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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기념 공원에서 부르는 이국의 이름들-아직도 그대 이름은 찰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022
한자 -記念公園-異國-
영어의미역 The Names of Foreign Countries Sung at the U.N. Memorial Cemetery: Your Name is still Charli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93[대연동 779-1]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나여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1년 1월 18일연표보기 - 유엔 기념 공원 조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3년 - 『아직도 그대 이름은 찰리』 초판 발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0년 - 『아직도 그대 이름은 찰리』 개정판 발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0년연표보기 - 유엔 기념 공원 유엔 평화 문화 특구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0년 10월 - 유엔 평화 대축전 행사 개최
소재지 유엔 기념 공원 -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93[대연동 779-1]지도보기

[잊혀진 전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어제 편지가 참 많이 왔군요. 그중에 당신 편지가 두 통이나 있었습니다. 매주 받는 편지에 감사하는데, 무엇보다 당신이 보낸 편지에 감사하고, 또 기다려진답니다. 정말 이곳은 춥군요. 얼음이 얼고, 맑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불어옵니다. 날씨가 더 추워질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추운 날씨와 함께 외로움도 몰려옵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당신만 있으면 한꺼번에 해결될 터인데….”[호주 3대대 대대장으로 6·25 전쟁에 참전해 사망한 그린 중령이 아내 올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아버지를 뵌 적은 없지만, 항상 아버지와 그 희생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겨 왔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 덕분에, 아버지는 언제나 제 가슴 속에서 살아계셨습니다. 평안히 계십시오, 아버지.

당신을 그리워하는 모든 이들과 당신의 아들 니겔로부터”[영국 안장자 SMITH E W의 아들(Mr. Nigel J.W. Saunders)]

영국의 그린 파크, 뉴욕의 센트럴 파크, 서울의 올림픽 공원, 북경의 세계 공원, 일본의 히부야 공원 등 다양한 기능과 전시로 이목을 끄는 공원들이 많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고 특별한 공원이 바다, 산, 강을 두루 갖춘 아름다운 부산에 있다.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에 위치한 재한 유엔 기념 공원[이하 유엔 기념 공원]이다. 전쟁을 상기시키는 기능이 있지만 그보다는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특별함을 품고 있다. 그것은 6·25 전쟁 중 유엔 기념 공원에 안장된 전몰장병들의 안타깝고 가슴 아픈 사연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6·25 전쟁은 대한민국의 모든 국토와 국민들에게 상처를 남겼지만, 특히 부산은 6·25 전쟁을 거론하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전쟁이 끝난 1953년 7월까지 3년 동안 임시 수도였던 부산을 상징하는 한 많은 피난살이, 잊지 못할 판잣집, 슬피 우는 경상도 사투리의 아가씨는 한낱 유행가 가사가 아닌 6·25 전쟁이 부산에 터트린 핵폭탄이었다. 전쟁의 최후방이었지만 그 피해는 최전방 못지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3년은 6·25 전쟁이 발발한 지 63주년을 맞는 해이다. 환갑을 넘겨 노쇠한 6·25 전쟁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제 많지 않다.

6·25 전쟁 시기에 부산으로 피난 온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산복 도로는 부산을 방문하는 다른 지역인들뿐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필수 관광 코스가 되었고 6·25 전쟁 당시 미군 주둔 부대였던 하야리아는 이제 부산 시민 공원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전쟁의 환란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산복 도로, 하야리아의 변모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미덕은 무엇보다 전쟁을 겪은 세대나 겪지 않은 세대 모두에게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일한 유엔 기념 공원 역시 전쟁으로 인해 남겨진 건축물로 세련되고 훌륭한 외양을 자랑하지만 산복 도로나 하야리아 부대만큼 우리에게 가까이 있지 않다. 전쟁의 상처는 품고 있으나 환골탈태한 모습으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는 산복 도로와 하야리아 부대처럼 유엔 기념 공원 역시 우리의 마음속에 보다 더 친근하고 잊을 수 없는 부산의 대표적인 장소 중 하나로 새겨져야 한다. 그것은 이곳에 잠든 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이 땅을 비롯해 인류의 안식처에서 전쟁이 영원히 사라지길 바라는 소망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진흙 속에 핀 연꽃으로, 원더풀!]

인근의 넓은 논을 경작할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연못이 있어 그 지명이 유래된 대연동에 이제 연못은 사라졌지만 유엔 조각 공원, 유엔로, 평화 공원을 사방에 포진한 채 6·25 전쟁이 발발한 그 다음 해인 1951년 1월 18일 유엔군 전사자를 매장하기 위하여 유엔군 사령부가 조성한 유엔 기념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부산광역시립박물관과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유엔 기념 공원에 도착하니 정문 옆 철제 벽면에 ‘대한민국 근대 문화유산 등록 문화재 제359호 재한 유엔 기념 공원’ 이라고 찍힌 철제패가 이름표처럼 붙어 있다. 몇 걸음 발길을 옮기자 유엔 기념 공원 정문을 지키고 서 있는 젊은 병사가 거수경례로 객을 맞는다. 먼 옛날 이 땅의 전쟁 중에 목숨을 잃은 타국의 군인 묘역을 지키는 젊은 병사에게 가던 눈길이 유엔 관계 건축 가운데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찬사를 받았다는 유엔 기념 공원의 정문으로 옮겨간다.

“이국땅에서 평화를 위하여 싸우다 간 여러 나라들의 천사들에게 두 손 모아 경건히 바친 작품이다.”[김중업의 『건축가의 빛과 그림자』 중에서]

센스 있는 건축가 김중업은 그리운 고국으로 달려가는 이국 병사의 마음을 헤아렸는가. 청청하게 떠서 흘러가는 흰 구름을 잡으려는 듯 네 귀의 처마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있다. 그 마음 담긴 소반 같은 지붕을 튼실한 여덟 개의 곡선 기둥이 떠받들고 있다. 이제 다시는 흔들림 없는 국가를 만들겠다는 우리의 다짐 또한 저리 튼실하기를 바라며 발길을 옮긴다.

스테인드글라스와 세모진 형태의 이국적인 건축물 추모관에서 6·25 전쟁과 유엔 기념 공원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고 밖으로 나오자 제 빛깔을 뽐내고 있는 맑고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멋진 조화를 이루며 파인애플을 잘라 끼워 놓은 듯한 키 큰 나무들 위로 펼쳐져 있다. 흡사 병사들의 철모처럼 느껴지는 둥글고 키 낮은 나무는 한낮의 뜨거운 태양을 가려주려는 듯 푸른 잔디 위로 도열해 있다.

유엔 기념 공원의 바닥을 융단처럼 깔고 있는 잔디밭에는 고 정주영 회장과 관련된 전설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공원이 아니라 묘지로 불리던 시절, 때는 전쟁의 와중이었고 겨울이었다. 고 정주영 회장이 부산에서 미군 관련 공사를 대거 수주해 재기의 발판을 노리고 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5일 만에 유엔 묘지를 푸른 잔디로 덮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각국의 유엔 사절이 내한해 참배하는 행사를 앞두고 흙으로만 뒤덮인 묘지의 민망함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짧은 기한과 넓은 면적을 채울 잔디를 구하기 힘든 터라 모두들 고개를 내젓고 있을 때 정 회장은 재치를 발휘해 유엔 묘지를 물결치는 푸른색으로 뒤덮는다. 삭막한 땅의 흙을 감추기 위해서는 굳이 잔디가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에 낙동강 변에 있던 보리를 모두 옮겨와 심었던 것이다. 한겨울의 물결치는 푸른 보리를 보고 방문자들의 입에서 연신 흘러나왔던 말은 “원더풀!”, “원더풀!”이었다고 한다. 보리가 물결치던 그 자리에 7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짙푸르고 정갈한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나도 모르게 외마디가 튀어나온다. “원더풀!”

[우리의 가슴에 임들의 이름을]

각국의 기가 게양된 주 묘역과 녹지 공간 사이에 도은트 수로가 설치되어 있다. 6·25 전쟁에 참전한 병사 중 최연소 전사자였던 호주 병사 도은트[J. P. DAUNT]의 성을 따서 지은 것이다. “도은트….” 17세 어린 나이에 머나 먼 이국땅에서 목숨을 잃은 어린 병사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본다.

수로가 시작되는 입구에 몇 마리의 작은 금붕어가 보인다. 맑은 물속에 도란도란 무리지어 다니는 금붕어를 일별하고 수로를 따라 몇 걸음 옮기자 앞서의 금붕어보다 성큼 자라 있는 물고기가 보인다. 어린 병사의 자유와 평화를 소망하던 기원이 씨앗 되어 대한민국이 성장했듯 도은트의 수로 속에서 빛나는 비늘을 키웠을 물고기를 오랫동안 바라본다. 물속에 빠진 푸른 잎사귀 그림자 사이로 꼬리와 지느러미를 유연하게 흔들며 헤엄치는 물고기에게서 자유와 평화로움을 느낀다. 고요하고 잔잔하게 흐르는 도은트 수로 위로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한여름 젊은 태양이 내리쬐고 있다. 젊은 병사 도은트, 그의 스러지지 않는 젊음처럼 이 땅에 영원한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며.

도은트 수로 지근거리에 또 하나의 물을 담고 있는 건축물이 있는데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 명비이다. 각각 전쟁과 죽음, 평화와 삶의 상징 철모와 꽃을 품고 있는 원형 수반 주위로 6·25 전쟁에서 사망한 전몰장병의 이름이 모두 조각된 검정색 명비가 길게 늘어서 있다. 실종자를 포함해 4만 895명의 전사자 이름이 알파벳 순서로 새겨진 검정색 명비 앞에 서니 무겁고 웅장한 느낌과 함께 숙연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 없다. 영원한 세계 평화와 전몰장병들의 영혼에 대한 추모를 의미하는 수반 안의 우뚝 솟아 있는 꺼지지 않는 불꽃 기둥 뒤로 둘러 선 추모 명비가 마치 바람을 가려주는 병풍처럼 느껴진다.

“어떤 하나가 좋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단 것을 깨달은 것 같아요. 이 희생을 용사 아저씨들께서 해주셨고 이제 저도 그런 희생을 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사이버 유엔 기념 공원 추모 글 중 12살 김로이(2013. 6. 30)]

“전 12살 밖에 되지 않아 전쟁에는 못 나가지만 지금 다른 나라에 돕고 있는 친구는 있어요. 제가 크면 용사님들처럼 다른 나라를 위해 죽기까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다른 나라를 돕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이런 마음을 심어주신 여러분께 정말 감사드려요.”[사이버 유엔 기념 공원 추모 글 중 배예원(2013. 6. 29)]

“여러분들 덕분에 저희가 이렇게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군인 분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 정말 행복한 나라에서 태어난 것 같습니다.”[사이버 유엔 기념 공원 추모 글 중 초등학교 6학년 김소정(2013. 6. 25)]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을 행복하게 여긴다는 초등학교 6학년 김소정 학생의 행복감이나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12살 김로이 학생과 다른 나라를 돕고 싶다는 배예원 학생의 다짐은 자유와 평화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한 도은트의 말없는 가르침이다.

2012년 한 해 동안 방문객이 수반에 던져 넣은 동전을 유엔 기념 공원 추모객 이름으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랑의 열매에 기부하였다는 팻말이 수반 앞에 서 있다. 가슴 따뜻한 또 하나의 정경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피어난다. 우리 모두의 마음을 대신해 평화의 전령사들께 바치는 추모 명비 앞의 이해인 수녀 헌시를 조용히 읊조리며 전사자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으로 발길을 돌린다.

“우리의 가슴에 임들의 이름을 사랑으로 새깁니다. 우리의 조국에 임들의 이름을 감사로 새깁니다.”

[묘비의 노래]

6·25 전쟁 당시 8만 7000여 명이 참전하여 1,177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영국. 무성한 갈기를 드리우고 엎드린 사자 형상의 영국 추모비 뒤로 안장자들 묘역이 보인다. 영국의 전몰용사 에드워드 스미스는 6·25 전쟁에 참전한 지 7주 후에 사망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가족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냈는데 그 선물은 그의 전사 통지서보다 늦게 도착했다.

“선물은 유난히 예쁘게 포장되어 있었어요. 받자마자 눈물이 흘렀죠.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선물을 받고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오빠의 선물을 잘 보관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제가 물려받았고 조카인 나이젤에게 물려주었습니다.”[전몰장병 에드워드 스미스의 여동생 베티]

또 다른 영국 전몰용사 헤론 상병의 아내 엘렌은 남편이 잠들어 있는 유엔 기념 공원을 방문한 후 언제나 “죽으면 남편 곁에 묻히고 싶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엘렌에게 딸 캐시는 “돈이 없으면 한국에 갈 수 없다”는 농담을 했다. 엘렌은 죽기 전 5년 동안 치매에 시달렸는데 돈을 관리하고 있는 딸에게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내가 한국에 또 갈 수 있는 돈이 있느냐?”라고 물어보곤 했다. 결국 엘렌은 2001년 1월 10일 치매에 걸려서도 잊지 못하던 남편 곁에 영원히 잠들었다.

“아버지 것을 하나 갖고 싶어서 유엔군 묘지에서 장미 한 송이를 몰래 꺾어서 왔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남편과 딸이랑 갔을 때 어머니 것으로 또 몰래 한 송이를 꺾어 왔습니다.”[영국 전몰용사 J. T. 헤론 상병의 딸 캐시]

아버지 어머니를 대신해 캐시가 꺾어간 유엔 기념 공원의 붉은 장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이 순간 흰 구름 펼쳐진 하늘 아래 초록빛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유독 붉은빛을 토하고 있는 장미는 내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찰리, 내 사랑!

아침이 그토록 눈부셨던 그 날!

달콤한 작별 키스 아직도 남아 있는데

곧 돌아온다던 그 손 놓지 말 것을

지구 동쪽 끝 미지의 나라

달빛 곱던 강물이 선홍색 핏빛 되고

내 소중한 당신 잠들던 날

늦가을 붉은 사과 시리도록 아름다웠지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해도

아직도 사랑하는 그대

[올윈 그린의 『아직도 그대 이름은 찰리』 중에서]

올윈 그린의 남편 찰리 그린은 1950년 11월 1일 30세의 나이로 6·25 전쟁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남편 찰리를 잊지 못해 13년 동안 공들여 한 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아직도 그대 이름은 찰리』. 그녀가 13년 동안 공들여 집필한 도서의 제목이다.

올윈이 그녀의 남편 찰리를 처음 만난 건 17세 때였다. 아버지 가게 일을 돕고 있던 올윈과 만년필을 사기 위해 가게를 찾은 키가 큰 21살의 젊은 군인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지만 표현은 하지 못하고 그대로 헤어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2년 뒤 1941년 어느 날 올윈에게 한 통의 편지가 전달되는데, 바로 만년필을 사갔던 그 젊은 군인이 보낸 것이었다. 편지로 이어진 그들의 인연은 2년 뒤 결혼으로 맺어졌다.

찰리가 2차 대전 중 중동 지역에 배치되거나 2차 대전 후에는 콜롬보와 뉴기니아 내전에 참전했기 때문에 그들이 함께했던 생활은 짧았다. 찰리는 1946년 군대에서 사회로 복귀하고 1947년 딸 안띠아가 태어났지만 제대로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1949년 호주 정규군 장교로 다시 입대했다. 그 다음 해 호주군 중령 대대장으로 6·25 전쟁에 파병된 찰리는 30세의 나이로 전사하고 말았다.

세 살 된 딸과 홀로 남겨진 26세의 올윈은 그를 잊기 위해 신혼살림을 시작했던 그래프톤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 후 그녀는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하고 20여 년간 영어 교사를 했다. 1980년 교사직에서 은퇴한 그녀는 1981년부터 남편의 전기를 쓰기 시작해서 1993년에야 집필을 마칠 수 있었다. 찰리와 7년간 결혼 생활을 했던 그녀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느꼈고 그가 속했던 군대와 전쟁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공부하는 것보다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나. 나는 짧은 7년의 결혼 생활과 그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그의 사후 30년이 되도록 슬픔과 죄의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부에 집중함으로써 그 슬픔을 극복하고 싶었다. 찰리에 대한 책을 씀으로써 내 아픈 상처가 치료 받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녀는 책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올윈이 세상에 없는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책을 쓰면서 가장 고통스럽고 어려웠던 것은 찰리가 2차 대전이 끝나고 호주로 돌아 왔을 때 그녀가 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한다.

“찰리는 농부가 되고 싶어 했는데 나는 반대했다. 그리고 나중에 결국 그는 군인으로서 한국에서 전사했다. 그의 죽음 후 나는 말 못할 죄책감으로 60년을 살았다. 그러나 내가 2010년에 내 책의 개정판을 냈을 때 나는 찰리가 정말 놀라운 리더십이 있는 군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찰리가 농부의 꿈을 접고 다시 군대로 복귀한 것도 그에게 그렇게 나쁜 선택은 아니었겠다, 라는 생각을 한다.”

‘왜 나는 찰리가 2차 대전 후 전선에서 돌아왔을 때 그를 좀 더 긍정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왜 2차 대전 후 찰리는 다시 군대에 들어갔고 왜 1,000명의 군인 중에 그날 한국에서 찰리만 죽었을까?’ 따위의 의문을 풀어가는 과정과 찰리와 그가 속했던 군대, 전쟁을 알아가는 일은 그녀에게 고통스런 여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993년 책의 초판이 발간되고 나서 6·25 전쟁에 대해 더 연구하여 알리는 것이 자신의 임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2010년 개정판까지 내게 되었다고 한다. 남편 찰리를 보내고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단 한순간도 그의 생각을 안 한 적이 없다는 올윈은 1993년 자신의 책 『아직도 그대 이름은 찰리』 에필로그에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를 실었다.

“보고 싶은 찰리. 당신에게 편지를 보낸 지 오랜 세월이 흘렀군요. 당신이 전사한 지 어느덧 40년이 넘었군요. 그동안 많은 것을 깨달았답니다. 우리 사이에 시간은 의미가 없지요. 우리가 서로 같이 있었던 시간을 몇 분 또는 몇 년으로 계산하는 것은 참 부질없는 일이지요. 내 기억이 살아 있는 한 우리 결혼 생활은 평생 계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당신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당신은 내가 아는 인간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이랍니다. 내가 항상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당신을 사랑하는 올윈”

2007년 8월 17일, 딸과 함께 세계 여행을 하던 Mr. Claude Morin은 6·25 전쟁에서 전사한 그의 형을 만나기 위해 유엔 기념 공원을 방문했다. 1952년 그가 다섯 살일 때 그의 형은 6·25 전쟁에 참전했다. 지금까지 그의 기억 속에는 1951년 겨울 크리스마스 파티 때 자신을 목마 태우고 활짝 웃으며 재미있게 놀던 형의 모습과 그 다음 해 형의 전사 통지서를 받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의 모습이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캐나다 그의 집 거실에는 형과 관련된 그들만의 작은 박물관이 있다고 한다. 6·25 전쟁 당시 형이 가족들에게 보냈던 사진과 편지, 훈장 그리고 6·25 전쟁 50주년 기념 우표, 휴전 기념일 행사 때 만든 포스터 등 6·25 전쟁과 관련된 것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딸과 함께 처음 유엔 기념 공원을 방문한 Mr. Claude Morin은 이곳이 이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인 줄 몰랐다며 울먹이면서 말했다.

“형이 잠들어 있는 곳을 이렇게 아름답게 가꿔줘서 고맙습니다.”[캐나다 안장자 Morin Camille Joseph의 유가족 Mr. Claude Morin]

묘비명 중 Morin Camille Joseph의 이름을 찾기 위해 묘역으로 발을 내딛는다. 순간 멀리서 안내원인 듯싶은 남자가 “들어가면 안 된다”고 고함을 지른다. 재한 유엔 기념 묘지에서 일반 시민에게 친숙한 공간으로 다가가기 위해 유엔 기념 공원으로 바뀐 공원은 여전히 다가가서는 안 되는 묘지임을 실감한다.

“부모도 시간이 지나면 잊는데…… 쉼터도 없고…… 쉽게 다시 찾을 수 있게 만들어서 보고 느껴야 역사고 전쟁이고 기억할 거 아니겠어요.”[택시 기사 이민수(56세)]

유엔 기념 공원을 찾아오는 길, 불현듯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유엔 기념 공원’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가 들은 대답이 내내 머릿속에서 맴돈다. 묘비에 접근할 수 없어 상한 마음을 캐나다 기념 동상을 보는 것으로 대신하기 위해 조형물 가까이 다가선다. 하지만 모자도 쓰지 않고 직위, 무기도 없는 군인과 함께 있는 소년과 소녀 손에 쥐여진 21개의 단풍나무와 무궁화가 6·25 전쟁에 참전 했던 캐나다 실종자 21명을 상징한다는 안내 문구로 인해 가라앉아 있던 마음에 무거운 추가 더해진다.

[부산 속의 장소로]

“부산 시민이 볼 때 유엔 기념 공원은 참으로 이질적인 시설이다. 지금처럼 부산이 국제화되기 이전에 거의 독보적인 국제 시설이었기에 도시의 자랑거리이기는 했으나 건립 초기부터 현재까지 여전히 부산 시민들의 일상과는 별로 접점이 없는 장소이다.”[전진성,「유엔 기념 공원을 부산 속에 재배치하기」 중에서(『유엔 기념 공원과 부산』 학술 발표회)]

“철저하게 주변과 폐쇄되고 관람객을 지나치게 통제하는 팍팍한 분위기, 민간 업자에게 맡겨 버려 입구 주차장에서부터 겪는 불친절함 등 첫인상을 시급히 개선해야….”[『부산 일보』, 2013. 7. 26]

인근의 평화 공원과 유엔 기념 공원을 가로 막은 담장에 대해 동명대학교 사회복지학과의 김교정 교수는 “후문 하나만 내어도 동선이 훨씬 좋아져 많은 사람들이 찾을 텐데 정말 안타깝다. 관리에 어려움은 더 많겠지만 시민 의식이 놓아지고 있으니 관리 위원회가 검토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부산 일보』, 2013. 7. 26]. 주변과 단절되고 일반 시민의 접근이 그다지 용이하지 않은 유엔 기념 공원의 재배치에 대한 의견, 관람객을 통제하는 분위기 등에 대한 지적은 새겨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부산 문화 회관,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유엔 조각 공원, 유엔로, 평화 공원으로 둘러싸인 유엔 기념 공원은 2010년 유엔 평화 문화 특구로 지정되었고 이를 기념해 10월에는 유엔 평화 대축전 행사가 열렸다. 또한 2014년부터 사업비 50억 원을 투입하여 인근에 평화 거리[도시 철도 2호선 대연역~유엔 교차로], 유엔 거리[유엔 교차로~부산 예술 회관], 추모 거리[유엔교차로~유엔 기념 공원~평화 공원]를 조성한다는 계획도 발표됐다[『부산 일보』, 2013. 6. 21]. 이러한 시도와 행사가 한낱 상업주의에 치우친 관광 상품으로 변질될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 또한 높다.

“소유와 관리가 부산과는 전혀 무관하게 이뤄지는 등 엄숙주의와 신비주의로 일관해 온 유엔 기념 공원이 최근에는 관광 상품으로 개발할 목적으로 평화 문화 특구로 지정되는 등 신성불가침과 상업주의의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결합을 보여 주고 있다.”[민주시민교육원 부원장 김종세의 「평화의 상징 유엔 기념 공원을 비판하다」 중에서(『부산 일보』, 2013. 6. 21)]

깔끔하고 현대적인 시설과 감동적인 콘텐츠를 갖추고 있는 세계 유일의 유엔 기념 공원을 부산이라는 공간 속에 녹여 세계인이 주목하고 잊히지 않을 장소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우리의 남은 과제이다.

[갈등과 대결을 넘어 세계 평화의 상징 공간으로]

전 세계 의료 지원을 포함해 21개 나라에서 연인원 180여 만 명이 참여했으며 4만 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냈던 6·25 전쟁이 발발한 지도 어느덧 63년이 지나고 있다. 현재는 대부분 본국으로 시신이 송환됐지만 2,300여 명의 참전 용사들은 유엔 기념 공원에 영면하고 있다.

“내 전우들은 모두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비록 죽었지만 유엔군 묘지가 그들의 집입니다. 그들의 집이면서 또 내 집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에 있는 내 친구들을 자주 방문합니다.”[영국군 참전 용사 제임스 그룬디(83세)]

“1988년 어머니가 한국에 있는 유엔 기념 공원에 다녀온 후 언제나 내가 죽으면 아버지 해론 곁으로 가겠다, 라고 말했습니다.”[영국 전몰용사 해론 상병의 유가족 캐시]

“저희들에게 한국은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터키 군인들이 한국 땅에서 피를 나눈 형제가 됐기 때문입니다.”[터키군 참전 용사 오스만 야사르 에켄(82세)]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남편 찰리가 잠들어 있는 유엔 기념 공원을 방문하는데 묘지는 아름답고 정성스럽게 가꾸어져 있다. 찰리를 그렇게 정성스럽게 돌보아 주시는 한국인들에게 감사한다. 그곳을 방문할 때 한국 어린이들이 묘지 앞에서 기도하고 경의를 표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정말 감동스러웠다.”[『아직도 그대 이름은 찰리』의 저자 올윈 그린]

6·25 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은 동료가 영면한 유엔 기념 공원에 대해 동료의 집이고 나의 집이라고 할 정도로 남다른 애착과 의미를 부여한다. 자신의 나라에서 올리브나무를 소중히 안고 유엔 기념 공원에 잠들어 있는 동료를 방문하는가 하면 그날의 기억을 더듬고 잠든 동료 병사를 위해 기도를 올리며 눈부시게 발전한 한국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새삼 느낀다. 또한 전사한 자신의 남편을 잘 돌봐주어서 고마워하기도 하고 감동을 받기도 한다. 이렇듯 참전 용사와 그 유가족에게 한국은 고향의 나라, 형제의 나라, 죽으면 묻히고 싶은 마지막 안식처로 고맙고 감동적인 나라로 인식된다. 그것은 전쟁으로 빚어진 사연에서 기인한다. 그 틈에 유엔 기념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유엔 기념 공원은 호주 참전 용사의 부인 올윈 그린 여사가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13년 동안 집필한 『아직도 그대 이름은 찰리』라는 도서의 제목처럼 6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잊히지 않고 영원히 가슴에 새겨진 참전 용사와 전몰장병 유가족들의 사랑의 성지이며 세계의 평화를 지키고 자유와 사랑을 인류에게 인식시키는 나침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6·25 전쟁 중 임시 정부 역할을 하며 최전방 못지않은 환란을 겪었던 부산은 이제 번영과 발전의 역사를 그려가고 있다. 전쟁의 상흔은 오히려 그 어디에도 없는 진귀한 관광 상품이 되었고 화려한 영화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고 있으며 어두운 밤바다를 밝히고 있는 광안 대교의 불빛처럼 그 미래가 밝다.

이에 발맞춰 전쟁으로 인해 빚어진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유엔 기념 공원이 묘지가 아닌 진정한 공원의 역할을 하려면 시민들이 언제라도 방문해서 영면한 이들의 끝나지 않은 노래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제 다시는 그런 슬픈 노래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리는 일이자 살아남은 자와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자유의 땅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는 이들의 몫이다. 그리하여 전쟁의 소산물 유엔 기념 공원이 세계에 단 하나뿐인 평화의 성지로 영원히 기억되게 하여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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