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6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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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萊客舍 |
영어음역 | Dongnae Gaeksa |
영어의미역 | Dongnae Guesthous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시장길 14[복천동 229-28]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정형 |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에 있던 조선 시대 동래부의 출장 관리 숙소.
[개설]
조선 시대 동래 수령[사또]은 임금을 의미하는 ‘전(殿)’ 자와 임금이 사는 궁궐을 의미하는 ‘궐(闕)’ 자를 새긴 나무패를 모셔 두고, 매월 1일과 15일, 임금의 생일날 등 나라의 특별한 날에 휘하의 관리들과 함께 절을 하는 망궐례(望闕禮)를 올렸다. 동래 부사 등이 부임할 때나 고을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에도 객사에 절을 올렸으며, 출장 나온 암행어사 등 관리나 사신들도 이곳 객사에 절을 올렸다. 본래 출장 관리들이 먹고 자게 하던 숙소인 ‘봉래관(蓬萊館)’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공립동래보통학교[현재의 내성초등학교] 등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일제 강점기에 뜯겨졌다.
[위치]
동래 객사(東萊客舍)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229-28번지에 있었다. 동래구 복천동 동래 시장 상가 건물 중 서쪽과 그 남쪽, 북쪽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동래 객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1612년(광해군 4) 동래 부사 성진선(成晉善)에 의해 동상방(東上房)이, 1618년(광해군 10) 동래 부사 윤민일(尹民逸)에 의해 정청(正廳)이, 1629년(인조 7) 동래 부사 유여각(柳汝恪)에 의해 정청의 서헌(西軒)·중문·대문·공수(公須)가 각각 차례로 지어졌다. 이렇게 세워진 객사는 1646년(인조 24) 동래 부사 민응협(閔應協)에 의해 다시 건립된 후, 1703년(숙종 29)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705년(숙종 31)에 다시 지었다.
이후 고종 때 동래 부사 정현덕(鄭顯德)에 의해 크게 고쳐져 조선 시대 말까지 이어졌다.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관립 소학교, 공립동래보통학교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도 공립동래보통학교 음악실 및 실험관 등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30년대 동래 공설 시장을 개설할 때 뜯겨져 현재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형태]
임진왜란 후 다시 지어진 객사는 39칸으로 동쪽은 인빈헌(寅賓軒), 서쪽은 질성헌(秩成軒)이라고 하였다. 이 밖에 대문 3칸, 좌우 협문 각 1칸, 행랑 6칸, 북공수(北公須) 8칸이 더 있었다. 고종 때에는 동래 부사 정현덕이 객사를 52칸으로, 내삼문을 10칸으로 각각 크게 고쳤다. 정확한 형태는 잘 알 수 없으나 옛 사진 자료집에 의하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다른 객사와 같이 3개의 지붕을 가진 3채의 집이었겠지만 1채처럼 보인다.
가운데 지붕은 좌우 지붕보다 1단 높은 솟을지붕으로 되어 있어 멀리서 보면 날개를 퍼덕이는 새처럼 경쾌하기도 하고, 좌우에 이어진 산봉우리를 거느린 큰 산의 주봉(主峰)처럼 장중하기도 하였다. 객사의 바깥 대문이었던 식파루(息波樓)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이었고, 1층 가장자리의 기둥은 돌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었다.
[현황]
현재 동래 객사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다만 1994년 동래구에서 동래 객사의 원위치에 세운 표석이 있어, 원래의 위치를 후손들에게 전해 주고 있으며 교육적 자료로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의의와 평가]
동래 객사는 일제 강점기 중간에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으려는 일본의 계략에 의해, 동래부 동헌(東萊府東軒)과 임진왜란 때 동래 부사로서 동래읍성(東萊邑城) 전투(戰鬪)에서 순절한 송상현(宋象賢)을 모시는 송공단(宋公壇) 사이에 동래 공설 시장을 만든다는 이유로 헐려 지금은 볼 수 없다. 그러나 전해지고 있는 옛 사진 자료를 보면, 동래 객사는 다른 지역의 객사와 마찬가지로 동래부(東萊府)에서 가장 크고 신성한 건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일본과의 외교·국방상 요충지였던 동래부의 객사였기 때문에 부사가 지역 최고의 수령으로 근무하는 다른 지역의 객사보다 훨씬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고 한다. 동래 객사의 실제 크기는 터에 대한 발굴 조사 등을 거쳐 하루 빨리 밝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