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8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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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Saebaji Village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항동 세바지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영섭 |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항동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세바람[서남풍의 방언]을 받는 등받이라서 세바지(혹은 새바지)라 불렀다.
[형성 및 변천]
세바지 마을이 있는 가덕도 곳곳에 선사 시대 조개더미[貝塚]와 고분군 등이 발견되어 일찍부터 마을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에 이곳에 가덕진(加德鎭)과 천성 만호진(天城萬戶鎭)이 설치되었고, 1906년 웅천군(熊天郡) 천성면과 가덕면으로 나누어졌다가 1908년 웅천군 천가면으로 통합되었다. 천가라는 이름은 천성 만호진과 가덕진의 머리글자를 딴 합성 지명이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천가면이 창원군에 편제되면서 눌차리·대항리·동선리·성북리·천성리 등으로 구성되었다. 1980년 의창군에 속하였다가 1989년 부산직할시에 편입되면서 강서구 대항동이 되었다.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면서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항동 세바지 마을이 되었다.
[자연 환경]
세바지 마을 북쪽으로 마을 뒤쪽을 병풍처럼 둘러 있는 산이 연대봉이다. 남쪽에는 국수봉과 남산이 연이어 있다. 남산을 넘어서면 가덕도의 최남단인 동두말이 있고, 그곳에 가덕도 등대가 자리한다. 주위는 가파른 해식 단애로 이루어져 있다.
[현황]
세바지 마을은 행정동인 가덕도동 10통 지역으로, 대항 본동에서 동쪽으로 1㎞ 지점에 언덕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동선 세바지 마을과 같은 이름의 마을이다. 마을의 경관은 가덕도에서 으뜸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해변가에는 자갈이 깔려 있다. 또 일제 강점기 일본군들의 포진지 굴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어 역사의 현장을 느낄 수 있다. 지금도 이곳 마을에는 ‘진해만 요새 제1 지대표(鎭海灣要塞第一地帶標)’라고 새겨진 표석을 민가의 지주대로, ‘육군 사용지(陸軍使用地)’라고 새겨진 석물을 계단으로 사용하는 등 당시의 흔적을 쉽게 볼 수 있다.
일본군이 러일 전쟁 이후에도 계속 주둔하였고, 태평양 전쟁 때에도 주둔하며 해안 쪽으로 포진지를 설치하였는데, 포진지 굴 앞쪽에 출구 3개, 뒤쪽에 출구 2개를 만들어 놓았다. 뒤쪽 출구 1개는 공사 도중 태평양 전쟁에 패하면서 중단됐다고 하는데, 강원도 태백에서 온 광부들이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일제가 1945년 8월 연합군에 패한 뒤 강원도 태백에서 온 광부들이 살아서 나가는 모습을 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일본 육군인 가덕도 수비대가 출입하는 선박 또는 연합군 비행기를 감시하기 위해서 만든 감시 초소는 밖에서 안으로 가면서 점점 작아져서 겨우 한 사람[가로 약 50㎝, 세로 약 50㎝] 몸이 들어 갈 정도의 크기이다.
가덕 등대(加德燈臺)는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는데, 1909년 12월 완공된 등대로서 대한제국 때 건립한 41개 유인 등대 가운데 하나이다. 등탑과 부속사를 단일 건물로 구성한 것이 상당히 이례적이다. 건물의 형태는 르네상스풍의 의장 수법과 고딕 건축의 첨탑식 지붕, 한국 전통 건축 양식의 주두와 접시받침이 있는 기둥을 세우는 등 동양과 서양의 의장적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상당 부분 원형을 잘 간직하여 역사, 건축사적으로 가치가 돋보이는 문화유산이다. 한편으로 세바지 마을은 녹산 국가 산업 단지, 명지 주거 단지, 부산 신항 등의 오폐수를 처리하는 하수 종말 처리장의 최종 출구로서 산업화의 폐해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해안과 접한 지리적 위치로 마을 주민의 주업은 어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