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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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交通 |
영어의미역 | The Streets and Transportation of Busan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부산광역시 |
집필자 | 이일래 |
[길의 도시, 부산]
길이 열리면서 도시로서 부산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근대적 교통으로서 경부선이라는 철길과 부관 연락선이라는 바닷길이 서로 뚫리면서 동래가 아닌 부산이 도시로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부산이 근대적 도시로 형성되기 이전부터 부산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 시대 전국의 주요 도로로서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한 아홉 개 대로가 있었다. 그중 부산은 영남 대로로 한양과 이어졌다. 영남 대로에는 다시 좌도, 중도, 우도 세 갈래 길이 있었는데, 그중 부산과 연결된 중도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던 길이었다. 이 길은 동래에서 시작하여 밀양, 청도, 대구, 선산, 상주, 조령, 음성, 이천 등을 통해 열나흘이면 한양에 이르렀다. 특히 부산에서 밀양에 이르는 길을 황산도(黃山道)라고 했다.
조선 시대의 대로들은 중간마다 역참을 세우고 연결하였는데, 황산도는 그 중심 역이었던 양산의 황산역(黃山驛)에서 따온 이름으로 동래 휴산역(休山驛)에서 밀양 무흘역(無訖驛)까지의 길이었다. 지금의 부산 시내만 놓고 보면 황산도는 지금의 동래경찰서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휴산역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동래 향교, 명륜초등학교 앞을 지나 온천 입구 사거리로 이어지고 이후 부곡동에 있는 공수물 소공원, 기찰을 경유하여 금정구 하정 마을에 있었던 소산역(蘇山驛)으로 연결된다. 소산역에서 팔송 경찰 초소, 작장 마을을 지나 지경 고개를 넘어 양산으로 이어진다.
이 길은 한양으로 가는 사람들의 길일 뿐 아니라, 물자들의 길이기도 했다. 지역의 백성들이 한양의 임금에게 세금으로 바치는 조운로였으며, 초량에 있던 왜관에서 거래된 물자들이 유통되던 교역의 길이었다. 부산에 교역의 길은 육로뿐 아니라 수로도 있었다. 구포 나루에서 낙동강을 이용하여 경상북도 내륙을 거쳐 충주에서 한강으로 연결되는 물길로도 한양까지 물자가 운송되었다. 특히 구포 나루에는 조선 후기 세금을 징수하던 남창(南倉)이 들어서 있었다.
오늘날 이런 옛길의 흔적은 몇몇 지명에서 발견되는 데 대표적인 것이 기찰(譏察)이다. 기찰은 지금으로 치면 검문소로, 조선 시대에서 기찰포교(譏察捕校)가 상주하면서 통행자나 물품 등을 검문 검색하던 곳이다. 부산 지역에는 십휴정(十休亭) 기찰과 구법진(仇法津) 기찰, 이렇게 두 군데 기찰이 있었다. 십휴정 기찰은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에 있던 것으로 육로로 가는 사람들과 물자를 검문하였고, 구법진 기찰은 북구 덕천동에 있던 것으로 낙동강에 감시선을 띄우고 물길로 이동하는 사람들과 물자를 감시하였다.
당시 기찰은 지금의 경찰과 세관을 합친 것으로 부산에 두 군데의 기찰이 있었던 것은 왜관 등을 통한 일본과의 교역 물자가 빈번히 오가면서 밀수 같은 것이 일어나는지 단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만큼 당시에도 부산은 육로와 수로가 이어지고 조선과 외국을 연결해 주는 곳이었다. 오늘날 기찰이라는 이름은 정식 행정 구역에서는 사라졌지만, 기찰 마을이란 이름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며 최근에는 십휴정 기찰이 있던 지역에서 생산되는 기찰 막걸리란 이름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부산의 철길, 근대적 교통의 시작]
세계사적으로 근대적 교통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스티븐슨(Stephenson)이 개발한 증기 기관차가 1825년 영국의 스톡턴(Stockton)에서 달링턴(Darlington)까지의 철로를 달리면서부터다. 철도는 근대적 교통을 연 장본인이자 이후 자동차가 대중화되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대중교통 수단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근대적 교통도 철도다.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이 1897년에 착공하여 1900년에 완공되면서 등장한 철도는 1904년 부산~서울 간 경부선, 1905년 신의주~서울 간 경의선이 이어서 개통되었다. 세 노선 모두 일제에 의해 건설되었는데 이는 조선의 식민지화와 대륙 침탈을 위한 일본의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식민지 근대의 비극 속에서 한국의 근대 교통이 시작되었다.
부산에 근대적 교통수단이 등장한 것도 철도가 놓이면서부터다. 부산에 처음 등장한 철길이 바로 경부선이다. 경부선은 1901년 8월 20일에 서울 영등포에서, 9월 21일에는 부산 초량에서 공사가 시작되어 1904년 12월 27일 완공되었다.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철도는 경인선이었지만, 철도를 건설한 일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경부선이었다. 제국주의적 확장을 꾀하던 일본에게 있어 경부선은 한반도를 수탈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만주와 중국 대륙으로 침략해 나가기 위한 중심 노선이었다.
부산은 섬나라 일본과의 바닷길과 대륙으로 가는 철길을 이어주는 핵심 연결점이었다. 이는 경부선이 완공되고 9개월 만에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운행하는 부관 연락선이 취항하고 경부 철도와 연대 운행을 시작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렇게 일제의 핵심 교통망이었던 경부선은 1930년대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통행량과 물동량이 더욱 급격히 늘어났다. 이에 따라 1936년에는 경부선 복선 공사가 착수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 10월에 준공되었다.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공고히 되면서 더욱 많은 철도가 건설되었는데 부산에서도 경부선에 이어 동해 남부선이 놓이게 되었다. 1930년 7월에 부산진에서 공사를 시작하여 1935년 12월 기존의 울산~포항 사이에 놓여 있던 노선에 연결되면서 동해 남부선이 완공되었다.
사람들이 철도를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이 역사(驛舍)다. 부산역은 부산을 대표하는 역사이자 철도로 부산에 오는 사람들이 처음 만나는 부산의 얼굴이다. 경부선이 건설되고 처음에는 철로 변에 임시 정거장이 역의 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다 3년이 지난 1908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10년 10월에 부산역사가 완공되었다. 붉은 벽돌에 흰색 화강암을 섞어 르네상스식을 바탕으로 한 절충 양식으로 건설한 부산역사는 경부선 개통 이후 가장 먼저 만들어진 현대식 역사였다. 부산역사는 1층은 역 건물로 사용하고 2층부터는 호텔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었다. 당시 부산역은 중구 중앙동 4가 부산 무역 회관 부근에 있었으나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뒤 부산진역을 부산역으로 사용하다 1969년 6월 지금의 부산역이 있는 동구 초량 3동에 부산역 건물을 신축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본격적인 시내 대중교통의 시작도 철도였다. 대신동에서 온천장까지 운행되던 전차가 그것이다. 1909년 부산진에서 동래 남문까지 경편 철도가 부설되었는데, 1915년 이를 초량까지 연장하면서 본격적인 전차 운행이 시작되었다. 이후 1928년 대신동 공설 운동장까지 연장되었고, 1935년에는 영도 다리를 건너 영도 남항동 시장까지 운행하는 영도선이 건설, 연결되었다. 전차가 처음 등장하자 이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전차 운행이 방해받을 정도였으며, 사람들은 전차와 공중으로 연결된 전선에서 전기 불꽃이 이는 것을 보고 전차가 번갯불을 잡아먹고 그 힘으로 달리는 괴물로 생각했다. 또한 근대적 교통 체계에 익숙하지 못해서 정거장이 아닌 곳에서도 손을 들어 타고 내리기도 했으며, 전차로 인한 교통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후 50여 년 동안 전차는 부산의 핵심적인 시내 대중교통 수단이었으나, 광복과 6·25 전쟁 이후 부산이 급격히 확장하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전차는 노후화와 느린 속도로 인해 대도시의 교통수단으로서는 부적합하게 되었다. 결국 1968년 5월 부산의 전차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부산의 찻길]
과거의 길은 사람과 우마차 정도가 지나갈 수 있는 구불구불한 좁은 길이 보편적이었다. 그러다 근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많은 물자와 사람들이 지날 수 있게 반듯하고 넓은 길이 닦이기 시작했다. 과거에 이런 길을 신작로라고 불렀다. 부산에 이런 근대적인 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부산이 개항되면서부터다. 부산 최초의 시가지 도로는 1898년 12월에 복병산과 용두산 중간을 뚫어 닦은 지금의 대청로이다.
또한 개항과 함께 왜관이 폐지되고 일본인 전관 거류지가 형성되면서 기존 왜관의 동관과 서관을 잇던 길이 개발되어 최고의 번화가로 발전하였는데, 이 길을 장수통이라 불렀다. 이 길은 1909년 1월 대한 제국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이 부산으로 민정 시찰을 왔을 때 지난 길이기도 했다. 민족의 아픔이 서린 이 길은 광복을 맞이하면서 광복로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또한 일제는 침략과 수탈뿐 아니라 일본인들의 유흥과 관광을 위해서도 부산에 길을 만들었다. 일본인 거주지와 부산항에서 동래 온천을 연결하기 위해 전차를 놓았듯이, 전국 최초의 해수욕장인 송도 해수욕장 때문에 1920년대 송도 윗길이 닦이기도 했다.
일제는 부산을 인구 40만 정도의 도시로서 계획했고 거기에 맞추어 도시를 개발하였다. 그러나 광복으로 귀환 동포들이 부산을 통해 대거 귀국하고, 이어 발발한 6·25 전쟁으로 인해 전 국민이 부산으로 모여들면서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모여든 사람들은 산자락에라도 보금자리를 만들어 생활했다. 이렇게 해서 부산은 곳곳마다 산동네가 형성되었다. 이런 산동네를 연결하면서 만들어진 게 산복 도로다. 산동네를 지나는 길은 우리나라 여러 도시에서 볼 수 있지만 산복 도로는 부산에만 있다. 산복 도로는 ‘산허리를 베어 터를 내고 닦은 길’을 일컫는 것인데 국어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은 말로 부산 인근 지역에서만 쓰이는 말이다. 산복 도로가 처음 놓인 것은 1964년 10월 17일에 초량동 산복 도로가 개통되면서다. 1969년에 이 길이 이웃 동네인 수정동과 연결되면서 부산의 대표적인 산복 도로인 망양로가 만들어졌다. 이후 산동네가 많은 부산에 해돋이길, 시약산길, 영도 산복 도로, 전포동 산복 도로 등 여러 산복 도로가 생겨나면서 부산을 상징하는 길이 되었다.
부산의 대표적인 간선 도로는 중앙 대로다. 중앙로라고도 불리는 중앙 대로는 오늘날에도 부산 사람들이 오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길이지만 1970년대까지는 사람뿐 아니라 물자가 이동하는 데 있어서도 부산을 넘어 전국적으로 중요성이 높았다. 중앙 대로는 일제가 부산항을 개발하기 위해 1901년부터 중앙동 일대를 매립하면서 만들기 시작한 도로이다. 이후 1921~1927년에 초량동·수정동·좌천동·범일동을 지나는 폭 5.4~10.9m, 총 연장 11.45㎞의 초량로가 개통되면서 중앙 대로는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일본에게 부산은 조선과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전초 기지이자 가장 많은 일본인이 거주하던 곳으로, 부산항을 통해 많은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철도와 함께 중앙로를 닦았던 것이다. 광복 이후에서도 중앙 대로는 부산항과 전국을 이어주는 도로였으며 특히 경부 고속 도로가 건설되고 나서는 부산항을 통하는 수많은 물자들이 이곳을 통하여 오갔다. 중앙 대로는 1960~1970년대 한국의 산업화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길이었으며, 따라서 산업 도로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부산시와 부산 사람들은 상당한 고통을 감내하여야 했다. 거대한 화물 트럭이 도심을 관통하면서, 진동과 소음, 매연 등이 도시 환경에 나쁜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안 그래도 도로 사정이 열악한 부산에 심한 교통 체증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고속 도로가 아닌 시내 도로에서 컨테이너 트레일러가 달리는 모습은 부산에서는 익숙한 풍경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도심을 우회하여 부산항과 고속 도로를 직접 연결하는 도시 고속 도로를 만들게 되었다.
부산 최초의 도시 고속 도로인 번영로는 1977년 5월에 착공하여 1980년 10월에 완공되었다. 번영로는 중앙동 국제 부두에서 구서동 경부 고속 도로까지 총 21㎞로, 중앙로를 통할 경우 45분이 소요되던 것을 20분으로 단축시켰다. 번영로에는 산이 많은 부산답게 총 5개의 터널이 있었는데, 터널 안에서도 라디오 방송 수신이 가능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번영로는 부산 최초의 유료 도로로서 최초 요금이 승용차 100원, 10톤 이하 화물차 300원, 10톤 이상 500원, 버스는 600원을 징수하였다. 이후 2004년부터 무료화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1994년에 동서 고가로라고 불리는 제2 고속 도로가 건설되어 남해 고속 도로와 부산항이 바로 연결되었다. 또한 2001년에 중앙 고속 도로와 연결되는 제3 고속 도로인 관문 대로가 완공되었다.
부산은 지형적으로 산이 많은 도시다. 그래서 부산(富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산을 넘어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는 터널이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부산 최초의 터널은 서구 동대신동과 중구 영주동을 연결하는 부산 터널이다. 부산 터널은 일제 강점기 말인 1945년에 착공되었으나, 광복이 되면서 공사가 중단되어 1961년에야 개통되었다. 부산 터널은 남포동으로 우회하지 않고 서부산 지역을 연결시켜 주었는데, 사람뿐 아니라 부산항의 물류도 이곳을 통하였다. 교통량의 증가로 1988년 제2 터널이 개통되었고 원래 이름이었던 영주 터널에서 부산 터널로 개칭되었다.
이후 1971년에 대티 터널이 건설되어 서구와 사하구를 이어주었고, 1973년에는 제1 만덕 터널이 완공되어 구포 지역과 동래 지역을 연결하였다. 만덕 터널은 특히 남해 고속 도로와도 연결되기 때문에 통행량을 감당할 수 없어 1988년에 제2 만덕 터널이 건설되었으나, 여전히 상습 정체 지역으로 남아 있다. 1984년에는 구덕 터널이 뚫림으로서 부산항과 사상 공단, 나아가 남해 고속 도로가 더욱 빠르게 연결되었다. 1995년에는 황령 터널이 완공되었다. 이전의 터널들이 주로 도심을 외곽 지역이나 고속 도로와 연결되는 것이었다면 황령 터널은 부산시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황령산을 우회하지 않게 함으로써 도심 내부의 교통 흐름을 더욱 빠르게 해주었다. 현재에도 금정산 터널과 초읍 터널이 건설 중이거나 계획이 확정되어 있는 등 산이 많은 부산의 특성상 터널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터널이 산을 넘어 이곳과 저곳을 연결한다면, 물을 넘어 연결시켜 주는 것이 다리다. 그런데 다른 도시의 다리가 주로 강을 건너는 것이라면 부산의 다리는 바다를 건너는 것이 많다. 과거 부산을 상징했던 다리인 영도 대교가 대표적이다. 1934년 11월에 건설된 영도 대교는 우리나라 최초로 바다 위에 놓인 다리다. 또한 다리의 상판 한쪽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유일한 다리였다. 선박을 통과시키기 위해 하루에 여섯 번씩 다리를 들어 올렸는데 이 광경을 보기 위해 구경꾼들이 모여드는 등 부산을 상징하는 명물이 되었다. 이 때문에 6·25 전쟁 당시 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에 가면 영도 다리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였다는 일화가 생기기도 하였다. 영도 대교는 다리를 오가는 사람과 차량이 많아지면서 1966년부터는 더 이상 다리를 들어 올리지 않게 되었다. 이후로도 통행량은 계속 증가하여 1980년에는 영도 대교 옆에 부산 대교가 건설되었고, 영도 대교도 원래 명칭이었던 부산 대교에서 영도 대교로 바뀌게 되었다. 2003년에는 노후화로 인해 안전에 문제가 생겨 철거 논란을 겪기도 했으나, 2006년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면서 다시 다리를 들어 올리는 도개 기능을 되살리는 등 복원에 착수하여 2013년 11월에 준공되었다.
물론 부산에는 바다를 건너는 다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산과 김해를 이어주는 구포교는 낙동강 위에 놓인 최초의 다리로 1932년 건설되었다. 건설 당시 구포교는 한국에서는 물론 아시아에서 가장 긴 다리였기 때문에 낙동장교(洛東長橋)란 명칭이 붙었다. 구포교가 노후되자 철거와 보존 사이에 보존 논란이 있었지만 2003년 태풍 매미가 부산을 강타하면서 붕괴되기 시작하여 마침내 2008년 완전히 철거되기에 이르렀다. 이외에도 낙동강에는 구포교의 역할을 넘겨받은 구포 대교, 낙동강 대교, 명지 대교 등 여러 다리가 놓였으며, 수영강에는 수영교, 원동교, 동천에는 광무교, 온천천에는 세병교 등이 강 위에 놓인 대표적인 다리들이다.
그러나 부산을 특징지을 수 있는 다리는 바다 위에 놓인 다리다. 부산의 랜드 마크로서 영도 대교의 지위는 부산 타워 등에 의해 오래전에 상실되었지만 최근 들어 다른 다리가 부산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해운대와 용호동을 잇는 광안 대교, 공식 명칭 ‘다이아몬드 브릿지’가 그것이다. 광안 대교는 1994년 말 착공하여 2003년 1월에 개통되었는데, 국내 최초의 해상 복층 구조 다리이자 완공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현수교였다. 특히 광안 대교는 기존의 다리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 다리다. 보통의 다리가 강 이편과 저편, 또는 섬과 육지를 최단 거리로 잇는 연결점이라면, 광안 대교는 육지의 이곳에서 저곳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바다 위에 놓은 하나의 길이다. 부산은 산지가 많고 바다를 끼고 있기 때문에 육지에는 더 이상 도로를 놓을 평지가 부족하여 바다 위에 다리를 놓아 도로를 만든 것이다. 따라서 광안 대교는 광안 대로라고도 부른다.
이렇게 바다 위에 하나의 도로로서 놓인 다리는 부산만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2008년 서구 암남동과 영도구 영선동 사이에 남항 대교가 완공되었는데, 이 역시도 부산 신항과 북항의 물동량을 연결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이후 영도구와 남구를 잇는 북항 대교가 완공되면 부산 신항~명지 대교~남항 대교~광안 대교~경부 고속 도로로 이어지는 부산의 해안 순환 도로를 형성하게 된다.
이런 특징은 시내 교통뿐 아니라 시외 교통에서도 나타난다. 2010년 10월에 개통된 거가 대교는 부산과 거제를 잇는 8.2㎞의 시외 도로다. 거가 대교에는 2개의 사장교와 4개의 접속교, 그리고 1개의 해저 침매 터널이 있다. 해저 침매 터널은 육지에서 만든 터널 모양의 구조물을 바다에 빠트려 연결한 것으로, 수심 48m에 놓인 거가 대교의 해저 침매 터널은 우리나라 최초일 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건설된 것이다. 거가 대교는 남해 고속 도로로 돌아가면 2시간이 넘게 걸리던 거리를 50분으로 크게 단축시켰으며, 산업 도시인 거제와 부산 신항을 직접 연결하였다. 또한 부산과 거제를 하나의 권역으로 묶으면서 쇠락해 가던 남포동 일대 부산의 원도심 지역이 다시 활성화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렇게 도로는 시내뿐 아니라 시 바깥의 다른 지역을 연결하는 기능을 한다. 특히 다른 도시와 빠르게 연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고속 도로다.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고속 도로가 부산에서 시작하여 서울까지 연결된 경부 고속 도로다. 수출 주도적인 산업화를 추진하던 우리나라로서는 최대의 항만인 부산을 연결하는 고속 도로가 무엇보다 필요하였다. 경부 고속 도로에는 당시 국내 건설 사상 최대 규모인 430억 원을 투입하였으며, 총 연장 428㎞의 도로를 착공한 지 29개월 만인 1970년 7월에 개통하였다. 이로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4시간 17분 만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이어 1973년 11월에는 남해 고속 도로가 개통되었다. 순천에서 부산까지 이어지는 남해 고속 도로는 남해안의 중화학 공업 단지의 수출을 위해 건설한 도로로, 1984년 88 고속 도로가 건설되기 전까지 영남과 호남을 잇는 유일한 고속 도로였다.
경부 고속 도로가 경부 철도와 중복을 피하고 좀 더 많은 도시를 경유할 수 있도록 건설되는 바람에 부산에서 대구까지는 경주로 우회하여 건설되었다. 따라서 한국 경제가 발전하고 많은 고속 도로가 건설되면서 부산에서 대구까지 바로 연결하는 고속 도로의 건설이 제기되자, 2006년 1월 신대구 부산 고속 도로가 개통되었다. 신대구 부산 고속 도로의 개통으로 부산~대구 간 거리가 경부 고속 도로보다 40㎞가량 단축되어 30분 정도의 시간을 절감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경부 고속 도로로는 언양을 우회하여 울산을 가야했기 때문에 2008년 12월에는 부산 해운대구와 울산 남구를 연결하는 부산 울산 고속 도로가 개통되었다. 그리하여 30분이면 울산까지 갈 수 있게 되어 부산과 울산이 같은 생활권으로 묶이기 시작하였다.
[부산의 대중교통]
우마차 정도가 다니던 구불구불한 근대 이전의 길이 크고 반듯한 신작로로 바뀌면서 그곳을 달리기 시작한 것이 자동차다. 우리나라가 처음 자동차를 도입한 것은 1903년으로 고종의 의전용으로 구입한 승용차였다. 그러나 제대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부산에 언제 자동차가 등장하였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통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19년으로 당시 부산에 총 19대의 자동차가 있었다. 자동차를 이용한 대중교통으로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택시다.
우리나라에 택시가 등장한 것은 1919년 12월로 서울에 경성택시회사가 설립되면서부터다. 부산에 언제 택시가 등장하였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1926년에 이미 안전택시, 대덕자동차회사가 있었다고 있다. 일제 강점기 동안 택시가 서서히 보급되었지만 확실한 통계는 1960년대 이후부터 확인할 수 있다. 1961년 부산에 530대의 택시가 있었는데 이후 급격한 변화 없이 조금씩 늘어나다가 전차가 폐지되면서 급격히 증가하였다. 1977년에는 승객에 대한 서비스 향상을 목적으로 개인택시가 처음 도입되어 303대가 운행하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88 서울 올림픽에 맞추어 체구가 큰 서양인들의 불편함을 줄이고 서비스를 개선한다는 목적으로 배기량 1,500㏄ 이상의 차량인 중형 택시가 도입되었다. 이후 택시는 소형 택시와 중형 택시로 이원화되어 운행되다가 1990년부터 소형 택시를 폐차하면 중형 택시로 전환하게끔 하면서 자연스레 모든 택시가 중형 택시로 일원화되었다.
초기의 택시는 승객이 출발하기에 앞서 ‘어디까지 얼마에 가자’고 흥정해서 요금이 정해지는 계약 요금제였다. 이후 택시가 대중화되면서 1976년부터 탑승한 거리만큼 요금을 내는 거리 비례 요금제로 바뀌었다. 그러다 대도시의 교통이 혼잡해지고 택시 기사들이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손님을 태우기 위해 난폭 운전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자 1987년부터 거리뿐 아니라 운행 시간도 같이 계산하여 요금을 매기는 거리·시간 병산 요금제가 실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철도에 이어 대중교통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버스다. 우리나라에서 버스의 운송 사업을 시작한 것은 1913년 대구~포항 간을 운행하면서다. 이후 부산을 포함한 여러 도시에서 버스가 운행되었으나,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자 육상 운송에 대한 통제 조치를 실시하면서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6·25 전쟁 등으로 여전히 위축되었다가 종전 후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과거 버스 요금은 현금으로 버스 안내양에게 직접 지불하였다. 안내양은 차장으로도 불렸는데, 버스 중간에 있던 문 앞에 서서 승객에게 요금도 받고 승하차가 제대로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등 버스 운행을 보조하였다. 그러다가 1978년 2월부터는 토큰 제도가 실시되었다. 토큰은 금속 동전 모양의 버스표로 승객이 버스 정류장 근처의 토큰 판매소에서 구입하여 버스를 이용할 때 납부하였다. 토큰제를 도입한 것은 버스 회사의 수입 내역을 파악하여 탈세를 막고, 소위 ‘삥땅’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삥땅’은 안내양 등이 승객에게서 받은 요금을 회사에 납부하지 않고, 몰래 가로채는 행위로, 당시 이를 적발한다는 이유로 안내양의 몸수색을 하는 등 인권을 침해하는 경우가 많아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거스름돈을 내주는 데서 오는 혼잡과 불편을 덜고, 버스 정차 시간이 줄어들어 교통 체증을 완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1983년에 전국 6대 도시에 시민 자율 버스가 도입되었다. 시민 자율 버스는 이전의 버스가 가운데에만 문이 있었던 반면, 오늘날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버스 앞과 중간에 자동으로 여닫을 수 있는 두 개의 문이 달렸다. 시민들이 앞쪽의 문으로 버스를 타면서 요금함에 요금을 직접 내게 되면서 시내버스에서 안내양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1968년 부산이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전차가 폐지되고 버스·택시 같은 차량을 중심으로 대중교통 체계가 형성되었으나, 급격한 도시 성장이 계속되면서 이 역시도 한계를 보이게 되었다. 따라서 다시 도시 철도에 대한 요구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대도시에 적합한 교통수단인 지하철이 등장하게 되었다. 1978년 12월 기본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하여 1981년 6월에 착공된 부산 지하철 1호선은 1985년 7월 노포역~범내골역 간 16.2㎞의 1단계 구간이 개통되어 운행되면서 부산은 전국에서 두 번째로 지하철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후 단계별로 건설이 계속되어 1994년 신평역까지 개통되면서 34개 역 32.5㎞의 부산 지하철 1호선이 완성되었다.
2호선은 양산역~장산역 간 42개 역 45.2㎞ 구간으로, 1991년 11월에 착공하여 2008년 1월에 완공되었다. 1호선과 2호선이 서면역에서 환승할 수 있게 되면서 부산의 남북축과 동서축이 서로 만나 입체적인 도시 철도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3호선이 1997년 11월에 착공하여 2005년 11월에 수영역~대저역 간 17개 역 18.1㎞로 완공되었다. 4호선은 2003년 12월에 착공하여 2011년 3월 미남역~안평역 간 14개 역 17.2㎞가 완공되었다. 특히 4호선은 국내 최초의 경전철로 고무바퀴를 사용하여 소음과 진동이 적고 구불구불한 지형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장점이 있다. 또한 국내 최초로 무인 운전 시스템을 도입하여 운영비가 절감되고 승객이 전방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이로 인해 사고와 승객 안전에 취약하다는 논란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도시 철도가 확충되면서 지하철은 부산 사람들의 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노선이 서로 만나는 환승역이 있는 곳은 유동 인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도심으로 활성화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1호선과 2호선이 만나는 서면지역이 부산의 중심가로 완전히 자리 잡았으며 3호선이 뚫리면서 2호선과 환승 지역인 덕천동 일대가 부상하였다. 최근에는 4호선 개통의 여파로 동래역 일대가 북적이고 있다.
이렇게 부산에도 도시 철도가 자리 잡았으나, 다른 대중교통인 버스와의 연계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많았다. 이에 2007년 5월부터는 버스 운영에 부산시가 개입하는 버스 준공영제를 실시하면서 지하철을 중심으로 버스 노선을 조정하고 시내버스와 지하철 간에도 환승이 가능하게 되었다. 교통수단 간 환승 체계의 도입으로 시민들이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게 되었으며, 교통비도 절감하게 되는 등 본격적인 도시 대중교통 체계가 형성되었다.
이렇게 시내 교통망을 하나로 통합하여 환승 체계를 구축하는 데는 10여 년 전부터 사용해 온 교통 카드가 큰 도움이 되었다. 1997년 9월 시범 운영을 시작하여 1998년 2월부터 전면적으로 사용하게 된 하나로 카드가 그것이다. 하나로 카드는 전국 최초의 통합 교통 카드다.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버스를 탈 때는 토큰을, 지하철을 이용할 때는 승차표를 각기 이용하였고, 상시적으로 여러 개의 토큰을 들고 다니거나, 주기적으로 정기권이나 정액권을 발급받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러나 교통 카드는 한 장의 카드로 버스와 지하철 모두를 이용할 수 있고, 버스나 지하철에 탑승할 때 단말기에 갖다 대기만 하면 되어 더욱 빠르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교통 카드가 급격히 보급되면서 토큰이 사라지게 되었고, 버스 정류장마다 있던 토큰 판매소는 일부가 카드 충전소로 바뀌었으나, 많은 곳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교통 카드는 주차장의 주차료, 유료 도로나 터널의 통행료뿐 아니라 자동판매기에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하나의 전자 화폐로 자리 잡았다.
[부산의 바닷길과 하늘길]
부산에는 육지의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다의 길도 있다. 부산은 단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도시가 아니라 바다로 길이 나 있는 도시다. 이 바다의 길이 부산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만든 핵심 요소 중 하나다. 조선 시대까지 지역의 중심은 내륙인 동래였으나, 그 아래 딸린 부산이 개항으로 발달하면서 오히려 동래를 포괄하게 되었다. 이전에도 부산은 일본과의 외교·무역의 유일한 교류 창구였다. 그러던 것이 강화도 조약 이후 개항된 부산에 근대적인 항만 시설이 건설되면서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고, 이를 부관 연락선이 일본으로 연결하면서 부산은 일본과 한반도 그리고 대륙을 잇는 물적·인적 흐름의 중심지가 되었다.
부관 연락선(釜關連絡線)은 부산(釜山)의 앞 글자와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의 뒤 글자를 딴 것으로, 1905년 9월에 증기선 이키마루호[壹岐丸號]가 도시 사이를 11시간 30분에 걸쳐 운항하면서 시작되었다. 부관 연락선은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산요선[山陽線]을 거쳐 고베[神戶]에 이르고 다시 고베에서 도카이도선[東海道線]으로 도쿄[東京]까지 철도와 연결되고 부산에서 경부선·경의선를 걸쳐 만주의 안봉선·남만주 철도·시베리아 철도와 같은 대륙 철도로 이어지는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맥의 하나였다. 경부선과 부관 연락선은 우리나라를 식민지 근대로 편입시킨 핵심적인 교통망으로 부산은 유일하게 이 두 교통망의 기종착점을 동시에 가진 곳이었다.
1935년에 당시로서는 최신예 여객선이었던 공고마루호와 고안마루호 등이 취항하면서 시간도 7시간 30분까지 단축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1943년 3월 고안마루호가 미군에 의해 격침되면서 사실상 부관 연락선은 단절되었으며, 광복 이후에도 한일 간에 국교가 정상화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부산에서 다시 일본으로 가는 뱃길이 열린 것은 1964년 1월 여객선 아리랑호가 운항하면서부터다. 이후 1970년 6월 17일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이틀마다 한 번씩 오가는 부관 페리가 정식으로 취항하였으며, 현재는 1일 1회씩 운항하고 있다. 그 외에도 부산에서 대마도와 오사카[大阪] 등을 오가는 국제 여객선이 각각 정기 운항하고 있다.
부산에 처음 비행기가 등장한 것은 1940년 일본이 지금의 벡스코 일대에 육군 비행장을 건설하면서부터다. 수영 비행장이라 부르던 이곳은 광복이 되고 일제의 시설물을 접수한 미군이 1946년 C-47 항공기 8대를 투입해서 주 2회 서울~대구~부산을 오가는 정기 노선을 개설하면서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수영 비행장은 6·25 전쟁으로 서울의 비행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1950~1954년 4년 동안 우리나라 유일의 임시 국제공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6·25 전쟁이 끝나고 다시 서울의 여의도 비행장이 국제공항으로 회복되면서 국내선만 운행되다가, 부산이 직할시로 승격한 1963년 부산~후쿠오카 간 정기편이 취항하면서 정식으로 국제공항으로 승격되었다.
1960~1970년대에 부산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항공 수요도 급증하였다. 이로 인해 수영 비행장은 이내 한계에 봉착하였다. 활주로가 작아 대형 항공기가 이착륙하기 어렵고, 공항 건물도 협소하여 승객들의 불편도 많았다. 결국 국제공항으로 승격된 지 몇 년도 안 되서 이전 논의가 제기되어 1972년 김해 비행장으로의 이전이 결정되었다. 1976년 8월 김해 공항이 개장되었고, 수영 비행장은 폐쇄되기에 이르러 오늘날에는 수비 사거리와 같은 지명에만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이전 개장한 김해 공항도 거대 도시이자 국제도시로서 부산의 항공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상태다. 김해 공항은 인천 공항, 김포 공항, 제주 공항과 함께 몇 안 되는 흑자 공항으로 이용 승객이 많아 1993~1999년, 2007년 등 여러 차례 걸쳐 확장 공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현재는 더 이상 확장이 어려운 실정이다. 이로 인해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김해 공항을 이전할 신공항을 건설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김해 공항을 대체할 신공항 건설이 정책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했으나 대구·경상북도 지역이 여기에 가세하면서 신공항 입지를 둘러싼 논란이 발생하여 결국 무산되었다. 하지만 김해 공항의 한계가 기정사실화되면서 신공항 문제는 2012년 대선 과정에서 다시 등장하여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길의 도시, 부산]
부산은 길의 도시다. 길이 끝나는 곳이 아니라 시작하는 곳이고 길과 길을 이어주는 곳이다. 부산만큼 다양한 길들이 만나는 곳은 없다. 철길, 고속 도로, 산업 도로, 산복 도로와 같은 땅의 길뿐 아니라 섬과 대륙을 오가는 바닷길이 열린 곳이고 다른 도시와 다른 나라를 오가는 하늘길이 열린 곳이다. 길에 쌓인 부산의 기억은 다층적이다. 일제 강점기 국권 상실과 수탈의 길이었고, 광복이 되서는 귀환 동포와 피난민을 받아주었던 생존과 생활의 길이었다. 산업화 시기에는 국가 재건과 경제 발전의 길이기도 했다.
오늘날 부산의 길은 많은 숙제를 안고 있다. 도시 내부를 들여다볼 때 부산의 길은 가장 비싼 길이다. 산지가 많고 평지가 부족한 지형적 특성으로 비용이 많이 드는 터널과 다리가 많은데 국가의 지원은 적어 유료 도로가 전국에서 가장 많기 때문이다. 인근 도시와의 연결되는 길도 부족하다. 서울이 일찌감치 주변 도시와의 도로와 전철망을 구축하여 수도권이라는 광역권을 형성하여 발전해 나간 반면, 부산은 양산, 김해, 창원, 울산, 거제 등 주변 도시와의 광역 도로망과 전철망의 건설이 뒤늦거나 부족한 감이 있다. 광역권의 형성이 미흡한 반면 KTX의 개통 등으로 오히려 수도권으로 인력과 자금 그리고 시장이 유출되는 ‘빨대 현상’이 제기되고 있다.
그 반면 미래의 길은 불투명한 상태다. 부산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로 열린 길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즉, 부산의 발전은 길의 쇄신에 있다. 그러나 북항 재개발이나 항만 공사 등 바닷길에서도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으며, 김해 공항의 포화 문제나 신공항 건설 등 하늘길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은 여전히 미지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