쳐 오늘에 이른 부산이란 도시는 오늘도 하루가 다르게 그 스스로 하나의 생물이라도 된 것처럼 격렬하게 호흡하며 변화하고 있다. 그 속에서 외지인들이라면 그저 거대하고 화려한 마천루에 감탄하고 지나가겠지만 하루하루의 일상을 이곳에서 보내야하는 주민들은 그 이면에서 꿈틀대는 숨 막히는 불안에 고통을 겪기도 한다. 아이들의 교육 문제가, 빠듯한 살림에 큰 맘 먹고 구입한 집값의 등락이, 고령화되는 이웃들의 문제가 시시각각 피부로 와 닿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지자체는 또 연일 새로운 도시 공간의 재편 방안을 논의하고 발표한다.

도시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들이 충돌하며 다양한 가치와 취향, 목적과 삶의 방식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가까운 과거, 근대화와 산업화를 겪는 동안 도시는 이렇듯 다양한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수용하기엔 역량도 의지도 부족했던 게 사실이며 인간 이성과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 위에서 오직 획일적이고 다소 폭력적으로 공간이 구획되고 분절되면서 개발되어 왔다. 주거, 행정, 산업, 운송, 여가 등 다양한 기능을 바탕으로 공간이 잘게 쪼개지는 동안 그 한편에서는 소외와 불평등이 표출됐고 그러는 사이 주민들 저마다가 간직한 나름의 기억과 마을이 가진 장소성은 휘발되었다. 구체적 이야기는 사라지고 추상적이며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계획 하에 만들어진 도시라는 공간. 21세기를 맞이한 오늘날, 우리는 다시금 이 도시라는 공간에 주목하게 된다.

도시는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생물 같은 것으로 인류의 지난 역사와 현재의 문명 및 역량이 총 집결된 거대한 복합체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를 근대적 방식으로 파편화하고 분절시키는 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도시라기보다는 거꾸로 도시를 위해 사람들이 살아가는 전도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단절된 도시 공간들은 단순히 물리적 교통수단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나 일상적으로 연속되고 관계 맺을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이 그래서 갈수록 뜨겁게 제기되고 있다. 도시 그 자체를 위한 도시가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 한 개인의 삶의 질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개발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할 때라는 것이다.

동서를 중심으로 초대형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의 부산 역시 신낙동강 시대를 열든, 최첨단을 걷는 센텀과 동부산 관광 단지를 개발하든 그래서 반드시 염두에 두고 넘어야 할 과제가 있다.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고 도시 공동체와 마을의 장소성이 회복될 수 있으며 그곳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의 질과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이미 스마트 시대를 맞이하면서 물리적 경계로서의 지역과 세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도시 공간의 재편과 관리 및 성장 모델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잘 살펴야 할 때다. 녹지 공간의 확보와 공동체성 확보, 역사와 전통을 가진 장소성의 문제, 남녀노소 세대 및 젠더의 문제 등을 고민하지 않으면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시대의 변화 앞에서 이미 중구, 서구 등 원도심이 한 차례 겪었고 서부산의 공단 지역이 겪었던 것처럼 지금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해운대나 센텀 등지도 비슷한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문득, ‘오래된 미래’ 라는 말을 떠올려 본다. 거꾸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가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 정보 통신과 과학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 고유의 가치와 감성, 그리고 함께 하는 마음의 소중함은 더욱 강조될 것이다. 부산의 가능성도 바로 이러한 현실과 시대적 요구에서부터 찾아야 하지 않을까? 아름다운 바다와 여기저기서 쉽게 볼 수 있는 산, 그리고 짧은 근대와 현대 속에 켜켜이 쌓인 동네마다의 이야기가 즐겁게 공존하는 부산의 미래를 떠올려보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슬며시 미소를 짓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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