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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766
한자 元杜尤
영어음역 Horace Grant Underwood
이칭/별칭 원두우(元杜尤),언더우드
분야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이상규 1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선교사|목사
성별
출생 시기/일시 1859년 7월 19일연표보기 -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1885년 - 목사 안수 받음
수학 시기/일시 1881년 - 뉴욕대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884년 - 뉴브런즈윅신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885년 4월 5일 - 한국으로 건너옴
활동 시기/일시 1889년 - 성교서회[기독교서회] 창립
활동 시기/일시 1891년 - 북장로교 부산선교부 개척 추진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신약 성경』 역간
활동 시기/일시 1911년 - 『구약 성경』 역간
활동 시기/일시 1915년 - 서울에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설립
몰년 시기/일시 1916년 10월 12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영국 런던
학교|수학지 뉴욕대학교 - 미국 뉴욕
학교|수학지 뉴브런즈윅신학교 - 미국 뉴저지 주 뉴브런즈윅
활동지 북장로교 서울선교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활동지 북장로교 부산선교부 - 부산광역시

[정의]

한국에 온 첫 장로교 목사 선교사로 부산 기독교 선교의 출발에 영향을 준 인물.

[개설]

한국 이름은 원두우(元杜尤)이다. 아버지는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이고, 어머니는 엘리자베스 그랜트 마리(Elisabeth Grant Marie)이다.

[활동 사항]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1859~1916]는 1859년 영국 런던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3세 때에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저지 주 뉴 더햄(New Durham)에 정착하여 저지(Jersey)에 있는 남자 학교[Hasbrook Seminary for Boys]를 다녔다. 1877년 뉴욕대학교에 입학하였고, 1881년 졸업과 함께 뉴저지 주에 있는 뉴브런즈윅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884년 동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선교사가 되고자 하였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188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1885년 4월 5일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 후 한국에서 언어 공부와 함께 광혜원(廣惠院)에서 제약사로 일하면서 병원 일을 도왔고, 제중원 의학교가 개교하자 그곳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 1886년에는 고아원 형태의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언더우드학당’의 시작이었다. 이 학교는 1905년에는 경신학당으로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5년에는 서울에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곳이 후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통합되어 연세대학교로 발전하였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서울에 주재한 북장로교 대표 선교사였으나, 부산 지방 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1891년 북장로교 부산선교부 개척을 추진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를 부산에 파송하였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순회 전도자이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한국의 자연과 지리를 익혔고, 새문안교회[1887년]를 비롯하여 여러 교회를 개척하였다.

1889년에는 성교서회(聖敎書會), 곧 대한기독교서회(大韓基督敎書會)를 창립하였고,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회장을 역임하며 성서 번역 사업을 주관하였다. 그 결과 1905년 『신약 성경』, 1911년 『구약 성경』이 차례로 역간됨으로써 한국어 『성경 전서』가 출판되었다. 1900년에는 기독청년회[YMCA]가 조직되었는데, 이 일에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기여가 적지 않았다. 1912년의 장로교 총회 조직은 그간의 한국에서의 봉사에 대한 예우였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1884년 내한한 알렌(H. G. Aallen)의 뒤를 이은 첫 목사 선교사이자, 첫 장로교 목사 선교사였다. 개척 선교사로서 한국에서 큰 업적을 남겼으며, 오늘의 한국 교회를 있게 한 초석을 쌓은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서울에 주재하였으나 북장로교 부산선교부를 열었고, 부산 선교 부지 확보 등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등 부산 지방을 대상으로 한 선교 운동을 지도하고 격려하였다. 1916년 10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사상과 저술]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비록 장로교 선교사였으나 타 선교부와 협력하고 동역하는 연합 정신의 소유자였다. 이런 연합 정신과 사상은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해 얻은 자연스런 결과였다. 1889년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J. H. Davies)가 입국하여 부산 선교를 구상하고 있을 때 선교부 간의 연합을 위해 미국·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 연합선교회[The United Council of Missions of the American and Victorian Churches]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호주 출신 데이비스가 부산에서 사망하자 이 연합 기구는 해산되었지만, 1892년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입국하게 되자 다시 북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 선교부는 1893년 1월, 장로교 정치를 채용하는 선교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런 조직의 최종 목표는 한국에서 단일한 장로교회를 조직하기 위한 것이었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장로교 선교부 간의 연합만이 아니라 감리교 선교부와도 연합을 추구하였다. 1892년에 선교 지역 간의 분할 협정을 맺었고, 비록 선교 지역은 구분하되, 지역 분할로 이루어진 장로교·감리교인들의 상호 교환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성경 번역에 있어서도 교파를 떠나 단일 위원회를 구성하고 장로·감리교회 선교부가 공동으로 이 일을 추진하였다. 한국에서 하나의 교회를 조직하고자 한국기독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Korea]로 명칭까지 합의하였으나 본국 교회의 반대로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연합운동가(Unionist)’였다. 부산에서 일하던 호주 선교사들 간에 불화와 대립이 있었을 때에 부산으로 와 이를 중재하고 화해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또한 제2의 도시인 부산 지방 선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부산 지부를 후원하고 격려하였다. 저술 중에서 『한영 문법』[1890]과 『한어 사전』[『A 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 1800]이 대표적이다. 이는 5년간의 노고의 결실이었다. 1897년에는 주간지 『그리스도 신문』을 창간하기도 하였다. 또 저서 『한국 선교 23년』[『For Twenty-three Years, a Missionary in Korea』, 1908]는 초기 선교사역에 대한 소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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