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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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萬國-釜山-異國遊覽記 |
영어의미역 | Touring all the Nations by Walking in Busan: Tour of Foreign Countries in Busan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류영진 |
[부산의 일상으로 녹아든 이국의 문화]
부산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얼까? 아마 항구 도시 부산, 야구 도시 부산 이런 것들이 아닐까? 국제도시 부산이라는 단어를 쉽게 떠올리는 사람은 아직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부산의 국제성은 요모조모 들여다보면 상당히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부산은 한반도를 통해 대륙으로 들어가는 첫 대문이자 바다를 통해 세계로 나가는 첫 현관이다. 글로벌 인터체인지 부산이다.
언제나 길목에는 다양한 손님이 붐비기 마련. 1894년 조선을 방문했던 오스트리아인 헤세 바르텍은 『조선 1894년 여름』에서, ‘부산은 이곳 사람들이 낯선 이방인에게도 정직하며, 바다와 강이 선박으로 가득 덮여 있다’고 표현했다. 부산은 이국인들에게 닫혀 있지 않은 도시이며 숨기는 것이 없는 도시였다. 그런 부산에 많은 이국들이 발을 디뎠다. 그 역사는 평화와 갈등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지속되어 왔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부산은 먹고 자고 입는 것에서부터 이국의 모습들이 부산의 그것들과 맞물려 이루어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국이 남기고 간 흔적들과 경험들은 부산이라는 지역 자체에 스며들어 있다. 오래전 이국인들로부터 인정받은 부산의 국제적인 위치는 착평 공사와 매축 공사를 거치며 부산의 지형을 바꾸었다. 그 이후 부산에 지속적으로 유입된 이국의 문화들은 부산의 위상을 바꾸었고, 부산 사람들의 일상을 바뀌어놓았다.
부산의 이색 문화는 전체적으로 무지개 마냥, 절묘한 조화를 이룬 색색의 이미지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특정 국가의 일관된 모습이 아니라 만국기가 펄럭이듯 다양한 국가의 속성이 집약적 공간에 섞이어 특별히 경계 구분이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박물관 속의 박제된 이색 문화가 아닌 삶의 현장과 거리에서 만나는 문화이다. 부산의 이색 문화는 특별한 것이 아닌 일상적인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 중국, 미국, 러시아 등 다양한 국가들이 이색 문화의 근간을 이루며 역사 속에서 순차적으로 부산을 거쳐 가며 발자취를 남겨놓았다.
부산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이국은 일본이다. 전통적으로 한반도는 중국의 영향력이 컸지만 해항 도시였던 부산은 바닷길을 마주하고 있는 일본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으며, 이것은 부산의 이색 문화에 가장 진한 색깔을 남기는 결과가 되었다. 이후 6·25 전쟁 시기에는 미군들의 주둔지, 보급지가 되면서 미군 부대의 문화가 유입되었고, 이어서 경제 발전 시기 러시아 보따리 상인들이 드나들면서 부산에 러시아의 향취가 풍기게 되었다.
부산 속에 남아 있는 이국의 발자취와 문화들을 살펴봄으로써, 진정한 국제도시로서의 부산의 자부심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또한 다양한 문화들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에너지의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산의 다양한 빛깔을 느낄 수 있는 부산 속 세계 풍경을 찬찬히 되돌아보자.
[미묘한 애증의 이국 일본]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하지만 일본이 바로 옆 동네로 불렸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왜관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의 전관 거류지이자 상가 단지인 왜관은 조선 시대 대일 외교의 중심이었다. 차이나타운도 생기기 이전에 ‘재팬 타운’이 생긴 셈이다. 부산진역 2번 출구를 나서면 사람들이 고관 입구라고 부르는 곳으로 들어설 수 있다. 윤흥신공 동상이 있는 자그마한 쌈지 공원 한쪽 일대가 두모포 왜관이었음을 나타내는 표지석이 있다. 1607년(선조 40) 설치되어 72년간 존속한 왜관이었다.
이곳이 고관 또는 구관이라는 불리는 것도 본디 이곳에 있던 왜관이 초량 왜관으로 이전하면서 예전의 왜관이 있었던 곳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용두산 공원 한쪽에도 그 아래로 초량 왜관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표지석이 있다. 초량 왜관은 1678년(숙종 4)에 현 용두산 공원 일대에 신축한 왜관으로, 규모가 36만 3636㎡[11만 평]에 달하는 규모였다고 한다. 부산의 왜관은 1407년(태종 7)에 설치된 부산포 왜관을 처음으로 하여 198년을 존속하였다. 후에 일본은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이곳을 전관 거류지로 전환하였다.
“인천, 경성에는 조악하고 싼 물건이 있지만 파는 곳이 매우 멀다. 부산은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개항장이므로 조악하고 싼 물건을 사기보다는 오히려 견고한 것을 사려고 하는 풍조가 생긴다.”[혼마 큐스케[本間九介]의 『조선 잡기』 중]
왜관이 설치되자 부산은 일본과의 교역을 위한 경제 특구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부산은 지리적으로도 일본과 아주 가까웠다. 부산에서 일본 후쿠오카[福岡]까지의 직선거리는 170㎞, 대마도의 경우는 49.5㎞이다. 부산에서 제주도의 직선거리가 227㎞이니, 일본은 지리적으로 제주도보다도 가까운 곳이다. 덕분에 일본과의 문화 교류는 그 어느 지역보다도 활발하였다. 이는 부산 사람들에게 일본이 그리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역사적 경험으로서 쌓여갔다.
일본이 부산을 조선 침략의 교두보로 삼으면서 일본의 문화는 더욱 부산의 일상 속에 스며들게 되었다. 부산을 통하여 왕래하는 일본인의 숫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1905년 9월 일본의 산요기선주식회사에 의해서, 1,680톤급 이키마루[壹岐丸]를 시작으로 부산-시모노세키 간 정기 연락선인 관부 연락선이 출항하였다. 이후 곤고마루[金剛丸], 고안마루[興安丸], 도쿠주마루[德壽丸] 등이 취항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운항하였다. 이것이 현재 중앙동 국제 여객항에서 출항하는 부관 페리의 전신이다.
“비좁은 장소에 앞을 다투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수백 명씩 들이닥친다. 몇 개 안되는 창구에다 고함고함 도항증을 들이밀고 검인과 더불어 승선권을 받아야 한다. 간혹 위조 서류를 디밀었다가 발각이 나서 묶여 들어가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내선일체가 통하지 않는 데가 이곳이다.”[이병주의「관부 연락선」 중]
부산항은 관부 연락선으로 인하여 늘 붐비었다. 조선인과 일본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미국인도 연락선을 통하여 부산과 일본을 드나들었다. 1920년대 당시 신문을 보면 늘 연말이 되면 승선자들이 엄청나서 증선한다는 기사들이 꼭 등장한다. 1922년 4월에는 박람회 일정에 맞춰 증선을 하는 등 일본으로 이동하는 가장 큰 창구이자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또한 관부 연락선은 한국과 일본 간 물류와 여객을 수송하고 부산은 그것을 다시 전국으로 실어 나르는 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러일 전쟁과 함께 시작된 관부 연락선은 제2차 세계 대전 패망과 함께 마지막 배가 일본으로 떠난 이후 부산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1968년부터 시모노세키와 부산은 다시 이 항로의 개설을 공동으로 논의하기 시작했고, 1970년 6월 19일 재일 교포 정건영이 출자한 부관훼리주식회사에 의하여 3,600톤급 여객선 2척이 다시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기 시작했다. 현해탄을 가로지르는 국제적인 뱃길은 아시아에서는 부산과 일본이 최초였다. 당시에는 이례적이고 동시에 이색적인 것이었다. 당시에 신문에서는 서울에서 자동차로 도쿄까지 내달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며, 현해탄 하이웨이 ‘부관교’라고 불렀다. 지금도 부관 페리는 늘 같은 자리에서 출발하며 부산과 일본을 잇고 있다.
부산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본격화됨에 따라 일본의 손에 의한 급격한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몇 차례의 매축과 착평으로 지형을 바꾸고 여러 근대 시설들을 짓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인들이 지은 건물과 위락 시설, 산업 시설의 흔적이 아직도 많은 곳에 남아 있다. 부산에 남아 있는 근대 문화유산 200여 건 중 61건이 일제 강점기의 것이라고 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들을 살펴보면 아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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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용두산 공원은 부산 사람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공간이지만 그 공원의 기틀은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순신이 바다를 보고 눈을 부라리고 있는 동상이 있는 그 자리는 일본인들이 거주하였던 장소였다. 일본인 남녀가 용두산 정상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해 음독자살을 기도하거나, 한 일본인 남성이 폭탄 자살을 하는 등, 별별 일본인들의 에피소드의 주 무대는 용두산이었다.
1931년 3월 22일 자 『동아 일보』에는 부산부 예산 협의회제에 참여한 유일한 조선 사람 김장태의 인터뷰를 실었는데, “예산 전면을 통해 보건대 모든 것이 용두산을, 즉 일본 사람 많이 사는 곳을 중심으로 하야 편성되어 있다”고 일갈했다. 이렇듯 용두산은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일본의 생활권이자 일본만의 공간이었다. 용두산에서 일본인들이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들의 종교적 상징인 신사가 용두산 공원 정상에 만들어지게 되었다. 신사의 규모도 꽤 컸다.
일본의 관료가 진해의 중요 항구를 검열하기 위해 입국하였을 때 용두산 신사를 참배하였고, 다양한 행사들이 용두산 신사 광장에서 시작되었다. 1936년 용두산 신사는 조선총독부가 관리 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국폐사로 격상되기에 이른다. 부산 속 일본의 성역이었던 셈이다. 이후 광복과 함께 용두산 신사는 방화로 전소되어 버리고 용두산은 다시 공원으로 가꾸어져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부산이 일본의 침략 전초 기지 역할을 하게 되면서 많은 근대 문화를 접했다. 철도와 전차가 놓이고 근대 공업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부산에 사는 사람들은 이러한 근대 문화에 대해서 빠르게 적응해야 했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부산 사람들은 침략자인 일본인들을 미워하면서 동시에 동경하는 이중적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았을까? 역사적으로 부산은 오랫동안 왜구의 첫 번째 목적지로서 침입에 시달렸으며, 왜란의 격전지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면서도 왜관을 설치하면서 그들과 삶을 공유했고, 일본의 가장 가까운 관문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부산은 삶 전체를 일본과 부대끼며 살아왔고 덕분에 미묘한 이중성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감정 속에서 부산은 끊임없이 자의든 타의든 일본의 문물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경제 성장 이후에도 부산은 일본으로부터 직접적인 물자 수입뿐만 아니라 문화 수입도 전국에서 가장 빠른 지역으로 손꼽혔다. 오랜 시간 동안 일본을 가까이에서 겪어왔던 부산은 일본의 문화를 스펀지처럼 잘 받아들였다. 1980년대 실제로 TV가 있는 가정에서는 안테나를 통해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전파소에서 NHK와 ABC 방송을 수신하는 것이 가능했었기 때문에 부산 시민들의 상당수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상을 이미 알고 있을 정도였다.
지금이야 위성 안테나, 케이블 등이 일반적으로 보급되었지만 당시에는 부산의 지붕을 수놓은 안테나는 부산의 진풍경이었다. 1962년 경상남도 지사 양찬우는 일본 TV를 시청하는 부산 시민들에게 ‘민족정기를 살리는 의미에서도 일반 TV 시청자들은 자숙해야 한다’고 경고할 정도였다. 「마징가 Z」를 이미 일본의 방송으로 보고 있는 가정도 있었다. 일본의 성인 잡지와 패션 잡지, 만화책들은 1970~1980년대 단연 부산이 가장 먼저 넘겨받았다. 책, 잡지, 비디오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도 보수동 책방 골목에는 그 시절 일본발 패션 잡지와 고서들이 즐비하다. 예전에는 TV 방송 제작자들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와 일본의 예능 프로 비디오를 보며 프로그램을 연구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에는 ‘묘지 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무심코 지나가면 알 수 없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곳은 집의 벽면, 받침대, 계단 등이 비석이나 제단, 상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이곳은 일본인들의 묘터였다. 광복 이후 일본인들이 급히 떠나며 묘를 남겨두고 갔고, 6·25 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묘위에 터전을 잡은 것이다. 아미동 일대에 아직 남아 있는 몇몇 판잣집은 일본인들의 납골당 위에 집을 지어 크기가 10~23㎡인 집이 많다. 부산은 일본인들의 죽음에 공간을 내어주었고 이후 그 공간을 딛고 다시 삶을 이어나갔다.
2007년 5월 일본의 ‘아시아 게이트웨이 구상’ 발표 이후, 지금의 후쿠오카 하카타 항의 국제선에는 ‘부산과 후쿠오카는 정(情)으로 이어져 있다’는 포스터와 입간판들이 게시되어 있다. 미운 정인지 고운 정인지 그 미묘한 ‘정’의 상관관계가 부산과 일본 사이의 정서로 남게 된 것은 아마도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부산의 땅 위에 숨 쉬었던 대륙, 중국]
일본만큼 우리의 귀에 익숙한 나라가 중국이다. 또 다른 항구 도시인 인천과 달리 부산은 청나라보다 일본의 영향력이 컸던 도시였지만, 청나라의 영향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저 거대한 대륙도 부산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부산역 5번 출구를 나오면 ‘상해문’이라는 관문을 만나게 된다. 붉은 색깔과 용무늬와 『삼국지』의 관우 동상이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부산역의 맞은편, 부산의 이색적 향기를 가득 머금고 있는 흔적은 바로 상해 거리 특구이다. 이 지역은 화교 거리로 조선 시대 청나라인들의 전관 거류지였다.
오래전 왜관에 대비되는 곳이라고 하여 청관이라고 불리었다. 지금도 화교들의 학교가 있는 그곳은 1884년 처음 청나라 영사관이 있던 자리였다. 1882년 임오군란 후부터 1895년 청일 전쟁 발발 전까지 청관 거리에는 중국인들로 넘쳐났었다. 그리고 영사관이 들어선 이후에는 정주하는 중국인들이 많아지고 청나라 객주들이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그에 따라 부산의 청관은 중국에서 유명한 포목, 비단, 양복지, 꽃신 등이 거래되면서 한때는 시집가는 부산과 영남 처자들의 최대 혼수 시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1930년대 원로 가수 김정구의 노래 「왕서방 연서」의 가사 마냥 ‘비단이 장사 왕서방’의 이야기는 실제로 청관 거리의 에피소드였을지도 모른다.
부산항과 아주 가까운 위치에 있던 청관은 왜관의 일본 상인보다는 훨씬 싼 가격에 물건을 거래하였기 때문에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원래부터 인천, 원산에 비하여 일본의 세력이 막강했던 부산이었기에 청나라가 주도권을 쥐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청일 양국 간 경제 주도권 경쟁 구도가 부산에서 나타났다. 당시 아시아의 두 경제 대국이 부산이라는 시장을 놓고 격돌을 벌인 것이다. 결국 청나라는 청일 전쟁에서 패배해 영사관을 잃고 청관은 급격히 쇄락하였다. 청관 일대는 일본인들이 장악하게 되었으나 1901년경부터 다시 중국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대외적으로 부산이라는 도시의 국제성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것이 바로 지금의 상해 거리이다. 상해 거리는 표면적으로는 중국의 문화를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 내부를 조금만 면밀히 살펴보면 다양한 문화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산의 국제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인 셈이다. 앞서 왜관이 있던 자리에 청관이 이어서 자리를 잡았고, 덕분에 일본풍의 건물들이 남아 있던 그곳에서 중국의 문화가 거래되었다. 지금도 상해 거리 일대에 남아 있는 백제병원 터만 하더라도 일본식의 근대 건물이었지만 이후 중국 요리점으로 바뀌어 운영되었다. 부산이라는 공간에 서로 다른 문화들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며 쌓여갔다. 부산 사람들의 일상에는 그런 오버랩이 어색하지 않은 것이 되어갔다.
지금 상해 거리 특구에는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중화 요리점들이 즐비하다. 홍성방, 사해방 등 큰 규모의 중화 요리점을 비롯하여 신발원, 일품향, 장성향 등 유명한 맛 집들도 상당하다. 신발원의 공갈빵과 중국식 콩국 등은 이미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 전국 택배 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다. 장성향의 군만두는 실제로 영화 「올드 보이」에 등장했던 군만두이다. 단순히 짜장면과 짬뽕으로 대표되는 한국판(?) 중국 음식이 아닌 제대로 된 ‘중국 요리’를 하는 집들이 즐비한 곳이 바로 상해 거리이다. 매년 상해 거리 특구 축제가 개최되는 때가 되면 각 중화 요리점들은 모두 짜장면 1,000원 판매 행사를 연다. 점원들은 한국말과 함께 중국어를 사용하는데, 이것 또한 식도락과 함께 신선한 경험이다.
어쩌면 지금의 상해 거리는 자연스러운 ‘오버랩’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것 같다. 현재 상해 거리 특구라는 이름은 1993년 부산시와 상하이가 자매결연을 체결하고, 1998년 부산이 옛 청관 거리 일대를 상해 거리로 조성하면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상하이에는 역시 부산 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이후 동구청은 1999년부터 이 일대의 도로 확장 및 조명 시설 확충 등을 실시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리고 2002년 중국의 당서열 3위가 지켜보는 가운데 웅장하게 상해문이 건립되었다. 그런데 사실 이 상해 거리에 상하이 사람은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실제 청관에 자리 잡았던 중국인들은 대부분 산둥 성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현재 청관에 정착해 있는 이들은 대부분 대만 사람들이다. 문화 정책을 강조하며 상하이가 아닌 곳에 상하이를 덮어 놓았다.
최근 부산에서는 굳이 상해 거리가 아니더라도 중국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대학가를 돌아다니다 보면 한국으로 유학 온 많은 중국인들을 만날 수 있고, 그로 인하여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중국 요리점과 양 꼬치 술집, 중국 식재료 상가 등이 속속 늘어나고 있다. 점포의 아르바이트생들 중에 중국인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더 젊고 현대적인 중국이 부산으로 몰려들고 있다. 가히 부산 전체가 ‘신 차이나타운’이 되고 있다. 아니, ‘생활형 차이나 부산’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까?
[텍사스 거리와 국제 유곽의 역사]
상해 거리를 걷다가 길의 끝자락에 다다르게 되면 거리를 수놓고 있던 붉은 빛깔의 중국어 간판 대신 영어 간판의 빈도가 점점 높아진다. 순식간에 다른 국가로 국경을 넘나든 기분이 든다. ‘클럽 텍사스’, ‘샌프란시스코’, ‘할리우드 클럽’ 등의 영어 간판들이 즐비한 거리의 입구에는 낡고 키 작은 표지판 하나가 서있다. ‘청소년 출입 금지 지역-동구청장’ 이라는 글귀와 해당 지역이 지도로 표시되어 있는 쇠로 된 안내 간판이다. 과연 저 안내 간판이 지금도 유효할까 라는 의문이 문득 들지만 지금도 부산항에 군함이 들어오거나 하면 이 거리는 이국인들로 가득 찼다. 이 숫자는 실로 엄청나고 빈도도 낮지 않다.
2008년 3월 부산에 미국의 항공모함 니미츠가 입항했을 때 5,600명의 승무원이 쏟아져 나왔고, 그 이전에도 오하이오호, 프린스턴호, 폴 존스호[이상 미국], 몰랜도함[페루]이 부산에 입항했고 여기서도 모두 1,000여 명 이상의 승무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같은 해 7월 로널드 레이건호와 호위 함정 2척이 입항해 6,000여 명의 승무원이 내렸다. 이들이 약 3일 정도를 부산에 머무르며 쓴 돈이 6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로 인하여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대낮부터 각 유흥업소는 장사진을 이루었다.
상해 거리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전혀 다른 이국의 이 거리가 바로 일명 ‘텍사스 거리’로 불리었던 곳이다. 일본이 물러가고 6·25 전쟁을 겪으면서 미군들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주둔하자 부산에는 기지촌을 비롯하여 일명 텍사스촌이라고 하는 미군 대상 유흥 단지가 속속 들어서게 되었다. 홍성철의 『유곽의 역사』를 보면 6·25 전쟁 뒤 미군과 유엔군을 상대하는 기지촌으로서 중구 중앙동에 텍사스촌이 먼저 생성되었다고 한다. 이 텍사스촌이 1953년 역전 대화재로 불타버리자 현재의 초량동 일대로 새로이 옮겨오게 되었다. 월남전 전후로 19개 업소에 성매매 여성이 45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청관이 쇄락하고 그 일대가 다시 일본인들에게 넘어갔다가 일본 패배 이후 미국인들에 의해 이 거리는 다시 새로운 문화로 덧씌워지게 된 셈이다. 미군들과 외양 선원들이 회포를 푸는 유흥 단지이자 상업 지구로서 그 역할이 바뀌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 이 일대는 성매매의 절정기를 누렸다. 또한 외국 제품 거래의 단속 면제 지대가 됨에 따라 코카 콜라, 바이스로이 담배, 캐나디언 위스키 등이 버젓이 거래되기도 하였다. 1980년대 이 거리에는 술에 취한 미군들로 넘쳐났으며 내국인들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었다. 1983년 7월 21일 자 『동아 일보』에 따르면 미국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5일간 입항하여 쓴 돈 2~3억 원[현재 가치로 10억 원이 훨씬 넘음]은 밍크 담요 상인과 텍사스촌으로 나뉘어 들어갔다고 추계되고 있었다. 미군들에게 텍사스 거리는 욕망의 거리였다. 텍사스 거리는 그러한 흥청거림과 함께 흥해갔다. 그 옛날 동래 권번 기생들의 주 무대였던 요정과 요릿집들은 미군이 들어오면서 담배를 꼬나문 양공주들의 클럽과 카페로 바뀌어갔다.
“양공주라 불리던 ‘언니’들이 아침 햇살 가득한 클럽 앞 평상에서 무방비 상태로 무릎을 세우고 발톱을 깎던 모습. 소설가 박영애가 기억하는 1960년대 후반 텍사츠촌의 풍경이다. 청소를 하느라 탁자 위에 거꾸로 세워놓은 하늘로 뻗은 둥근 의자의 네 다리와 언니들의 치마 사이로 드러난 다리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부산 일보』, 2009. 1. 31]
“골목마다 원색의 옷을 걸친 여자들이 희희닥거렸고, 선원 차림의 외국인과 미군 수병들이 여자를 끼고 비틀걸음으로 걸어가는 게 보였다.”[황석영의 「낙타 눈깔」(1972) 중]
유흥가로서의 텍사스 거리는 이후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러시아 선원들이 미군을 대신하게 되고 ‘러시아 텍사스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국제 유곽으로서의 부산의 역사와 명성은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미국과 러시아와의 관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미 부산은 일제 강점기 현재의 완월동으로 불리는 지역에 ‘미도리마치’라는 사창가를 설치하였다. 1980년 3월 22일 자 『동아 일보』에는 개항장 곳곳에 산재해 있는 성매매 업소들을 집결시켜 유곽으로 처음 만든 것은 1902년 7월이었다고 논문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당시 조선에는 불특정 다수에게 금품을 받고 성을 매매하는 유곽 문화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글에서 『일선 통교사』를 인용하며 이 최초의 유곽은 당시의 일본인 관리관이 부산 부평정경찰관파출소 앞의 도량을 경계로 특별 요리점의 영업을 허가한 것에서 출발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최초 허가 후 4개월 만에 성매매 종사자가 280명에 육박하자 풍기 단속이 힘들어졌고, 완월동 1, 2가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완월동은 성업을 이어갔고 세월이 흐를수록 완월동 일대의 유명세는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완월동은 동양에서 가장 큰 사창가로 불렸다. 완월동이 이처럼 비대해진 것은 이곳이 다른 사창가들과 달리 외국인 접대의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다. 완월동의 손님들 중에는 단체 관광 여행으로 부산을 찾는 일본인과 미군들이 많았는데, 그 과정에서 완월동 사창가가 외화 획득의 주역으로 평가 받았고 덕분에 단속도 느슨해졌다. 일본인 관광객들 중에는 완월동에 짐을 풀고 며칠씩 머무는 사람들도 많았다. 충무동에 위치한 ‘동리 사진실’ 김 모(32) 씨는 ‘당시 일본에서 배가 왔다는 말이 나기 무섭게 일본인들을 태운 관광 버스가 완월동에 도착했다’며….[홍성철의 「유곽의 역사」 중]
성매매 특별법 발효 이후 유흥업에 대한 규제가 강화됨에 따라, 완월동도 텍사스 거리도 그때 그 시절만큼의 불건전한(?)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이제는 쇼핑가로서의 이미지가 훨씬 더 강해져 미국 선원들이 한국의 점퍼, 재킷, 캐시밀론 이불을 한 아름 사가는 곳으로 더 유명하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는 말처럼 군데군데 흥청거림을 받아주던 업소들과 그 흔적들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거리 곳곳에 남아 있다.
“뭐 미군이야 고맙긴 고맙지. 어쨌든 전쟁이야 군인이 한 거 아이가. 그런데 그런데서 술 퍼마시고 소리 빽빽 지르고 다니고 쌈박질하고 하는 거 보믄 저런 것도 사람인가 싶기도 하고.”[ㅂ씨, 남, 79세]
“아. 요란스럽지. 어째 보면 참 추줍은 일인데 또 그걸 우짜겠노. 저레라도 놀아야겠다는데. 저거 나라에가 여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몰라도 먼 거는 먼 거 아이가. 북한에 코앞에도 전쟁 나고 못가는 사람 천지인데. 혀를 차고 욕을 하다가도 마 우짜겠노 하는 거지.”[ㅈ씨, 여, 76세]
당시 텍사스 거리를 누볐던 미군과 외국 선원들에 대한 추억에서, ‘우짜겠노’라는 한마디는 어쩌면 일본이나 중국에게 보냈던 시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부산의 양가적 감정의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부산은 국제적인 유곽으로서 기능하였고 부산 사람들은 그 모습을 일상 속에서 지켜보았다. 욕망으로 가득 찬 외국인들의 일상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불편하고 동시에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부산의 원조 글로벌 마켓 ‘초량 외국인 상가’와 ‘국제 시장’]
1990년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를 맺게 되었다. 이후 한국이 경제 발전을 이루고 부산도 1980년대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자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러시아 보따리 상인들이 대거 부산을 찾기 시작했다. 부산과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의 항로가 개설되자 부산을 찾는 러시아인의 숫자는 몇 년 사이에 나날이 늘어 갔다. 부산은 이미 타국을 받아들이는 데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다. 청관 거리 일대와 텍사스촌 지역은 러시아 상인들의 상가로 모습을 바꾸어갔다.
1992년 6월 14일 자 『동아 일보』에 따르면 1991년까지만 해도 13개이던 외국인 전용 술집 가운데 5개소가 신발과 옷 가게 등으로 바뀌고, 가게 이름에 영자 상호명과 함께 러시아 상호를 써넣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마이애미’라는 술집은 러시아 인기 가수인 ‘알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가게는 러시아 통역원 3명을 두고 부두까지 승합차를 운영하였다고 한다. 당시 가게 주인인 송영배는 “이곳을 찾는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선원들이고 어선 선원들이 상선 선원보다 지갑이 두둑한 편”이라고 설명했다.
속초나 부산을 주 무대로 한국의 의류, 생활용품, 식료품을 사가지고 러시아로 돌아가는 보따리 상인들은 건장한 체구에 금발을 하고서 동양인들과 뒤섞여 거리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당시 처음 보따리 장사를 시작한 것은 어선 선원들이었다. 이들은 구입한 생필품을 자국민이나 친지에게 되팔아 5~10배의 이득을 보았다. 1992년에는 한 달 평균 4,000여 명이 텍사스 거리를 찾아왔으며, 1993년 『동아 일보』 기사에 따르면 한 달 평균 7,800명이 텍사스 거리를 다녀갔다고 한다. 당시 특히 인기 있던 품목은 초코파이였는데, 1993년에는 급기야 텍사스 거리 초코파이 품귀 현상까지 빚어지게 된다.
러시아 상인들을 대신해서 상품을 구입해 러시아로 배송하는 대행자들까지 상당수 생겨났다. 텍사스 거리의 점포들은 소련 시절의 국가들과 하나둘 이어지며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과도 왕래가 생겼고, 거리 이름도 현재의 ‘초량 외국인 상가’로 바뀌었다. 부산역에서 30여 분을 걸어서 만나게 되는 한 은행 2층에는 러시아인 전용 외환 창구가 따로 마련되어 있고, 같은 은행 건물 8층에는 러시아 총영사관이 들어와 있다.
부산을 출입하는 러시아 상인들의 출입로는 주로 감천항이었다. 지금도 많은 러시아인들이 선원의 신분으로 입항하고 있으며, 입항하는 배들을 정비하고 직거래를 하는 러시아인들도 상당수 상주하고 있다. 감천항은 부산의 항구이면서도 부산 사람들에게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러시아인들의 향기와 문화가 여기저기 묻어나는 곳이다.
한 여행 잡지에 실린 윤희진의 에세이에는 “감천 사거리를 기점으로 감천항 쪽 골목엔 부두를 통해 입국하는 러시아 선원들이 드나드는 러시아어 간판을 내건 술집들이 즐비하다. 도로가에 오래된 대중목욕탕 감천탕 주변에는 ‘다정’, ‘늘봄’, ‘메아리’, ‘옥이’ 등의 손바닥 만한 빨간 간판들이 영업을 하고 있다. 감천에서 러시아 선원들 덕분에 생계를 이어가는 곳들이다. 감천초등학교와 서천초등학교 등 학교와 인접한 곳인데도 없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감천항에는 러시아 선원들이 풍기는 특유의 냄새가 난다”고도 묘사하고 있다.
부산의 경기는 러시아의 경기에 따라 한때 움직이는 듯했다. 하지만 이렇듯 양으로 음으로 번성하던 러시아 거리의 부흥도 지금은 예전만 못하다. 1996년 3월 6일 자 『경향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볼 수 있다.
“부산 동구 초량동 외국인 전문 상가. 러시아 텍사스촌. 부산역 건너편에 위치한 이곳 골목 입구에는 낯선 대형 아치물이 서 있다. ‘초량 외국인 상가’. 그러나 그 누구도 이 골목을 ‘초량 외국인 상가’로 부르지는 않는다. …… 1990년대 이후에는 ‘러시아 텍사스촌’으로 부른다. 거리를 꽉 메우던 러시아 보따리장수들은 동남아시아나 중국으로 발길을 돌리고 부산항으로 들어온 이들도 서울 동대문 시장으로 향하는 탓이다. …… [러시아 교포들에게] 그러나 중국 조선족들처럼 이들에게도 ‘코리안 드림’은 그저 요원한 꿈으로 끝날 것 같다. 텍사스촌의 네온사인이 하나둘 꺼져 갈수록 그들의 꿈도 점점 사라져갈 것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 도착했다’는 최루다[42], 리나타샤[35]는 부산의 높다란 고층 빌딩을 둘러보며 마냥 밝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사실 초량 외국인 상가가 정말 외국인들의 현대적인 쇼핑 거리로 비춰지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언제나 휘청거리는 외국인들의 밤거리라는 이미지를 벗기가 힘들었고, 그 속에 상인들의 문화가 뒤섞여 지금의 형태가 갖추어졌다. 초량 외국인 상가 거리의 환전소에는 달러와 위안, 엔, 러시아 루블 등을 함께 거래하고 있다. ‘돌고 돌아 돈’이라고 하지만 이곳에서는 참 많은 돈이 돌았고, 또 역사가 돌았다. 지금은 아시아 각지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 거리를 걷고 있다. 환전소에서 팔고 있는 국제 전화 카드의 주 소비자들은 바로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이 거리는 다시 또 새로운 이국의 사람들을 품어주는 거리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초량 외국인 상가는 외국인들이 직접 들어와 부산과 섞이면서 만들어진 곳인 반면, 국제 시장은 이국의 것들을 부산 사람들이 직접 추스르고 사고팔며 만들어진 곳이다. 1945년 일본이 패하고 급하게 퇴각하며 남기게 된 전시 통제 물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이것들을 팔아치우기 위하여 지금의 부평동 공설 시장 일대와 주변 빈터들이 시장 터가 된 것이다.
1987년 9월 1일 자 『경향 신문』의 한 기획 기사에서는 당시 국제 시장의 모습을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패망과 함께 수탈한 재산을 고리짝에 담아 초조하게 귀국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떤 한국 젊은이가 소리쳤다. ‘당신들은 손가방 하나 밖에 배에 실을 수 없소. 나머지 고리짝은 모두 버려야 할 거요!’ ‘고리짝 1개에 무조건 5원씩 주겠소’ 이렇게 해서 부두에서 고리짝 거래가 시작되었다. 내용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5원이었다. 이 고리짝들은 다시 부산서정 4정목 123소개지로 옮겨져 10원씩에 거래되었다. 그렇게 즉석 시장이 열린 것이다. 누군가는 횡재를 했고 누군가는 헛장사였다. 일본인이 다 돌아가고 나서는 귀국 동포들이 다시 시장판으로 나왔다. 당시 이 시장은 ‘도떼기시장’이라고 불리었다. 일본어로 ‘톳타!’, 즉 ‘얻었다!’, ‘취했다!’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이름이었다.”
이후 1948년, 도떼기시장은 단층 목조식 건물을 12동 가량 짓고 자유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당시에는 광복 이후 여기저기 자유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유행이었다. 물론 지금의 부산 자유 시장과는 다르다. 이후 부산이 잇따른 전쟁의 보급지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서 미군의 군용 물자들이 흘러나와 거래되었다. 일명 깡통 시장이라고 불리는 국제 시장의 군용 물자 시장은 지금도 그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미군에서 유출된 캔 식료품을 주로 팔았던 시장이다. 지금도 일본의 과자와 함께 미국의 군용 양주, 통조림을 파는 상가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본래는 깡통 시장과 함께 국제 시장에는 케네디 시장이라는 곳이 있었다. 전쟁고아를 위한 구호물자를 빼내서 전문적으로 팔았던 시장으로, 창선동 일대에 형성된 곳이다. 구호품이 끊기고 나서는 수입 구제 의류를 취급하는 시장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대부분 일반 의류 시장으로 바뀌었다. 지금 국제 시장의 포목상과 의류 상가 일대가 바로 예전의 케네디 시장 자리이다. 물자의 다양성, 넓은 부지, 항구의 인접 등 당시로서는 유통의 정점에 있는 시장이었다.
홍콩, 마카오, 대만, 중국, 러시아, 미국 등에서 들어온 밀수품들이 성행하면서, 국제 시장은 밀수품을 전국으로 보급하는 시장으로 유명해졌다. 당시 부산항은 밀수의 메카였다. 1959년 『동아 일보』의 기사를 보면 1958년 한 해 동안만 부산세관은 605건의 밀수를 적발하고, 검거된 밀수범만 1,000여 명, 압수 품목은 5억 9900만 환에 이르렀고, 부산 앞바다에서 해녀를 동원한 해저 밀수품 운반까지 나타나고 있다며 걱정을 금치 못하고 있다. 벨벳 옷감, 화장품, 모피, 보석, 시계 등이 밀수선에서 트럭으로 국제 시장까지 직송되었다. 밀수가 성행하자 히라마오, 마사이치, 로스케 등 불량배 집단들도 활개를 쳤다. 밀수로 한밑천을 잡은 상인들은 동대문, 남대문, 청계천 등지로 옮겨가서 새로 시장을 형성했다. 이들 3개 시장은 부산 국제 시장 출신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국제 시장이 태어났던 시절. 그 난장 시장의 질곡의 흔적인 양 국제 시장은 온 골목이 미로처럼 엉켜 있다. 그리고 그 골목 이곳저곳이 세월을 이겨낸 다양한 상가들로 채워져 있다. 특히 부평 시장 일대로 들어서면 미군용 위스키와 담배들이 상가 좌판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고, 노점상들은 일본에서 넘어온 화장품, 과자, 식재료 등을 팔고 있다. 몇몇 상점의 주인들은 고정 환율로 외환을 거래하기도 한다. 옷가게들을 거닐다 보면 이불만 한 크기의 바지도 볼 수 있다. 이 모든 흔적들이 그 옛날의 도떼기시장에서 이어져 오는 것이다. 살아가기 위한 생존의 수단으로 부산 사람들은 이국의 문화를 걷어다 이곳 국제 시장에서 팔아왔다. 국제 시장에서는 정말 ‘국제적인’ 것들이 거래되었다.
[이국을 비벼 부산의 맛이 되다]
특정 장소뿐만 아니라 부산 사람들의 일상 속에도 이국은 그렇게 낯설지 않다. 낯설지 않기에 거의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고 지나갈 만큼 평범한 것들이 많다. 어떤 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부산의 것이 되어 녹아 있을까? 먹을거리만 하더라도 앞서 상하이 특구 거리에서 짚었던 중국 요리나 초량 외국인 상가의 음식 등 부산에서는 이국의 음식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시내 곳곳에서 해당 국가의 현지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더욱이 현지 음식에 그치지 않고, 아예 부산에 녹아들어 부산의 음식이 된 것도 많다.
부산의 오뎅[어묵]은 전국 제일의 수준을 자랑한다. 부산 사람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어묵이지만, 서울에서는 아예 포장마차에서 어묵과 부산 어묵이 따로 명기되어 판매될 정도이다. 어묵의 본고장 일본과 가장 가까웠던 부산의 위용이다. 어묵은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부산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1924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의 시장』에서 부평동 시장에 대해 ‘쌀, 어묵, 채소, 청과물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고 어묵을 따로 기록할 정도로, 부산의 어묵은 하나의 큰 식품군이었다. 부산에서는 1936년 일본인이 처음 어묵 공장을 세우고, 광복 후 동광식품을 시작으로 삼진식품, 환공식품 등 큰 어묵 공장들이 이어서 들어섰다. 이후 부산의 어묵은 ‘부산 어묵’ 자체의 고유 명사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맛을 자랑하게 되었다. 삼진식품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부산에서 어묵을 만들고 있다. 초량 시장에 나가면 지금도 어묵 가게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초량 시장에 자리 잡고 있는 영진식품의 즉석 어묵이 1966년 초량 시장의 천막에서 출발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남포동에서 소문난 메뉴 중 하나로 ‘완당’을 들 수 있다. 1948년 개업해 65년째 남포동에서 영업 중인 ‘18번 완당집’에 들어가면 벽면에 완당의 역사가 쓰여 있다. 완당은 본래 ‘훈탕’이라는 중국 음식이었는데, 이것이 일본으로 넘어가 완당이 되었고 한국으로 들어와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근처 부산 시민들이 점심 한 끼, 저녁 한 끼로 먹는 이 음식을 다른 지방 사람들은 일부러 먹기 위해 부산을 찾는다. 중국의 음식도 일본의 음식도 아닌 부산의 음식으로서의 완당을 찾는 것이다.
이 외에도 부산의 명물 음식으로 알려진 돼지국밥과 70여 년 전 남포동 일대에 널리 퍼지고, 현재도 부평동 깡통 시장 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노점의 단팥죽 역시 가까운 일본식의 문화가 접목되어 탄생된 것이다. 돼지국밥은 6·25 전쟁 때 서울의 피란민들이 소뼈를 우려내어 먹던 설렁탕에 돼지 뼈를 우려 육수를 내는 일본 문화가 녹여져 탄생한 것이다. 실제로 부산과 뱃길을 맞대고 있던 규슈[九州]의 명물은 돈코츠[豚骨], 즉 돼지 육수이다. 단팥죽 역시 우리 전통 팥죽과 달리 갈분과 설탕을 넣는 일본식 젠자이 문화가 결합된 것이다.
[창조성의 발판, 칵테일 도시 부산]
부산은 그러고 보면 여러 이국과 부대끼며 단맛과 쓴맛을 뒤섞어 함께 경험하였다. 제3자가 되어서 멀찍이 타자를 바라보는 위치가 아니라, 경제적인 관계에서부터 가장 밑바닥 욕망의 단계까지 다 드러내 놓고 관계를 맺은 셈이다. 이러한 경험은 “으이그 이 원수덩어리!”라면서도 내 가족이고 내 이웃이라며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부산 사람들의 모습들과도 미묘하게 오버랩된다. 살을 부대끼고 사는 가족처럼 타국 사람들의 무대 앞면과 뒷면을 모두 보아왔기에, 부산은 더욱 유연하게 타국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었다. ‘무슨 놈 무슨 놈’ 하면서도 부산은 그들이 설수 있는 땅을 내어주고, 그들에게 삶을 제공했다. 부산 역시 이국을 상대로 또는 그들의 것들로 삶을 꾸려 나갔다.
부산의 국제적 위치와 역사는 나름대로 부산에 많은 경험을 축적시켜 주었다. 그로인해 부산은 요즘 말하는 하이브리드를 훨씬 오래전에 다양한 분야에서 만들어냈고, 동시에 이국 문화 정착의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해왔다. 1884년 9월 14일 기독교 전파를 위해 세 선교사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처음 밟은 땅은 부산항이었고, 6·25 전쟁 때, 참전 군인들을 통해 전파된 몰몬교의 첫 집회지도 부산이었다. 이들 종교는 부산을 시작으로 한반도에 전파되어 갔다.
1970~1980년대 부산은 외국 영화가 가장 먼저 들어오는 도시였고, 외화의 흥행 여부는 부산에서 얼마나 흥행하느냐가 기준이었다. 일본의 가라오케는 ‘가라오케 박스’ 형태로 부산에 최초로 상륙하여 한국식의 노래방이 되었다. 부산이 트로트의 메카가 되었던 것도 일제 강점기 일본 요나누키 풍의 음계 엔카[演歌]가 부산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부산은 마치 서로 다른 맛과 빛깔의 술들로 빚어진 칵테일 같은 도시이다. 소주와 구수한 막걸리를 베이스로 하고 사케, 위스키, 빼갈, 보드카가 섞여져 부산이라는 하나의 잔에 담겨졌다.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한 칵테일, 빛깔이 고우면서도 마시면 취하는 칵테일. 칵테일도 섞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알고 비율을 아는 법이다. 부산이 앞으로 빚어낼 술은 어떤 맛일지 궁금해지지 않는가? 창조는 언제나 새로운 만남과 충돌에서 생긴다고 했다. 부산만큼 이색적 만남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도시가 또 있을까?
이러한 부산의 강점은 부산의 미래와도 연결된다. 이색 문화 자체가 가지는 문화 관광 콘텐츠로서의 가치도 물론 충분하지만 그 가치는 부산의 문화로서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부산은 북항 재개발과 허브 공항 논의 등과 함께 국제 문화 도시로의 도약을 외치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는 세계의 관문이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부산은 인위적으로 국제성을 덧씌울 필요가 없는 도시이다. 부산은 그 정체성 속에 이미 국제성이 녹아들어 있다. 왜관과 청관의 설치 이후 부산은 이미 동아시아의 교역과 문화 교류의 네트워크 도시였다. 부산은 이러한 국제적 경험을 다시 살려내어 활성화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부산이 가지고 있는 국제적인 친화성은 부산에 발걸음을 멈추는 이국 사람들을 늘어나게 할 것이다.
2011년 부산 문화 회춘 프로젝트를 계기로 한국, 중국, 홍콩, 대만, 일본, 독일, 미국 등 많은 국가의 아티스트들과 문화 운동가들이 부산대학교 앞을 찾았고 조형 예술, 공연, 그라피티 등 많은 예술 활동을 자유롭게 보여주었다. 부산은 문화를 그리는 자유로운 도화지가 되어 주었다. 당시 부산을 찾았던 세계의 젊은이들은 부산이 나라 안팎의 다양한 문화적 실험과 상상력이 모이고 자유롭게 교류하는 청년 문화의 중심지가 되는 미래를 꿈꾼다.
2012년 부산은 이미 거주 외국인 5만 명을 바라보는 도시로 변화하였다. 부산 주민 등록 인구의 1.4%를 차지한다. 부산은 이제 거리에서 외국인을 만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도시이다. 다문화를 선도해 나가는 부산의 미래도 이색 문화에서 볼 수 있는 부산의 포용성이 바탕이 될 것이다. 국제적인 물류와 산업뿐만이 아닌, 일상 속에서의 이국 문화를 통한 접점의 도시를 만드는 것. 그 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창조성을 발현할 수 있는 경험의 장이 새롭게 구축되어 갈 것이다. 『동아 일보』에 실린 독립 운동가 김도태의 칼럼 가운데 부산에 대한 짧은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부산은 교통으로 조선과 내지의 연락뿐만 아니라 만주국 북지에 통하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동아의 중대 관문이요. 좀 더 나아가서는 세계 교통의 필요한 곳으로 차츰차츰 면목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세계를 일주하는 사람이나, 무슨 국가의 중대한 사명을 띤 사람이나 이곳을 지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외 인사들의 왕래가 더욱 빈번하야 교통량이 더욱 많아져 연락선만 가지고 도저히 이렇게 많은 손님과 물화를 운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다 밑으로 지하 철도를 경영하며 공중으로 비행기를 이용하게 될 것인즉 장래의 부산은 세계적으로 이름이 드날리게 될 것입니다.”[『동아 일보』, 1940. 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