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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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社會救護-始作-釜山福祉 |
영어의미역 | The welfare of Busan Began from a Social Slogan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학림 |
[부산, 현대 한국 사회 복지의 첫 장면]
부산은 뜨거운 도시다. 도시 이름에서부터 ‘가마 부(釜)’자를 사용하는 도시다. 한국학 거장인 고 김열규 교수는 “떠돌이 모래알들이 찰흙으로 변함으로써 영광된 떠돌이[노마드]의 도시를 이룩한 곳이 부산”이라고 일찍이 말하였다. 떠돌이들이 ‘뜨거운 가마’ 부산으로 유입한 최대 계기는 광복과 6·25 전쟁이었다. 귀환 동포들과 피난민들이 대거 부산으로 흘러들어 왔던 그때 오늘날 부산의 많은 것이 이루어졌다. 특히 당시 부산 사회 복지는 한국 사회 복지의 원형을 만들었다.
이는 당연하면서도 참으로 역설적인 것이다 6·25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였던가. 1952년 3월 정부 조사에 따르면 전쟁으로 인한 구호 대상자가 1,040만 6,000명으로 당시 전 국민의 절반이 구호 대상자였다. 그런 ‘기막힌’ 상황이 현대 한국 사회 복지를 사회 구호에서 태동시켰는데 그 중심이 부산이었다.
잠시 제주도로 눈을 돌려보자. 제주도도 피난의 땅이었다. 그곳은 섬이었기에 1·4 후퇴를 전후하여 전쟁고아들을 비행기로 옮기는 극적인 공수 작전까지 벌어졌다. 1950년 12월 20일 군목(軍牧)인 러셀 블레이즈델 미군 대령이 서울에 남겨진 전쟁고아 1,067명을 가까스로 군 수송기에 실어 제주도로 피신시켰다. 비슷한 시기에 딘 헤스 미군 대령은 전쟁고아 907명을 군 수송기에 실어 제주도로 피난시켰다. ‘전쟁고아들의 어머니’로 불린 원불교 종사 고 황온순도 등장하는 그 사연은 1957년 할리우드 스타 록 허드슨이 주연한 영화 「전송가[Battle Hymn]」로 만들어져 세계에 알려졌다. 이런 식으로 제주도에 밀려들었던 피난민은 15만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부산의 긴급한 상황에서도 수많은 인간 드라마가 펼쳐졌다. 6·25 전쟁 때 부산에는 제주도 피난민의 4배에 달하는 60만여 명이 몰려들었으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참하고 끔찍한 그 아수라장 속에서 많은 것들이 극적인 장면이었고, 그 극적 장면들은 모여 한국 현대 사회 복지의 첫 장면이 되어 역사의 장을 열었다.
2002년 출간된 『부산 사회 복지 50년사』 축사 글에서 당시 문태준 한국사회복지협의회장은 “우리나라의 사회 복지 사업은 불과 5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부산에서 먼저 민간 사회 복지 사업이 싹트기 시작하였다.”라고 말하였다. 막대한 구호 욕구가 집중되어 무수히 많은 사회 복지 시설들이 생겨나면서 부산은 한국 사회 복지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부산이 곧 한국이었던 그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 본다.
[부산 최초의 민간 아동 복지 시설]
부산광역시 동래구 금정마을로 83번길 구만덕로 안쪽 녹지, 이곳 금정 마을에 사회 복지 법인인 새들원이 자리 잡고 있다. 귀환 동포가 밀려들던 1945년 11월, 그러니까 부산을 만든 중요 계기였던 해방 직후에 설립한 새들원은 부산 최초의 아동 양육 시설이다. 새들원 뜰 한쪽에 한복 차림으로 두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안음전 동상[안음전 어머니 상]이 있다. 새들원을 설립한 안음전(安音全)[1905~1985]의 상인데 안음전은 한국 아동 복지와 사회 복지에 상당한 역할을 한 이다. 안음전이 품은 소년 소녀는 격랑의 한국사가 내팽개친 아이들이었다.
귀환 동포가 몰려들 때 부산역에는 보금자리가 없이 굶주리는 아이들이 득시글거렸다.
“정거장 앞에 거리에 부랑 소년 고아들이 범람하고 있다. 대부분이 일본말 하는 전재아동인 것 같다. [중략] 거리에서 차 속에서 ‘나니와부시[浪花節, 일본 고유의 창]’ 나부랭이나 하고 돈을 청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우울하기 짝이 없다.”[『경향 신문』, 1947년 4월 5일]
남편과 만주로 피신하였다가 해방과 함께 부산에 정착한 안음전은 어느 날, 부산역 대합실 구석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듯한 남루하고 눈이 큰 아이를 발견하였다. 아버지가 만주에서 죽었고 고국을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를 잃은 그 아이가 안음전의 첫 번째 아이가 되었다. 그런 아이가 부지기수였다.
안음전 또한 아픈 곡절을 지니고 있었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읜 안음전은 마산 의신여학교 2학년 때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친구의 치명적인 놀림에 큰 충격을 받고 일본 유학길에 올라 보육학을 전공하였다. 마흔 둘에 남편과 사별한 안음전은 불임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신세였다. 평소 “자기 자식이 있는 사람은 보육원을 운영할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안음전은 사재를 털어 원래 일본인이 사용하던 현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의 옛 절[현 부산 가톨릭 센터 인근]을 개조해 새들원 문을 열었다. ‘새들’은 ‘새로운 땅’이란 뜻이다. 6·25 전쟁 때 식구들이 300명으로 불어나자 먹고 입는 것 자체가 전쟁이었다. ‘지프차, 번개’라고 불린 안음전은 추진력이 뛰어난 여장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구호 활동에 분주하였고 아이들 수업료를 감당하느라 자신의 옷을 팔기도 하였고, 보모들의 월급을 꾸기도 하였다.
새들원은 1951년 3월 미국에 본부를 둔 외국 원조[외원(外援)]단체인 기독교아동복리회[CCF, 현 한국어린이재단]에 가입해 아동 1인당 10달러의 원조를 받았다. 정부 보조금이 없던 시절에 외원 단체에 의지한 것은 당시 한국 민간 사회 복지 시설의 운영 공식 같은 것이었다.
부산에 설립된 민간 사회 복지 시설은 일제 강점기 6곳, 그러다가 해방 이후 16곳, 6·25 전쟁 발발 직후 10년간 무려 75곳이 생겨났다. 이들 시설은 부모 잃은 천애 고아들을 구호하기 위한 고아원, 즉 영육아 수용 시설이었다. 1960년 부산에서 고아원 수용 인원은 모두 1만여 명에 육박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사회 복지 시설은 고아원으로 불렸는데 부산에서 그 복지 시설의 효시가 새들원이었다.
[10만 명에 이르는 전쟁고아들]
6·25 전쟁으로 생긴 고아는 무려 10만 명에 달하였다. 홀트아동복지회를 탄생시킨 ‘전쟁고아들의 아버지’ 해리 홀트가 한국에 왔던 것은 1955년 추운 겨울에 신발과 겉옷도 없이 참혹하게 떨고 있는 6·25 전쟁고아들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접한 충격 때문이었다. 전쟁고아들의 모습을 포착한 비참한 사진들을 보면 그 아이들이 우는 울음, 겁먹은 까만 눈동자, 그들이 뒤집어쓴 넝마와 들고 있는 깡통은 헐벗은 비극의 끝을 보여 주는 듯하다.
당시 전국 291개 구호 시설에 수용된 고아는 3만 1,173명. 이중 1만 9,272명, 60% 이상이 철모르는 6세 미만이었으며, 심신 허약 아동은 무려 6,070명이나 되었다.
현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초읍동 금용산 자락. 여기의 동래 정씨 문중 부지와 부산시청에서 천막 3개를 빌려 시작한 신애 재활원은 6·25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1951년 3월 설립한 부산 최초의 장애 아동 보호 시설이다. 처음 이름은 신애 불구원이었다. 그 이름에 보이는 ‘불구’는 한민족이 겪었던 전쟁의 아픈 상처 자체를 웅변하는 말이다.
1952년 5월 27일자 『경향 신문』 ‘전쟁 이면(戰爭裏面)의 사회상(社會相)’ 기사는 통탄하고 있다. ‘그날그날의 찰나주의에 몸을 파는 이 나라의 어머니와 누님이 있는가 하면 다음 세대를 지닐 수많은 소년 소녀들이 가두에 방황하는 이 사실은 뜻 있는 사람들을 전율 이상의 공포 속에 집어넣고 있으니’. 당시 부산에 ‘슈샤인 뽀이’[구두 닦는 아해 전국 1만 440명] 5,500명이, ‘뉴쓰 뽀이’[신문 파는 아해, 전국 5천585명] 3,200명이 몰려 있었다. 그만큼 부산은 아득한 하늘 아래 헐벗은 아이들이 들끓는 비극의 땅이었다.
신애 재활원의 설립자인 평안남도 출신의 박상근[1919~] 원장은 일제 강점기 이래 나가사키 원자 폭탄 투하, 현해탄에서의 밀선 난파, 38선 월경을 겪으며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기적적으로 넘기고 살아남았다. 6·25 전쟁 때는 강원도 인제군 전투에서 온몸이 불탔다고 할 정도로 큰 중화상을 입었으나, 매일 한 트럭씩의 시체가 실려 나가던 부산국군통합병원에서 천주교 수녀와 기독교 자원봉사자의 도움으로 정말 극적으로 살아났다.
다른 이의 도움에 의한 극적인 소생이 기독교적 신념과 사회사업으로 이어져 부산에 넘쳐나던 고아와 팔다리가 절단된 장애아 40여 명을 데려 와 신애 불구원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현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에 있던 당시 제일 큰 음식점이던 대구관, 한일관에 매일 가서 손님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자전거에 싣고 와 아이들에게 먹였다.
신애 재활원은 1951년 근처의 미군 하야리아 부대와 자매결연을 하여 1970년대까지 큰 도움을 받았다. 1957년부터 세계 최대의 국제 아동 후원 단체인 미국 양친회[1953~1979년 한국 구호 활동]의 원조를 받았다. 양친회의 후원을 받는다는 자체가 괜찮은 시설이라는 보증이었다. 아동들에게 지급되는 원조로 직원 월급을 줄 정도였다. 양친회에서는 매년 2회, 봄가을에 등록 아동의 실재 여부를 조사하였으며, 가끔 아동의 머리에 이가 있는지 여부도 조사하였다. 신애 재활원은 그런 도움으로 자체 초등학교[1957년]와 중학교[1959년]도 만들어 한국 장애인 재활 교육의 시초가 되었다.
[사회 구호, 그 영욕의 파노라마]
부산에서 펼쳐진 복지의 파노라마는 기본적으로 사회 구호였으며, 그것은 영욕의 파노라마이기도 하였다. 힘겨웠던 시절, 사람 사는 세상의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 고아원을 운영하던 스님이 원조를 얻기 위해 머리를 기르고 개종하는 웃지 못 할 경우도 있었다. 이는 6·25 전쟁을 계기로 대거 내한한 외원 기관들이 대부분 기독교적 색채를 띠면서 은연중에 기독교적 성향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원조 받는 시설들이 외원 단체와 행사를 할 때 1부 예배, 2부 본 행사로 진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6·25 전쟁 직후 부산에서 사회 복지 시설을 설립 운영하였던 이들은 ‘1세대 원장들의 99%가 이북 출신’이라고 뭉뚱그려 말할 만큼 전쟁 와중에 이북에서 월남하였던 피난민들이 주축을 이뤘다.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부산 사회 복지인의 삶』[부산복지개발원, 2010]에 이런 내용의 인터뷰가 나온다.
“피난민들이 생활 수단으로서 아이들만 모으면 돈이 나오고, 묵을 거 같다주니까 아, 이것도 괜찮다 해가지고 [중략] 그래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 피난 내려온 사람이 부산에, 그 당시에 사회사업가들의 주종을 이루었다고 [중략] 한편으로는 돈이 되었다는 거 아니가, 하면 일단 호구지책은 해결될 수 있고.”
물론 이 내용은 다소 일면적이기는 하다. 조선 후기부터 북한은 기독교가 상당히 깊게 유입된 지역으로 당시 부산으로 피난 온 상당수 이북 출신은 반공 기독교인이 많았다. 그래서 이들이, 전통적으로 불교가 강세였던 부산·경남 지역민들과 견주어 볼 때 기독교적 색채를 띤 외원 단체와 쉽게 연결될 수 있었다는 점이 작용한 것이다.
6·25 전쟁의 피해는 어마어마하였다. 사회 구호 대상으로서 전쟁미망인 30만 명, 불구자 33만 명, 전쟁고아 10만 명으로 통상 일컬어진다. 그런데도 1950~1960년대 부산의 민간 사회 복지 시설은 대부분 전쟁고아들을 수용하는 고아원, 즉 영육아 수용 시설이었다. 이는 영육아 수용 시설이 다른 시설에 비해 외원 단체들의 지원을 수월하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부산시는 경찰을 동원해 거리의 부랑아를 단속하였다. 트럭 5대로 하루에 수백 명씩 단속해 수용하였다. 수용할 장소가 변변찮아 현 부산광역시 사하구 괴정동 일본인 수용소 옆 공터에 8동의 가설 천막 아동 보호소를 설치하고 부산애린원의 한정교 목사에게 시설 운영을 맡겼다. 그러나 밤이 지나고 나면 부랑아들은 10여 명만 남고 모두 거리로 다시 도망쳐 운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아동 보호소에 근무하던 직원들이 부랑아 20~30명씩 데리고 현 부산광역시 남구 문현동 산비탈에 흙담집을 짓고는 ‘힐 사이드’라고 이름 짓는 등 남구 대연동, 동구 범일동 안창 마을, 북구 구포동, 동래구 사직동 등 곳곳으로 흩어져 많은 시설들을 설립하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부산의 고아원이기도 하였다.
외원 단체의 시설 지원은 응급 구호 차원이었기 때문에 무차별적이고 임시방편적인 성격이 짙었으며, 그에 따라 겹치기 지원과 과잉 지원 현상이 나타났다. 해당 시설에 필요하지 않은 구호물자가 지원되기도 하고, 그럴 경우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고[실상 안 맞는 옷이나 생필품을 시장에 팔고는 시설에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시설 운영자가 개인적 치부 수단으로 삼는 일도 있었다. 시설 보조금, 시설 아동에 대한 후원금, 구호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외원 단체에 대한 로비도 치열하였다. 외원 단체에 종사하는 직원은 상전 노릇을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러저러하였던 것이 당시의 ‘사바사바’하는 사회 풍조였다.
“자선 사업가면서 보니까 뭐 여기저기에 가서 어떻고 하면서 원조 물자가 나오면 국제 시장에 팔아먹고 하니깐 이런 게 우리 시민들 보는 눈에는 부정적으로 보일 수밖에… 구제 물자로 나온 물건이,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들어가 있어야 할 물건이 국제 시장에 난무하는 시대가 되었으니깐… 그리고 구호품이나 이런 거 들어오면 전부 시장에 팔아먹는 사람들도 있었고.”[『부산 사회 복지인의 삶』 224쪽]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수반하는 것이 현실적인 삶이다. 많은 이들과 시설들의 헌신적이고 감동적인 노력에 의해 분명 부산 사회 복지의 텃밭이 일구어졌다는 것은 명심해야 한다.
자매여숙의 양한나(梁漢拿)[1893~1976]라는 걸출한 인물은 기억되어야 한다. 동래 출신으로 일신여학교 제1회 졸업생인 양한나는 1946년 부산YWCA를 창설하는 등 해방 전후 기독교 운동과 민족주의 운동에 헌신하였다. 말년에는 모든 기득권을 버렸으며 하루 4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아동과 거리로 내몰린 윤락 여성과 정신 질환을 지닌 여성들의 보호를 위한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가재도구 하나 없이 겨우 몸 하나 누일 작은 방에서 지냈던 양한나는 평소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도 않았고 내세우지도 않았던 ‘낮은 삶’을 살았다.
[기독교의 도움, 매켄지와 아펜젤러 집안]
1950년대 부산, 아니 한국 사회 복지의 특징은 외원 기관, 기독교와 연관이 많았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영향은 깊었다. 1951년 3월 천막 2개로 출발한 애광 양로원에서 현재 한국의 대표적 종합 노인 복지 시설로 발전한 애광원도 기독교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부산 복지관 사업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부산 기독교 종합 복지관도 1952년 여 선교사 타운센트를 파견한 미국 감리교에 의해 출발하였다. 고아와 부녀자들을 돕던 부산 기독 사회관이 무료 진료도 하면서 지금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기독교의 사회 구호에 힘입어 많은 병원들도 부산에 지어졌다. 가톨릭 메리놀수녀회는 1950년 4월 대청동에 메리놀수녀병원을 지어 현재 메리놀병원의 초석을 놓았다. 1950년 전쟁 발발 이후 의사를 보내 충무로 교회 앞뜰에서 무료 진료소를 운영하던 미국 남침례교 선교회는 1955년 현 부산광역시 영도구 영선동에 대지를 구해 왈레스 기념 침례병원의 문을 열어 초량 시대를 거쳐 오늘날 남산동 침례병원에 이르게 되었다.
일신병원은 호주 장로교 선교회의 매켄지[한국 이름 매견시] 집안과 의미 깊은 사연을 품고 있다. 매켄지 집안은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 때부터 대를 이은 인연과 약속으로 부산의 선교 역사, 의료 복지사와 연관이 깊다.
오륙도가 내려다보이는 현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의 한 아파트 단지는 상전벽해의 현장이다. 이곳에 일명 ‘용호 농장’으로 불리던 나환자 정착촌이 있었다.
용호 농장의 전사(前史)는 감만동 나환자 수용소였다. 감만동 나환자촌을 일군 이가 호주 장로교 선교회에서 파견한 매켄지[1865~1956] 선교사였다. 1910년 2월 45세 때 부산에 도착한 매켄지는 의료 선교사로서, 그 앞 해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의 어빈 선교사가 만들어 놓은 80명 수용 규모의 감만동 나환자 수용소를 넘겨받았다. 영국 구라(救癩) 선교회의 지원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병원을 운영하면서 1916년에는 특효약인 대풍자 기름도 입수해 환자 사망률을 20%에서 2%까지 떨어뜨렸다.
이후 수용 인원이 팽창해 650여 명에 이르렀고,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은 매켄지는 1938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28년간 봉사하였다. 1940년 일제는 남아 있던 나환자를 소록도로 강제 이주시켰으며 이때 소록도에 가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있던 나환자들은 해방 이후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다시 용호동 나환자촌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부산 나환자들의 친구’였던 매켄지는 나환자들에게 가끔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내가 아들이 없어서 내 후임을 잇게 하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내 딸들을 공부시켜서 한국 사람들에게 꼭 보내겠다.”
매켄지의 신성한 약속은 엄숙하게 이루어졌다. 1952년 매켄지의 두 딸인 의사 헬렌과 간호사 캐더린이 호주 장로교 선교회의 의료 선교사로 다시 부산에 와서 그 어려운 전쟁 시절 수많은 산부인과 환자를 치료하면서 오늘날 일신기독병원의 전신인 일신부인병원을 열었다. 헬렌과 캐더린은 부산에서 20년을 봉사하고 귀국해 맥켄지 집안의 특별한 인연을 부산 땅에 깊이 새겼다. 2002년 일신기독병원과 부산진교회 근처에 매켄지 역사관이 세워졌다. 사람의 흔적은 쉬 사라지기도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한편 도시 철도 남포역 7번 출구 옆에 ‘기독교 선교사 이곳에 첫발을 딛다’는 표지석이 2013년 6월 세워졌다. 선교사 세 명 중 하나가 1885년 부산에 첫발을 디딘 아펜젤러이다. 부산에 내디딘 아펜젤러의 첫발의 행보는 아펜젤러 2세로까지 이어졌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나라 유사 이래 가장 값지고 필요한 대규모 구호 활동을 펼친 외원 단체가 미국의 기독교세계봉사회였다. 1951년 1~9월 전쟁 이재민 22만 5,000명에게 긴급 물자를 공급했다. 이 기독교세계봉사회의 초대 총무가 바로 아펜젤러 2세였다. 아펜젤러 2세는 1951년 2월 내한해 부산으로 와 구호 활동을 감독하였다. 아펜젤러 2세는 3년 동안 노구를 이끌고 동분서주하며 피난민 고아 과부들을 돌보다가 마침내 백혈구 부족으로 병석에 누웠다. 1953년 11월 위독한 상태로 미국에 돌아가 12월 1일 65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아펜젤러 1세와 아펜젤러 2세는 대를 잇는 봉사를 한국 땅에 새겼던 것이다.
[외원 기관, 전문 사회사업 토양 조성하다]
웃기는 농담이 있다. 사회사업가를 케이스워커(caseworker)라고 하는데 초기에 이를 ‘상자[case] 만드는 사람’으로 오해하였다는 것이다. 영국인 다우슨은 1960년 영연방아동구호재단 한국지부장으로 부산에 부임해 15년 이상 근무하면서 부산과 한국의 사회사업을 크게 확장한 사람이다. 다우슨이 처음 한국인 종사자를 케이스워커라고 부르자 사람들은 정확한 뜻도 모르면서 서로 그렇게 불렀다. 하기야 사회사업가 하면 고아원 원장으로만 여기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런데 정말 1960년대 들어서 케이스워커들은 뭔가 다른 ‘상자’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부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세 개의 외원 기관은 영연방아동구호재단, 스웨덴[서전]아동구호연맹, 캐나다아동구호재단이다. 이들 기관은 6·25 전쟁 때인 1952년 부산에 와서 초기에는 아동 구호, 의료 구호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세 외원 기관은 뭔가 달랐다. 첫째 대부분의 외원 기관과는 달리 선교 및 기독교, 즉 종교 색채를 넘어서 있었으며, 둘째 이 점이 아주 중요한데 1960년대 들어 자선 사업이나 박애 사업과는 차별화된 전문적 사회사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활동은 장차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회사업의 방법을 일깨웠고 토양을 조성하였다. 부산을 민간 사회 복지 사업 발달의 요람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초기에 세 기관은 빈민들에게 물자를 나누어 주던 구호 사업을 하였다. 영문 보고서를 본국에 작성해 보내야 하는 번역사 업무가 케이스워커 일보다 더 막중하였다고 하니 이를테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었다. 의료 사업도 초기의 기본적인 사업이었다. 피난민들이 집중하였던 판자촌 지역을 중심으로 서구에 중앙진료소, 동구에 임보관진료소, 사하구에 괴정진료소와 감천진료소를 운영하면서 당시 가장 흔한 질병이던 결핵 퇴치 및 예방에 애썼다. 서전아동구호연맹의 2대 부서 중 하나가 결핵사업부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들 기관이 진료소를 운영하면서 선구적으로 탁아 사업을 펼쳤다는 점이다. 영연방아동구호재단은 감천과 괴정에 100~200명 규모의 탁아소와 유치원을 운영하였다. 극빈층 아동을 위한 무료 시설로 요즘 ‘방과 후 교실’의 전신이었다. 서전아동구호연맹도 괴정과 부산시 사회 복지 회관에 탁아소를 운영하였으며, 매우 진취적으로 탁아 보모 학교도 꾸렸다.
이뿐이 아니다. 직업 보도 사업, 주택 개량 사업, 자활 자금 대여 사업, 나환자촌 정착 원조 및 나환자 자립 지원 사업, 시설 지원 사업, 야간 학교 운영, 빈곤 가정 성인 입원비 지원, 연 120회 보건 위생 계몽 등 사회 복지 영역에서 구호를 넘어서 별의별 사업을 다 벌였다.
새마을 운동보다 앞서서 낙후 농촌을 돕는 온갖 지역 개발 사업도 활발하게 벌였다. 경상남도 각 군의 낙후 농촌을 지원하였던 송아지 대여 사업은 가장 성공적인 사례였다. 1970년 당시 경상남도 양산군 물금면 어곡리 우씨 집에서는 송아지 한 마리를 대부 받아 8년간 키우면서 3년 뒤 송아지 한 마리를 상환하고 일곱 마리를 증식시켜 학비에 충당하였는데 처음에 중학 진학도 생각을 못하던 장남 태길이 교육 대학을 졸업한 뒤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는 보고 사례도 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가정 복지 사업은 대표적인 사업의 하나였다. 아동과 외국의 보조자를 연결시키는 광범위한 결연 사업이었다. 다음은 1976년 12월 초등학교 6학년 결연 아동이 보조자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보조자님이 잊지 않고 보내 주신 보조금 9,940원과 크리스마스 선물금 1만 2,125원, 그리고 크리스마스카드는 잘 받았습니다. 이 돈을 저는 중학교 입학금에 보태어 쓸 예정입니다.” 아동들은 연 2~4회 감사 편지를 썼다. 그런 시절이었다.
외원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시설 지원 사업 때 외원 지원을 받는 시설에 대한 감사가 심하였고 아니꼬운 경우가 있었다.
“돈을 주면서도 고자세로 사진을 찍어라, 원장이 떼먹지 않느냐는 둥 트집을 잡고 [중략] 어떤 시설에서는 외원에서 감사를 하는데 아이들을 저울로 달아 본다고 하였다. [중략] 애들이 얼마나 착하고 건강하게 잘 자랐나, 발육 상태와 건강한 얼굴을 보면 알 것을 돼지처럼 얼마나 살이 쪘나 저울로 달아 본다니 말이 될 법한 소리인가.”[모 시설 원장의 회고록에서]
그럼에도 이들 외원 기관은 응급 구호, 사회 구호에서 시작해 그것을 넘어선 전문적 사회사업의 씨를 뿌렸다. 서전아동구호재단은 한국을 떠나면서 재산과 조직을 그대로 넘겨 1971년 한국아동복지회[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의 설립에 결정적인 지원을 하였다.
[한국 의료 보험 제도 씨앗 뿌린 청십자와 장기려]
부산은 민간 의료 보험 조합이 가장 먼저 탄생한 땅이다. 그것은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의료 보험 제도의 선구이다. 부산에서 민간 의료 보험 조합이 탄생한 것은 절묘하였다. 피난의 땅으로 그만큼 불우한 고난의 땅이 의료 보험 탄생의 토양으로 작용한 것은 역설 중의 역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장기려(張起呂)[1911~1995]가 있었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가끔 성인(聖人)의 삶과 동시대를 누리는 경우가 있다. 장기려가 그런 인물은 아니었을까. 2013년 4월 문을 연 현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산복 도로 아래쪽[영초윗길 48]의 ‘더 나눔’ 센터. 여기에 장기려 기념관이 있다. “내가 이남에서 남을 도우면 이북에서도 다른 사람이 내 가족을 돌볼 것이다.” “사람에게 신세 진 일이 있거든 갚으려고 하지 마라. 네 평생 동안 그것을 지고 가라. 그게 옳은 길이요, 참으로 갚는 길이다.” 장기려의 삶은 감동적이다.
김일성대학을 대표하는 의대 교수였던 장기려가 부산으로 남하한 것은 6·25 전쟁 때문이었다. 수많은 피난민들도 질병과 극빈을 안고 부산으로 몰려왔다. 장기려는 1951년 현 부산광역시 영도구 영선동에 복음병원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무료 천막병원을 세워 아픈 자들을 치료하였다. 장기려는 늘 생각하였다. 밀려드는 이 가난한 환자들을 도울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뭘까. 1956년 송도로 복음병원을 지어 옮겼을 때는 무료 병원을 계속할 수 있는 형편도 못되었다.
그리하여 1968년 5월 만든 것이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었다. 초량 텍사스 거리 입구에 있던 고신복음병원 초량분원에서였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이가 사회운동가 채규철이다. 채규철은 장기려의 집에 모여 성경 공부를 하던 ‘부산모임’에서 덴마크 유학 기간 중 경험한 사회 보장 제도를 소개하였고 청십자의 실무적인 준비를 하였다. 희한한 운명의 소유자가 채규철이었다. 그해 10월 교통사고 폭발 사고로 팔다리를 다 잘라 내야 할 정도로 전신에 큰 화상을 입어 한쪽 눈과 용모를 잃었으나 장기려의 도움으로 27번의 수술을 받고 가까스로 소생하였다. 이후 굴하지 않고 의료 복지 운동과 각종 사회 운동을 이어갔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초기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조합원 700여 명으로만 출발하였던 터였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 벌어졌다. 마침 독자적으로 의료 보험 조합을 추진 중이던 스웨덴아동구호연맹이 원조를 받던 2,700여 세대 1만 2,000여 명을 청십자 조합원으로 전원 가입시켜, 부산이 실험한 민간 의료 보험 조합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1975년 조합원의 치료를 전담할 청십자의원을 개원하였고, 1981년 7월 손익 분기 시점을 보는 조합원 3만 명을 달성하였으며, 1983년 9월 조합원 10만 명에 이르렀다. 1988년에는 청십자소비조합을 열었다. 1989년 전 국민 의료 보험이 실시되면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이상이 실현되자 발전적으로 해체하였다. 당시 조합원 24만 명에 연 15억 이상의 흑자를 냈고, 지정 의료 기관이 무려 480여 곳에 달하였다.
6·25 전쟁에 깊은 뿌리를 두고, 성인의 면모를 풍기는 장기려라는 걸출한 의사, 그리고 숱한 조력자와 우여곡절이 등장하는 청십자의 역사는 장엄한 서사시 같다. 그것은 피난의 땅 부산이 찬란하게 세운 금자탑이었다.
[사회 복지의 토착화, 그리고 부산 복지의 과제]
사회사업가를 뜻하는 케이스워크라는 용어가 1960년 국내 처음으로 사용된 곳이 부산이라고 하였다. 부산사회복지사협회는 1965년 7월 부산에서 케이스워크협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였다. 한국사회사업가협회보다 2년 앞서 창립되었다. 그만큼 부산은 사회 복지에서 선구적이었다. 6·25 전쟁 이후 부산에 사회 복지 기관이 집중해 있었고, 외원의 한국 지부가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케이스워커로서의 자각은 고아원에서 전문 사회사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맹아(萌芽)였다. 자선 사업, 박애 사업, 구호 사업, 시설 사업은 한국 사회에서 지배적인 사회사업 개념이었다. 이를 ‘통속적 사회사업’이라고 하는데 그럴 때 요구되는 것은 희생 정신과 봉사 정신 같은 덕목일 뿐, 특수한 전문 지식이나 기술은 아니다. 부산과 한국의 사회 복지는 1960년대까지 케이스워커들이 외원 사회사업 전문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전문 지식과 기술을 이전 받았고, 1970년대부터 국내에서 사회사업 교육을 받은 사회사업가들이 배출되고 또 대학 교수들과 협력하면서 사회사업 실천 분야가 다양해지는 경로를 밟아왔다. 이 과정이 사회 복지의 토착화 과정이다.
부산사회사업가협회의 ‘제6회 1969년 사회사업 하계 강좌’ 사진과 ‘제8회 1971년 사회사업가 강습회’ 사진은 사회 복지 토착화 과정을 나름대로 보여 주고 있다. 1969년의 하계 강좌 사진에는 외국인 세 명이 맨 앞줄에 앉아 있는데 당시 강좌 교육을 이들이 주도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외원 활동가의 영향력을 아직 느낄 수 있는 사진이다. 그러나 1971년 사진에 와서는 강습회 참여자 전원이 한국인 사회사업가로 채워져 토착화가 진행된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한국의 사회 복지는 거듭 진화해 왔다. 해방부터 1960년까지 15년간 긴급 구호의 시대였다. 1961년부터 1987년까지 28년간은 선별적 복지의 시대였는데 특히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 시절에 복지 예산이 대폭 확대되었고 민심 수습용의 복지 정책이 구사되었다. 1988년부터 1997년까지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 10년간은 복지 제도 확대기였다. 이후는 복지 국가 준비 및 진입기로 분류하고 있다.
부산의 사회 복지는 그 과정 속에서 많은 것을 실험하였다. 1968~1975년 시내 중심가인 동구 수정동 고지대와 철도변, 범일동 조방 부지의 철거민들이 집단적으로 정책 이주한 해운대구 반송동의 지역 복지 토착화 사례는 공동체 모두의 복지를 위한 것으로 향후 한국 복지가 지향해야 할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21세기 부산의 복지는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사회 복지 예산이 계속 증가하고 있지만 복지 기반 시설 부족, 노인 복지 및 기초 생활 보장 수요의 증가, 삶의 질적 수준 저하 및 생활 위기의 심화, 지역 복지 체계의 불안정 등의 과제를 안고 있다. 지역 중심의 복지 체계 혁신이 시급하다. 부산발전연구원 선임 연구 위원인 임호의 지적이다. “현재 부산의 사회 복지는 지역 사회 복지 역량 강화, 민관 협력에 기반한 복지 거버넌스 구축, 복지 사업 주체의 다양화와 효율성 제고, 부산형 지역 복지 브랜드 창출과 관련 정책이 필요하다.” 한국사의 고난을 떠안으면서 출발해 험난한 ‘오디세이의 여정’을 수행한 부산의 사회 복지는 부산의 고유한 복지 모델을 개발하면서 능히 그 혁신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