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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8877
한자 菖法-
영어의미역 Changbeob Village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사상구 괘법동 창법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영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자연 마을
변천 시기/일시 1888년 -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창법리
변천 시기/일시 1914년 -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창법리에서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괘법리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63년 -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괘법리에서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사상출장소 괘법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75년 -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사상출장소 괘법동에서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괘법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78년 -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괘법동에서 부산직할시 북구 괘법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95년 - 부산직할시 북구 괘법동에서 부산광역시 사상구 괘법동으로 개편
자연 마을 창법 마을 - 부산광역시 사상구 괘법동 창법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괘법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창법 마을의 이름은 창진리(倉津里)에서 유래한다. 창진(倉津)이란 지명은 이곳에 있던 사창(社倉)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1872년(고종 9)에 제작된 『경상도 지도(慶尙道地圖)』에 사상면 사창(社倉)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사창은 조선 시대 한 마을을 이룬 공동체로 하여금 창(倉)을 설치하여 곡물(穀物)을 저장해 두었다가 흉년이나 춘궁기(春窮期)에 대여해 주고 다음 수확 때 환곡하게 하는 제도이다. 이 창고가 있던 곳의 나루터가 바로 창나루, 창진이었던 것이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 사상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고문서에 ‘창진’이란 지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에는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동래 부사 박재명(朴齋明)이 재임한 1832년(순조 32) 샛강에 제방을 쌓았던 정황을 기록한 「사상면 방경 전말 등록(沙上面坊坰顚末謄錄)」에 “창법방(倉法坊)에 2,580명의 부역군(負役軍)을 동원하여 강제방 1,235보(步), 신축 제방 190보, 해방축 제방 232보”를 축제했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창법방(倉法坊)은 창진 마을 앞 들판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사상의 향약계(鄕約契)인 「연구계 신절목(戀舊契新節目」[1863]에 모라리·덕포리·괘내리와 함께 창진리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1888년(고종 25)과 1891년(고종 28)에 작성한 「사상면 호적 중초(沙上面戶籍中草)」에 괘내리와 함께 창법리(昌法里)로 기록되어 있다. 사상 지역의 다른 고문서에 창진리, 창법방(倉法坊), 창법리(倉法里) 등으로 혼용되어 있음을 볼 때, 원래의 창진이 창법으로 변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이곳 창법 들판에도 사구(砂丘)가 여러 곳 생기고, 일제 강점기에 낙동강 제방이 축조되어 뱃길과 물길도 끊기면서 옛 모습이 크게 변화하였다.

1914년 일제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괘내리창법리를 합쳐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괘법리가 되었다. 1963년 부산직할시에 편입되며 부산진구 사상출장소 괘법동이 되었다. 1975년 부산진구의 구포출장소와 통합하여 시 직할 북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8년 북구 괘법동이 되었고,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면서 북구에서 분리되어 부산광역시 사상구 괘법동 창법 마을이 되엇다. 괘법동 지역은 일찍이 사상의 중심지 기능을 하여 조선 시대에는 사상면사무소가 소재하였고, 이후 사상출장소와 북부출장소도 있었던 장소로, 1995년 사상구 설치 당시 구청 소재지였으나 2002년 사상구청은 감전동의 현 청사로 이전하였다.

조선 시대 이곳에 있던 포구를 창날포라고 불렀다. 이곳은 광선(廣船)을 정박할 수 있는 큰 포구였는데, 창나루 포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곳 창날포로 들어오는 배와 나가는 배는 돛을 내려 경의(敬意)를 표하고 선창에서 싸움질하거나 욕질을 하면 고로(古老)들에게 붙들려 가서 벌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뱃사람들은 이 고장을 여포(呂布)의 창(槍)날처럼 매섭고 까다로워 ‘창날’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또 창날포는 부상포(富商浦)라고도 한다. 1788년(정조 12) 동래 부사 이경일(李敬一)이 사상면의 샛강에 처음으로 제방을 쌓아 준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경일 축제혜민비(李敬一築堤惠民碑)’에 창진리 부상포가 나온다. 당시 사상면 사창이 있던 창나루 일대에는 수로가 크게 열려 있어 유두강의 물길이 가포를 거쳐 덕포동과 물길로 마주 보던 이곳 창나루로 들어오는 곳에 장배머리가 있었다.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장배[商船]가 이곳까지 물자를 싣고 들어와 포구에서 짐을 내리고 머물던 곳으로, 크게 번성하여 부(富)를 누리던 곳이라 부상포라 이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자연 환경]

창법 마을은 서쪽으로 감전수로와 인접하고 그 너머에 낙동강이 흐른다. 동쪽으로 백양산이 있다.

[현황]

창법 마을괘내리 마을 서쪽에 있다. 현재 이마트, 사상 강변 동원 아파트, 부산 산업 용품 유통 단지 등이 들어서 있다. 사상구 감전동 서전 마을과 인접하며, 서부산권 교통의 중심지이다. 또한 홈플러스, 르네시떼 등 대형 쇼핑몰과 산업 물류 상가 등이 중앙의 광장로를 중심으로 밀집해 있다. 창진초등학교의 학교명에서 창진, 창나루가 있었음을 연상하게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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