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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4533
한자 開港場
영어의미역 Open Port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희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07년연표보기 - 부산포, 제포 왜관 설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76년 2월연표보기 - 조일 수교 조약, 한국 최초의 개항장

[정의]

부산 지역에 외국인의 내왕과 무역을 위해 개방한 항구 주변의 제한 지역.

[개설]

개항장은 통상 1876년 개항 이후 개방된 항구 주변의 제한 지역을 가리킨다. 19세기 중엽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통상을 요구하며 침략해 오기 시작한 뒤, 민씨 정권이 1876년 일본의 무력에 굴복하여 강화도 조약을 맺음으로써 부산[1876]을 시작으로 원산[1879], 인천[1880]이 차례로 개항되었다. 이어 미국·영국·독일 등의 서구 열강과 통상 조약을 맺으면서, 조선은 결국 제국주의가 지배하던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강제로 편입되었다. 제국주의 열강과의 통상 중심지였던 개항장은, 이후 조선의 미곡과 금·은 등이 유출되고 대량 생산된 서구의 자본제 상품이 유입되는 곳으로서 외세 침투와 침략의 통로였다

[개항 이전]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부산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일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釜山浦)이다. 항거왜호(恒居倭戶)[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집]가 있는데 북쪽 현에서 거리가 21리다.”라고 하여 산이 가마솥 모양과 같아 부산(釜山)이라고 하였으며, 이후 계속 ‘부산’이라고 하였다.

개항 이전 조선에 일본 상선이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왜관이 설치되었는데, 1407년(태종 7) 처음으로 부산포[현재의 부산진 시장 일대의 자성대 주변]와 제포[경상남도 진해시]에 설치되었다. 왜관은 일본 사절과 상인이 조선에서 외교와 무역 행위를 하던 곳을 일컫는다. 왜관 설치 이후 조선의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고 왜구로 인한 국가 안위의 문제로 인해, 이후 왜관의 설치와 폐쇄가 반복되었다. 1419년(세종 1) 이종무(李從茂)의 대마도 정벌로 부산포 왜관이 1차 폐쇄되었다가 1423년(세종 5) 부산포와 제포에 다시 왜관이 설치되었다. 그 이후 삼포왜란으로 왜관이 2차 폐쇄되고 다시 설치와 폐쇄가 반복되었다.

1426년(세종 8)에는 염포, 부산포, 제포의 삼포에만 일본 상선 출입을 허용하였다. 일본인의 왜관 거주 기간 및 거주 인구가 점차 증가하여 1494년(성종 25) 당시 부산포 왜관 거주 일본인은 127가구 453명 정도였다. 1607년(선조 40)에는 두모포[현재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일대]에 왜관이 설치되고 왜란 이후 국교가 정상화 되어 양국 간 상인의 접촉이 늘었다. 1678년(숙종 4)에는 1607년 이후 동구청 일대에 있던 두모포 왜관을 초량[현재 용두산 공원 일대]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격리시키기 위함이었다. 초량으로 왜관을 이전한 이후, 왜관의 규모가 커지고 면적도 넓어졌으며 일본인들의 범법 행위 역시 심해졌다.

[부산 개항장]

19세기 중반 이후 조선은 거세어지기만 하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함께 대내외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1866년 프랑스 함대의 강화도 침범으로 병인양요가, 1871년 미국 함대의 침략으로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조선 내에서는 척화론이 더욱 득세했고 일본의 교섭 요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은 1875년 부산항에서의 무력시위에 이어 강화도에서 운양호 사건을 도발하였다. 그 결과 1876년 2월 조일 수호 조규에 따라 부산포가 조선 최초의 개항장으로 개방되었다. 개방 이후 일본인과 일본인 자본이 급속도로 유입되면서 부산항이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동래 중심의 발전 구조가 부산 내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편의성을 중심으로 바뀌어갔다.

지리 입지 조건이 좋아 항구로서 적합했고, 왜관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자국인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부산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였다. 부산항은 축항과 항만 시설 정비 덕분에 한국 최대의 항만이자 내·외 무역의 관문이 되었다. 1935년 부산항은 조선 전체 무역액의 3할을 점하는 2억 7000만 원에 달하는 수출입 화물이 드나드는 조선 제1의 무역항이었다. 1935년경 부산항의 항내 면적은 동항 약 8.69㎢[263만 평], 남항 약 1.19㎢[36만 평]으로 선박 수용력이 매우 큰 편이었다. 그리고 무역액은 1884년 부산해관 개청 직후 약 60만 원 정도에서 1919년 1억 5000만 원, 1931년 1억 7000만 원으로 증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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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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