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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347
한자 遊廓
영어의미역 Red-light Distric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강정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2년 - 좌수토원(佐須土原)에 유곽 형성
1907년~1912년 - 미도리마치[녹정(綠町), 현 충무동]로 이전
1916년 6월 - 경상남도 경무부 고시 제7호 「대좌부 창기 취체 규칙」 제3조에 의해 부산의 대좌부 영업지역 지정
관련 장소 좌수토원 -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
관련 장소 미도리마치[녹정] - 부산광역시 서구 충무동

[정의]

1902년 부산 지역에 처음 만들어진 일본식 집중적 성매매 지역.

[개설]

유곽은 일본인들이 부산에 자리를 잡으면서 일본인 거류지에 설치한 일본식 성매매 업소이다. 전통 사회에서는 화폐 경제가 발달하지 않았고, 유교 등의 영향으로 엄격한 도덕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로 인하여 근대적인 형태의 퇴폐적인 전업형 성매매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기생, 축첩 등의 성욕 충족의 제도적 장치가 있었다. 그러나 개항기를 거쳐 일제 침략기 성매매가 공식화[공창제]되면서 직업적 형태의 근대적인 성매매 지역이 형성되었다.

[유곽 설치]

개항 후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독신 남성들의 수도 증가하였고, 이들 일본인들은 대부분 단순 노무자거나 영세 상인들이었다. 부산 일본인 거류지의 일본인 성매매 업자들은 본국에서 창기들을 모집·이송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881년 11월 전국에서 부산이 가장 먼저 영사관령으로 공창제 운영에 관한 법규인 「대좌부 영업 규칙(貸座敷營業規則)」과 「예·창기 취체 규칙(藝·娼妓取締規則)」을 만들어 거류지 일본인에 대해 적용하였다. 이는 서울과 그에 인접한 인천에 비해 매우 일찍 공식적으로 도입한 것으로, 그 목적은 성병 관리와 세금 징수 등에 있었다.

취체(取締)는 경찰 권력의 단속을 말하고, 대좌부(貸座敷)는 일본의 성매매 방식으로 성행위를 할 수 있는 여성과 방을 제공하는 곳이다. 「대좌부 영업 규칙」은 첫째 대좌부업은 면허지에서만 할 것, 둘째 대좌부업 경영자는 영사관에 신청해서 허가를 받을 것, 셋째 세금을 납부할 것, 넷째 창기를 바깥에서 보이게 하거나 대좌부 외에서 숙박시키거나 면허 감찰이 없는 부녀에게 좌부를 빌려 주지 말 것, 다섯째 손님 중 돈을 많이 쓰거나 수상하게 보이는 사람은 곧 경찰서에 신고할 것 등이다.

1900년 부산 영사관은 성매매 업자들을 현재의 사하구 신평동 등지로 이전하고, 1902년 좌수토원(佐須土原)[중구 부평동 시장 부근]에서 안락정(安樂亭)을 비롯하여 실질적인 대좌부(貸座敷)들이 모였다. 이것이 조선에서 첫 유곽, 집창 지역의 출현이었다. 이 유곽은 시가지 팽창과 함께 중심지로 편입되자, 1907년에서 1912년에 걸쳐 녹정(綠町)[미도리마치, 현 충무동]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공식적인 유곽의 동향이며,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성매매 업이 부산의 여러 지역에서 번성하였다.

[유곽 확산]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전체에 통일적으로 적용되는 관리 규정으로 경무총감부령 제4호 「대좌부 창기 취체 규칙(貸座敷娼妓取締規則)」[1916년 3월]이 발표된 이후, 1916년 6월 경상남도 경무부 고시 제7호 「대좌부 창기 취체 규칙」 제3조에 의하여 부산의 대좌부 영업 지역이 지정되었다. 기존의 공인 유곽 지역인 ‘녹정’과 초량(草梁), 목도(牧島), 주갑(洲岬)[현 영도구 영선동]과 동부 유곽[현 영선동] 4곳이 지정되었다. 초량과 목도는 시한제로 두었는데, 목도 동부 유곽은 1930년대 이후에도 존속하였다. 유곽 설치 초기에는 대좌부 업자나 창기나 유곽 출입자가 대부분 일본인이었으나, 점차 조선인의 비율이 높아졌다.

이상과 같이 일본 근대 공창제는 침략 전쟁과 함께 식민지 등지로 확산되었는데, 군인 및 일본인 사회에 성병 확산을 염려하여 정기적 성병 검사가 엄격하게 이루어졌다. 성병 검사는 창기만이 아니라 예기, 작부 등으로도 확산되었으나 남성은 늘 검사 대상이 되지 않았다. 조선에서 처음 검사가 시행될 때 매우 폭력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상 여성들의 강력한 저항에 봉착하였다. 이는 보건 상의 목적뿐만 아니라 치안 유지 차원이기도 했다. 1948년 공창제가 폐지되면서 공식적으로 유곽은 사라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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