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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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敬一築堤惠民碑 |
영어의미역 | Stone Monument for Yi Gyeongil |
이칭/별칭 | 부사 이공경일 축제혜민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부산광역시 사상구 사상로 320-1[덕포동 417-1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오인택 |
[정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에 있는 조선 후기 동래 부사 이경일(李敬一)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건립 경위]
동래 부사 이경일이 사면(沙面)[현 사상과 사하]에 제언(堤堰)을 쌓아 농경지의 수해를 줄인 공덕을 기려 1788년(정조 12) 12월 사상의 면민이 이경일 축제혜민비(李敬一築堤惠民碑)를 세웠다.
[위치]
이경일 축제혜민비는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417-15번지에 있다.
[형태]
기단이 없는 일반적인 비석으로, 둥근 머릿돌이 있으며 비각은 없다. 비의 크기는 높이 135㎝, 너비 61㎝, 두께 9㎝이다.
[금석문]
비의 앞면에는 ‘부사 이공경일 축제혜민비(府使李公敬一築堤惠民碑)’라는 비제(碑題)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우리 사면은 낙동강의 하류에 닿아 있어 논밭이 수해를 입는 통에 해마다 씨를 뿌리고도 수확이 없었을 뿐 아니라, 또한 인가마저 물에 잠겨 견디기 어려운 근심이 있었다. 부사가 동래부에 부임하여 비록 포흠으로 축난 곡식을 거두는 데도 여가가 없었지만, 이러한 실정을 듣고는 감영에 보고하여 양산 제방 쌓는 일에 나누어 가던 부역을 특별히 면제케 하고, 각 면에서 조발(調發)한 다음 별기위(別騎衛) 별장(別將) 이명천(李命天)을 보내어 처음부터 끝까지 작업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모라촌 뒤쪽 키 모양의 석축이 270발, 같은 동네 상주을산 일원의 방죽이 700발, 하주을산 쪽 300발, 덕포리 대암 일원이 350발, 창거리 부상포 아래에서 모전 말단의 각 지역에 이르는 곳 모두 1,050발, 그리고 감동도 일원에 돌을 세워 새로 물길을 낸 그 좌우의 방죽이 700발, 괘내와 주례 두 동네 앞의 사목포에 새로 도수로를 연 그 오른쪽 방죽이 700발이다. 모두 계산해 보면 그 공사가 넓고 큰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포 아래위로 각각 2개의 통을 묻어 물을 대고 빼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 대개 10리 안에 있는 5,000여 마지기의 땅 가운데 예전에 재난을 면하였던 논은 조금 높은 곳에 있는 1,000여 마지기의 땅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더 늘어난 것이 역력하다. 수해도 사라졌고 둑을 쌓는 일도 그해에 완성을 보았으니 부사께서 공덕을 이루신 것이 신통하고 신속하다고 할 만하다.
둑 안쪽 앞으로 새로 개간할 수 있는 땅이 1,000여 마지기가 될 것이요, 또 몇 해 지나지 않는 사이에 갈대밭이 모두 논이 될 것이며, 이 모두가 수해 없는 좋은 땅이 될 것이다. 아! 부사의 은택이 이 지역에 미침에 어찌 한정된 곳이 있을까마는 사면은 더욱 깊다고 하겠다. 만약 부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분명 물고기 신세가 되었을 것인데, 이제 만세토록 길이 의지할 편리함을 가지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감동도와 사목포의 수로와 덕포 상포의 새 방죽 등지의 땅이 모두 논으로 편입되고, 마른 밭들은 개간되기도 하고 막히기도 하여, 그 값이 동전 60꿰미가 되었다. 그 이익을 얻은 수백 명에게 세금을 거두어 들여야 마땅하였지만 들추어 따지지 않았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실 때도 오히려 더욱 염려하는 마음으로 수량대로 회계 조처하였다. 부사께서 우리 사면의 면민들을 보살피심이 어찌 이리도 지극하신지. 적합한 사람을 뽑아 일을 완성시킨 것으로도 그의 감식안이 밝고 원대함을 볼 수 있었다. 이에 작은 돌에 적어 만고에 잊지 못할 부민들의 마음을 붙여 둔다.
건륭 53년[1788] 12월 사상면에서 세우다. 좌수 문명현 기록, 유학 정유 쓰다. 감관 황하정[惟我沙面 處洛江下流 稻田被水患 年年有播無穫 且有人家沈沒難保之患 侯臨府 雖未遑於大逋收殺 而聞此民情 報巡營 頉免梁堤劃赴之役 發各面 下遣別騎衛別將李命天 終始董役 盖毛羅村後 石築如箕形者二百七十把 同里上注乙山員防堰七百把 下注乙山三百把 德浦里大巖員三百五十把 倉去里富商浦以下 至茅田末端各員合一千五十把 又甘同島員 立石新開水道 左右堰七百把 掛乃周禮兩里前司牧浦 新開都水道左邊堰七百把 摠計之 則其役之浩大可知 而商浦上下各植二桶 以便水之灌與退 大抵十里之內 五千餘斗地 水田之曾所免灾者 不過稍高處千餘斗地 今則歷歷 上 其害乃去 築堤當年已見成 效侯之功 可謂神且速 而堤內之將新墾者 可爲千餘斗地 且於不多年間 蘆田必盡爲稻田 而俱作免害之良土矣 噫 侯之澤 及於闔境者 何限 而至於沙面 尤也 微侯 吾其魚矣 而今有萬世永賴之利 且甘島司浦水道及德浦商浦新堰等處 皆割入水田 旱田且開且防 其價爲六十緡銅 當斂之於蒙利者 累百許人 而未及拮据矣 轅回之際 猶加軫念 如數區劃 侯之恤我沙民 何至此極 而其得人而完事者 尤可見鑑識之烱遠也 聊識短碣 以寓萬古不忘之輿情云爾 乾隆五十三年十二月日 沙上面 立 座首 文命顯 記 幼學 鄭楡 書 監官 黃河淨].”
[현황]
비석 중간에 부러진 부분을 보수한 흔적이 있다. 부산광역시에서 관리한다.
[의의와 평가]
이경일 축제혜민비를 통해 당시 사면의 제언 축조 사실과 과정, 제언의 규모와 저수 면적 등에 대한 부분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