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000
한자 埋藏遺産-釜山-日常
영어의미역 Daily Life of the Busan People Seen from the Unearthed Cultural Heritag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백승옥

[매장 문화재를 통해 보는 부산 사람들의 삶]

문화재란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형, 무형의 소산들을 말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문화재의 범주가 매우 좁았으나 전후에는 미술 공예품, 건조물,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민속자료, 무형 문화재 등으로 대상을 구분하여 국가적으로 보호 육성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다.

문화재는 지정 유무에 따라 지정 문화재와 비지정 문화재로, 존재 형태에 따라 유형 문화재와 무형 문화재로 구분할 수 있다. 문화재로 지정할 경우 주체는 국가 또는 광역시·도가 된다. 국가가 유형 문화재를 지정할 경우는 국보 또는 보물로 구분하며, 광역시·도가 지정할 경우는 각 광역시·도 유형 문화재가 된다. 국가가 무형 문화재를 지정할 경우는 중요 무형 문화재로 하며, 광역시·도가 지정한 무형 문화재는 각 광역시·도 무형 문화재가 된다.

매장 문화재란 땅속에 묻혀 있는 문화재를 말한다. 이들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실체를 파악한다. 따라서 이들을 발굴 문화재라 하여도 무방하며, 역사 기록이 없거나 부족한 시기의 인간 삶의 모습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역사 기록이 비교적 풍부한 시기라 하더라도 매장 문화재는 기록물과 다른 연구 대상물로서 중요하다. 이를 통해 부산 사람들의 모습을 개관해 보고자 한다.

[최초의 부산 사람들, 꿈의 낙원에서 살다]

부산에 살았던 최초의 사람들은 구석기인들이다. 부산시의 해운대 신시가지 조성 계획에 의해 1992년 부산박물관에서는 좌동·중동 지역에 대해 시굴과 발굴 조사를 하여 구석기 유적을 확인하였다. 유적에서 나온 유물들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석영제 소형 박편 석기와 조각도, 긁개, 돌날, 다면 석기, 망치돌, 모루돌, 갈돌, 좀돌날몸돌[細石刃核]과 좀돌날[細石刃], 소형 밀개, 뚜르개 등이 출토되었다. 유물과 관련된 특별한 시설물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석기 제작과 관련된 망치돌·모루돌 등이 다수 출토되고, 유물의 분포 상태가 조밀한 점 등으로 미루어 석기 제작과 관련된 일시적인 야외 생활 유적으로 추정된다. 유적이 만들어진 시기는 돌날의 제작 기법과 석기의 형태적 특징으로 보아 지금으로부터 2만 년에서 1만 5000년 전의 후기 구석기 시대로 추정된다.

이러한 좌동·중동 구석기 유적은 부산에서 최초로 확인된 청사포 구석기 유적과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이로 보아 구석기 시대 부산 사람들은 푸르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면서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곳을 좋아하였던 것 같다. 지금도 해수욕, 횟집, 문탠 로드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지만 구석기 시대 해운대청사포 일대는 부산 구석기인들의 삶의 터였다.

푸른 물결 춤을 추며 물새 날아드는 해운대, 흰모래 넓게 펼쳐진 그곳에서 사랑을 나누다 배가 고프면 청사포로 갔을 것이다. 손만 뻗으면 딸 수 있는 청사포 갯바위의 조개와 미역 등의 먹거리는 풍부하였다. 좀돌날을 장착한 창을 이용해 꽤 큰 산짐승도 사냥하였다. 혼자가 아닌 공동 사냥이었다. 잡은 짐승은 모두가 모여 공동 작업을 통해 먹거리와 가죽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긁개를 이용해 동물의 가죽을 벗긴 후 밀개로 털을 제거하였다. 가죽은 옷감과 천막으로 이용되었다. 찍개로 자른 나무로 기둥을 만들고, 홈을 파야 할 곳은 새기개를 사용하였다. 가죽을 이용한 천막집은 추운 겨울을 날 수 있게 해 주었다. 살점은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먹거리가 되었다. 소금에 절인 고기는 맛난 육포로 저장 가능하였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특별히 정해진 주거지 없이 편안한 곳을 골라 잠자리를 청하였다. 이곳은 파라다이스였다. 꿈같은 낙원, 부산의 구석기인들은 이런 곳에서 그렇게 살았다.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구석기인들이 신석기인들의 직접적 조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간에 논란이 많다. 지금의 연구 단계로는 잘 모른다고 함이 정답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만 2000년 전쯤 수백만 년간 계속되어 온 구석기 시대가 끝나고 빗살무늬 토기와 간석기로 대표되는 신석기 문화가 전개된다. 부산 지역에서는 8000년에서 7000년 전에 물과 식량 자원이 풍부한 강가나 바닷가 등지에 신석기인들이 정착해 살았다. 사냥과 고기잡이, 원시 농경 생활을 하면서 조개더미, 주거지, 분묘 등 각종 유적과 유물을 남겼다.

이 중에서 특히 각종 생활 쓰레기들이 쌓여 만들어진 동삼동·영선동·수가리 조개더미와 조리용 화덕 시설이 대량으로 발견된 신석기 범방동 유적은 부산 지역에 살았던 신석기인들이 남긴 대표적인 유적이다.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빗살무늬 토기, 조개껍데기·물고기·동물 뼈, 도토리·조·기장, 화살촉·돌도끼·낚싯바늘·작살·갈돌·갈판·돌괭이·돌보습, 흙 제품, 조개 가면·곰 모양 토우, 귀걸이·조개 팔찌 등은 신석기인들의 먹거리와 생활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조개더미는 선사·고대인들이 먹다 버린 음식 쓰레기 더미를 말한다. 과거 인류가 식량으로 채취하여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오랜 기간 동안 쌓여 만들어진 유적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8000년 전부터 조개더미가 만들어지며 신석기 시대 전 기간에 걸쳐 나타난다. 물론 신석기 시대뿐만 아니라 후대에 이르기까지 조개더미는 만들어진다. 많은 조개껍데기가 토양을 알칼리성으로 만들기 때문에 이곳에는 토기, 석기, 뼈로 만들어진 생활 도구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식량으로 이용한 동물이나 고기 뼈 등과 같은 아주 작은 뼈도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조개더미는 당시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매장 문화재의 보물 창고라 할 수 있다.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 중의 하나가 빗살무늬 토기이다. 토기의 표면에 빗살 같은 무늬가 장식된 데서 붙여진 명칭이지만, 실제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무늬가 존재한다. 빗살무늬 토기는 물레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빚어 야외 노(爐)에서 600~700℃의 온도에 구웠으며, 색깔은 대부분 붉은 갈색을 띤다. 무늬의 장식 기법에 따라 크게 덧띠 무늬 토기·눌러 찍은 무늬 토기·그은 무늬 토기·짧은 빗금무늬 토기·겹아가리 토기 등으로 구분되는데, 이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사용된 것이 덧띠 무늬 토기이다.

그릇의 기본 형태는 밑이 둥글거나 납작한 바리이지만, 용도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누어진다. 바닥이 그릇 모양인 것은 음식을 끓이거나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목이 있는 항아리는 저장용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이 밖에 특수한 목적이나 제사 등의 의식용으로 사용된 붉은 간 토기, 채색 토기, 귀때 토기, 깔때기형 토기, 배 모양 토기 등이 있다.

이러한 빗살무늬 토기로 보아 신석기인들은 음식을 조리해 먹었을 것으로 보인다. 구석기 시대에는 가능하지 않던 물을 이용해서 조리하는 방법 중 찌는 요리 외에는 전부 가능하였을 것이다. 토기의 표면이나 내부에 유기물이 탄화되어 출토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점으로 보아 그러하다. 그리고 갈판과 갈돌이 함께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식물을 제분해 쿠키 상태의 요리나 곡물을 죽으로 만들어 먹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산의 신석기 시대 조개더미 유적에서 나오는 유물 가운데 주목되는 것이 결합식 낚싯바늘이다. 미늘[낚시나 작살의 끝에 있는 물고기가 물면 빠지지 않도록 가시처럼 만든 작은 갈고리]이 달린 바늘과 몸체를 따로 만들어 붙여 사용하는 것으로,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어로 도구이다. 바늘은 사슴뿔이나 동물 뼈를 가공하여 만들며 끝에는 미늘이 달려 있다. 몸체는 돌이나 동물 뼈 또는 조개를 이용하여 만드는데, 아래에는 바늘과 결합하기 위한 흠이 나 있다. 낚싯바늘의 크기로 보아 다랑어나 돔 같은 큰 고기를 잡는 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산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강가나 바닷가, 가까운 야산 등지에서 사냥과 고기잡이를 통해 식량을 확보하였다. 조개더미 속에 뼈와 껍질 상태로 남아 있는 사슴, 멧돼지, 도미, 다랑어, 상어, 고래, 대구, 굴, 전복, 홍합, 백합, 바지락, 꼬막 등은 당시 사람들이 즐겨 먹었던 음식물이다. 사냥, 고기잡이와 더불어 도토리 같은 나무 열매나 식용 식물 등을 채집하여 주식으로 이용하였다.

특히 도토리 등은 저장공[식품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에 저장해 두었다가 계절에 상관없이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신석기 시대에 도토리 저장공이 있었다는 점은 도토리의 떫은맛을 제거해 요리로 만들어 먹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이 시기 사람들이 오랜 경험을 통해 먹거리 성분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발견된 불탄 조와 기장은 이미 5000년 전부터 잡곡을 재배 섭취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원시 농경이 신석기 시대부터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획득한 음식물은 주로 토기에 담아 끓이거나, 돌을 둥근 형태로 깐 후 불에 달구어 굽거나 익히는 화덕 시설을 이용해 조리하였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류는 몸 꾸미기를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였다. 신석기인들은 일상활동을 통해 쉽게 구할 수 있는 조개, 동물 뼈, 옥, 돌, 흙 등의 재료로 목걸이와 팔찌, 발찌, 귀걸이, 뒤꽂이 등 각종 장신구를 만들어 몸을 치장하였을 뿐 아니라 주술적인 목적으로도 사용하였다. 목걸이는 조개나 동물 뼈·옥을 가공한 다음 한 점 내지 여러 점을 연결하여 만들었고, 귀걸이는 흙으로 굽거나 돌로 만들었는데 착용 방법에 따라 고리형과 삽입형으로 구분된다.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대량으로 출토된 조개 팔찌는 부산의 신석기인들이 가장 즐겨 착용한 장신구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구하는 방법으로 예쁜 조개 팔찌와 목걸이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신석기인의 대외 문화 교류의 모습은 동삼동·범방동·울주군 서생면 신암리·연대도·욕지도·상노대도 유적에서 일본 죠몽[繩文] 토기와 석기, 흑요석 등이 출토되는 점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본 서북 규슈 지역의 여러 유적 및 쓰시마 섬[對馬島]의 사가[佐賀] 조개더미와 고시다카[越高] 유적 등지에서 출토되는 한반도계의 각종 빗살무늬 토기와 장신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석기인의 대외 문화 교류 흔적을 특히 잘 보여 주는 것이 흑요석이다. 유리질로 되어 있는 흑요석은 어느 돌보다도 단단하여, 결대로 잘라내어 가공하면 칼만큼이나 날카롭다. 사냥과 음식물을 조리하는 데 다른 석기보다 효율성이 높다. 이러한 흑요석의 물리적 특성으로 구석기 시대부터 석기의 재료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흑요석은 화산 지대 등 특정 지역에서만 산출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 지역의 흑요석이 유명하며, 남부 지역에서 출토되는 흑요석의 대부분은 일본의 규슈 지역에서 나온 것임이 밝혀졌다. 흑요석은 8000년 전 일본으로부터의 수입품이었다. 당시 부산과 규슈 지역 간 교역의 산물인 것이다. 오늘날 부산의 국제 해항 도시적 성격은 이미 이때부터 나타난다. 부산의 정체성과 관련해 부산다움의 시작은 신석기 시대부터였다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마을을 이루며 살다]

3500년 전 무렵 우리나라는 청동기 시대로 접어든다. 학자들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부산 지역을 기준으로 볼 때 이후 기원전 300년까지를 청동기 시대라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신석기 시대와 달리 벼농사를 비롯한 곡물 재배의 농경이 본격화되었으며 사회 분화, 정주 취락의 본격적 발전, 조상 숭배 신앙의 정착 등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청동기·간석기·민무늬 토기·고인돌·환호취락(環濠聚落)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문화가 전개된다.

부산 지역의 청동기인들은 바닷가와 하천 주변, 혹은 낮은 구릉에 살면서 농경과 어로 활동을 병행하였다. 이와 관련된 많은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지금까지 부산 지역에서 확인된 청동기 시대의 주요 유적으로는 해운대구 반여동, 금정구 노포동, 동래구 온천동, 기장군 정관읍 방곡리 집터를 비롯하여 사하구 감천동, 가덕도 고인돌, 동래구 사직동, 금정구 망미동·두구동 돌덧널무덤조도 조개더미강서구 미음동 분절·온천동 유적 등이 있다.

아가리에 구멍을 뚫어 장식한 구멍무늬 토기와 화살촉·돌칼·돌창·돌도끼·돌끌·반달 돌칼·가락바퀴[紡錘車] 등 여러 종류의 유물이 출토된 반여동·방곡리 집터조도 조개더미는 부산 지역의 청동기 시대 생활 모습을 잘 보여 준다. 감천동 고인돌과 가덕도 고인돌은 부산 지역 청동기인들의 매장 형태와 관습을 보여 주는 유적이다.

청동기 시대 생활 도구는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가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목기도 농경용이나 일상 도구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 밖에 소수지만 청동 도끼나 끌 같은 청동기는 공구용으로 이용되었다. 청동기 시대 유물은 크게 청동기·석기·뼈 연모·토기·토제품·장신구 등으로 구분되며, 이 중 민무늬 토기와 함께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것이 청동기와 간석기이다. 청동은 주석과 구리를 일정 비율로 섞어 만든 금속이다. 청동기는 다른 유물에 비해 수량이 적고 집터나 무덤 등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대표적인 유물로는 비파형 동검, 거친 무늬 거울, 화살촉, 청동 도끼와 청동 방울 등 의식 용구가 있다. 이 같은 청동 제품은 당시의 유력자들만이 지닐 수 있었고, 신분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이용되었다.

간석기는 신석기 시대부터 사용되었으나 청동기 시대도 여전히 주요한 생활 도구로 이용되었다. 간석기는 쓰임새에 따라 공구용·농경용·사냥용·무기용으로 나누어지며, 이 중 돌칼과 화살촉은 청동기와 함께 주로 고인돌[지석묘]과 돌널무덤[석관묘]의 부장품으로 많이 출토된다.

1. 집 옆에 묻히기를 원하였던 사람들

2010~2011년 부산박물관에 의해 조사된 강서구 미음동 분절 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 주거지 1동과 지상식 건물 터 3동, 무덤 11기가 확인되었다. 당시의 마을 유적으로 추정된다. 무덤들은 나지막한 구릉의 아랫부분에 11기가 밀집되어 있었다. 고인돌과 돌널무덤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돌로 둥근 모양 또는 네모난 모양의 구획을 이루는 것들도 있었다. 발굴 조사 결과 고인돌에서는 붉은 간 토기[적색 마연 토기(赤色磨硏土器)·홍도·단도 마연 토기라고도 부른다], 간 돌검[磨製石劍]·화살촉·유구석부(有溝石斧) 등이 출토되었다. 묘 주변에서는 가락바퀴, 그물추, 시루 등도 출토되었다.

강서구 미음동 분절 유적에서는 주거 공간과 묘역이 공존하고 있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산 언덕배기 집, 지상식 건물로 지어진 곳간에는 겨우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충분히 확보해 놓았다. 이승의 삶을 다하면 살던 곳 옆자리에 무덤을 마련하였다. 모두가 함께 항상 같이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것은 이 시기 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않고 죽음이 곧 삶의 연장이라는 생각을 하였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2. 힘센 자는 고인돌에

무리를 이끌던 지도자가 죽자 표식이 될 만한 커다란 돌로써 무덤의 윗돌로 하였다. 무덤을 만드는 과정에서 새로운 지도자도 탄생하였을 것이다. 무덤 안에는 주검과 함께 붉은 간 토기, 돌칼, 돌화살을 함께 넣었다. 그 앞에서 제사도 지냈다. 또한 삶이 팍팍하면 고인돌 위에 올라 구멍을 파면서 기원하였다. 성혈(性穴)이라 불리는 고인돌 윗돌에 새겨진 구멍들은 기원과 그리움을 갈구하던 흔적이다.

3. 환호취락의 등장

청동기 시대의 큰 특징은 벼농사와 밭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 문화의 성립이다. 불탄 쌀, 기장, 수수, 조, 보리, 그리고 곡식 이삭을 따는 데 이용된 반달 돌칼, 돌낫 등은 농경 생활의 흔적을 잘 보여 준다. 농경 문화의 등장과 발전은 생산력의 증대뿐만 아니라 생활 양식의 변화와 기술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그 결과 다양한 종류의 도구가 만들어지고 마을 주위에 울타리와 도랑을 두른 환호취락이 출현한다. 동래구 온천동에서는 청동기 시대 환호가 확인되었다.

4. 풍요는 전쟁의 씨앗

가락바퀴는 부산 지역 곳곳에서 출토된다. 이로 보아 추운 겨울을 대비해 옷을 만들어 입기도 하였다.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이 아닌 실을 뽑아 만든 옷이다. 산뽕나무에서 실을 뽑다가 누에치기를 통해 많은 양의 비단을 생산할 수 있었다. 거친 가죽옷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비단옷을 입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또한 청동기 시대 부산 사람들은 곡물 재배를 통한 저장이 가능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완만한 경사를 이용한 계단상의 논밭 경작을 통해 얻은 것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장하며 사는 풍요로움이 반드시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저장품을 빼앗아 가려는 집단과 그를 지키려는 집단 간의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전쟁의 씨앗이었다.

[드디어 국가를 이루며 살다]

청동기 시대 후반 무렵 중국으로부터 철기 문화가 유입된다. 철기라는 생산 도구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생산량의 증대를 가져왔다. 사회는 급변하게 발달하였다. 이를 조직화하고 통제하기 위한 권력체가 등장하게 된다. 소규모의 국가체이다. 이를 작은 국가라는 의미에서 소국(小國)이라 한다.

1. 독로국의 등장

3세기 말 무렵 중국 서진(西晉)의 역사가 진수(陣壽)[233~297]가 지은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東夷傳)이 있다. 이 책에는 당시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많은 소국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한·진한·변한으로 구분하고 각각 54, 12, 12의 78개국의 국명을 일일이 나열하였다. 이러한 삼한 사회가 성립되면서 부산도 역사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때의 부산은 변한 12개국 중 하나인 독로국이 존재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다른 문헌 기록에 의하면 독로국이 존재한 시기 부산에는 거칠산국(居漆山國)·내산국(萊山國)·장산국(萇山國) 등도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독로국의 또 다른 이름인지, 아니면 별도의 정치 세력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향후 연구를 통해서 밝혀야 할 점이다. 이는 부산 지역에 생긴 최초의 국명(國名)이란 점에서 중요하다.

이 시기의 생활 유적으로는 부산 동래 패총내성 유적이 있고, 분묘 유적은 복천동·구서동·노포동에 있다. 유적들은 온천천과 수영천 주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여, 당시 부산의 중심지가 동래 일대였음을 알려 준다. 이들은 원거리 항해를 통해 대외 무역을 주도하며 왜(倭)를 비롯하여 진한·마한 등지의 기타 소국들과 활발한 교역을 전개하면서 성장한다. 이 시기의 문화 현상으로는 와질 토기라는 새로운 토기와 더불어 덧널무덤이 등장하는 것과 철로 만든 다양한 도구와 무기가 출현하는 것을 들 수 있다.

2. 독로국, 구야국과의 연맹으로 금관가야가 되다

철기 사용이 일반화되고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격동기를 맞이하면서 삼한 소국들은 인접한 소국과 연맹을 맺거나 통합되기도 한다. 이 시기 지금의 김해 지역에는 구야국이 있었는데, 부산의 독로국구야국과 연맹하여 더욱 큰 정치 세력을 이룬다. 이것이 금관가야이다. 5세기 이후가 되면 금관가야가 쇠퇴하고 신라가 부산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신라 문화가 급격히 유입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삼국 시대 유적은 부산 복천동 고분군, 부산 오륜대 고분, 두구동 고분군, 두구동 임석 고분군, 당감동 고분군, 화명동 고분군, 덕천동 고분군, 반여동 고분군, 괴정동 고분군, 연산동 고분군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분묘 유적이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연산동 고분군에서는 큰 무덤이 많이 만들어졌고, 또한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외의 고분군은 무덤의 규모가 작고 출토 유물의 질과 양도 앞의 두 고분군보다 떨어진다. 이러한 현상에 비추어 볼 때 삼국 시대 부산에는 복천동연산동 고분군을 만든 집단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 지역에 대소의 집단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집단 간에 위계가 설정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철이 사회를 변화시키다]

철기는 인류 문화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생활 도구였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은 비약적인 생산력 증대를 가져왔고, 생산력 증대는 인구의 증가를 가져와 사회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철은 청동에 비해 원료가 풍부하고 채취와 제작 과정이 용이하여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이 소유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명실상부한 금속기 사용의 시대가 전개되었으며, 돌로 만든 농공구와 민무늬 토기는 점차 사라졌다.

1. 철 소유는 권력의 상징

부산 복천동 고분군을 비롯한 부산의 고분군에서는 많은 양의 철제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중에서도 철제 집게와 망치, 숫돌의 존재는 당시 부산에서 철 생산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철의 생산은 원료인 철광석과 사철을 채취하는 채광, 철광석을 녹이는 제련, 철 소재와 도구를 만드는 주조 및 단조 과정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 국내에서의 철기는 모두 철광석을 원료로 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분석되었다.

채광 후에는 원료를 녹이는 제련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이 제련을 위해서는 제련로와 함께 숯과 송풍 시설이 필요하다. 제련로에서 나온 선철을 가져다 용해로에 넣고 끊여 융용된 상태의 철을 주물에 부어서 제품을 생산하게 되는데, 이때 생산된 것이 주조 철기이다. 제련 과정에서 나온 선철을 탈탄(脫炭)[철 속의 탄소를 빼는 작업]과 단련 작업을 통해 덩이쇠[鐵鋌]와 같은 철기 소재로 만들고 이를 달구어 망치로 두들겨 제품을 생산하는데, 이를 단조 철기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생산된 철제품이 가장 많다. 단야(鍛冶) 작업에 필요한 것이 노와 함께 받침대, 집게, 망치, 숫돌 등이다.

철의 생산은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이어졌다. 논과 밭의 개간을 촉진하여 생활의 무대를 구릉에서 평지로 바꾸었다. 평지의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무기의 재료도 철로 바뀌었고, 철제 무기가 많아짐에 따라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는 상호 작용을 일으켰다. 세력이 강한 나라가 주변 지역을 정복해 나가면서 고대 국가의 출현은 이러한 과정의 산물로 태어났다.

부산의 대표적 고분군인 복천동·연산동 고분군에서는 철제 무구류가 많이 출토되었다. 이는 당시 사회상을 반영해 주는데, 이들은 항시 집단 간의 전쟁 위험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다. 무덤에 다량의 철기를 매납하는 것은 죽은 자의 위엄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산자의 권력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2. 편두(偏頭), 미인 선발 대회 출전 선수들

김해 예안리 고분군에서 머리를 납작하게 만든 편두 두개골의 모습이 발굴되었다. 『삼국지』의 기록에는 진한인들은 편두 습속이 있었다고 전한다. 진한과 변한은 제사 외에는 풍습이 거의 같았다.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변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보아 삼한·삼국 시기 부산 사람들도 편두를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편두는 유아기부터 두개골 이마 부위를 강제로 눌러 납작하게 함으로써 만들어진다. 머리에 압력을 가하는 방법으로는 천을 머리에 묶는 것, 머리 위에 돌을 얹어서 누르는 것, 판자를 이마와 뒤통수에 대고 끈으로 묶는 것 등 여러 가지이다. 편두를 왜 하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연구에 의하면 편두 인골의 대부분이 젊은 여성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무당과 같은 특수 신분에 속한 여성들이었을까? 아니면 아름다움을 과시하기 위한 성형의 방법이었을까? 미인 선발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편두를 하여야만 하였을까?

3. 죽어서도 주인 곁에서-순장 풍습

삼한과 가야 시기 부산을 대표하는 고분군은 부산 복천동 고분군연산동 고분군이다. 즉 당시 부산 지역의 지배 집단들이 묻힌 곳이다. 무덤의 구조는 덧널무덤이다. 규모가 큰 경우 주인공을 묻은 주덧널[主槨]과 여러 껴묻거리[副葬品]를 넣은 딸린덧널[副槨] 등 2개의 덧널이 하나의 무덤을 이룬다. 부장품으로는 칼·장신구·덩이쇠 등을 부장하였다. 딸린덧널에는 많은 양의 토기와 철기 등을 부장하였다. 주인공은 주덧널 바닥에 돌을 깔고 안치하였다. 그런데 주인공의 발치 쪽에 3~5명의 순장자도 함께 묻은 무덤도 있다. 아마도 주인공을 모셨던 종자들일 것이다. 이들 순장자들의 뼈가 놓인 상태를 보면 가지런하다. 죽는 순간에도 전혀 몸부림치 지 않은 모습이다. 주인에 대한 충성심은 죽음의 고통도 극복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죽인 상태로 매장해서일까? 이도 연구 과제이다.

4. 찌고, 끊이고, 삶고

부뚜막 모양 토기와 시루가 출토된 점으로 보아 이 시기 부산 사람들의 식생활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시루에 담긴 불그스레하지만 찰기가 있는 잡곡밥을 나무 주걱으로 퍼서 흙으로 만든 식기에 담아 밥상을 차린다. 식기에는 나뭇잎을 놓아 밥이 흙에 묻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흙의 황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데커레이션이다. 우리에게 그다지 낯설지만은 않은 이 풍경은 바로 2000년 전 부산인들의 식탁 모습이다. 삼한·삼국 시대에는 철제 농구의 사용으로 다양한 작물이 생산되면서 음식물의 내용도 다양해졌다. 이에 따라 이를 담는 식기도 다양해졌다. 출토되는 토기 기종의 다양성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아궁이 위에 물을 담은 연질 독을 놓고 그 위에 시루를 놓은 다음 음식물을 담아 찌는 것이 이 시기의 주된 조리법이었다. 국과 찌개같이 국물이 있는 음식은 항아리나 독에 담아 끓였다. 조리된 음식물은 국자와 주걱으로 퍼서 식기에 담았는데, 식기에는 토제 칸막이 접시와 크고 작은 각종 독·항아리·굽다리 접시·보시기·바리 등이 있다. 쌀·조·콩·수수·기장 등의 곡물은 가장 중요한 음식물이었다. 이들 곡물은 항아리에 담긴 채 발굴되기도 하고, 산청 소남리 유적에서와 같이 곡물로 가득 채워진 저장고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곡물 외에 닭·오리·사슴·소·멧돼지·노루 등의 육류와 생선 및 패류 같은 해산물도 당시 부산 사람들의 주요한 음식물이었다.

[불교라는 고등 종교를 믿다]

김해 지역과 함께 금관가야를 이룬 부산 지역은 5세기 중·후반 무렵 신라에 병합된다. 그러나 신라의 지방 통치 제도 미비로 상당 기간 동안은 지방 독자 세력이 존재하였을 것이다. 7세기 후반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면에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문화면에서는 국제적인 당(唐) 문화 수용에 따른 변화와 수도인 경주 문화의 전국적 확산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큰 규모의 무덤 유적은 대부분 사라지고 사찰·성·건물·유원지 등 종교 및 일상생활 관련 유적들이 중심이 된다. 따라서 이전 시기에 비해 기와, 불상, 십이지신상, 중국제 도자기, 생활 토기 등 일상생활 관련 유물의 출토량이 증가한다. 토기에는 통일 전에 유행하던 삼각 집선문과 반원점문이 사라지고, 말발굽 무늬·물방울무늬·지그재그 무늬·꽃무늬 등의 찍은 무늬[印花紋]가 표면에 장식된다. 주둥이 부분이 넓은 목 긴 항아리·뚜껑 접시와 같은 형태가 유행하며, 개인·가정·취락·관아·사원 등에서 규범화된 토기를 전국적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부산에서는 기장군 철마면, 기장읍 동부리 유적, 두구동 임석 가마 유적 등에서 이러한 통일 양식 토기가 조사된 바 있다.

1. 불교식 장례 문화는 통일 신라 시대부터

신라가 통일을 한 이후에는 삼국 시대에 유행하던 부부장·가족장을 한 앞트기식 또는 굴식 돌방무덤 등의 전통적 매장 방식을 계승하는 한편, 불교의 영향으로 불승·국왕·귀족들을 중심으로 화장을 하고 그 뼈를 담아 묻는 골장(骨葬)도 발달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 왕과 귀족들의 국제성은 장례 문화에도 반영되어 중국으로부터 십이지신상을 받아들여 무덤 둘레돌에 조각하기도 하고, 봉토 하단에는 사각형으로 다듬은 호석(護石)을 둘렀으며, 일부 왕릉 앞에는 돌로 만든 조각상을 놓아 장중하게 보이게 하였다. 무덤에 넣는 부장품은 종류와 양이 매우 적어졌으나, 일부 무덤에는 흙으로 만든 인형, 또는 십이지신상을 껴묻거리로 묻었다.

흙 인형에는 일반 남녀, 문인과 무인, 신라인과 외국인 등이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옷 모양새와 머리 맵시에서부터 당을 통해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신라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산에서 조사된 통일 신라 시대 분묘 유적으로는 기장 교리·오륜대·덕천동의 돌방무덤을 들 수 있으며, 연산동에서는 뼈 항아리가 발견된 바 있다. 이전의 매장 방식을 이어받기도 하고, 화장이라는 새로운 장례 문화를 받아들인 모습이다. 장례 문화는 보수성이 강하기 때문에 쉽게 바뀌기 어렵다. 죽은 이를 화장해 묻은 당시의 부산 연산동 사람들은 새로운 문화에 대한 수용 흡인력이 강하였던 것 같다.

2. 유골 처리 방식의 두 가지-장골과 산골

통일 신라에서는 불교의 융성으로 장례 풍속이 많이 바뀐다. 가장 큰 변화가 시신을 태우는 화장의 등장이다. 화장한 후 남은 유골을 처리하는 방식에는 산골(散骨)과 장골(藏骨)이 있다. 산골은 화장한 후 유골을 산·강·바다 등에 뿌리는 것을 말하며, 장골은 유골을 용기에 담아 땅속에 묻거나 부도나 석탑 안에 봉안하는 것이다. 유골을 담은 용기는 토기, 중국 도자기, 청동 항아리 등 다양하며 갖가지 문양으로 장식되었다.

부도에 봉안된 장골은 주로 입적한 승려들의 유골을 담은 것이다. 탑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사리 용기, 불교 경전, 작은 탑, 불상, 각종 공양품이 껴묻힌다. 이것을 사리장엄이라고 하며 불교 경전과 당시의 불교 미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요즈음 장례 문화가 시신을 관에 넣어 땅에 매장하는 이른바 토장 형태의 방식이 점차 줄어들고 산골과 장골이 늘어나고 있는데, 삼국 시대에서 통일 신라 시대로 넘어가면서 장례 문화가 바뀌는 것과 흡사해 역사 순환의 한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부산에는 세 개의 고을이 있었다]

고려 시대에 해당하는 부산의 발굴 문화재는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발굴한 것도 성터[城址]와 절터[寺址] 중심이어서 이를 통해 당시 부산 사람들의 일상을 살펴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고려 시대 부산 지역에는 동래현동평현, 기장현 3개의 현이 있었다. 부산진구 당감동 일대에 위치한 동평현 성터는 고려 시대에서 조선 초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고려 시대 부산 지역 행정 구역의 하나인 동평현의 읍성이다. 동평현은 삼국 시대에는 대증현이었다. 757년(경덕왕 16) 동평현으로 이름을 고쳐 동래군의 속현이 되었으며, 1018년(현종 9) 다시 양주[지금의 양산]의 속현이 되었다. 동평현 성터는 고려 중기 이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성된 것이다. 발굴을 통해 판축 기법으로 두 차례에 걸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각종 청자류와 상감 분청사기, 명문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기장 고읍성은 기장읍 교리 일대에 있는 토성으로 통일 신라 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 기장읍성이 축조되기 전까지 사용된 성곽이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의하면 고려 후기 왜구의 침입으로 성이 함락되어 파괴되자 1391년(공양왕 3) 다시 축조하였는데, 이때 성의 규모는 길이 약 972.12m[3,208척]이었다고 한다.

성벽 기단부에 평평한 돌을 2~3단 쌓고 그 위에 흙과 모래로 판축하였으며, 성벽 바깥쪽 퇴적토에서 소문 청자 2점이 출토되었다. 읍성 주변의 집터와 민묘에서도 다량의 소문 청자와 함께 음각, 양인각, 상감청자가 출토되었다. 성을 쌓는 일은 백성들의 고통이 뒤따르는 일이다. 부역에 동원되어 집안일을 돌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왜구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 같은 일로 빚어지는 부작용도 많았을 터이다.

1. 부산의 대규모 절터인 만덕사지에는 과연 만덕사가 있었나

북구 만덕동 일대에 있는 만덕사지[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호]는 가운데 부분의 긴 네모형 축대[만덕사 금당 터]를 중심으로 만덕 1동의 대부분을 차지한 큰 규모의 절이었다. 이는 부산박물관에서 만덕사 금당 터를 중심으로 1990~2002년 3차에 걸쳐 조사한 결과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발굴에서는 다량의 고려 시대 막새·평기와·치미·전(塼)·자기류와 함께 다양한 명문 기와가 출토되었다. 주변에 흩어져 있던 삼층 석탑 1기는 수습하여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통일 신라 시대의 탑 정도는 아니지만 비교적 늠름하고 균형 잡힌 탑이다.

출토 명문에는 송선사(松善寺), 기비사(祇毗寺) 등의 절 이름이 보인다. 송선사 명은 1점 발견되었는데, 이는 인근의 송선사 터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다수의 기비사 명문 기와 등으로 보아 이곳에는 원래 기비사라는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각종 기와, 탑, 치미 등의 양식으로 보아 기비사는 통일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건립된 사찰로 보인다. 만덕사 터라고 알려져 온 것은 후대이다. 만덕동의 사지는 기비사 자리로 추정된다.

당시 부산 사람들은 기비사를 찾아 예배도 하고 소원도 빌었을 것이다. 기비사 금당의 지붕 등마루 양쪽에는 커다란 치미가 얹어져 있었다. 치미는 마치 연약한 중생들을 악귀로부터 보호해 주는 듯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금당 앞의 탑을 중심으로 수많은 이들이 탑돌이도 하였을 것이다. 그 가운데 많은 연분도 생겼을 것이다.

2. 부산 사람들도 청자를 만들었나

부산 지역에서 청자가 출토된 유적은 만덕사지로 대표되는 사찰 유적과 동평현 성터, 기장 교리 고읍성 터 등 성곽 유적, 기장 교리의 집터 유적과 분묘 유적·온천동·덕포동 등지의 가마 유적이 있다. 대부분이 지방산의 조잡한 소문 청자이지만, 만덕사지에서는 3차 조사 때 대표적 초기 청자인 해무리굽 청자 완(靑磁碗) 1점이 출토되었다. 음각이나 양인각, 상감 등도 있으나 소문 청자에 비해 분량이 적다. 기종도 병, 항아리, 잔, 뚜껑 등이 소량 출토되기는 하나 대접와 접시류가 주류이다.

부산 지역은 강진·부안 등 질 좋은 청자 가마가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지역과 원거리에 위치함으로써 제작 기술의 전파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뚜렷한 소비 계층이 없어 중·하품만이 소량 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려 시기 부산 사람들의 삶과 문화 수준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산은 왜구로부터의 침략을 막는 곳]

고려 말·조선 초는 왜구의 피해가 극심하던 시기였다. 부산은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 섬과 지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이 시기 국방과 외교의 일선을 담당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부산 지역에 남아 있는 조선 시대 매장 문화재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1397년(태조 6)에는 부산포(富山浦)[지금의 동구 좌천동 일대]에 진(鎭)을 설치하였고, 1592년(선조 25)에는 울산 개운포에 있던 경상 좌수영을 수영(水營)[지금의 수영구 수영동 일대]으로 옮겨옴으로써 국방 요새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1407년(태종 7) 웅천의 내이포와 함께 부산포가 개항된 이후 17세기에 들어와 두모포 왜관이 설치되었고, 이곳이 협소하여 번폐스러워지자 용두산 일대에 초량 왜관을 두었다.

부산은 일본 사절과 상인의 출입이 빈번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 사절들이 일본에 파견될 때도 모두 이곳을 경유해 감으로써 조선 시대 한일 간 외교와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조선 시대 부산은 왜적을 막는 관방적 성격과 함께 대일 무역의 중심지라는 이중적 성격을 가진 곳이었다.

동래는 행정·교육의 중심지로 읍성 내에는 객사, 동헌을 비롯한 각종 관아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읍치(邑治) 가까운 곳에 동래 향교·안락서원·시술재(時述齋) 등 교육 기관이 밀집되어 있었다. 또한 군사·외교적 상황에 따라 현, 도호부, 부 등으로 위상의 변동을 겪게 된다.

1. 양반은 기와집에서 평민은 초가집에서 살다.

조선 시대는 신분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문화도 달랐다. 두구동 임석과 기장 동부리에 관아 시설 및 양반 마을에 공급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 가마가 조사되었고, 금정구 남산동·동상동·부산진구 전포동 등지에서 도자기 가마터가 확인되었다. 최근 동래 복천동과 오륜대 유적 등에서는 마을을 보호하는 시설물로 추정되는 도랑이 조사되기도 하였다.

평민들은 땅을 약간 파고 기둥을 세운 다음 볏짚이나 풀잎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에서 생활하면서 농사일과 생활에 필요한 여러 도구를 직접 만들어 사용하였다. 집 뒤에는 도랑을 파서 빗물을 바깥으로 흘러내리게 하고, 집 가까이에 구덩이를 파서 쓰레기를 버렸다. 기장 교리 유적에서는 이러한 구조의 마을이 발견되었다.

2. 죽어서도 차별을 받다

일반 평민과 양반 계층은 죽어서도 사용하는 무덤이 달랐다. 평민은 목관을 안치하는 널무덤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움무덤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양반 계층은 회덧널을 안치하는 회덧널무덤을 주로 사용하였다. 움무덤이나 널무덤의 경우는 직사각형의 묘 구덩이 벽면에 별도의 공간인 감실(龕室)을 만들어 명기(明器)를 묻은 후 봉분을 만드는 형태이다. 부산 지역의 민묘에서 출토된 명기로는 분청사기, 백자, 청동제 수저와 뚜껑 그릇 등이 있다. 간혹 가위, 반지, 유리, 수정제 구슬 등의 장신구도 출토된다. 이러한 무덤의 주인공은 아마도 여성이었을 것이다. 금정구 남산동, 북구 덕천동, 수영구 망미동, 기장군 교리 등지에서 조선 시대 분묘 유적이 조사된 바 있다.

[매장 문화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부산 자체가 중심으로 존재한 시기는 구석기 시대부터 가야 시대까지이다. 가야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중앙에 대한 지방으로 존재해 왔다. 부산은 지방 중에서도 변방에 속하였다. 이러한 지역일수록 역사를 알 수 있는 문헌 자료가 소략하다. 결국 옛 부산 사람들의 생활상을 살펴보려면 고고학적 자료, 즉 매장 문화재에 주목해야 한다.

산업화가 진행되며 개발 등으로 수많은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많은 자료가 축적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급속히 이루어지는 구제 발굴의 경우, 개발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형식적 절차로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조사라는 이름으로 유적의 파괴로 볼 수 있는 행위도 발생한다. 조심하고 삼가야 할 일이다. 차분한 기획을 거쳐 학술적 접근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터이다. 이러한 결과들이 쌓여야만 부산의 역사를 제대로 밝히는 자료 축적이 가능하다.

부산의 역사를 밝힌다는 것은 부산이 어떤 곳인가를 살피는 일이다. 우리는 이를 정체성이라고 한다. 정체성을 알아야만 부산이 발전적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청사진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역사 연구는 중요한 것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