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83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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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藿岩- |
영어의미역 | Gwakam Village |
이칭/별칭 | 각암(角岩) 마을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이곡리 곽암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영섭 |
성격 | 자연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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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895년 - 경상남도 기장군 상서면 이곡동 |
변천 시기/일시 | 1914년 - 경상남도 기장군 상서면 이곡동에서 경상남도 동래군 철마면 이곡리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73년 7월 1일 - 경상남도 동래군 철마면 이곡리에서 경상남도 양산군 철마면 이곡리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86년 - 경상남도 양산군 철마면 이곡리에서 경상남도 양산군 동부출장소 철마면 이곡리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95년 3월 1일 - 경상남도 양산군 동부출장소 철마면 이곡리에서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이곡리로 개편 |
자연 마을 | 곽암 마을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이곡리 곽암 마을 |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이곡리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 유래]
마을 뒷산에 미역 바위라고 불리는 각이 진 바위가 있어 곽암(藿岩) 마을이라 하였다고 한다. 각암(角岩)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형성 및 변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차성가(車城歌)」에 “공곡(空谷)의 저 백구(白駒)를 곽암(藿岩)에 메엿[매었]도다.”라고 하여 곽암이란 지명이 나온다.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을미개혁으로 기장군 상서면 이곡리가 이곡동과 곽암동 두 마을로 나누어졌다. 1904년(고종 41) 간행된 『경상남도 기장군 가호안』에 의하면, 당시 기장군 상서면 곽암리에는 7호가 살고 있었다. 집은 대개 초가 2~4칸이고, 박씨(朴氏)가 가장 많았다. 1914년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경상남도 기장군 상서면 각암동과 이곡동이 합쳐져서 동래군 철마면 이곡리가 되었다. 1973년 양산군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부산광역시로 편입되면서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이곡리 곽암 마을이 되었다.
[자연 환경]
곽암 마을 동쪽에 일광산이 있고, 남쪽과 서쪽, 북쪽을 아홉산이 둘러쌌다. 마을 내에 곽암 못이 있고, 동쪽으로 이곡 소류지, 북쪽으로 이곡천이 흘러서 농경지를 형성하기에 적합한 자연 환경을 이룬다.
[현황]
곽암 마을은 기장군 철마면 이곡리 656번지 일대 8통 지역에 있는 자연 마을이다. 이곡 마을 회관에서 실로암 영농조합단지 안내판이 있는 길을 따라 가면 경주 최씨(慶州崔氏) 산소 표지석이 있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따라 올라가면 마을이 나온다. 곽암 경로당 앞에 동래 정씨(東萊鄭氏) 동지공파(同知公派) 재실인 돈륜재(敦倫齋)가 있다. 본래 곽암 마을에는 이곡리 곽암 당산이 있었으나 2005년을 즈음하여 철거되었다. 마을의 주업은 논농사인 벼농사이며, 최근에는 부업으로 비닐하우스에서 채소 등을 재배하여 농가 소득을 올린다.
마을 북쪽 산 중턱에 있는 암석 단애인 미역덤 또는 미역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아주 먼 옛날 큰 해일이 생겨 수영만의 바닷물이 수영강을 거슬러 밀려와 철마천[장전천]이 범람하면서 산사태로 하구가 막혀 바닷물이 오랫동안 호수처럼 잠겨 버렸다. 이곳에서 농사를 짓던 어느 착한 농부는 농토에 바닷물이 넘쳐 올라오는 것을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런데 주민들은 바닷물이 점차 육지로 밀려 올라오는 것을 보고 하나같이 천지개벽이 일어났다고 아우성을 치면서 피난하고 아무도 농부를 도와 바닷물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런 보람 없이 바닷물이 점차 밀려 올라오게 되자 농토와 가축을 모두 잃은 그 농부는 허리까지 물에 잠겨 오도 가도 못하고 곧 죽게 되었다. 그때 큰 바위 밑에 있던 용굴에서 용마가 치솟아 올라와 농부를 태워 목숨을 살려 주었다. 그때 이 바위벽에 미역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하여 미역 바위라고 부른다. 지금도 그때 미역이 매달려 있던 흔적이 있고, 조개껍데기와 용마의 발자국이 뚜렷이 남아 있다. 용굴은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막혀 버렸다고 한다.