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012 |
---|---|
한자 | 韓國映畵-故鄕-釜山國際映畵祭 |
영어의미역 |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The Hometown of Korean Cinema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호일 |
[부산 최초의 극장 행좌]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에서 탄생한 영화는 이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세계에 퍼져 나갔다. 불과 두 달 만에 영국에 상륙하였고, 10개월 안에 러시아, 미국, 인도, 중국까지 진출하였다. 일본에는 1897년 2월에 도착하였다. 1876년 개항한 부산은 다른 지역보다 외래문화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런 분위기에 편승한 영화도 일본을 거쳐 부산에 소개되면서 한국에 상륙하였다. 영화는 지금과는 달리 활동사진(活動寫眞)이라 불리었는데 이는 일본의 한학자 후쿠치[福知]가 이름을 지은 것이다.
당시 부산에는 전국 최초로 극장 취체 규칙[공연장 시설과 운영에 관한 법. 1895년]이 제정되었는데 그 즈음에 부산에 극장이 존재하였다고 짐작할 수는 있으나 아직 밝혀진 것은 없다. 영화가 국내에 첫 선을 보일 즈음 부산에는 이미 6,000여 명이나 되는 일본인 거류민이 용두산을 중심으로 한 조계지(租界地)에 모여 ‘작은 일본’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그래서 국내 최초로 영화를 상영한 곳이 부산이며, 영화를 최초로 본 한국인은 아마도 부산 사람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부산은 한국 영화의 고향으로 불린다.
현재 문헌상 1903년 설립된 행좌(幸座)가 부산 최초의 극장이다. 행좌는 현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할매 회국수집과 서울 깍두기 사이의 좁은 골목길에 있었다. 그러나 옛날의 화려한 모습과 달리 지금은 양쪽의 건물들이 서로 등지고 있는 길이 되어 버려서 인적이 거의 닿지 않고 있다. 이후 1914년 3월 욱관(旭館)이 개관되면서 ‘상설관 시대’가 열렸다. 현재 ‘피프 광장’이라 불리는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과 용두산 공원 인근에 극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보래관[1914년], 태평관[1922년], 소화관[1931년], 부산 극장[1934년] 등이 신축되어 극장가를 형성하면서 부산은 근대 한국 영화의 중심지로 우뚝 섰다.
행좌, 송정좌를 비롯해 수많은 극장들은 일본 전통극 공연장으로 출발하였지만 연극의 지위를 영화가 잠식해 들어가는 동안 서서히 영화관으로 바뀌어 갔다. 행좌 역시 일본 전통극인 가부키 공연장이지만 초창기부터 영화를 함께 상영하였다. 다다미 바닥에 앉아 전통 연희를 보는 장소를 뜻하였던 좌(座)라는 이름은 근대적 복합 공연장인 관(館)으로 변모되었고 영화관인 극장이 된 것이다.
[최초의 영화사 조선키네마]
1924년 7월 11일 한국 최초로 영화사인 조선키네마가 부산에서 탄생되어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경손(李慶孫), 김정원 등 도쿄[東京] 유학생들이 조직한 무대예술연구회를 중심으로 영화 제작소 설립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면서 자본금 20만 원으로 최초의 영화사가 부산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조선키네마를 통해 안종화(安鍾和), 이경손 등 영화감독과 이채전, 유수준 등이 영화배우로 데뷔하였고 영화 「아리랑」의 나운규(羅雲奎)도 조선키네마에서 활동하였다.
부산항에서 바로 마주 보이는 복병산 꼭대기, 옛 러시아영사관 자리에 보금자리를 튼 조선키네마는 2년간 운영되었으며 이 후 일본 요새사령부를 거쳐 광복 후에는 미군 장교 구락부로 사용되다가 1953년 11월 27일 발생한 부산 역전 대화재 때 소실되었다.
조선키네마의 창립작은 「해의 비곡」이었다. 촬영은 영화 제작에 의욕을 가졌던 다카사가 왕필열(王必烈)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감독을 맡았고, 무대예술연구회 회원이던 이경손이 조감독을 맡았다. 「해의 비곡」은 우연히 만난 두 젊은 남녀가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알고 보니 이복 남매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이룰 수 없는 사랑의 한을 안고 바다에 몸을 던진다는 내용을 그렸다.
출연진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었다. 24살의 경남은행 출납계원이었던 이주경(李周璟)이 주연을 맡았는데 미남으로 명쾌하고 활동적이었다. 특히 이주경은 당시 부산에 야구 붐이 일어날 때 투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지만 은행을 그만두고 배우로 변신해 눈길을 끌기도 하였다. 촬영은 주로 부산에서 이뤄졌고 제주도까지 가서 한달 동안 묵으며 영화 작업을 이어 나가기도 하였다. 개봉 결과, 3,000원의 흑자를 낼 만큼 성공적인 작품이었다.
조선키네마는 창립 다음 해인 1925년 「운영전」, 「암광」, 「촌의 영웅」 등을 내놓았으나, 영화 시장이 예상보다 협소하였고 일본 배급 회사와 관계도 틀어져 수출 판로가 막히게 되자 네 편의 영화만을 제작하고 문을 닫았다. 하지만 조선키네마에서 활동한 제작진과 연기진은 서울로 올라가 당시의 무성 영화 시대에 힘을 보탰다.
유성 영화인 토키 시대를 맞아 1929년 7월 부산 행관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토키 영화인 일본 시대극 「돌아오는 다리」가 상영되었다. 이어 1930년대 부산 영광키네마 등에서 극영화 제작 운동이 처음 일어났으며, 1948년 순 부산 제작 영화 1호인 「해연」이 탄생하는 등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과 광복을 맞기까지 부산은 한국 영화의 고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부산 문화 지형의 변동을 몰고 온 6·25 전쟁]
1950년 6·25 전쟁은 부산 문화 지형의 지각 변동을 몰고 왔다. 1·4 후퇴 후 피난민 유입으로 부산 인구는 47만 명에서 84만 명으로 늘어났다. 거주민과 유입민이 반반씩 뒤섞인 셈이었다. 영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산에 이주한 영화인 중 절반은 영화 제작으로 담배 한 대 피울 짬도 없을 정도로 분주하였으며, 나머지는 금강 다방과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며 무료한 피난지의 시간을 보내야 하였다.
전시 기간 중 한국 영화는 부산과 진해, 대구로 나뉘어 제작되었다. 부산에서는 1·4 후퇴 이후 한형모, 양주남 감독이 이끄는 국방부 정훈국이 보수동 목욕탕에 짐을 풀었다. 공보처는 경상남도청 지하실에서 종군 기자들이 촬영해 온 필름을 현상하고 편집해 뉴스를 내보냈다. 공보처의 중심인물은 조선키네마에서 활동하였던 안종화 감독이었다. 전쟁이라는 역사적 우연으로 부산은 다시 한국 영화 제작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하지만 1953년 7월 휴정 협정이 체결되자 영화인들의 서울 이주가 시작되었다. 국방부 정훈국은 현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에서 서울 남산의 한옥 마을로 시설과 자재를 옮기고 필동 촬영소로 이름 붙였다. 필동 촬영소는 195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영화의 메카인 ‘충무로 시대’를 견인하는 한 축을 담당하였다.
[지역 문화의 파수꾼,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는 1958년 영화 평론가 허창(許彰)과 부산대학교 교수 장갑상(張甲相)을 비롯해 작가 이주홍(李周洪)·여수중·박두석(朴斗錫)·황용주(黃龍珠)·김일구 등이 의기투합해 설립되었다. 지역 영화 저널리즘을 선도한 부산영화평론가협회는 부산대학교 내에 영화연구회 등과 손잡고 영화 시사회 및 비평 모임을 통해 영화 지망생들을 지도하는 등 지역 문화의 파수꾼 같은 역할을 하였다.
특히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설립의 일등 공신인 장갑상은 같은 해 최초의 영화상인 부일 영화상(釜日映畵常)의 탄생에도 간여하였으며, 영화진흥공사 부산지사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후일 영화 도시 부산의 탄생을 돕는 밑거름 역할을 하였다. 장갑상은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설립을 주도하면서 부산 영화 평론가상 제정에 최우선 과제를 두기도 하였다. 트로피를 직접 디자인하고 재정 확보에 앞장섰으나 끝내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부산 국제 영화제의 성공과 함께 후배 부산영화평론가협회 회원의 노력으로 2000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이 제정되어 장갑상의 꿈이 실현되었다.
[한국 최초의 부일 영화상]
한국 최초의 영화상은 부산에서 탄생하였다. 1958년 부산 국제 영화제의 초석을 다진 부일 영화상이 출범한 것이다. 이는 현존하는 대종상 영화제, 청룡 영화상, 춘사 영화상 보다 앞섰다.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신문사 최초로 부산일보사가 제정한 제1회 부일 영화상 시상식이 1958년 3월 27일 부산 국제 극장에서 역사적인 막을 열었다.
당시 부산일보[1958년 1월 29일자]는 부일 영화상 제정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본사에서는 부일 영화상을 제정하여 금년부터 각기 상을 수여하기로 하였다. 영화는 가장 대중적인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부일 영화상은 영화 문화의 급속하고 올바른 발전을 위하여 제작 관계자에게는 예술성을 높일 것을 자극하고 흥행 관계자에게는 예술성이 높은 작품을 흥행하는 의욕을 조성하자는 것이다. 한국에서 최초의 신문사에 의한 영화상인지라 얼마만큼의 성과를 올리게 될는지 예측하기 어렵지마는 우수한 영화가 제작 또는 수입되고 우리는 그 영향을 받아서 보다 나은 보다 진실한 생활을 영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본사에서 영화상을 제정한 궁극의 의도인 것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 당시 부일 영화상은 범람하는 외국 영화에 맞서 한국 영화의 발전을 선도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시상식 첫 해인 1958년 「잃어버린 청춘」이 최우수 한국 영화상과 감독상[유현목]을, 「시집가는 날」의 김승호와 「실락원의 별」의 주증녀가 남녀 주연상 수상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부일 영화상 탄생을 계기로 국내에서는 각종 영화상들이 앞 다투어 제정되었다. 1962년에는 문화공보부가 대종상을, 1963년 조선일보사가 청룡 영화상을, 1965년 한국일보사가 한국 연극 영화 예술상을, 1968년 서울신문사가 서울 신문 문화 대상 등을 만들어 한국 영화 전성시대를 뒷받침하였다.
제2회 부일 영화상 때는 연기 부문 남녀 조연상을 비롯하여 각본, 촬영, 미술, 음악 등 기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6개 부문을 신설하는 등 최대의 영화제전으로 성장해 나갔다. 제3회 부일 영화상 때는 신인 연기상이 신설되어 「가난한 애인들」의 이수련이 수상하였으며, 그 후 태현실, 이낙훈, 고은아, 남정임, 문희, 윤정희, 김창숙, 김희라, 윤여정 등이 신인상을 받아 한국 영화계를 이끌어 가는 대들보를 탄생시켰다.
제6회 부일 영화상[1963년] 때는 특별상을 신설하여 「진시황제와 만리장성」을 제작한 한양영화사에 첫 수상의 영광이 돌아갔으며, 제9회 부일 영화상[1966년] 때는 남녀 인기상을 신설해 김진규와 김지미가 첫 수상의 기쁨을 누렸다. 이후 인기상은 남우 부문에서 신성일이 3회, 신영균과 최무룡이 각 2회씩을 차지하였으며, 여우 부문에서 윤정희가 4회, 문희가 2회, 고은아가 1회를 차지해 당대 최고의 인기 스타임을 과시하였다.
영화인은 물론 팬들과 부산 시민이 정성 들여 가꾸어 온 부일 영화상 시상식이 열렸던 극장과 퍼레이드가 펼쳐졌던 당시 부산의 거리는 축제의 한마당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하지만 부일 영화상은 텔레비전의 급속한 보급과 한국 영화 산업의 사양화 등으로 인해 1973년 4월 14일 제16회 시상식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던 부일 영화상은 2008년 35년 만에 부활하였다. 『부산 일보』는 2008년 9월 17일자 신문에 이렇게 알렸다. “국내 최초의 본격 영화상으로 지난 1958년 부산일보사가 제정하였던 부일 영화상이 35년 만에 부활됩니다. 부산일보사는 창간 62주년을 기념해 1973년 제16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던 부일 영화상을 부활시켜 부산 국제 영화제 기간인 오는 10월 9일 부산 해운대 그랜드 호텔에서 제17회 시상식을 갖습니다. 역대 수상자를 비롯한 영화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할 부일 영화상 시상식은 영화인들의 축제 한마당이 될 것입니다. 또한 부일 영화상은 PIFF를 한층 더 풍성하게 하는 한편 부산이 아시아 최고의 영상 산업도시로 성장해 가는 데 크게 일조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부활된 부일 영화상은 18개 부문의 시상자를 선정해 1973년 중단되기 전보다 두 개 부문을 늘렸고, 특히 영화인들이 대거 몰리는 부산 국제 영화제 개막식 다음날로 시상식 날짜를 고정해 한국 영화인의 최대 축제로 거듭나고 있다.
[최초의 국제 영화제 탄생]
1996년 9월 13일 오후 6시 30분, 우여곡절 끝에 부산 국제 영화제가 막을 올렸다. 해운대 수영만 야외 상영장은 5,000여 명의 관객으로 가득 찼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어디서 온 것인가, 라며 초청 손님과 관객들은 서로 얼굴을 보며 의아해 하였다. 이런 가운데 부산뉴필하모니오케스트라가 조용필의 히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연주하자 객석이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첫 개막식 사회의 행운은 영화배우 문성근과 전문 엠시 김연주에게 돌아갔다. 문정수 부산광역시장이 “제1회 부산 국제 영화제 개막을 선언합니다.”며 힘찬 선언으로 신화의 시작을 알렸다. 이어 김동호 집행위원장이 개막작 「비밀과 거짓말」 소개를 마치자 지붕처럼 뉘여 있던 야외 스크린이 서서히 일어섰다.
수영만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 남포동 거리로 쏟아져 나온 젊은 관객들의 열기에 김동호 집행위원장도 감격하였고 문정수 조직위원장도 흥분하였다. 사무국의 스태프, 자원봉사자들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야외 상영장을 찾은 구름 같은 관객들도 여러 번 놀랐다. 말로만 듣던 야외 스크린의 위풍당당함에, 화려한 불꽃놀이에, 그리고 앞줄에 빼곡히 앉아 있는 영화 스타들의 얼굴에 놀랐다.
개막작의 주인공인 블렌다 블레신과 장 마리 밥티스트, 그리고 신성일, 김지미, 장미희, 심은하, 강수연, 안성기 등이 관객과 함께 「시네마 천국」의 한 장면처럼 야외 스크린에 영사되는 영화를 감상하며 제1회 부산 국제 영화제 개막식의 탄생을 축하하였다.
한국 최초의 국제 영화제의 역사는 이렇게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한국 영화인의 잔치였으며 부산 시민의 축제였다. 부산 국제 영화제는 행운아였다. 무엇보다 한국 최초의 국제 영화제가 수도 서울도 아닌, ‘문화의 삼류 도시’ 부산에서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부산은 형편없는 극장 시설에서 액션과 에로 영화만 통하는 그야말로 변두리 혹은 시골로 치부되던 시절이었다.
그런 곳에서 재미없는 예술·작가주의 영화를 상영하는 국제 영화제를 연다는 것이었기에 어쩌면 모험이었다. 솔직히 논의 단계에서 단발성 행사로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산 국제 영화제는 열렸고 꿈은 실현되었다. 부산 국제 영화제 첫 회에 31개국, 169편의 작품이 부산에 왔다. 개막일로 잡은 ‘13일의 금요일’에 대한 우려와 걱정도 한순간에 사라졌다.
시작부터 느낌이 좋았던 것은 무엇보다 관객들의 폭발적인 반응 때문이었다. 개막일까지 판매된 입장권은 무려 5만 장을 넘어섰다. 집행부의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할리우드 영화가 아닌 색다른 영화를 맛보고자 하였던 관객의 갈증은 입장권 판매 숫자로 표현되고 있었다.
극장들로 둘러싸인 남포동 피프 광장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최상의 영화제 장소였다. 젊은 열기로 뒤덮인 한낮의 광장, 노천카페에 삼삼오오 모여 맥주 한잔 들이켜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피프 광장과 남포동 거리에 주말이 되자 젊은이들로 넘쳐났다. 사실 남포동은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인파가 몰려 빼꼭해 보이는데 여기에 영화제까지 덧칠되었으니 장소 선정은 그야말로 최적이다.
부산 국제 영화제 상영 시간표를 들고 오가는 사람들과 주말을 맞이하여 시내로 나들이를 나온 시민들이 한데 섞여 영화의 거리는 활력으로 넘쳐났다. 피프 광장 야외무대를 통한 영화인들과의 만남도 영화제 분위기를 한층 들뜨게 만들었다. 초청된 한국 영화감독들과 배우들이 야외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고 무대 인사를 하면 이내 인파들로 메워졌다. 얼굴 한 번 제대로 마주칠 수 없었던 부산에서 스타들의 행렬이 이어졌으니 시민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다.
부산을 처음 방문한 외국 게스트들은 이런 부산 관객의 열정에 깜짝 놀랐다. 무엇보다 그들이 놀란 것은 남포동을 가득 메운 관객의 대부분이 10~20대의 젊은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유명 해외 영화제의 주요 관객들이 중년층임을 감안할 때, 남포동의 관객들은 여느 영화제에서도 보기 힘든 낯선 풍경이었다. 칸과 베를린, 베니스 등 해외 유수의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을 비롯해 버라이어티 등의 외신 기자들은 부산 국제 영화제에 ‘젊은 영화제’라는 수식어를 붙였고 “영화제에 희망이 보인다.”는 소식을 연이어 타전하였다.
[세계 5대 영화제로 우뚝 선 부산 국제 영화제]
부산 국제 영화제는 과연 성공하였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정부나 연구 기관, 언론, 관객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부산 국제 영화제가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일궈 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선두에서 이끌었으며 항구와 신발 산업뿐이었던 부산을 영화 도시로 바꾼 일등 공신이라는 점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부산 국제 영화제의 성공 비결은 무엇보다 민간 전문가 중심으로 짜인 조직위원회의 자율 운영이 밑바탕이 되었다. 김동호 명예 집행위원장과 이용관 집행위원장, 전양준·김지석 부위원장 등 영화 전문가로 구성된 집행위원회가 운영을 맡고 부산광역시는 행정 및 재정 지원만을 전담한 철저한 역할 분담이 주효하였다.
‘저비용 고효율’을 지향한 운영 방침과 다른 영화제와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상업성을 배제한 것도 성공의 주요인이다. 또 작품을 선정해 순위를 정하는 칸이나 베를린, 베니스 등의 경쟁 영화제 대신 비경쟁 영화제를 선택한 것도 성공에 힘을 보탰다. 여기에 부산 시민의 영화에 대한 강한 애정과 자발적인 참여, 영화 전문가 및 행정 기관 등의 하나같은 의지를 잘 조화시킨 점도 한몫을 단단히 하였다.
[부산은 아시아 영화의 중심지]
언론의 평가는 후하였다. 국내외 많은 영화인과 기자, 관객들은 부산 국제 영화제가 ‘세계 5대 영화제’, ‘아시아의 칸’으로 우뚝 섰다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영화의 고향’ 프랑스의 『르몽드』는 1997년 10월 22일자 기사에서 “장차 아시아 영화의 독자적 중심지가 되고자 하는 부산의 야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보도하였다. 또 일본의 유력지 『아사히 신문』도 “지난해[1996년] 가을에 갓 태어난 영화제지만, 아시아 독립 영화의 거점을 기치로 한 의욕적인 기획으로 외국 영화 관계자들로부터 도쿄 영화제를 능가하는 주목을 끌었다. 지난 10월 10일부터 9일 동안 모두 18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한 제2회 부산 국제 영화제는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가 되었다고 해도 손색이 없다.”며 후한 점수를 주었다.
해가 바뀐 1998년,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 알리슨 다코다지 기자는 「아시아의 칸[The Cannes of Asia]」이라는 과감한 제목을 뽑으며 이렇게 썼다. “아마 그것은 수천 명의 사람들과 별빛이 가득한 해변이었거나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6층 높이의 대형 야외 스크린이었을는지 모른다. 아니면 홍콩의 관금봉이나 중국의 티안 주앙주앙, 그리고 인도의 수디르마슈리갈 같은 보기 힘든 아시아 감독이 존재하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또 다르게는 접시에 가득 담긴 부드러운 회와 좋은 술이 끊임없이 제공되어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이유가 어쨌거나 부산 국제 영화제의 화려한 개막식은 이 8일간의 행사가 ‘아시아의 칸’으로 발돋움하려는 서막이었음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1999년 4회 부산 국제 영화제를 전후해 언론들은 부산 국제 영화제를 아시아 최고로 손꼽기 시작하였다. 『조선 일보』는 부산 국제 영화제 결산 기사[1999년 10월 25일]에서 「아시아 대표 영화제 자리 굳혔다」라는 제목을 뽑으며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23일 폐막한 부산 국제 영화제는 관객과 부산 시민, 국내외 영화인들이 한데 어울린 풍성한 영상 축제였다. 부산 영화제는 4회째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 내면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확실히 자리를 굳혔다. 열흘 동안 관객은 18만 명, 작년보다 1만 명가량 줄었지만 상영관이 밀집한 남포동은 젊은 관객들로 연일 인산인해를 이뤘다. 각국 영화 관계자와 기자들을 포함한 해외 게스트 400여 명이 몰려들었다.”
프랑스 『르몽드』의 자크 만델봄 기자는 「할리우드에 대항하는 부산에서의 움직임」이라는 제목과 「부산, 한국의 영화제는 18만 5000명의 관객을 모으면서 그 중요성을 확인시켰다」라는 부제의 글을 통해 이 해 영화제를 유럽 전역에 알렸다. “한국의 제2의 도시 부산에서 열린 부산 국제 영화제는 예술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 영화의 가장 큰 진열장으로 소임을 확인받는 자리였다. 한국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은 이후로 18만 5000명의 관객을 동원하였고, 53개국으로부터 온 208편의 영화들을 선보였다.”
2002년 부산을 찾았던 홍콩의 유력지 『명보』는 홍콩이 아시아 최고 영화제 자리를 부산에 내주었음을 인정하는 기사를 작성해 눈길을 끌었다. 「영화 세력 한국에 모이다」라는 제목의 부산발 기사는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2002년 11월 30일]
“11월 하순, 한국 동남쪽의 연해 도시인 부산이 평일의 항구가 아닌 아시아 최고의 주목을 받는 영화제로 초점이 맞춰졌다. 한국 영화계의 주요인물[감독, 배우, 영화 배급사, 영화진흥위원회] 및 제1회 때 400명 정도에서 3,000명까지 증가한 해외 언론 매체 관계자들이 한곳에 모였다. 이미 부산 국제 영화제는 7회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에게 아시아 내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제로 인식되어 수준이 낮은 상하이와 태국 등은 물론 도쿄, 홍콩의 수준도 앞질렀다. 7년 전 부산 국제 영화제는 아시아 영화에 초점을 둔 홍콩 국제 영화제를 모델로 하였다. 그러나 7년 후인 지금, 부산은 아시아 영화의 대표 시장이자 기초가 되었다. 한국 영화의 풍성한 발전적 상황은 홍콩 국제 영화제의 탄생이 당시 홍콩 영화의 새로운 물결과 혁명의 바람을 일으킨 것과 같다.”
아무래도 언론의 평가는 2005년 제10회 부산 국제 영화제 개막에 맞춰 절정을 이루었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의 아시아판[2004년 11월 22일]은 ‘PIFF, 아시아 최고 영화제’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부산 국제 영화제 사람들의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해 주었다.
『타임』의 ‘BEST OF ASIA’는 ‘정신, 몸, 영혼’의 세 가지 부문으로 나누어 각 부문별 장소와 이벤트 등을 선정하였는데 부산 국제 영화제는 이 중 정신[BEST FOR YOUR MIND] 부문에서 ‘최고의 영화제’로 뽑힌 것이다. 당시 『타임』은 “컨테이너 항구로 잘 알려져 있는 부산에서는 매년 10월 일주일 동안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필름 페스티벌인 부산 국제 영화제가 개최된다.”고 소개하며 “지난 9회 행사에는 262개의 작품들을 보기 위해 16만 6000명의 관객이 부산을 찾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제10회 부산 국제 영화제를 맞자 언론은 지난 10년을 회고하는 한편 ‘변화’, ‘재도약’, ‘미래’ 등의 단어를 사용하며 부산 국제 영화제의 내일을 걱정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부산의 언론이 먼저 움직였다. 『부산 일보』는 「PIFF 10살, 제도약 어떻게」라는 고민 속에 칸, 베를린, 베니스, 로테르담, 토론토 등 세계 5대 영화제를 현지 취재해 이를 12회 시리즈로 다루었다.
그리고 「PIFF 미래를 찾아서-세계 영화제서 배운다」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기사를 보도하였는데 「영화제 성공 비결 작품 선정이 반이」, 「관객, 축제를 움직인다」, 「필름 마켓은 필수 영양소」, 「전용관은 성장 버팀목」, 「스폰서를 찾아라」, 「지역을 살찌운다」, 「경쟁이냐 비경쟁이냐」, 「영화제의 사령탑」, 「연중 타오르는 영화 불꽃」, 「PIFF, 새 도약을 향해」 등의 제목을 뽑으며 약 석 달간 시리즈를 이어 나갔다.
[국내 ‘최고’ 공인받은 부산 국제 영화제]
부산 국제 영화제에 대한 정부 차원의 평가는 2005년 처음 이뤄졌다. 1996년 부산 국제 영화제가 출범한 이후 10년 만이다. 문화관광부가 산하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에 의뢰해 작성된 「국제 영화제 평가 및 향후 발전 방안」을 통해 처음 공개되었다. 그동안 국내외 언론의 평가는 많았지만 정부 기관에서 부산 국제 영화제가 국내 ‘최고’임을 공인한 것은 이 연구 보고서가 처음이었다. 부산 국제 영화제는 11개 평가 항목 중 ‘주제의 독창성과 성격’[3.76점]을 제외한 10개 항목에서 ‘4.00’[5점 만점] 이상을 받아 정부의 국고 지원을 받는 국내 6대 영화제 가운데 최우수 영화제임을 공인받았다.
그렇다면 부산 국제 영화제는 경제적으로 얼마나 도움이 될까. 2004년 부산 국제 영화제 때 「5만여 인파, 100억 쓰고 간다」는 조사 결과가 보고되었다. 추계예술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이 부산 국제 영화제의 경제적 효과를 분석한 분석 모형 틀을 활용한 평가 결과, 2004년 열린 제9회 부산 국제 영화제를 찾은 일반인 관람객[중복 관람 4.14편 기준 4만 1000여 명]이 숙박비와 쇼핑비와 식사비 등으로 모두 32억 1200여만 원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여기에 개막식·폐막식 게스트들과 심사 위원 등을 포함한 공식 내국인 참가자[5,060명]들이 54억 9500여만 원을, 외국 게스트[578명]가 9억 2900여만 원을 쓴 것으로 계산되었다. 부산 국제 영화제를 찾은 국내외 게스트들과 관객들이 영화제 기간 중에 96억 2700여만 원을 직접 지출한 셈이다. 또 300여 명의 해외 취재진의 지출액을 더하면 영화제 관련 직접 지출액이 100억 원을 훨씬 넘어선 것으로 추산되었다. 특히 2005년 10회째를 맞아 국내외 공식 참가 인원이 크게 늘어났고 일반 관객도 5만 명에 육박하는 등 성황을 이뤄 직접 지출 금액이 크게 증가하였다.
영화제 개최로 인한 경제적 간접 효과는 더욱 두드러진다. 추계예술대 문화예술대학원은 제7회 부산 국제 영화제를 기준으로 부산 국제 영화제로 인한 생산 유발 효과가 225억 2000만 원에 달하였고 1,687명의 고용 유발 효과를 보였으며 부가 가치 유발 효과도 121억 4000만 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제10회 부산 국제 영화제 때는 600억 원을 상회하는 경제적 효과를 낳은 것으로 추산되는 보고서도 제시되었다. 한국은행 부산본부는 2004년 제9회 부산 국제 영화제가 생산 유발 효과 380억 원과 부가 가치 유발 효과 140억 원을 더해 총 520억 원의 경제적 효과를 지닌 것으로 평가하였다. 이어 2005년 변화된 수치를 적용한 결과 각 부문에서 16~20%의 상승효과가 있어 총 600억 원 이상의 파급 효과를 나타냈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관객 수의 증가였는데 2004년 16만 6164명에서 2005년에는 19만 2970명으로 늘어 16.1%가 증가하였으며 국내외 게스트도 5,638명에서 6,088명으로 늘었다. 또한 국내외 취재진 규모도 900여 명에서 1500여 명으로 대폭 늘어나 관객, 게스트를 포함한 이들의 숙박비와 식비, 쇼핑비 등 직접 지출액만도 전년의 100억 원 수준에서 20% 이상 늘어난 것으로 분석되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영상 도시를 꿈꾸는 부산에 러브 콜을 보냈다. 삼성경제연구소 고정민 소프트산업팀장은 2004년 12월 부산 그랜드 호텔에서 열린 부산 영화 영상 산업 활성화를 위한 세미나에서 「영상 센터 및 후반 작업 기지의 경제적 효과 분석」이라는 자료를 통해 영상 센터가 부산 국제 영화제의 핵심 인프라로서 안정적 개최에 기여하게 되어 부산 국제 영화의 위상을 높일 수 있으며 지역 문화 시설의 확충에 따른 도시 이미지 개선과 관련 산업의 발전도 함께 기대된다고 발표하였다.
고정민 소프트산업팀장은 이어 부산이 아시아 영상 산업의 중심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지방 자치 단체와 관련 기업, 대학 및 연구소가 클러스터를 형성해 기반 시설을 설치하고 인력 양성과 국제화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이 같은 클러스터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문화 산업과 관광을 연결하고 영화뿐만 아니라 게임과 애니메이션, 방송 산업을 동시에 육성하여 세계 시장을 겨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부산 국제 영화제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잇따르자 부산광역시는 부산을 영상 도시로 특화하려는 계획에 착수하였다. 한국의 대표적 민간 싱크 탱크인 삼성경제연구소에 연구 용역을 의뢰하였는데 2005년 3월 발표된 「부산 영상 도시 육성을 위한 종합 계획」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부산이 영상 도시로 발돋움하려는 존재의 이유를 더욱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04년 부산의 영상 산업 시장의 규모는 6000억 원이며 앞으로 부산광역시가 추진하는 갖가지 사업을 통해 ‘영상 클러스터’가 구축될 경우, 2008년에 1조 3000억 원, 2014년에 2조 4000억 원으로 성장할 것으로 추정하였다. 2008년까지는 매년 15%씩, 2014년부터는 매년 10%씩 높은 성장을 할 것으로 예측하였다. 부산 국제 영화제 성공에 힘입어 부산 시민들의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영상 산업 발전의 청신호라는 것이다.
부산 국제 영화제에 대한 국민들의 사랑과 관심도 대단하였다. 2006년 제11회 부산 국제 영화제 개막 이후 영화 포털 시네티즌과 SBS 뉴스엔조이가 공동으로 여론 조사 전문 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 응답자[814명]의 57.2%는 ‘관심이 많은 편’이라고 답해 부산 국제 영화제에 대한 국민들의 높아진 관심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특히 관심이 많은 편이라고 한 응답자를 연령별로 보면 20대가 69.2%로 젊은 층에서 높은 관심을 보였고, 지역별로는 개최지인 부산·경상남도 지역이 68.1%로 나타나 다른 지역을 압도하였다.
[영상 산업 겸비한 영화 도시로 탈바꿈]
부산 국제 영화제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지만 부산의 영상 산업은 미약하다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부산발전연구원은 2011년 10월 「제2의 도약기를 맞은 영화 도시 부산」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부산이 영화의 전당 개관을 계기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였지만 영화 산업은 아직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 때문에 경제적 파급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영화 산업 활성화를 핵심 과제로 추진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보고서를 작성한 금성근 선임 연구 위원은 “부산 국제 영화제의 성공과 부산광역시의 정책적 노력에 비해 부산의 영화 산업은 아직 본궤도에 오르지 못한 상황”이라며 “2009년 기준으로 부산 영화 산업의 전국 비중은 사업체 수 5.6%, 매출액 3.8% 수준”이라고 밝혔다.
영화진흥위원회 등 영화 관련 공공 기관의 부산 이전 확정 등 정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아직 부산 영화 산업의 활성화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금성근 선임 연구 위원은 “영화 도시 부산이 제2의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국제 영화제의 성공, 영화의 전당 개관, 센텀 영화 영상 혁신 지구 조성 등을 기반으로 ‘영화제 개최 도시’에서 ‘영화 산업을 겸비한 영화 도시’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이를 위해 부산 영화 산업이 활성화할 수 있는 클러스터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며 “이와 함께 영화 기획·제작 자금의 집적, 전문 인력 육성, 하드·소프트 인프라의 확충, 첨단 영상 기술 개발 등이 선순환적으로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고 분석하였다.
[부산 국제 영화제 관객 20만 명 돌파 ‘역대 최대’]
2012년 제17회 부산 국제 영화제를 찾은 관객이 처음으로 20만 명을 넘어섰다. 10일간 열린 영화제 기간 중 모두 22만 1200명이 부산 국제 영화제를 찾았는데 이는 역대 최다 관객이었다. 영화제 기간이 예년보다 하루 늘긴 하였지만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대단한 성과이며 지난 17년간 부산 국제 영화제가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바로 부산 관객의 폭넓은 수용 문제인데 현재 부산 국제 영화제는 영화의 전당이 있는 해운대 센텀 지역에서 초청작을 집중적으로 상영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 관객들이 소외를 받고 있다는 지적이다.
또한 영화제 발상지인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에서도 부산 국제 영화제 초청작을 상영해 달라는 요청이 이어지고 있다. 2012년 남포동에서 일부 작품을 상영하였지만, 장르가 국한되어 관객의 불만을 사기도 하였다. 부산 곳곳에서 ‘찾아가는 영화관’처럼 다양한 형태로 영화가 상영된다면 부산 국제 영화제의 역동성이 회복될 수 있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선술집, 카페, 커피점 같은 지역의 여러 공간에서 관객들이 영화로 이야기를 꽃피울 계기를 마련해 주자는 지적이다. 영화의 고향에서 출범해 어느덧 세계 메이저 영화제로 우뚝 선 부산 국제 영화제가 부산 시민에게 활짝 열린 영화제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