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86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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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Bungae Village |
이칭/별칭 | 분깨,분포 마을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분개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선석열 |
[정의]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염전[盆]이 있던 포구(浦口)라 하여 분포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지역 방언으로 ‘분깨’라는 명칭이 더 잘 알려져 있다. 분포(盆浦) 마을이라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조선 후기에 염분(鹽盆)[바닷물을 가마솥에 붓고 끓여 소금을 만드는 방법]이 조성되면서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당시 동래부에는 69좌(座)의 염분이 있었다고 한다. 1740년 간행된 『동래부지(東萊府誌)』에 분포리(盆浦里)는 동래부의 관문에서 28리[약 11㎞]의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동래부 남촌면(南村面)으로 불렸으며,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慶尙南道東萊郡家戶案)』[1904]에는 동래군 남하면 용호동에 56호가 있으며 남하면 10개 동 중에서 가장 큰 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910년 행정 구역 변경으로 동래군 용주면(龍珠面) 용호리(龍湖里)가 되었으며, 1936년 용주면 일부가 부산부로 편입되면서 용호리도 부산출장소에 편입되어, 『조선의 성(朝鮮の姓)』[1936]에 서면 용호리에 파평 윤씨(坡平尹氏) 동성 마을[35가구]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분개 마을은 과거 염전으로 유명하였는데,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재정 통계 연보』[1909]에 연간 소금 생산량이 22만 6520㎏으로 집계되어 있다. 조선총독부가 이곳에 ‘시험 제염 용호출장소’를 설치하여 염전의 이권을 수탈해 감으로써 분개 주민은 생계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광복 당시 분개 마을에는 김해 김씨, 김녕 김씨, 파평 윤씨, 개성 왕씨, 담양 전씨, 밀양 박씨 등 100여 호가 살았다고 한다.
1953년 부산시 대연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57년 구제(區制) 시행으로 부산진구 대연출장소로 개편되었다. 1963년 부산시가 부산직할시로 승격되었고, 1973년 부산직할시 대연출장소로 승격되었다. 1975년 부산직할시 남구가 신설되면서 편입되었고,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되면서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의 분개 마을이 되었다.
[자연 환경]
분개 마을은 부경대학교 대연캠퍼스에 있던 사분개 마을과 남부 하수 처리장이 있는 섭자리 마을 사이 바닷가에서 소금을 생산하는 마을이었다. 현재는 바닷가가 매립되어 평지로 바뀌었다.
[현황]
지금은 도시화와 매립에 의해 LG 메트로시티 등의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주변에 분포초등학교와 분포중학교, 분포고등학교 등이 있어 옛 마을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