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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침략과 전통 공간의 해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001
한자 日帝-侵掠-傳統空間-解體
영어의미역 Invasion of Japan and the Disintegration of Traditional Spac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성현

[동래, 부산과 분리되다]

전통 공간으로서의 동래는 근대 이전부터 전통적인 지방 행정 구역인 동래부에 속하였으며, 읍성을 중심으로 하는 읍내면이 군 관아를 통한 지방 행정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 시대에도 존재하였던 대일 관계의 특수한 공간인 왜관도 지방 행정관인 동래 부사가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행정적·공간적으로 통합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개항 이전 동래 지역에는 각종 군사 기구들이 있었고, 대외 관계에 대한 보고 체계도 일차적으로는 부산진 첨사와 더불어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방 행정 구역으로서의 관할권은 동래 부사에 일원적으로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간적 구조에 큰 변화를 준 것이 개항이라고 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개항과 더불어 동래부는 「조일 수호 조규 부록(朝日修好條規附錄)」과 「조일 무역 장정 규칙(朝日貿易章程規則)」에 의하여, 1877년 일본 정부와 「부산구 조계 조약(釜山口租界條約)」을 맺고 옛 초량 왜관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일본 전관 거류지를 설정하였다. 「조일 수호 조규」의 불평등성으로 말미암아 「부산구 조계」는 치외 법권 영역으로서 일본 전관 거류지가 규정되면서 동래부의 공간도 분할되었다. 특히 ‘조계(租界)’의 설치는 행정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 거주에서도 분할되었다.

이전까지 동래부에 속해 있던 옛 초량 왜관과 그 인근 지역이 ‘조계’로서 일본 전관 거류지가 되면서, 동래부의 관할 아래 있었으나 실제적으로는 독립 행정 구역으로 설정되어 일본 본국의 통치를 받았다. 개항 초기 일제는 조계 지역의 정비와 일본인 거류민의 확대에 주력하면서 외교 통상 업무 등 대외 관계를 위한 행정 관청을 바로 설치하지 않았다. 개항을 전후하여 일제는 주로 외교 통상 업무는 한성에 주재하던 일본 공사를 통하여 진행하는 한편, 개항장(開港場)은 조선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의 이주만이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 전관 거류지의 행정 업무는 일차적으로 조선으로 진출하는 자국 거류민의 보호를 위한 관리 관청과 관리관의 임명에 그쳤다. 그리고 1880년 2월에야 비로서 관리 관청이 ‘대일본제국 일본영사관’으로 개칭되면서 조계에 영사를 주재시켜 일본 전관 거류지의 일본인 관리 보호는 물론, 조선 정부와의 영사 및 외교 통상 업무를 본격화하였다. 더불어 조계 밖으로의 진출이 보다 본격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지방 행정관인 동래 부사가 겸임하던 대외 업무를 독자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생겼다. 일본 영사와 같이 대외 업무를 분장할 행정 체계가 필요하다고 인식한 조선 정부는 1883년 우선 외교 통상 업무를 전담할 감리를 개항장에 설치하고 동래부의 경우 부사가 그 업무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대외 업무가 점차 늘어나고 관리들이 증원되면서 이를 담당할 독립 관청이 필요하게 되었다. 조선 정부는 일본 전관 거류지의 인근인 초량에 별도로 동래감리서(東萊監理署)를 설치하고, 외부 직속의 관리를 직접 파견하는 형태로 일본 영사와의 외교 통상 업무는 물론 일본 전관 거류지와 그 인근 부산항의 전반적인 행정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동래부의 공간은 지방 행정 중심지인 읍내면을 비롯하여 옛 초량 왜관과 그 인근 지역으로 다원화되었다. 또한 일본 전관 거류지를 포함하는 부산항은 일본인과 조선인 각각의 민족별 관리 아래 일본인과 조선인의 중심 거주지로 나뉘었다. 결국 개항과 더불어 전통적 공간인 동래 지역은 지방 행정 중심지로서의 읍내면을 비롯하여 새롭게 탄생한 일본 전관 거류지, 그리고 개항과 더불어 일본인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재편된 초량 지역이라는 세 공간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주요 공간은 각각 근대적 공간으로 전환할 인적·물적 자원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일본인 중심의 전관 거류지에는 조선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하여 강고한 공간 지배를 추구하던 일제와 일본인 자치 기구인 거류민단에 의하여 각종 관청·은행·회사·병원·학교 등 근대적 시설물들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인근 조선인 마을이라고 할 수 있는 초량 지역 또한 각지에서 몰려든 조선인들과 그 속에서 성장한 객주를 비롯한 유력자들에 의하여 학교 등 근대적 시설들이 들어서면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전통적인 행정 중심지였던 읍내면도 읍치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며 개화한 유지들에 의하여 근대적 학교가 설립되는 등 공간이 근대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동래 지역의 이러한 변화의 분위기는 일제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고 조선에서 힘이 강해지자 어긋나기 시작하였다. 알다시피 청일 전쟁 이후 조선 진출의 선편(先便)을 잡은 일제는 잠시 삼국 간섭 등 러시아의 진출로 주춤하였지만, 개항장과 개시장에 진출한 일본인들의 적극적 협력과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통한 러일 전쟁의 승리로 조선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조선은 이 과정에서 체결된 이른바 ‘을사조약(乙巳條約)’에 따라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면서 반(半) 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보다 체계적이고 완전한 식민 통치를 전개하기 위한 지방 제도의 개편이 추진되었다.

일제는 을사조약을 통하여 외교권을 장악한 이후 조선을 완전히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하고 지방 제도 개편에 착수하였다. 통감부는 먼저 지방제도조사소(地方制度調査所)를 설치하고 지방 제도 개편에 필요한 조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당시 통감부가 추진한 지방 제도 개편의 핵심은 군폐합안(郡廢合案)이었다. 하지만 군폐합안이 추진될 경우 일어날 조선인 관료들의 반발과 의병 투쟁의 확대를 두려워한 통감부는 개항장 업무와 관련된 일부 부군(府郡)의 명칭 개편과 이사청(理事廳)[일제가 각 지방에 설치한 통감부의 지방 기관] 설치에 머물고 말았다.

이와 같은 부분적 지방 행정 구역의 개편에 따라 일본 전관 거류지와 그 인근 지역을 민족별로 관리하던 일본영사관과 동래감리서의 분리된 관리 체제는 사라지고 부산이사청으로 일원화되었다. 나아가 지방 행정의 권한을 도 관찰사에 집중함으로써 부윤과 군수는 단순한 행정관에 그치게 되었다. 이로써 도 관찰사-부윤·군수로 이어지는 외관상 일원적 지방 행정 구조가 존재하는 한편, 이와 별개로 개항장에 부가 다시 설치되면서 동래부의 경우 부윤은 도는 물론 부산이사청의 지휘까지 받게 됨으로써 민족별 행정 구역의 분리는 ‘중심과 주변’이라는 단일 공간의 위계 구조로 전락하였다.

이때부터 부산이사청부산거류민단이 중심이 되어 일본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하는 도시화와 조선 및 대륙 침략의 교두보 확보를 위한 공간 확장을 계획하고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1906년부터 본격화된 부산해관[지금의 부산본부세관] 공사와 제1기 부산 축항 공사를 비롯하여 1907년부터 시작된 일본 전관 거류지 내 시가지 계획, 그리고 1910년을 전후하여 전개된 제2기 부산 축항 공사와 영선산 착평 공사 등 공간의 정비와 확장은 모두 이 시기에 계획되어 진행되었다. 이와 같이 지방 행정 체제의 위계화와 더불어 동래부도 식민지의 위계적 공간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1910년 한일 병합은 동래부의 이러한 공간 구조를 더욱 심화시키는 한편, 또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가 된 조선에는 외국 영토에 설치하던 일본 거류지와 거류지 자치 단체인 거류민단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하지만 조선에 건너와 자신들의 공간을 확보하고 확장하며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에 기여한 일본인들은 여전히 그들만의 공간을 토대로 자치제를 유지하며 조선인들과 구별된 채 조선 내에 거주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1910년 한일 병합은 형식적으로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통합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지방 행정 구역이 개편되어야 하였지만, 조선 거주 일본인들의 반발을 무시할 수 없어 곧바로 지방 행정 구역의 개편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다만 1910년 9월 30일자로 공포된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朝鮮總督府地方官官制)」와 다음 날 공포된 일련의 지방 행정 기구에 관한 법령[조선총독부령 제6·7·8호]에 의하여 1906년 개편 때와 마찬가지로 도·부·군(道·府·郡) 체제를 유지하는 한편, 경성부를 보통의 부로 내리고 그간의 개항장 또는 개시장에 설치되었던 부를 모두 이사청과 거류민단이 있었던 곳으로 제한하였다.

그 결과 표면적으로는 일원적인 지방 행정 체제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부와 군의 민족적 구분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부 설치 지역의 공간적 위계화는 더욱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래부의 경우 단순히 명칭이 부산부로 바뀐 것만은 아니었다. 행정 관청 소재지도 이전의 읍내면에서 옛 일본 거류지로 옮겨졌다. 더불어 일본인의 거류민단이 그대로 유지됨으로써 중심이 자연스럽게 일본인과 일본인 시가로 더욱 쏠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초량 지역은 자연히 일본인 시가의 확장에 의하여 병합되어 갔으며 전통적 행정 중심지였던 읍내면은 행정 중심지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쇠락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한편,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이상 일본인과 조선인을 계속 구분하여 통치할 수는 없었다. 조선 거주 일본인들이 자치제 유지를 계속 주장하였지만 조선총독부는 1913년 10월 30일자로 「부제(府制)」를 공포하였다. 그리고 1914년 1월 25일자로 「부제 시행 규칙」을 공포함으로써 그간 조선인과 행정적으로 분리하였던 거류민단 및 거류지 제도를 철폐하였다. 조선 거주 일본인들의 반발을 의식해서인지 조선총독부의 부제 공포는 일본인과 일본인 주거 공간의 주도적 운영과 재편에서 크게 두 가지 점이 주목된다.

먼저, 부제는 부의 범위 자체를 도시와 농촌이라는 구분 속에서 공간 분리를 단행하였다. 부 관할 규정에 의하면 부는 기존 시가지와 장래 발전 가능성이 있는 시가지를 포함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그 외 농촌 지역은 군으로 되돌리며 부로부터 제외하였다. 이것은 조선인과 일본인을 농촌과 도시로 분리하는 것이었다. 부산의 경우 동래부 일원을 포괄하던 부산부를 ‘도시’의 부산부와 ‘농촌’의 동래군으로 분리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도시화를 일본인 시가로 집중하고 제한하도록 하였다.

더 나아가 도시화를 이끌 수 있는 인적·물적 토대를 부에 설치 또는 부여하였다. 즉, 도시 기반 시설의 설치와 확장을 가능케 하는 토목과와 이를 자문 심의할 수 있는 부협의회의 설치, 그리고 독자적인 예산을 편성하고 확보할 수 있는 예산 권한까지 부에 부여하였다. 물론 군·면에는 이러한 기능을 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전통 공간인 동래군과 그 중심 면인 동래면은 독자적인 도시화를 일으킬 제도적 토대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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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과 같이 부제 실시에 따른 동래군부산부로의 분리는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관치 행정을 목표로 하였기에 완전한 자치를 주장하는 일본인 사회와 도시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없는 군·면 거주 조선인들 모두의 불만을 야기하였다. 조선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하여 일제는 공공사업 권한을 일부 인정하는 ‘면제’를 1917년 10월 1일부터 실시하였고, 곧이어 일어난 3·1 운동으로 다시 농촌 면에도 제한적 ‘자치’가 가능하도록 면협의회와 도 평의회의 실시를 통하여 불만을 달래고자 하였다.

한편 일본인들은 제한적 자치에 대한 불만으로 완전 자치제의 실시를 요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간 분리가 가져온 공간 축소와 도시 공간의 중요한 요소인 동래 온천송도 해수욕장 등 휴양지와 같은 또 다른 공간의 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불만은 이후 도시화의 심화 확대를 통한 공간 확장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다. 그 가운데서도 일본인 사회의 도시 공간 중 중요한 요소인 동래 온천을 둘러싼 부산부 일본인들의 공간 감각은 행정적으로는 분리되었지만 [심리적으로는] 결코 분리되지 않았다.

특히 자치제가 진행되고 있던 1909년 부산궤도에 의하여 부설되고 1912년 조선와사전기에 의하여 개선된 동래선은 부산과 동래 온천 간의 공간적 분리를 빠른 열차와 몇 개의 정류소를 통하여 공간 분리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 때문에 부산의 일본인에게는 이후에도 동래 온천부산부와 별개의 공간이 아닌 같은 공간으로 인식되며 지속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그 개발에도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다. 더불어 조선와사전기, 남만주철도, 그리고 조선총독부 철도국으로 이어지는 온천 경영을 끊임없이 주장하며 동래 온천에서 영업하던 일본인들과 연합하여 동래의 조선인들이 주장하던 동래면[읍]의 공영화 움직임에 미묘한 갈등을 야기하였다.

[동래, 도시로 전환을 시도하다]

일제의 식민지 경영이 본격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실시된 부제에 의해 부산부와 행정 구역의 분리를 거친 동래군[면]은 근대 도시로의 전환 가능성을 상실당하고 여전히 농촌에 머무를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동래군의 중심 면인 동래면은 전통적인 지방 행정 중심지였고, 개항과 더불어 경제적 기반을 갖춘 ‘도회’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제의 일본인 중심의 식민지 지방 행정 제도에 의하여 제도적 토대는 갖추지 못하였지만, 이른 시기부터 근대 학교의 설립을 통한 인력 배출과 봉래일기계(蓬萊一紀稧)를 기초로 설립된 동래은행 등 자생적 금융 기관도 존재하였다.

또한 전통적인 행정적·경제적 기반을 통하여 결성된 기영회 등 ‘유지’ 집단도 존재하고 있었다. 여기에 1917년 면제가 실시되자 제한적이지만 부분적인 도시 기반 시설의 설비와 경영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개된 전 민족적인 3·1 운동으로 말미암아 일제의 이른바 문화 통치 아래 부제의 개정 등 지방 제도 개정이 이루어져 면협의회와 도 평의회가 실시되었다. 물론 이들 기관은 자문 기관에 그쳤지만 면협의회의 경우 일반면과 지정면의 차이는 분명하였다.

일반면의 경우 군수나 도사(島司)가 면협의회원을 임명한 반면, 지정면의 경우 주민들의 직접 선거를 통하여 선출되었다. 따라서 제한적이지만 ‘민의’에 기반을 둔 자문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23년 경상남도에서 진주면, 진해면, 통영면에 그쳤던 지정면에 밀양면과 함께 동래면이 추가되었다. 이에 따라 동래면은 민의에 기초한 본격적 도시화를 위한 제도적 토대를 부족하나마 갖추게 되었다.

동래면의 1923년 지정면 추가 지정은 겉으로는 일제의 의도와 배치된다. 일제의 지정면 지정의 본래 의도는 부제 실시와 마찬가지로 일본인 중심 거주 지역의 도시화를 위한 ‘자치제’ 추구였다. 따라서 부협의회원과 면협의회원의 다수는 일본인이어야 하였고, 이를 위하여 지정면[면 부과금 1호 평균 7원 이상]과 유권자의 자격[면 부과금 연액 5원 이상]을 제한하였다. 하지만 동래면은 전통적인 기반을 토대로 일제의 까다로운 요구 조건을 충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가 의도한 일본인 중심의 면 경영이 아니라 조선인 중심의 면 경영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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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는 시기적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동래면의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이를 더 강화한 것이 1931년의 읍제였다. 읍제는 자문 기관에 그친 면협의회를 제한적이지만 의결 기구로 만듦으로써 읍 경영에 지역민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장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문에 동래면의 지정면 지정과 읍제의 실시는 이후 ‘민의’에 기초한 도시화의 길을 열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부산부로 도시 공간이 축소된 일본인들은 특별 시구제(市區制)의 요구와 함께 30만 명의 도시 건설과 경영을 위한 주장을 곧바로 제기하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주장은 지속적으로 일본인 사회에서 흘러나왔다. 그 중요한 근거가 되는 공간이 일본인들의 별장과 휴양지로서의 동래 온천해운대 온천, 그리고 송도 해수욕장이었다. 따라서 장래 확대될 도시 공간의 합병을 위해서라도 부분적인 도시화가 진행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동래면의 지정면 지정과 읍제의 실시는 일본인 다수의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지만 장래의 부산부 확대를 위한 토대 마련을 위해서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애초부터 동래 온천의 경영은 일본인으로부터 시작되어 식민회사들을 거쳐 남만주철도, 그리고 다시 조선총독부 철도국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조선인의 동래면[읍]과 별개로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동래면[읍]은 전통적 기반과 제한적인 ‘자치’의 제도적 토대와 결합하여 각종 도시화 사업을 진행하게 되었고, 이를 통하여 근대 도시로 전환할 수 있었다. 전통 공간 동래의 도시화 과정을 시구(市區) 개정 사업과 도시 기반 시설의 확충 및 교통 시설의 유치를 통하여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시구 개정 사업과 도시 기반 시설의 정비

동래면은 읍성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공간이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공간 구획인 관청을 기점으로 십자 형태의 도로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근대 도시는 사통팔달의 격자형 도로를 추구하였기 때문에 조선 후기부터 부분적으로 허물어지고 있었던 성벽을 완전히 허물고 격자형의 도로 개설을 목표로 하는 시구 개정을 전개하였다. 물론 시구 개정을 추진하는 면[읍]사무소와 군청 등의 관청은 이때도 중심 공간을 점유한 상태로 도로의 개설과 공간의 구획과 분할이 이루어졌다.

지정면으로 설정된 1923년 동래면은 곧바로 시구 개정에 착수하여 이후 줄곧 시구 개정을 통한 도로 정비에 들어갔다. 1925년 예정선이 결정되었고 1926년 예산 관계상 서문에서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이르는 간선에 대한 공사에 들어갔다. 예정 노선은 ①과 같이 행정 관청을 가로지는 동서 노선의 중심 노선이었다. 다시 1929년에는 세 예정 노선에 대한 선로 변경으로 지역 사회에 파란을 야기하였다. 이 세 노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지만, 광복 직후의 도로 노선과 비교하여 예상되는 노선이 ②~④의 노선이다. 이어서 1938년에는 남문통 회춘당(回春堂)에서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이르는 노선에 대한 시구 개정 공사가 읍 회의 의결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이후의 시구 개정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대체적으로 앞의 노선에 대한 시구 개정에 의해 일제 강점기 동래의 도로망이 격자형의 직선 가로망으로 갖춰졌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시구 개정 사업과 더불어 불거진 문제는 위생적 도시 기반 시설의 정비였다. 먼저 시구 개정에 의한 도로 정비에 바로 연결되는 문제가 장시(場市) 이전 문제였다. 또한 당시의 시장은 전통적인 장시로서 그림 속 A처럼 “제1공보 앞의 사거리 광장[四辻廣場]을 중심으로 군청 앞 도로와 구 도로까지, 북쪽은 읍사무소 앞, 남쪽은 야마다[山田] 의원 앞까지 도로”에서 열렸다. 장날이 되면 수백의 노점 상인이 도로 양옆에 늘어서 이 일대 도로 교통은 더욱 혼잡하여 차마(車馬)가 다니지 못할 정도였다.

여기에 더하여 장날이 되면 주로 좌판에 식료품을 진열하여 여름철에는 냄새로, 먼지가 날리는 날에는 위생상 큰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위생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시장 이전의 여론이 비등하였다. 따라서 시구 개정 사업을 위하여 시장 이전은 당연하였으나, 예산 문제 등으로 시장 이전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교통과 위생 문제로 여론이 비등하였지만 수천의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도로 변에 있는 상점 때문이 아니라 노점 때문이었다.

이 노점 때문에 상점 또한 번성하였기에 동래읍의 경제를 위해서는 단순히 노점만의 이전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따라서 시장 이전은 읍영(邑營) 시장의 설치와 결부되어 동래읍민 다수와 동래상공회의 여론에 의하여 동래고등보통학교 부지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1937년 2월 착공을 시작하여 4개월 만에 준공하여 6월 10일부터 신설 시장으로 개시되었다.

2. 교통 시설의 유치와 정류소 설치

동래면민은 1910년 일본인들에 의하여 추진된 동래선 경편 철도 부설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래 읍내를 지나가지 않았다. 곧이어 동래선이 개선되려고 하자 적극적으로 동래선 노선의 읍내 접근을 수용하며, 정차장이 남문과 서문 근처에 설치되도록 교섭하는 등 교통 시설 유치에 적극 나섰다. 물론 이 때문에 남문의 철거와 성벽의 해체 등 전통 공간이 훼손되기도 하였지만, 경편 철도는 남문·서문 근처로 우회하면서 정차장 역시 남문 앞에 설치되었다.

이후 부산부동래군이 분리되고 경편 철도는 전철로 바뀌었다. 그런데 행정 구역의 분리로 시내선과 시외선으로 구분된 전철은 4구간의 구간 구분과 요금이 거리에 비하여 시내선보다 높았을 뿐만 아니라, 요금 할인 규정도 없었기 때문에 동래면민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따라서 동래면민들은 ‘부산동래간 전차개선기성동맹회’를 조직하고 관련 문제에 대한 개정 요구와 함께 동래선을 온천장 안까지 연장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1926년경에는 부산부의 전기 부영화 운동(電氣府營化運動)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 결과 1927년 10월 호안 매축, 교량, 선로, 건물의 설치를 토대로 전철 동래선이 동래 온천장 안까지 연장 건설되었다. 이후 조선와전은 남선전기에 합병되었고, 전철 사업을 물려받은 남선전기에 의하여 동래읍에도 새로운 정류소가 서문 근처에 생기게 되어 1940년 당시 동래읍에는 거제리, 남문, 서문의 세 정류소가 설치되었다.

한편, 읍내면을 중심으로 하는 동래의 조선인들은 동래선의 연장인 동해 남부선 건설이 경남 동부 연선의 풍부한 물산을 동래에 집산하여 유통할 수 있는 지역의 발전과 공간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판단하고, 초기부터 철도 건설에 적극적이었다. 더군다나 동래읍을 경유할 동해 남부선이 건설될 경우 ‘남조선의 신흥 도회지’로 부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철에 의하여 읍내와 동래 온천장으로 이원화된 동래면의 공간 배치가 다시 읍내 중심의 구심력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동래면의 조선인들은 동해 남부선의 건설과 동래 경유를 극렬 열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해 남부선동래읍 경유[그림 ⓐ노선]가 아닌 남면 경유[ⓑ노선]로 변경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동래면민 유지들은 즉시 ‘2만 동래면민의 사활 문제’라며 인구, 산업, 교통, 관청 및 각종 시설의 비교를 통하여 동래읍 경유의 유리한 점과 필요성을 강력히 관계 당국에 진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동래면민 유지들은 지속적인 청원과 운동을 위하여 ‘동해안선로동래통과기성회’를 조직하고 연일 면민 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면민들을 대표하여 관계 당국에 진정한 결과 1927년 12월 동해 남부선은 동래에서 해운대를 거치기로 결정되었다.

이후 동래면민들의 운동은 결정된 노선의 빠른 건설을 주장하며 1932년 동래를 방문한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총독에게까지 요청하는 활동을 전개하여 결국 1934년 동래 경유의 동해 남부선을 완성하기에 이르렀고 동래역을 동래읍에 설치하게 되었다.

[동래, 부산에 포함되다]

1914년 부제의 실시에 따른 행정 구역의 개편으로 분리된 동래군의 중심인 동래읍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면제와 읍제의 실시에 따른 제한이 있기는 했지만, ‘근대적’ 도시로 전환할 수 있는 시구 개정, 교통 시설의 확충 등을 진행하며 도시로 전환할 수 있는 요건들을 갖추어 갔다. 이에 반하여 부산부는 도시를 부분적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부제라는 임시방편의 분리 행정 체제가 갖춰졌다. 부산부는 기존의 일본인 거류지인 옛 시가를 중심으로 1914년 부제 실시와 함께 편입된 초량동, 영주동, 영선동, 청학동, 동삼동, 범일동, 좌천동, 수정동, 부민동, 부평동, 대신동 등을 기초로 도시화의 기반을 다져 갔다.

부제 실시 당시부터 자치제에 기반을 둔 30만 대도시를 주장하던 부산부의 일본인 사회는 동래, 해운대, 송도를 포함하는 광역 도시화를 예견하고 있었다. 따라서 부제 실시 당시 5만 정도였던 인구가 불과 5~6년 사이에 10만에 육박하면서 본격적인 도시 계획과 대도시 건설의 논의가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1919년 일본에서 시작된 도시 계획에 따른 6대 도시 정비 사업의 영향을 받아 1921년 부산에서는 대신정을 시작으로 8년간 ‘시구 개정 사업’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또 3·1 운동의 영향으로 인하여, 1921년에 부산부의 행정 영역이 본격적으로 확장되려고 하는 전조가 경찰서 관할 구역 개편에서 드러났다. 이미 부산경찰서의 관할 구역은 기존의 부 영역을 초과하는 동래군 서면용당리·감만리·우암리, 그리고 사하면암남리까지 확대되어 있었다. 그런데 다시 동래군 서면 전체, 구포면·사상면·사하면으로 더욱 확장되었다.

경찰서 관할 구역이 행정 구역의 경계 지역까지 확대되는 것은 일본인들의 치안을 위하여 당연한 것이라면, 1921년의 관할 구역 확대는 이미 그 범위를 초월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일본인 사회는 더욱더 공간을 확장을 주장하여 공업 지대로서 영도, 부산진, 우암동 방면을 제시하고 그 인근의 주택 지구까지 언급하였다. 그러자 1926년 동래 군수는 “부산부의 행정 구역 확장은 필연적인 것으로 오직 시간의 문제”라고 하면서 송도와 서면 방면의 편입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뒤이어 조선총독부는 1929년부터 도시 계획령 수립을 위한 조치에 들어갔다. 부산부도 곧바로 도시 계획 자료 수립 등 행정 구역 확장을 위한 조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그리고 1932년 부산부 행정 구역 확장에 대한 2안을 수립하였다. 2안 모두 기본적으로 서면과 송도의 편입을 확정하였다. 나아가 1933년 행정 구역 확장과 관련된, 부산에서 서면을 거쳐 해운대에 이르는 8간도로, 부산에서 사하면을 거쳐 낙동강 호안을 따라 구포로 나오는 8간도로, 그리고 서면에서 사상을 거쳐 구포에 이르는 8간도로의 세 노선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를 통하여 부산부는 1933년 단계에서, 이미 공식화되고 있던 서면과 송도만이 아니라 동래군 남면[해운대], 동래읍[동래 온천], 사하면, 사상면, 구포면까지 행정 구역을 확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934년 조선총독부의 「조선 시가지 계획령」이 제정되고, 1차적으로 서면사하면 암남리[송도]의 행정 구역 확장이 1936년 4월 1일 실시되었다. 그리고 1차 행정 구역 확장에 따라 부산부의 인구는 20만 명을 넘어서 평양을 제치고 명실상부한 ‘조선 제2의 도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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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구역 확장 이후 곧바로 서면 방면에 약 3.306㎢[100만 평]에 이르는 대대적인 시구 개정 사업이 1차로 진행되면서 부산항을 중심으로 하는 서부·북부 시가지는 회사·상점 등이 즐비한 상업 주택 지구로, 영도서면 지역은 대단위 공업 지대와 그 배후의 노동자 주택지로, 송도는 부 내의 전원 휴양지로는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이전부터 공장 지대로 예정되어 있던 서면은 1935년을 전후하여 5개 리에 14개 공장이 이미 들어섰다. 그리고 서면 전 지역에 노동자들이 분포하면서 서면동래읍 방면은 서면 공업 지대의 노동자 주택지로 본격적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1939년에는 동래읍 거제리에 대단위의 주택 지구가 들어서 이를 뒷받침하였다. 그리고 서면 방면의 제1차 시구 개정 사업이 완료된 1942년에는 제2차 시구 개정 사업의 시작과 함께 2차 행정 구역 확장이 이루어졌다. 2차 행정 구역 확장은 부산부동래군으로 나눠질 때부터 부산의 영역으로 제기되던 동래 온천해운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942년 10월 1일부로 동래군 동래읍, 남면[해운대], 사하면, 그리고 북면 일부에 대한 2차 행정 구역 확장이 완료되었다.

결국 두 차례의 행정 구역 확장은 부산부를 광역화하면서 부산항을 중심으로 하는 서부와 북부 시가지를 상업 지구로 하는 ‘도심’, 매축과 함께 행정 구역 확장으로 이미 많은 일본인들의 진출이 이루어지고 있는 부산진서면의 공업 지구를 ‘부도심’, 그리고 바다와 온천이라는 자연적 휴양지이자 자본가와 관리들의 별장과 문화 주택이 들어서고 있는 동래 온천장, 해운대, 송도 해수욕장을 ‘교외’로 하는 수평적 공간 분할을 통하여 근대 도시를 형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전통 공간 동래는 부산에 포함되었지만 주변화되었고, ‘동래’라는 이름만 간직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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